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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학 시인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나 1996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하였다. 2001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시집으로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광대 소녀의 거꾸로 도는 지구』, 『모음들이 쏟아진다』가 있다. 박인환문학상,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을 수상했다.
그는 “시인에게 시 쓰는 이유를 물어보면 ‘그냥 좋아서’, 달리 할 말이 없다. 더 멋진 의미가 있으면 좋으련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발표된 시의 주인은 시인이 아니다. 시인의 의도보다는 독자들이 주체적으로 시 속으로 들어가면 된다. 감상이나 해석이 천차만별인 것도 시의 매력이다. 한 가지로만 해석되는 교과서 시들은 그런 점에서 불행한 시가 아닐까.”(동아일보)라는 말을 독자들에게 남긴다.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 정재학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비가 오기 시작하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날도 어두워지기 시작하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하늘이 죽어서 조금씩 가루가 떨어지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나는 아직 내 이름조차 제대로 짓지 못했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피뢰침 위에는 헐렁한 살 껍데기가 걸려 있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암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맥박이 미친 듯이 뛰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손톱이 빠지기 시작하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누군가 나의 성기를 잘라버렸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목에는 칼이 꽂혀서 안 빠지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그 칼이 내장을 드러냈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펄떡거리는 심장을 도려냈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담벼락의 비가 마르기 시작하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부당한 거래 / 정재학
햇빛이 교실의 칠판을 절반정도 뒤덮은 아침이었다. 내 앞자리에 앉았던 K는 구두를 가져와서 나에게 사라고 했다. 삼촌 것이었는데 크기가 맞지 않아 한 두 번 밖에 신지 않았다고 했다. 다리 위에 벗어 놓은 죽은 사람의 구두가 아닐까? 훔친 구두는 아닐까? 이렇게 말 할 수는 없어 혹시 주운 구두는 아니냐고 물었더니 진짜 아니라고 하였다. 나는 구두값을 깎고 있었는데 그때 한 아이가 그 구두를 보고는 오히려 오천 원을 더 줄 테니 자기에게 팔라고 하였다. 하지만 K는 단칼에 거절하며 내가 아니면 팔지 않겠다고우겼다. 쟤한테 팔면 더 받을 수 있는데 왜 굳이 나에게 팔고 싶으냐고 묻자, 흐트러짐이 없는 눈동자로 "이 구두는 네에게 가장 잘어울리기 때문이야, 너에게 꼭 팔고 싶어."라고 대답했다. 결국 K가 부른 가격보다 싸게 구두를 샀다. 날이 갈수록 내 발이 작아지더니 점점 몸도 작아져 구두 속에 갇히게 되었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구두 속에서 나는 소멸하고 있었고 K는 다시 구두를 집어 장사를 시작했다.//
간이역이 여우비를 지날 때 / 정재학
넘치는 휴지통을 발로 콱콱 누르다가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만다 역에는 늘 종이들이 붐벼요 한쪽 발목은 어디로 사라졌니? 너무 오래 걸어서요 종착역이 없으니까 … 내일 굽이라도 박으려고요 내 이빨이 대답했다 벽이 너무도 부드럽고 축축하여 그만 벽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싶었다 아버지, 변명은 않겠어요 결국 전 옳지 않은 일을 했어요 가까이 오지는 마세요 여긴 비가 오고 있으니까요 너무 만족하지 말아라 네 화석 같은 손톱은 중요하지 않으니까 태양은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버려진 유리병에는 단추가 가득했지만 제가 찾는 단추는 없었어요 구두만 한 짝 잃어버렸죠 귀 주위로 계속 침이 흘러 더러운 셔츠 속의 땀과 엉겨 붙었다 검역관이 오면 저를 못 본 지 오래되었다고 해 주세요 막 도착한 버스에 올라탔지만 운전사는 자리를 비운 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살인이 일어날 것 같은 더위였다//
