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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손택수 시인

부흐고비 2021. 12. 6. 08:36

손택수(孫宅洙) 시인
1970년 전라남도 담양에서 태어났으며, 경남대학교 국문학과와 부산대학교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호랑이 발자국』 『목련 전차』 『나무의 수사학』 등이 있다. 수주문학상, 부산작가상, 현대시 동인상, 신동엽창작상, 육사시문학상 신인상, 애지문학상, 이수문학상, 문학과의식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실천문학사 대표로 활동 중이다.

 




내 시의 저작권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 손택수
구름 5%, 먼지 3.5%, 나무 20%, 논 10%/ 강 10%, 새 5%, 바람 8%, 나비 2.55%, 먼지 1%/ 돌 15%, 노을 1.99%, 낮잠 11%, 달 2%/ (여기에 끼지 못한 당나귀에게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함)/ (아차, 지렁이도 있음)// 제게도 저작권을 묻는 일이 가끔 있습니다 작가의 저작권은 물론이고 출판사의 출판권까지 낼 용의가 있다고도 합니다 시를 가지고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고 한 어느 방송국 피디는 대놓고 사용료 흥정을 하기까지 했답니다 그때 제 가슴이 얼마나 벌렁거렸는지 모르실 겁니다 불로소득이라도 생긴 양 한참을 달떠있었지요 그럴 때마다 참 염치가 없습니다 사실 제 시에 가장 많이 나오는 게 나무와 새인데 그들에게 저는 한 번도 출연료를 지불한 적이 없습니다 마땅히 공동저자라고 해야 할 구름과 바람과 노을의 동의를 한 번도 구한 적 없이 매번 제 이름으로 뻔뻔스럽게 책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작자미상인 풀과 수많은 무명씨인 풀벌레들의 노래들을 받아쓰면서 초청 강의도 다니고 시 낭송 같은 데도 빠지지 않고 다닙니다 오늘은 세번째 시집 계약서를 쓰러가는 날 악덕 기업주마냥 실컷 착취한 말들을 원고 속에 가두고 오랫동안 나를 먹여 살린 달과 강물 대신 싸인을 합니다 표절에 관한 대목을 읽다 뜨끔해하면서도 초판은 몇부나 찍을 건가요, 묻는 걸 잊지 않습니다 알량한 인세를 챙기기 위해 은행 계좌번호를 꾸욱꾹 눌러 적으면서 말입니다//

아버지의 등을 밀며 / 손택수
아버지는 단 한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속에 준비해둔 다섯살 대신/ 일곱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공연한 일들이 좀 있어야겠다 / 손택수
내게도 공연한 일들이 좀 있어야겠다/ 일정표에 정색을 하고 붉은색으로 표를 해놓은 일들 말고// 가령, 태풍이 올라온다는 소식에 모종대를 손보는 노파처럼/ 곧 헝클어지고 말 텃밭일망정/ 흙무더기를 뿌리 쪽으로 끌어다 다독거리는 일// 장맛비 잠시 그친 뒤, 비가 오면 다시 어질러질 텐데/ 젖은 바닥에 붙어 잘 쓸리지도 않는 은행잎을 쓸어담느라 비질을 하는 일// 치우고 나면 쌓이고, 치우고 나면 쌓이는 눈에 굽은 허리가 안쓰러워/ 어르신, 청소부에게 그냥 맡기세요 했더니/ 멀거니 쳐다보곤 하던 일을 마저 하던 그 고요한 눈빛처럼// 별 뜻도 없이 고집스레, 내 눈엔 공연한 일들에 노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상하지 않는가, 나는 이 쓸모없는 일들 앞에서 자꾸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세상에는 값지고 훌륭한 일도 많다지만//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 / 손택수
연탄이 떨어진 방, 원고지 붉은 빈칸 속에 긴긴 편지를 쓰고 있었다 살아서 무덤에 들 듯 이불 돌돌 아랫도리에 손을 데우며, 창문 너머 금 간 하늘 아래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 전학 온 여자아이가 피아노를 치고// 보, 고, 싶, 다, 보, 고, 싶, 다 눈이 내리던 날들// 벽돌 붉은 벽에 등을 기대고 싶었다 불의 뿌리에 닿고 싶은 하루하루 햇빛이 묻어 놓고 간 온기라도 여직 남아 있다는 듯 눈사람이 되어, 눈사람이 되어 만질 수 있는 희망이란 벽돌 속에 꿈을 수혈하는 일// 만져도 녹지 않는, 꺼지지 않는 불을// 새벽이 오도록 빈 벽돌 속에 시를 점화하며, 수신자 불명의 편지만 켜켜이 쌓여가던 세월, 그 아이는 떠나고 벽돌집도 이내 허물어지고 말았지만 가슴속 노을 한 채 지워지지 않는다 내 구워낸 불들 싸늘히 잠들고 비록 힘없이 깨어지곤 하였지만// 눈 내리는 황금빛 둥지 속으로 새 한 마리 하염없이 날아가고 있다//
*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육친 / 손택수
책장에 침을 묻히는 건 어머니의 오래된 버릇/ 막 달인 간장 맛이라도 보듯/ 눌러 찍은 손가락을 혀에 갖다 대고/ 한참을 머물렀다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곤 하지/ 세상엔 체액을 활자 위에 묻히지 않곤 넘어갈 수 없는 페이지가 있다네/ 혀의 동의 없이 도무지 읽었다고 할 수 없는 페이지가 있다네/ 연필심에 침을 묻혀 글을 쓰던 버릇도 버릇이지만/ 책 앞에서 침이 고이는 건/ 종이 귀신을 아들로 둔 어머니의 쓸쓸한 버릇//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같다고/ 아내도 읽지 않는 내 시집 귀퉁이에/ 어머니 침이 묻어 있네/ 어린 날 오도독 오도독 씹은 생선뼈와 함께/ 내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던 그 침/ 페이지 페이지 얼룩이 되어 있네//

