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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매듭단추 / 석민자

부흐고비 2021. 11. 24. 11:22

저고리는 품위는 있을지 몰라도 날렵한 멋은 적삼이 윗길이다. 한 땀 한 땀 박음질로 박아낸 적삼의 맵시는 날렵하기가 물 찬 제비다.

목화를 심어 무명을, 누에를 길러 명주를, 삼베를 심어 베옷을 지어 입던 시절이었다. 디딜방앗간에서부터 지게니 소쿠리니 할 것 없이 필요한 기기를 집에서 만들어 썼듯이 단추 역시 매듭을 지어서 사용했다. 짝짝이 단추를 달고 다니는 아이들이 많았던 것은 잃어버린 것과 같은 것을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아서였다. 그러니까 그만큼 공산품이 귀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좀 조신해질 때도 됐구만은 우째 이래 선머슴아 티를 몬 벗는동. 단추가 떨어지는 줄도 모리고 맨날 이래 펄쩍대기나 해대이 운제쭘에나 철이 들라는동. 쯧쯧….”

내가 좀 분답기는 했어도 실 자체에 문제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목화에서 뽑아낸 실이었으니 보습은 탁월했을지 몰라도 질기지 못한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학교를 일곱 살에 들어간 탓에 언니오빠뻘과 한 교실에서 학습을 시작했다. 말이 동급생이지 너덧 살이나 차이가 나기도 했으니 한참은 손위 언니뻘과 공부를 시작했던 셈이다. 그 시절만 해도 여학생의 입성은 흰 적삼에 검정 치마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솔직히 그때는 그 옷이 아름답다거나 맵시가 있다는 생각은 애초 해보지를 못했다. 그나마 ‘살이’가 좀 괜찮은 집 아이들은 꽃무늬가 있는 포플린 원피스나 세라복을 입고 다니기도 했는데 옷도 옷이지만 단추가 더 인상 깊게 남아 있을 정도다.

적삼의 멋은 뭐니 해도 단아하고 앙증맞은 매듭단추다. 어떻게 보면 꽃망울과도 같고, 또 어떻게 보면 여인의 젖꼭지와도 같은 것으로 옷깃을 여민 여인의 가슴팍은 그대로가 한 송이 꽃이었다. 팟팟하게 풀 먹인 하얀 적삼에 검정 치마를 받쳐 입은 여인의 탯거리는 정갈하면서도 단아했다. 요즘 원불교의 정녀들에게서 볼 수 있는 차림새다. 연전에 이북에서 온 응원단원의 옷차림에서 느꼈던 감흥은 동족애 그 이상의 감정이었다.

저고리 고름은 자칫 풀어지기도 하지만 매듭단추는 좀해서 풀리는 법도 없다. 일부러 풀려 해도 쉬이 풀리지 않는 단단함이 있다. 공글리고 또 공글려서 엮어 낸 힘이 몽우리로 맺혀졌기 때문일 것이다. 매듭단추는 같은 천으로 만들어야 맵시가 난다. 옥으로 된 단추라도 같은 천의 것엔 미치지 못한다.

각설이에겐 허름한 옷이 제격이다. 누더기를 걸친 차림새라야 구경꾼의 어깨도 들썩거린다. 팟팟하게 풀 먹여 손질한 모시옷을 날아갈 듯 차려입은 청상이 각설이타령을 풀어낸다고 그게 각설이로 보이겠는가. 그녀가 제아무리 어깨를 추썩거린다고 해도 한풀이로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옥양목으로 지어진 적삼이 달빛 어린 박꽃이라면 광목으로 지어진 그것은 햇살 아래 흐드러진 호박꽃이다. 거기에 매듭단추는 풀잎에 맺힌 이슬이다. 저고리엔 고름을 달면서 적삼엔 매듭단추를 달 생각을 해낸 선조들의 심미안이 경탄스럽다. 날렵한 적삼에 매듭단추는 창호와 닥종이처럼 어울림이 맛깔스럽다. 무명적삼에선 초가처럼 소박한 멋이 흐르고 모시적삼에선 누정의 그것에서와 같은 날렵함이 묻어난다. 모시적삼이 서릿발 같은 칼칼함이 있다면, 무명의 그것은 흙과 같은 질박함이 있다.

빨래를 하고 나면 매듭단추는 한쪽으로 틀어지거나 찌그러져 있게 마련이다. 방망이질로도 모자라 다리미질까지 해대는 데도 모양새가 그대로라면 그게 외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찢어진 옷가지에서 깨어진 바가지나 나무 함지도 어머니 손만 거치고 나면 쓸 만한 물건으로 거듭났거늘 하물며 매듭단추겠는가. 어머니 손길이 두어 번 스치고 나면 언제 그랬더냐 싶게 몽우리로 피어올랐다.

길게 박은 끈을 무르팍에 올려 놓고 요모조모 공글리면 거짓말처럼 몽우리로 피어올랐다. 재료는 주로 옥양목이나 광목이었지만 이따금 포플린이나 인조를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주로 막 입는 옷이나 여름옷을 위한 단추였던 셈이다.

선머슴아같이 놀다가도 매듭단추를 엮을 때만은 흉내라도 내보려 얼찐거렸던 것을 보면 어쩌면 순탄치 못할 앞날이 예견되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에게 지워진 십자가를 홀가분하게 여길 사람이야 있겠는가마는 내게 지워진 십자가는 가혹하도록 냉혹했다. 눈꺼풀마저 무거울 정도로 고단한 일상이 이어지는 날이면 어김없이 매듭단추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매듭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그 미로 같은 여정과 내 살아온 날이 닮았다 싶어서이다. 어쩌면 그때 어머니가 묶던 매듭도 단추가 아닌 당신 자신의 정체성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벽 앞에서 매듭이라도 묶지 않았다가는 자신마저 놓아 버리게 될 것 같은 강박관념이 매듭에 더 매달도록 했을 것이다.

끈을 송곳으로 감아 요리조리 공글리고 나면 앙증맞도록 예쁜 장미꽃이 몽우리로 피어올랐다. 매듭단추를 묶고 있을 때의 어머니는 그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 버린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몰입했다. 뭐가 되었거나 늘 유름을 해 두는 편이기는 해도 매듭단추만은 화환으로 묶어도 될 정도로 쟁여 두고 지냈던 것을 보면, 매듭이 목적이 아니라 만드는 자체에 더 무게를 두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귀가 시간이 늦는 날이면 더 많은 매듭이 몽우리졌던 것을 보면 얼추 내 짐작이 맞을 성싶다. 매듭을 의지 삼아 아득한 생을 건너왔을 어머니에게 매듭은 동아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옷이 아닌 생을 여미기 위한 매듭이었기에 밤을 도와 피워 내지 않았을까 싶어서다.

적삼을 여미던 매듭으로 마음까지 여며 왔던 당신이었어도 이즈음은 단추에 더 익숙하시다. 더는 여밀 마음 자락도 없으시겠지만 지금 한 번 엮어 보랬더니 다 잊어버리셨단다.

“고분 단추가 쌔벨랬는데 까짓거는 맹글어서 뭐 할라고.”

당신의 대답이시다. 다 놓아 버린 게다. 마음자락도 매듭도 놓아 버린 채 안상하게 앉은 모습에서 옥양목 적삼 같은 엄마를 본다. 기다림을 꽃몽우리로 승화시킬 줄 알았던 장미꽃 몽우리 같던 우리 엄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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