역류 / 정재학
전화가 왔다 오랜 친구 번호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친구는 대답이 없고 심한 잡음 너머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직거리는 소음과 섞이지 않는 대화가 조금씩 확대되었다 내 목소리가 꾸물꾸물 수화기를 비집고 기어 나왔다 고등학생 때였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지만 우리의 대화는 손마디를 느끼는 것처럼 생생했다 우리는 여자 친구에 대한 고민을 얘기하고 담임 욕을 하기도 했다 그냥 그런 얘기들이었다 지금도 그리 다르지 않다 내일 학교 끝나고 수돗가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항상 수도를 잠그지 않는 애들이 있었다 모두 무관심하게 지나쳤다 그 물은 지금도 넘치고 있을까 우리가 내뱉은 말들이 그 오랜 시간 어디쯤에서 반사되어 다시 나에게 온 것일까/ 어디로 다시 떠나는 것일까 우리의 대화는//
죽음은 계속 피어나고 / 정재학
40년간 땅을 파다보니 이제 힘에 부치네. 그래도 사람 죽으면 나야 뭐 할 일이 있나. 적당하게 땅을 파주면 관이 들어오고 흙 좀 덮으면 유족들이 알아서 땅을 잘 밟아 준다네. 황천길 노자 돈을 좀 요구하기는 하지만 너무 책망 말게나. 내 벌이가 얼마 되나. 나도 노모와 처자식이 있다네. 사람들이 죽기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죽어야 나는 산다네. 그래서 가끔 울적하네. 내가 원하지 않아도 겨울이 지나면 들꽃과 잡초들이 올라오듯 죽음은 끝이 없으니까. 오늘 죽은 사람은 가족묘에 묻혔네. 젊은 나이에 죽었다더군. 물어볼 수 없었지만 가족들 눈빛을 보니 십중팔구 자살이라네. 죽기에 좀 이르지만 어쩌겠나. 벌레들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그래도 무덤이 있는 사람들은 행복한 걸세. 얘야, 꽃을 꺾었구나. 가지고 이리와 보렴. 꽃의 무덤을 만들어 줘야지.//
녹錄 / 정재학
이십년 넘은 아파트에서 녹물이 나온다. 녹물로 밥을 지어 먹고 녹차를 끓여 먹고 양치를 했다. 녹물을 많이 마시면 우울해진다. 종일 무기력하고 졸음이 쏟아진다. 눈물에서 쇳가루가 검출되었다. 머리가 녹슬고 가슴이 녹슬고 내가 아는 사람들의 이름도 녹슬었다. 노란색을 보면 우울해진다. 노란 나비가 나에게 침을 뱉는다. 노란 꽃도 싫어지고 은행나무 잎도 싫어졌지만 난 노란 살덩어리가 되어 누런 오줌을 싸고 있었다.//
미분微分 -시인 / 정재학
그는 어릴 적 냇물과/ 눈물 사이를 헤엄치다가/ 비틀거리며 나와/ 몇 개의 돌멩이와 물고기를 토해 내고는 죽어 버렸다// 그가 찍은 장면은 대부분 삭제되었다//
미분微分 -생일 / 정재학
출출한 새벽, 냉장고에는 다행히 날계란 두 개가 있었다 프라이팬에 계란을 깨자 검은자와 흰자위가 떨어졌다 눈동자 하나가 지글이글 분노하고 있었다 명확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껌벅이면서 무언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직감적으로 뜨거워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얼른 접시에 담아 주었다. 난 배가 고파서 널 먹어야 하는데 ...... 냄새는 분명 계란 프라이였지만 그것이 계란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말하는 눈이라니... 할 수 없이 다른 계란을 깼는데 죽은 병아리가 주룩 흘러 내렸다 껍질을 깨고 나올 힘이 없었던 모양이군 상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는 털을 뽑아낸다면 먹을 수 있었지만 그만두었다. 접시 위의 눈동자가 명확한 발음으로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그 병아리는 세상에 나오기 싫어 자살한 것이라고... 나는 달걀 껍질을 씹어 보았다//
실내악窸內樂* -책, 파도, 백경 3중주 / 정재학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내 두 눈에 파도가 들이쳤다/ 그때마다 눈동자가 조금씩 탈색되었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니/ 검은 잉크가 묻어있었다/ 내 눈은 하얀 거울이 되고/ 흰자위는 바다가 되고/ 그 속에는 흰 고래/ 한 마리 헤엄치고 있었다/ 너무 선명하여/ 실제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듣는 건/ 고래 울음소리가 아니라/ 날카로운 노래였다// 책장이 몇 장 남지 않았을 때/ 난 눈동자가 남지 않은/ 늙은 바다가 되어있었다/ 고래도 책도 사라졌지만/ 파도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 內樂: '내면에서 흘러나온 불안한 소리의 음악'이란 의미로 만든 뜻글자.