목련전차 / 손택수
목련이 도착했다/ 한전 부산지사 전차기지터 앞/ 꽃들이 조금 일찍 봄나들이 나왔다/ 나도 꽃 따라 나들이나 나갈까/ 심하게 앓고 난 뒤의 머릿속처럼/ 맑게 갠 하늘 아래,/ 전차 구경 와서 아주 뿌리를 내렸다는/ 어머니 아버지도 그랬겠지/ 꽃양산 활짝 펴 든/ 며느리 따라 구경 오신 할아버지도 그랬겠지/ 나뭇가지에 코일처럼 감기는 햇살,/ 저 햇살을 따라가면/ 나무 어딘가에 숨은 전동기가 보일는지 모른다/ 전차바퀴 기념물 하나만 달랑 남은 전차기지터/ 레일은 사라졌어도, 사라지지 않는/ 생명의 레일을 따라/ 바퀴를 굴리는 힘을 만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지난밤 내리치던 천둥번개도 쩌릿쩌릿// 저 코일을 따라가서 動力을 얻진 않았는지,/ 한 량 두 량 목련이 떠나간다/ 꽃들이 전차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든다/ 저 꽃전차를 따라가면, 어머니 아버지/ 신혼 첫밤을 보내신 동래온천이 나온다//

가시잎은 시들지 않는다 / 손택수
하늘에 매가 없다 솔개 한 마리, 독수리 한 마리 없다 이게 새들을 절망케 한다 매서운 부리와 발톱에 쫓길 때 그는 차라리 그 죽을 지경 속에서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겨울 아침 새들이 눈 쌓인 탱자나무 울타리 속에 와서 운다 아무런 장애물 없이 펼쳐진 저 드넓은 하늘을 두고 결사코, 여린 가슴을 겨누는 가시 밀림을 찾아든다// 오늘 빙벽을 찾아나선 사내들이 추락사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얼음 속의 가시, 살을 쿡쿡 찔러대는 빙벽에 입김을 불어넣으며 팽팽한 밧줄을 타고 아찔한 빙벽 사이를 날아다녔을 새들// 시들지 않기 위해 피어나는 잎이 가시가 된다 연하디 연한 이파리로부터 시퍼렇게 담금질한 무쇠잎이 된다 이파리 투둑 떨어지고 적설량에 와지끈 가지가 꺽어져도 잠들지 마라 잠들지 마라 겨우내 시들지 않고 남아 얼어붙은 땅을 찔러대는 가시//

저물녘의 왕오천축국전 / 손택수
지상엔 수없이 왔으나 처음 당도한 여름 끝의 노을이 걸려 있습니다/ 모래바람 날리는 저물녘 해변의 산보는 당신의 왕오천축국전/ 내디딘 대지에 한 발 한 발 기도를 드리듯이 걷습니다/ 불안하게 술렁이는 허공을 더듬거리면서 더디게 모아지는 발들, 한참을 머물렀다 또 한 걸음을 뗄 때/ 그 숨 막히는 보행은 차라리 구도가 아닙니까/ 반쪽 몸에 내린 빙하기가 반쪽 몸의 봄을 더 간절하게 합니다/ 쇄빙선처럼 길을 트는 가쁜 한 걸음 속에서/ 몸의 밑바닥은 의식의 가장 높은 고원,/ 불어가는 바람이 해저에서 막 융기하는 산맥의 바위처럼/ 굽이치는 당신의 이마를 환하게 쓸고 갑니다/ 단 몇 미터를 걷는 데 평생이 걸린다면/ 몇 미터의 대륙이 품에 안은 수십억 년을 가뿐히 뛰어넘는 것,/ 마비된 근육과 혈관 너머로 추방당한 복류천 맥박소리를 향해 걸어가는 것/ 깨어진 모래 한 알이 무릎걸음으로 해변을 동행할 때/ 더듬거리는 걸음과 걸음 사이의 침묵이 제 유창한 보행을 망설이게 합니다/ 지상에 말랑한 첫발을 내딛는 아기의 경이처럼/ 지팡이를 짚을 때마다 탁, 탁, 터져나오는 탄성/ 한 번도 온 적 없는 여름 끝 저물녘의 왕오천축국전/ 일만 번의 여름을 살며 스스로 풍경이 된 이름이 파도에 잠기고 있습니다//