시원詩源 / 정재학
태양이 지나다니지 않는 막다른 어둠에서 빛을 들을 때가 있다/ 어느 쪽 귀가 먼저였는지 알 수도 없이 순식간에 칼이 꽂히듯 내 두 귀를 관통한다 직선적이지만 첫 담배처럼 몽롱하다 그것은// 그 순간은 몸 전체가 두 귀 사이에 담겨 있는 것 같다// 꽂힌 빛이 뒤틀린다/ 내 귀는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연두색 피를 흘린다/ 시작점을 알 수 없는 빛, 단지 과정일 뿐 내 귀를 주파해 낸 빛이 어디까지 가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모든 소리들 멀어지고/ 내 목소리만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울린다/ 아니, 온 몸에서 울린다/ 나는 잠시 종이 되는 수밖에/ 발밑으로 흘러내리는 종소리/ 아주 잠시 그것을 볼 수 있다//
빌딩 숲 공원묘지 / 정재학
곤충들이 내 머리로 몰려든다 죽은 줄만 알았던 이 숲, 땅에서는 개미집 냄새가 질척이고 낙엽들은 흰 가지를 붙들고 있었다 귀로 들어온 딱정벌 레 하나 출구를 찾지 못하고... 나는 귀를 막고 걷는다 몇 마리의 벌레가 떨어졌다. 나는 죽은 벌레처럼 말라 흙이 되고 싶었다. 이곳에서도 난 자유롭지 못하다. 이 길은 분명 흐르고 있다. 길을 막고 있는 묘비들을 뚫고 얼굴 없이 심장만 두 개인 사람들의 행렬을 뚫고// 이 곳에서 나는 뒷모습으로 걸었다.//
정지한 시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각주 3 / 정재학
나만 보았던 아버지의 생전 마지막 모습,/ 가쁜 숨으로 흔들리시며 인공호흡기를 끼우던 그때/ 투명한 유리막 사이로 내가 힘내라고 주먹을 불끈 들었을 때/ 아버지도 천천히 함께 주먹을 들었다./ 사람에게 슬픔저금통이 있다면/ 그때 꽉 차버린 것 같다./ 묻어버리고 찾고 싶지 않은 슬픔저금통./ 이년이 되었지만/ 그 마지막 순간을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아직 말하지 못했다.// 요즘은 멀쩡하게 가던 시계를 손목에 차면 죽어버린다./ 이상해서 아내 손목에 채워보니 잘 간다.// 아버지, 이제 타르 같은 감정들을 버리려고 합니다./ 불친절했던 그 마지막 의사도/ 항암제 맞고 누워 계신 아버지에게 전화해서/ 자기 투정만 하던 그 인간도/ 이제 제 슬픔저금통에서 쏟아버리려고 합니다./ 가끔은 내가 왜 아버지를 선택해서 태어났을까,/ 아버지는 왜 저를 선택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버지와의 많은 엇갈림들이 나의 정서가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저를 시인으로 키우신 것 알고 있습니다./ 시 몇 편 쓰고자 저는 아버지를 선택했고요.// 이제는 저나 아버지나 아무 엇갈림 없이도 시를 쓸 수 있을 겁니다./ 지금처럼 시계를 죽이는 일도 없을 겁니다.//
정지한 시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각주 4 / 정재학
아홉 살 때 삼척 해변에 서 있다가 갑자기 센 파도가 들이쳐 쓰러졌다. 바다로 휩쓸려가던 순간 누군가 내 오른손을 꽉 잡아주었다. 얇게 뜬 눈 위로 급한 파도가 쓸려나가고 누군가의 강한 윤곽이 보였다. 부리부리한 눈. 굵은 목소리. 그날 이후 아버지는 나의 큰 산이 되었다. 너무 큰 산이라 걷고 또 걸어도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다투기라도 하듯 빽빽한 나무들 사이를 걷기도 하고 나는 때로 그 산에서 호수로 고여 쉬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 아버지는 내가 돌봐야 하는 작은 화분이 되어 있었다. 줄기가 쓰러질까봐 지지대를 꽂아 줄로 엮기도 했는데 결국 내 손이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바닷가에서 아버지가 잡아주었던 것처럼 힘껏 잡지는 못했지만 아버지의 야윈 손을 조심스럽게 꽉 잡아본 적이 있다. 모래처럼 쓸려가는 아버지를 붙들기 위해.//