호랑이 발자국 / 손택수
가령 그런 사람이 있다고 치자/ 해마다 눈이 내리면 호랑이 발자국과/ 모양새가 똑같은 신발에 장갑을 끼고/ 폭설이 내린 강원도 산간지대 어디를/ 엉금엉금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눈 그친 눈길을 얼마쯤 어슬렁거리다가/ 다시 눈이 내리는 곳 그쯤에서 행적을 감춘/ 사람인 것도 같고 사람 아닌 것도 같은/ 그런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래서/ 남한에서 멸종한 것으로 알려진/ 호랑이가 나타났다, 호랑이가 나타났다/ 호들갑을 떨며 사람들이 몰려가고/ 호랑이 발자국 기사가 점점이 찍힌/ 일간지가 가정마다 배달되고/ 금강산에서 왔을까, 아니 백두산일 거야/ 호사가들의 입에 곶감처럼 오르내리면서/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민 차리면 된다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속담이 복고품 유행처럼 번져간다고 치자/ 아무도 증명할 수 없지만, 오히려 증명할 수 없어서/ 과연 영험한 짐승은 뭐가 달라도 다른 게로군/ 해마다 번연히 실패할 줄 알면서도/ 가슴속에 호랑이 발자국 본을 떠오는 이들이/ 줄을 잇는다고 치자 눈과 함께 왔다/ 눈과 함께 사라지는, 가령/ 호랑이 발자국 같은 그런 사람이//

돌종 / 손택수
돌 쪼는 소리 쩡쩡/ 여름 한낮 나른한 대기를 흔든다/ 뭘 만드느냐 물으니/ 석수장이, 돌종을 만든단다/ 큰절 부방장 스님/ 석종 부도를 만든단다/ 그러고 보니 돌은 반쯤 종신 모양을 하고 있다/ 저 돌종이 다 완성되면/ 종은 이제 다시는 울지 못하는/ 버버리 종이 되겠구나/ 그래, 버버리 종으로 완전히 굳어지기 전에/ 석수장이 내려치는 정끝에서/ 저렇게 얼얼하게 아파 실컷 울고 있는 모양이구나/ 울음 뚝 그친 돌 속으로 들어가서/ 어떤 중이 돌종이 될는지/ 엉덩이 묵직한 돌중으로 깊디깊은 참선에 빠져들는지/ 돌은 벌써 반쯤 문 딱 걸어 잠근/ 침묵이다 챙 챙/ 불꽃 튀기는 침묵으로/ 남은 울음을 마저 쪼아내고 있다// 청도의 봄 혹은 소싸움 / 손택수
봄은/ 몸 위에/ 두 개의 뿔이 돋은 소다// 머리를 맞대고 퉁방울눈을 부라리며/ 황토빛 잔등에서 아지랑이 더운 김이 스멀거리도록/ 뾰족하게 깎은 뿔을 부딪힐 때마다 나는 마찰음이/ 챙, 챙, 불똥을 튀긴다// 봄은 쟁기로 겨우내 굳은 땅거죽을 갈아엎듯,/ 제 살거죽을 찌르며 뚫고 나오는 아픔/ 아픔으로 살진 몸 위에/ 돋아난 두 개의 뿔들을 휘두른다// 씩씩거리는 소울음 소리를 내며/ 모래판을 마구 헤집고 다닌다//

구름 농장에서 / 손택수
말라붙은 땅에서 누가 곡괭이질을 하고 있나/ 파헤친 땅에 땀방울 뿌려대고 있나/ 여기는 구름 농장, 구름을 목책처럼 두른/ 이 농장의 주산물은 포도, 뭉게뭉게/ 한 송이에 일만 개씩의 포도알이 열린다/ 마른하늘 끝에 비구름 몇 점 떠올릴 수 있다면/ 젖은 등 위로 스멀스멀 김이 피어오르도록/ 지상에 남은 마지막 한 방울의 비애를 마저 펌프질하라/ 지하철이 두두두두 수천 마리 두더지 떼처럼/ 지진을 일으키며 지나가는 농장에서도/ 상춧잎 들깻잎 푸르러가는 땅은 있으니/ 지하철 천장까지 내려갔다가 깜작 놀라/ 방울토마토 뿌리로 돌아온 지렁이를 위로하며/ 나의 일은 이 땅에서 구름을 일구는 것/ 요즘은 비가 오지 않으면/ 난폭하게 구름을 헤집고 들어간 인공강우 편대들이/ 드라이아이스를 구름밭에 파종하기도 한다지만/ 병든 몸의 열기와 비린내를 벗고/ 이슬점까지 떨어진 물기들을 뭉쳐 둥근 경단을 빚는 것/ 구름 그림자가 스윽 몸을 스치기라도 하면/ 몸속의 물방울들이 먼저 알아듣고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뜬구름과 뜬구름이 엉켜 운모석雲母石토양을 이루고 있는 과원/ 쿠르릉 기다리고 기다리던 구름의 출하가 시작되면/ 떨어져 으깨지는 방울방울이 내 노역을 향그럽게 하리라/ 그를 위해 내 쟁기는 지층 속의 구름을 파고들고/ 삽날을 물고 놓지 않은 구름 이랑 속에 씨앗을 뿌린다//

아버지와 느티나무 / 손택수
아버지의 스무살은 흑백사진, 구겨진 흑백사진 속의 구겨진 느티나무, 둥치에 기대어 있다 무슨 노랜가를 부르고 있는지 기타를 품고, 사진 밖의 어느 먼곳을 바라보고 있는지 젖은 눈으로, 어느 누군가가 언제라도 말없이 기대어올 것처럼// 한쪽으로 비스듬히 누운 느티와 함께 있다 나무는 지친 한 사람을 온전히 받아주기 위하여 그렇게 기울어간 것이나 아닌지, 쓰러질 듯 기울어 가면서도 기울어가는 둥치를 끌어당기느라 뿌리를 잔뜩 긴장하고 서 있는 것이나 아닌지// 그 사람들 등의 굴곡에 가장 알맞는 모습으로 기울어가기 위하여 한평생을 고단하게 쓰러져갔을 나무, 풍성한 머릿결을 바람에 비다듬고 내가 알 수 없는 노래에 수만의 귀를 쫑긋거리고 있다 구겨지고 구겨진 흑백 속에서도 그 노래 빳빳하게 살아 있다// 언젠가 구겨진 선처럼 내 몸에도 깊은 주름이 패이면, 돌아갈 수 있을까 저 생생한 한 그루 아래로, 돌아가서 당신을 쏙 빼닮았다는 등허리를 아름드리 둥치에 지그시 기대어볼수가 있을까// 처음 나무는 낯선 나를 의아해하겠지만, 한줌의 뼈를 품고 지쳐서 돌아온 나를 알아보지 못해 어리둥절해하겠지만, 구겨진 생의 실핏줄마다 새순 같은 초록물이 번지고 몸의 박동음과 물관을 타고 오르는 은지느러미 미끄러운 물소리가 다시 눈부시게 만나는 한때// 나무는 이내 알게 될 것이다, 약간 굽은 내 등의 굴곡을 통해, 무너져가는 가계를 떠맡은 채 일찌감치 그의 곁을 떠나간 청년 하나를, 그가 꾸다 만 꿈과 슬픔까지를// 어쩌면 흑백의 저 푸른 느티나무 아래서 부를 노래 하나를 장만하기 위하여 나의 남은 생은 온전히 바쳐져도 좋을는지 모른다 사진 안에 미쳐 들어오지 못한 어느 먼 곳을 향하여 아버지의 스무살처럼 속절없이 나는 또 그 어느 먼곳을 글썽하게 바라보아야 하겠지만// 한줌의 뼈를 뿌려주기 위해, 좀더 멀리 보내주기 위해, 제 몸에 돋은 이파리를 쳐서 바람을 불러일으켜주는 한 그루, 바람을 몰고 잠든 가지들을 깨우며 생살 돋듯 살아나는 노래의 그늘 아래서//

나무의 수사학 1 / 손택수
꽃이 피었다./ 도시가 나무에게/ 반어법을 가르친 것이다/ 이 도시의 이주민이 된 뒤부터/ 속마음을 곧이곧대로 드러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나도 곧 깨닫게 되었지만/ 살아 있자, 악착같이 들뜬 뿌리라도 내리자/ 속마음을 감추는 대신/ 비트는 법을 익히게 된 서른몇 이후부터/ 나무는 나의 스승/ 그가 견딜 수 없는 건/ 꽃향기 따라 나비와 벌이/ 붕붕거린다는 것,/ 내성이 생긴 이파리를/ 벌레들이 변함없이 아삭아삭/ 뜯어 먹는다는 것/ 도로변 시끄러운 가로등 곁에서 허구한 날/ 신경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며 피어나는 꽃/ 참을 수 없다 나무는, 알고 보면/ 치욕으로 푸르다//

나무의 수사학 2 / 손택수
식육점 간판을 가리다/ 잘려 나간 가지 끝에/ 물방울이 맺혀 있다/ 흘러갈 곳을 잃어버린 수액이/ 전기 톱날 자국 끝에 맺혀 떨고 있는 한때/ 나무에게 남아 있는 고통이 있다면 이제는/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수로를 잃은 물방울이 떨어질 때의 그/ 아찔하던 순간도 잠시/ 빈 소매를 펄럭이듯,/ 팔 없는 소맷자락 주머니에 넣고 불쑥/ 한 손을 내밀 듯/ 초록에 묻혀 있는 나무/ 환자통을 앓는 건 어쩌면/ 나무가 아니라 새다/ 허공 속에 아직도/ 실핏줄이 흐르고 있다는 듯/ 내려앉지 못하고 날갯짓/ 날갯짓만 하다 돌아가는,//​