계절의 연애 / 정재학
겨울은 봄을 끝없이 연애했지만 봄은 겨울을 사랑하지 않았다 둘이 함께 있는 시간은 너무나 짧았고 겨울은 봄 안에서 무너져 내렸다 계절은 갔던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다 봄은 여름을 끝없이 연애했지만 여름은 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봄은 겨울의 흔적을 보이지 않으려 녹은 겨울을 묻고 또 묻었다 봄은 늘 할 말을 적어 다녔다 준비된 말이 아니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름은 겨울을 끝없이 연애했지만 가을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가을은 미안한 듯 곧 사라졌고 아무런 비난도 받지 않았다 가을이 굴뚝에 걸어놓은 계단을 밟으며 여름은 겨울의 척추 뼈를 세어본다 거리에는 피 흘리는 조화(造花)들이 가득 피어있었다 꽃을 건드리자 벌들이 튀어나온다 계절은 왔던 길이 아니면 오지 않았다//
공모共謀 / 정재학
죽은 지 이틀 만에 시체에서 머리카락이 갈대만큼 자라 있었다 나와 그림자들은 시체를 자루에 싸서 조심조심 옮겼다 그림자 하나가 울컥했다 죽이려고까지 했던 건 아닌데... 나머지 그림자들이 그를 달랬다 그러지 않았다면 네가 죽었을 거야 차 트렁크 열고 시동 좀 걸어놔 간신히 1층까지 왔는데 아파트 현관 앞에 순찰 중인 경찰이 보였다 이게 무엇입니까? 하필이면 자루가 찢어져 시체의 멍든 허벅지 살이 드러났다 하하 이건 고구마입니다 우리는 서둘러 트렁크에 실으려 했다 한번 확인 해봐도 되겠습니까? 그림자 하나가 칼이 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옆의 그림자가 그의 팔을 잡았다 네 그렇게 하시지요 우리는 자루를 펴 보였다 자루 안에는 지푸라기와 고구마가 가득했다 경찰관과 우리는 미소를 지었다 고구마 하나가 김이 모락 모락 났다 방금 찐 고구마인데 하나 드셔보시겠습니까? 그럴까요 네 고맙습니다 경찰관이 고구마를 한입 물자 썩은 피가 뿜어져나왔다//
모노크롬, 레드 / 정재학
물고기를 좋아하는 그녀를 위해 생선이 되어볼까/ 갈기갈기 찢어져서 그녀에게 들어가볼까// 서로의 잇몸과 혀를 뜯어 먹는 광경// 태양과 키스한 후의 나는/나일 수 있는가// 불규칙한 월식,/지옥의 문이라고 해도 이미 늦었다//
샤먼의 축제 / 정재학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자도 말이 없다// 숨을 쉬어라,/ 잊혀진 신들이여// 간혹 나는 나와 하나가 되고 싶다//
샤먼의 축제 4 / 정재학
푸너리 푸너리… 장구재비의 손이 쉼 없다 내 눈동자가 녹았다 얼어붙었다를 반복하더니 갈라지기 시작한다 화끈거렸다 찢어진 동공 사이로 죽은 닭들과 꽹과리 소리가 흘러나온다 짓물러진 눈썹이 같이 묻어나온다 여너리 여너리… 흔들리는 잎새 위로 거미들이 기어다닌다 태평소가 낙타처럼 울었다 나는 진흙을 토해냈다 흙으로 된 짐승들이 불타면서 춤을 추었다 나의 고장난 뼈들도 춤을 추었다 푸너리 여너리… 해일처럼 징이 울린다 사람들의 귀가 사방으로 찢어졌다 익사한 검정 장화가 널뛰며 논다 너더리 너더리… 너덜겅에 매달리다// 애벌레가 꿈틀거리는 시간/변성기의 첫날,/ 나비 한마리/겨울밤 속으로 사라진다//
Edges of illusion (part VII) / 정재학
바다에 가라앉은 기타./ 갈치 한 마리 현에 다가가/ 은빛 비늘을 벗겨내며 연주를 시작한다// 소리 없는 꿈.../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만 부끄러워져 /당분간 손톱을 많이 키우기로 마음먹는다/ 백 개의 손톱을 기르고 날카롭게 다듬어/ 아무 연장도 필요 없게 할 것이다/ 분산(奔散)된 필름들을 손끝으로 찍어모아/ 겹겹의 기억들 사이에서/ 맹독성 도마뱀들이 헤엄쳐 나오도록 할 것이다/ 달의 발바닥이 보일 때까지/ 바다의 땅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나도 나의 사정거리 만에 있다// 네가 고양이처럼 예쁜 얼굴을 하고 딸꾹질을 하고 있는 동안/ 나는 보라색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생선이 되어 너의 입속에 들어가고 싶었다/ 아무 미동도 없이/ 고요하게// 어른이 되고 싶었다//