나무의 수사학 3 / 손택수
벚나무의 괴로움을 알겠다/ 꽃 피는 벚나무의 괴로움을 나는/ 부끄러움 때문이라 생각한다// 퇴근길 지하철 계단 위로 벚꽃이 날린다/ 출입구 쪽에서 흩날리던 꽃잎 몇이/ 바람을 타고 계단에 날아와 앉는다/ 이 지하철역 가까운 곳에서는 얼마 전/ 철거민들이 불타 죽은 일이 있었지// 계단 계단 누운 벚꽃을 밟고 오르며 나는 인어를 생각한다/ 떨어지지 않는 철거민 생각 대신/ 벚꽃 아래 사진을 찍던 여자들/ 종아리 맨살에 화르르 달라붙던 꽃비늘과/ 그이들 가슴에 익어갈 버찌/ 버찌에 물든 입술처럼 푸르를 바다 생각에 젖는다/ 그런데 이건 아니다 도리질 도리질/ 언젠가부터 나는 꽃을 마음 놓고 사랑하지 못 했다/ 국회의사당 앞에서는 춘투를 읽고,/ 꽃향기 따라 닝닝거리는 트럭 점포 앞에서는 유랑과 실업을 읽었다// 벚꽃을 나는 이제 그냥 벚꽃으로만 보고 싶을 뿐인데,/ 어깨를 스치는 꽃비늘에 사라져버린 인어와/ 바닥을 씻고 가는 물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도 같은데// 여기는 불과 재의 시간을 지나온 먼지 한 점이 아직 눈을 감지 못하는 땅/ 숨결을 타고 들어온 먼지들이 쿨룩쿨룩 잠든 내 몸속을 하얗게 떠돌아다니는 땅// 꽃잎이 오르내리는 사람들 구두 밑에서 으깨진다/ 절반쯤 으깨진 몸을 바닥에 붙이고/ 날아오를 듯 말 듯 들썩인다// 푹 꺼진 계단 계단 제 몸에 찍힌 발자국을/ 들었다 놓는 꽃잎,//

나무의 수사학 4 / 손택수
나뭇잎과 푸른 물고기에 대한 비유를 더는 쓸 수가 없다/ 나무줄기와 강줄기에 대한 비유도 그저 지루하기만 하다// 여기 하수도관을 뚫고 들어간 나무가 있다/ 잇몸이 가려운 시궁쥐 이빨처럼/ 드릴 구멍을 낸 뿌리들// 만년필로 검은 잉크를 빨아들이듯/ 관에 들러붙은 오물을 빨아들인다면/ 내다버린 아기와 죽은 고양이 울음소리가/ 폐수를 따라 올라온다면// 광기로 부글거리는 늪을 품고 구토를 하는 나무들아/ 걸러내고 걸러내다 지쳐 게워내는 고통의 초록들아// 버릴 수 없다 가지와 가지를 물들이고,/ 가지와 가지 사이 여백까지 푸르스름/ 번져가기 위해 덧나는 잎이 네 욱신거리는 수사들이라면// 나무야 나의 시는 조금만 더 낡아야겠구나/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미쳐가는 만년필 속/ 폐수를 거슬러 오르는 한 마리 푸른 물고기가 있어//

나무의 수사학 5 / 손택수
용케 헐리지 않았다 모래내 대장간 지나갈 때마다/ 가게 앞에 내다놓은 소철나무 안부를 묻는다/ 게으름뱅이가 키우기 좋다고, 아무렇게나 내버려둬도/ 저 혼자 잘 자라니 한 달에 한두 번 물이나 주면 된다던/ 소철 시들어버린 등걸에 못을 박고 물을 준다 못이/ 녹슬면 녹물이 나무 안으로 들어가 모자란 철분을/ 보충해줄 거야 극약처방이라도 하듯 푸석푸석 마른/ 살갗을 함부로 찔러보는 날들 광석이 흙으로 둘러싸인/ 식물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운석을 캐던 연금술사들의/ 믿음대로 녹슨 못을 푸른 못으로 뽑아내는 소철/ 슬레이트 지붕 너머로 떨어지는 해를 화덕 속 시우쇠처럼/ 품고 두드려댄다 땅, 땅, 땅 굳은 땅에 박힌 새들의 부리/ 자국처럼 파고든 침엽마다 뭉친 혈이 풀리면 오래전에/ 사라져버린 빛 하나 따끔 살갗을 뚫고 나오는 대장간//

두만강 검은 물에 / 손택수
간밤에 누가 강을 건넜는가, 눈 덮인 얼음 위에 발자국이/ 어지럽다 뚜포 -뚜포 -한족 두부장수가 지나가는 남평진/ 옥수숫대 서걱이는 강 건너 따닥따닥 붙은 다락밭이/ 누더기 옷을 기워 입은 것 같다 지난밤 라경호텔 식당에서/ 먹은 칠색송어와 별 네 개짜리 고량주가 아직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것 같은데 벼랑을 따라 미끄러져 내리던 어느/ 갈퀴손의 흔적인지 손톱자국처럼 후벼 팬 산길, 철조망 너머/ 눈 덮인 강이 투두둑 몸을 틀며 산협을 감아오른다/ 밀강 옆엔 미산, 삼합 옆엔 회령 마주 보고 있어서 더 외로운/ 국경마을들 소켓에 백열등 갈아 끼우는 소리를 내며 별이/ 뜨고 신호에 답하듯 지상에도 가물가물 불이 들어온다/ 이 밤에 또 누가 강을 건너려나 인민군들 몇이 펄럭이고 있는/ 강변 일행 중 하나는 남쪽에서 귀한 한약재로 쓴다는/ 겨우살이를 가리키는데 백양나무 봇나무 폭설에 부러진/ 생목가지 속살에서 수도관을 뚫고 나온 물처럼 싸한 향이/ 콸콸거린다 팍, 강 허리가 꺾어지는 자리, 금 간 얼음 속으로/ 검은 물이 흘러 간다//

동백사원 / 손택수
동백이 무슨 쇠종이라도 된다는 듯이 눈보라가 꽃망울을/ 치고 간다 겹겹이 뭉친 망울 속엔 동박새 울음이 들었고,/ 가지를 쥐고 흔들던 시월의 서리 묻은 바람이 들었고,/ 한 방울 머릿기름을 얻기 위해 눈보라 속을 걸어오던/ 발소리가 들었다// 묵언에 든 동백을/ 찾아 기억에도 없는 무슨 인연인가에/ 이끌려 땅끝까지 내달려온 길 둘 데 없는 마음은 미황사/ 처마처럼 벌어지는 꽃송이와 함께 얼어붙은 대기라도/ 살짝 밀어젖혀보고 싶은데// 멀리 꽃향기를 날리는 대신 다리에 쇳덩이 추를 달고/ 떨어지는 독한 것, 동백은 죽어 제 그늘 위에서 다시/ 피어나는 꽃이다 산문을 닫아건 채 자신의 중심을 물들이며/ 추락하는 저 얼얼한 꽃빛이 땅땅 쇠종 소리를 낸다//

녹슨 도끼의 시 / 손택수
예전의 독기가 없어 편해 보인다고들 하지만/ 날카로운 턱선이 목살에 묻혀버린/ 이 흐리멍덩이 어쩐지 쓸쓸하다/ 가만히 정지해 있다 단숨에 급소를 낚아채는 매부리처럼/ 불타는 쇠번개 소리 짝, 허공을 두쪽으로 가르면/ 갓 뜬 회처럼 파들파들 긴장하던 공기들, 저미는 날에 묻어나던 생기들,/ 애인이었던 여자를 아내로 삼고부터/ 아무래도 내 생은 좀 심심해진 것 같다/ 꿈을 업으로 삼게 된 자의 비애란 자신을 여행할 수 없다는 것,/ 닦아도 닦아도 녹이 슨다는 것/ 녹을 품고 어떻게 녹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녹스는 순간들을 도끼눈을 뜬 채 바라볼 수 있을까/ 혼자 있을때면 이얍 어깨 위로 그 옛날 천둥 기합소리가 저절로/ 터져나오기도 하는 것인데, 피시식/ 알아서 눈치껏 소리 죽인 기합 소리는 맥이 빠져 있기 마련이다/ 한번이라도 꽉 짜인 살과 살 사이의 틈에 제 몸을 끼워 맞추고/ 누군가를 단숨에 관통해본 자들은 알리라/ 나무는 저를 짜갠 도끼날에 향을 묻힌다/ 도끼는 갈고 갈아도 지워지지 않는 묵향을 그리워하며 기꺼이 흙이 된다/ 뒤꿈치 굳은살 같은 날들 먼지 비듬이라도 날리면/ 온몸이 근질거려 번쩍 공중으로 들어올려지고 싶은 도끼//

살가죽구두 / 손택수
세상은 그에게 가죽구두 한 켤레를 선물했네/ 맨발로 세상을 떠돌아다닌 그에게/ 검은 가죽구두 한 켤레를 선물했네// 부산역 광장 앞/ 낮술에 취해/ 술병처럼 쓰러져/ 잠이 든 사내// 맨발이 캉가루 구두약을 칠한 듯 반들거리고 있네/ 세상의 온갖 흙먼지와 기름때를 입혀 광을 내고 있네// 벗겨지지 않는 구두,/ 그 누구도/ 벗겨 갈 수 없는/ 맞춤 구두 한 켤레// 죽음만이 벗겨줄 수 있네/ 죽음까지 껴 신고 가야 한다네//