흑판 / 정재학
수업 중 판서를 하다가 갑자기 뭔가 물컹하더니 손이 칠판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몸의 절반이 들어갔을 때 “선생님! 새가 유리에 부딪쳐 떨어졌어요!”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고 싶었으나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물에 빠지듯 흑판에 빨려들어갔다. 칠판 속으로 들어가니 건너편 교실에서 중학교 교복을 입고 앉아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나는 짝과 떠들다가 생물 선생님에게 걸려서 철 필통으로 뺨을 맞았다. 맞을 때마다 샤프가 흔들려 덜그럭거렸다. 아이들이 웃었다. 뺨보다 그 쇳소리가 더 아파왔다. 나는 자리로 돌아가 교문 밖의 고양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종속과목강문계!”를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칠판을 건너오자 교실에 아이들은 없고 유리창 여기저기 검붉은 핏자국만 가득하다.//
정재학 밴드 / 정재학
록그룹이 결성되었다. 보컬에 강이진 선생, 퍼스트 기타에 정재학, 쎄컨드 기타에 황봉희 선생, 베이스 기타에 이충근 선생, 드럼에 이재희 선생, 밴드 이름은 호프집에서 다트 게임으로 결정했다. 열 번씩 던졌는데 내가 제일 잘 던졌다. 십삼년 만에 녹슨 일렉트릭 기타를 꺼냈다.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샀던 내 노란 중고 기타, 이펙터, 앰프, 케이블 뭐 하나 녹슬지 않은 것이 없다. 쇠는 오래되면 이렇게까지 녹이 스는구나. 아무리 닦아도 녹이 없어지지 않는다. 그사이 내 손가락은 더욱 녹슬었다. 그래도 그 손가락으로 매일매일 연습한다. 시월 학교 축제 때 제자들 앞에서 공연을 한다. 그런데 일상어로 쓰는데도 이렇게 영어가 많이 들어가는구나. 그래도 정재학 밴드 멤버들의 이름은 영어가 아니다.//
유실물 / 정재학
김수영의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풍으로// 지갑을 잃어버렸다 고궁과 같은 거창한 곳도 아닌/ 아무런 음모도 음탕도 없는 도봉산에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 것일까/ 하필 돈을 많이 넣은 날 잃어버렸다고/ 라이트 밀즈처럼 늘 깨어 있어야 한다고 나불대면서도 남들 속에 묻어 있기를 좋아하고/ 열심히 사는 것과 치열하게 사는 것도 구분 못하고/ 술집 주인이 술값 더 받는 건 아닌지 의심이나 하고 따지고/ 술집에서만 소리를 높이고/ 이라크전 파병도 술집에서만 반대하고/ 한참 비켜서 있으면서도 그것이 비겁한 것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내가 지갑을 잃어버린 날/ 티베트에서는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들의 부당한 죽음 대신에/ 고작 잃어버린 오만원이나 아까워하고/ 휴지통에 지갑을 버렸을 놈만 증오하고 있는가/ 먼지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제주 프라하 아르헨띠나 광주 천안문 티베트…/ 피를 빨아먹고 자라는 봄의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는데// 내가 십오년 동안 지갑을 지키면서 잃어버린 것들은 무엇인가/ 음악을 하겠다는 고등학교 때의 꿈도 잃어버리고/ 시만 쓸 수 있다면 밥벌이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던 그때의 초심도 잃어버리고/ 안정된 직장을 그리워하며 하루하루 아등바등 살고/ 우습지 않으냐, 그동안 지갑은 지켜내면서도/ 몇 번 찾아온 사랑도 지켜내지 못하고/ 개새끼, 지갑을 백번 잃어버려도 싼// 모래야, 먼지야,/ 나는 얼마큼 존재하고 있느냐//
죽음은 계속 피어나고 / 정재학
사십년간 땅을 파다보니 이제 힘에 부치네. 그래도 사람 죽으면 나야 뭐 할 일이 있나. 적당하게 땅을 파주면 관이 들어오고 흙 좀 덮으면 유족들이 알아서 땅을 잘 밟아 준다네. 황천길 노잣돈을 좀 요구하기는 하지만 너무 책망 말게나. 내 벌이가 얼마 되나. 나도 노모와 처자식이 있다네. 사람들이 죽기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죽어야 나는 산다네. 그래서 가끔 울적하네. 내가 원하지 않아도 겨울이 지나면 들꽃과 잡초들이 올라오듯 죽음은 끝이 없으니까. 오늘 죽은 사람은 가족묘에 묻혔네. 젊은 나이에 죽었다더군. 물어볼 수 없었지만 가족들 눈빛을 보니 십중팔구 자살이라네. 죽기엔 좀 이르지만 어쩌겠나. 벌레들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그래도 무덤이 있는 사람들은 행복한 걸세. 얘야, 꽃을 꺾었구나. 가지고 이리 와보렴. 꽃의 무덤을 만들어 줘야지.//
공전 / 정재학
나무 둘레에 나이테를 그리며 돌고 있는 나는/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늙은 성벽이 되었다//
여름 글자 필요 없어 / 정재학
아들이 나를 닮아 수박을 좋아한다. 수박 때문에 여름을 좋아한다. 여름 글자를 써달라고 한다. “여름”이라고 써주자 그림책을 가져와 무성한 푸른 잎을 거느린 나무 그림을 보여주며 여름 글자 필요 없어, 이게 여름이니까. 여름 생각하면 수박, 여름 생각하면 자두, 여름 생각하면 포도, 여름 생각하면 매미, 아빠, 매미 말고 여름에 태어나는 게 또 뭐 있어? 모기. 모기? 모기는 물기나 하고 너무 시시해. 아이가 시시해하는 모기 때문에 여름마다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모기약이 아이한테 해로울까 봐 새벽에 잠 설치며 한 마리 한 마리 직접 잡았으니…. 그 시시한 모기 소리가 얼마나 선명하게 들리던지. 모기야, 아기 피 말고 내 피를 빨아먹으렴. 아기가 모기 많이 물리면 속상해하시는 장모님 얼굴이 생각나 두려웠던 여름날들. 그림책보다 더 여름 같은 나무를 볼 날이 달려 고 있다.//
늘 그래요 / 정재학
저녁 굶고 술 마셔요 늘 그래요 TV는 계속 짖어대요 혼자 두어도 잘 놀아요 가끔은 알 수 없는 웃음소리가 흘러요 보지 않아도 TV를 끄지 않아요 그때의 정적이 싫거든요 시월이 오면 손에서 땀이 흘러요 종이가 찢어져 편지조차 쓸 수 없어요 늘 그래요 그녀는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있어요 생각해 보니 연락이 안 본지 꽤 되었어요 그냥 무덤덤해요 내일은 명화나 한 편 보려고 해요 늘 그래요 웃다가 내가 왜 웃었는지 까먹어요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한참을 생각하다./ 그냥 덮어두기로 했어요 늘 그래요 집에 들어와 보니 피아노가 부서져 있었어요 피아노 속에는 북은 기침이 가득하고 책에서 쏟아져 나온 글자들이 바닥에 서 꿈틀대고 있어요 눈썹에서 물감이 묻어 나와요 나는 허공에 검은 물감을 풀어 넣어요 늘 그래요 회색 물방울들이 날아다니며 기타 줄을 건드려요. 꿈은 언제나 명확해요 사람들은 왜 자신이 하나의 꿈이라는 걸 믿지 않을까요 가방에서 밀크가 새고 있어요 옷이 더럽혀졌어요. 사람들이 모래처럼 휘날려요. 늘 그래요.//
재즈의 맛 / 정재학