구두 속의 물고기 / 손택수
출판사 신간 보도자료 들고 광화문 신문사들 돌아다니다/ 나무 아래 구두 벗어놓고 잠시 땀을 식히는데/ 어디서 날아온 것인가 구두 속으로 들어간 나뭇잎이/ 그 옛날 강가에서 놀다 고무신 속에 품어온/ 각시붕어 같다 족두리를 닮은 지느러미가 흔들릴 때마다/ 먼 훗날 만날 각시를 생각하며 흐뭇해하던 아이가 있었다// 각시야 각시야 쌀 장만하러 돌아다니다/ 늙어버린 구두를 용서하렴/ 결혼기념일도 잊고 생일도 잊고/ 너를 풀어놓을 우물마저 잊어버렸구나/ 우물에 대고 부르던 노래도 더는 들려줄 수 없구나// 여울돌에 낀 이끼를 뜯어 먹더라도/ 나는 한때 그 강으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등을 뚫는 아픔 없이 어찌 풍경이 될까/ 절집 처마 끝에 올라 풍경소리 들려줄 수 있을까/ 다독이며 다독이며 참으로 멀리도 흘러왔는데/ 나뭇잎은 땀에 전 바닥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는다/ 내 몸 어디에 아직 떠나온 강물소리 출렁이고 있을까만/ 그 옛날 영산강 배꼽다리 대숲 마을/ 고무신 속 각시붕어처럼/ 젖은 구두 벌어진 어항 속을 유영하고 있다//

구두 밑에서 말발굽 소리가 난다 / 손택수
구두 밑에서 따그락 따그락 말발굽 소리가 난다/ 구두를 벗어 보니 구두 뒷굽에 구멍이 났다/ 닳을 대로 닳은 구두 뒷굽을/ 뚫고 들어간 돌멩이들이 부딪히며/ 걸을 때마다 챙피한 소리를 낸다/ 바꿔야지, 바꿔야지 작심하고 다닌 게 몇 달/ 할 수 없다, 할 수 없다 체념하고 다닌 게 또 몇 달/ 부산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광주로/ 마산으로, 다시 부산으로 떠돌아다니는 동안/ 빗물이 꾸역꾸역 밀려들어오는 구두/ 빙판길에선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엄지발가락에 꾸욱 힘을 줘야 했던 구두/ 걸을 때마다 말발굽 소리를 낸다/ 빼고 나면 다시 들어가 박히고/ 빼고 나면 또 다시 들어가 박히는 소리/ 지친 걸음에 박자를 맞춰주는 소리/ 닳고 닳은 발굽으로 열 정거장 스무 정거장/ 빈주머니에 빈손을 감추고 걸어가는 동안/ 들려오지 않으면 이제는 왠지 허전해진다/ 그만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이럇/ 뒷굽을 치며 갈기를 휘갈기는 소리/ 따그락 따그락 무거운 몸에 리듬을 실어주는 소리//

네 숨소리를 훔쳐듣는다 / 손택수
담장을 허무는 대신 나는 담장을 수리하겠다/ 탱자 울타리 속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를 들어보아라/ 가시와 가시 사이에서 새들은 노래를 한다/ 심드렁해진 나와 너 사이엔 저런 경계라도 좀 있어야겠다/ 담쟁이넝쿨을 좋아하는 너를 위해서라도, 무엇보다/ 대로보단 골목길을 어슬렁이길 좋아하는 나의/ 소심한 산책을 위해서라도/ 맞댄 등을 절벽으로 삼아보면 어떨가/ 어린 날 새 학년이 되어 만난 여자 짝꿍 책상 위에 금을 그어놓고/ 실랑이를 벌이던 악동으로라도 돌아가볼까/ 결혼 십년 째 여전히 곰팡내 나는 나를 신랑이라고 부르는 아내여,/ 식장을 걷던 날의 두근거림을 간직하고 싶은 나의 신부여/ 기교는 슬프다 기교가 무너진 자리에 남는 고독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서/ 말을 섞고 몸을 섞고 숨결을 나누지만/ 너의 눈 속으로 들어간 지 너무도 오래되었구나/ 어쩌면 나는 네가 아닌 한에서만 겨우 너,/ 한밤에 아파트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누군가의 울음소리처럼/ 뻣뻣한 금 앞까지 바짝 다가앉아 네 숨소리를 훔쳐듣는다//

이해인 수녀님의 동백가지 꺾는 소리 / 손택수
어떤 꽃가지들은 부러질 때 속 시원하게 부러진다/ 가지를 꺾는 손이 미안하지 않게/ 미련을 두지 않고 한번에 절명한다/ 꺾는 손이나 꺾이는 가지나/ 고통을 가능한 한 가장 적게 받도록/ 아니, 기왕에 작심을 하였으면/ 부러지는 소리가 개운한 음악소리를 닮을 수 있도록/ 아무도 모르는 급소를 내어준다/ 광안리 성베네딕도 수녀원/ 65년부터 여기에 있었다고/ 얼마 전 영정사진을 찍어놓았다고/ 암투병 중인 수녀님이 선물로 동백가지를 끊는다/ 뚝, 아무런 망설임 없이/ 마치 오랜 동안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단번에 가지 꺾이는 소리,/ 세상 뜰 때 내 마지막 한마디도 저와 같았으면/ 비록 두려움에 떨다가도 어느 순간/ 지는 것도 보람인 양/ 가장 크고 부드러운 손아귀 속에서 뚝,/ 꽃보다 진한 가지 향을 뿜어낼 수 있었으면//