밤이면 허름한 재즈 까페들을 돌며 연주한 지 십육년째, 난 오늘도 콘트라베이스를 매인 대신 만든다. 피아노를 시작으로 트리오 연주를 시 작한다. 오늘따라 드럼이 조금 절기는 하지만 최근에 저만한 드러머도 없다. 요즘은 찰리 헤이든의 곡들을 자주 연주한다. 그냥 마음이 편해진다. 삼십 명 정도의 관객 중 다섯 명만 집중해서 듣고 있으며 여덟 명은 만취되어 떠들고 있다. 가장 진부한 악기들로 가장 진보한 형태의 음악을 보여주고 있음을 몇 명이나 알고 있을까. 모르면 또 어떤가. 이제는 주목받고 싶은 생각도 없어졌다. 그저 연주를 계속할 수 있는 것이 좋다. 휴식시간에 가끔 인사를 건네는 이십여년 만에 보는 중고등학교 동창들이 있다. 우등생이던 네가 왜 여기서 딴따라를 하냐는 질문에 가장 할 말이 없다. 이해시킬 수도 필요도 없다. 허기진 음악을 하며 나는 한때 좌초되어 몇몇 인간들을 흘려버리기도 했다. 내 되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으며 새까맣게 타버린 뼈대만 남아 기계처럼 연주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며 나는 오늘도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소리들을 연주한다. 이 재즈의 맛.//
사진에 담긴 편지 / 정재학
당신이 찍은 사진을 현상했어요/ 기억나시죠? 같이 미술관에서 찍은 사진 말이에요/ 당신이 찍은 바구니 오브제마다 노란 비옷을 입을 여자가 한 명씩 들어가 있지 뭐예요 얼굴이 명확히 찍히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들의 눈 속에 있는 고장난 버스를 볼 수 있었어요 지금도 덜덜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답니다 사진을 서랍 속에 넣어두어도 계속 소리가 들려요// 저는 요즘도 결혼식장에 비디오 촬영을 나가고 있어요./ 오늘 찍은 신랑 신부는 떨려서 표정을 잡지 못하겠다며 미안해했고 무척 좋으니 염려 말라고 했어요 그렇게 열심히 찍었던 적은 없었을 거예요 늘 따분했던 앵무새 주례도 더듬거리며 모처럼 말다운 말을 하더군요 결혼식이 끝난 후 두 장님은 축복을 받으며 나갔죠 순간 내가 찍 은 건 그들이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파울 클레의 그림 「지저귀는 기계」 앞에서/ 저 찍어준 것 기억나세요?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 말이에요/ 현상한 사진에 저는 없고 당신의 시선만이 있더군요/ 그래서 당신에게 보냅니다//
글자의 생 / 정재학
아빠, 숨 쉬는 글자를 알려줘! 이제 막 한글에 흥미가 생긴 아들이 묻는다. 모든 글자는 숨을 쉬고 있단다. ㄱ ㄴ ㄷ ㄹ도 ㅏㅑㅓㅕ도 다른 글자들을 만나기 위해 항상 숨을 쉬고 모든 글자들은 절대 죽지 않아. 영원히? 글자의 힘에 의 지하는 것들만 그 글자 속에 숨어서 영원히 살 수 있어. 글자는 말이 되기도 하고 숨이 되기도 하고 말은 글자가 되기도 하고 노래가 되기도 한단다. 심장박동을 크게 만드는 멋진 말들은 시가 되지! 아빠가 시인인 건 아는데 시가 뭐냐? 시는 우리를 꿈꾸게 하는 글자들이야. 시 속의 글자들은 우리를 새로운 곳으로, 글자 수보다 훨씬 긴 여행을 하게 해주지. 많은 사람들, 많은 사물들을 만날 수 있고 많은 놀이를 할 수 있단다. 엄청 멋진 거지? 달팽이 속에도 글자가 숨어 있고 매미 날개에도 글자가 숨어 있고 기차 소리에도 글자가 숨어 있고 미끄럼틀 속에도 글자가 숨어 있단다. 시인은 그걸 찾아내는 거야. 그걸 어떻게 알고 찾아? 그것들을 좋아하고 마음으로 상상하면 진짜로 들린단다. 누구나 만화의 주인공은 하나만 떠올리지만 시는 읽는 사람마다 다른 모습을 떠올리지. 그리고 그 모습이 꿈틀꿈틀 움직이지. 글자들이 숨을 쉬기 때문이야. 진짜야? 글자들은 정말 멋진 뱀과 지렁이들이구나!//
제주-히말리야 샤머니즘의 만남展 -잔크리* / 정재학
나는 샤먼이자/ 시인이며 광대, 예언자/ 의사이며 춤꾼, 음악가이다// 잊혀진 지도에서 흘러나온 노래를 시작한다/ 역광 속에서/ 역광으로// 뭉툭한 북소리의 끝에서/ 음표 같은 푸른 뱀들이 쏟아진다// 음악과 땅의 경계에서/ 춤을 추는 죽음// 피 흘리는 숨통 뒤로/ 경계는 늘 고독하다// 일 초가 백 년이 되어 거꾸로 흐르고/ 잊혀진 지도에서 흘러나온 노래를 간직하는 땅/ 꿈틀거리는 수많은 뱀들/ 알을 까기 시작한다// 끝이 없는 여행/ 당신을 만나고 싶다/ 나는 죽고 또 죽는다//
* 잔크리: 네팔에서 샤먼을 일컫는 말
제주-히말라야 샤머니즘의 만남展 -굿 / 정재학
꿈의 문을 열면/ 죽음// 무덤 위에 누운 시인/ 상징을 여행하는 샤먼// 어머니의 물/ 물의 어머니/ 공기의 아버지/ 아버지의 공기// 달이 낳은 태양/ 태양이 낳은 달// 춤이 낳는 춤/ 함께 울어주는 신// 모든 소리는 음악이 되고/ 어떤 시간은 공간으로 창조된다/ 시작//
그 장미도 죽어버리고 / 정재학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 애써 키운 장미가 결국 죽어버렸다// 아이가 화분에 뱉어놓은 수박씨/ 몇 개 중 하나가 싹을 틔었다// 죽은 장미 옆에서 파릇한 작은 잎이/ 오늘은 벌써 열 개// 이 이파리들의 파릇한 작은 잎이/ 오늘은 벌써 열 개// 이 이파리들의 전생이 같은 화분/ 의 장미였을지도 모를 일// 장미의 역할이 지겨워졌을지도/ 모를 일// 벨벳 같은 빨간 장미를 계속/ 열어주었는데// 내가 친절하게 사랑해주지/ 못 했나 보다// 모를 일들 투성이지만/ 죽은 장미 옆에서 낮잠을 자다가// 노란 수박꽃이 피는 꿈을/ 꾸기도 한다.//
어쩜 그렇게 젊어 보여요? / 정재학
일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아파트 청소하시는 분이 "아니, 어쩜 그렇게 젊어 보여요?" 하신다. "감사합니다" 하고 엘리베이터 문을 닫으려는데 "한 오십 됐어요?" 하신다. "아니요. 사십대 중반입니다" 하고 엘리베이터 문을 닫으려는데 다시 "한 마흔다섯 됐어요? 사장님이에요? 왜 집에 있어요?" 하신다. "아니요. 마흔일곱입니다"만 대답하고 결국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데 그 너머 "아, 그래서 젊어 보였구나" 목소리가 들렸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거울을 보니 마스크 때문에 얼굴의 반만 보인다. 그래서 이 년은 깎아주셨나 싶다가도 내가 어디 가서 젊다는 소리 듣나 생각해봤더니 별로 없는 거다. 문인들 모임에서는 젊다는 소리를 많이 들을 때가 있었다. 나는 스물셋에 등단했는데 나보다 늦게 등단한 후배들이 선배라고도 안 부르고 나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반말을 하곤 했다. 지금도 그러려니 한다. 청소하시는 할머니는 연세가 몇이실까? 다음에 여쭈어봐야지. 엘리베이터 바닥을 보니 소독제로 깔끔하게 닦은 물기가 보였다.
내 손바닥보다 큰 달팽이 / 정재학
달팽이가 위를 향해 쭈욱 기지개를 켜듯 일어나 내가 뿌려주는 비를 맞는다. 아들이 "달팽이가 오 ~예! 하는 것 같다"며 좋아한다. 똥도 항상 치워주고 물도 뿌려주고 해서 내가 키운 거나 다름없다고 했더니, 아내가 매일 먹을 것을 준 건 자기라고 우기니,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아들이 공평하게 우리 셋이 키웠다고 한다. "아빠 손바닥보다 더 컸는데 구워 먹을까?" 했더니 "지금 달팽이 기분이 좋은데 구워 먹자고?" 아! 그렇구나! 그건 좀 잔인하네. "그럼 내일 구워 먹을까?" 했더니 "왠지 슬퍼" 그런다. "알았어, 안 먹을게. 좋지?" 그래도 아들 덕분에 살았다. 달팽아, 이만큼 클 줄은 몰랐다. 애 다섯살 때 유치원에서 준 새끼손톱보다 작던 백와달팽이. 수명이 이년 정도라는데 삼년 동안 촉촉한 가족이 되어주었다. 잠 안 오던 밤에 내 이야기도 가끔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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