하늘 골목 / 손택수
성당의 종소리가 노을 속으로 퍼져나가면/ 빈 도시락통을 딸랑거리며 돌아오시던 어머니,/ 어린 누이들과 함께 기다리던 골목은/ 정이 많아서, 처마와 처마 사이좋게 이마를 맞대고 있었지/ 어린 우리들 시장기처럼 늘 허기가 져 있던 골목이지만/ 창문에서 뻗어나온 팔이 맞은편 팔을 향해 국수 그릇을 건네면/ 김이 식지 않도록 후루룩 하늘도 몇젓가락씩 받아먹던 골목/ 처마와 처마 사이로 길을 낸다는 건 좁은 창문으로 금방 부친 전을 주고받고/ 멀리서 온 짐 꾸러미를 대신 받아주기도 하면서/ 내 것이 아닌 체취도 조금씩 품어 살아보자는 것이었을까/ 다섯 살 겁 많은 시골 아이를 받아준 문현동 옛집/ 상처투성이 보르크 벽과 벽 사이로 빨랫줄이 내걸리던 골목/ 더러는 아버지 코 고는 소리 때문에 창피하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탁자를 사이에 두고 국수를 들기 위해 고개를 숙일 때,/ 이마가 부딪치지 않는 딱 그만큼씩 떼어놓는 사이는 있었으니/ 어쩌면 그 사이를 지키기 위해 집들은 들썩이는 슬레이트 지붕마다 돌을 얹어놓고/ 바닷바람에 단단히 뿌리를 내렸을까 어머니를 기다리는 동안/ 누이들과 나는 그 사잇길에 앉아 하늘을 우러르길 좋아하였다/ 넓기만 한 하늘도 이 가난한 마을에 이르러서는/ 처마와 처마 속에 끼어 좁장한 골목처럼 풀어져 구불거리곤 하였으니/ 골목 따라 오는 별을 헤아리듯 어머니를 기다리던 시간들//

죽은 양귀비를 곡함 / 손택수
양귀비를 키워보았음 했는데 마침 씨를 구했습니다 누구는/ 배앓이할 때 쌈을 싸 먹으면 좋다 하고, 열매즙을 짜서/ 담배에 묻혀 말린 뒤 피우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합니다/ 나는 소문으로만 듣던 꽃이나 좀 보고 싶어서 주말 농장/ 텃밭에 겁 없이 씨를 뿌리기로 하였답니다 새로 꺼낸 솜이불이/ 살결에 와 닿는 감촉으로, 씨앗들이 숨을 쉴 수 있도록 너무/ 답답하지 않게, 흙을 덮을 때는 어린 것들 다치지 마라/ 바람에 날려가지 마라 흙덩이를 일일이 손으로 비벼 뿌려/ 주고 다독거려주는 걸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 어느 날이었을까요 알뜰하게 살피던 땅에 누가 때아닌/ 쥐불을 놓은 게 아니었겠습니까 한눈에 멀리서도 활활거리는/ 불길에 아이쿠나 내 양귀비 모두 타 죽고 말겠구나 물통을/ 들고 달음박질 친 곳에서 만난 불은 다름 아닌 양귀비였습니다/ 처음 보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들이 있는데 양귀비가/ 딱 그렇지요 넋을 잃은 저는 양귀비와 함께 밭 한구석을/ 활활거렸습니다 삼겹살에 양귀비 쌈을 싸 먹고 된장에 무쳐/ 먹으며 다디단 술잠을 불러 보기도 하였습니다 양귀비를/ 애첩 삼아 끼고 사는 동안 사람들은 제 얼굴이 몰라보게/ 평안해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때 평화가 게으름과/ 통한다는 걸 깨달았지요 어쩌면 이렇게 마음이 편안하고/ 게을러지니 성실을 으뜸으로 삼는 사람들이 금기시하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또 어느날이었을까요/ 농장 쥔 양반이라는 분이 어째 불안해하는 것 같아서/ (꽃빛에 아주 질려버린 그는 꽃 하나 때문에 감옥에 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저를 설득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하릴없이 뿌리들을 모두 화분에 옮겨 담아오고 말았는데/ 그날 이후로 시난고난 앓던 양귀비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한 뿌리도 남김없이 혀를 깨물고 말았습니다 온갖 거름과/ 영양제를 주었지만 이미 소용없는 노릇이었지요 양귀비는/ 옮기면 죽는 꽃, 제가 뿌리 내린 땅과 한 몸이 되어서/ 땅덩이째 옮기지 않으면 목숨을 끊고 마는 독한 꽃/ 저는 그제야 양귀비를 보러 가던 내 발소리와 일을 잃고/ 양귀비 옆에서 한숨을 짓던 날들과 밭 너머로 지는 노을에/ 둘 데 없는 눈을 맡기고 있던 어느 저물녘과 금기를/ 어기던 즐거움과 내 불안까지가 모두 양귀비라는 것을/ 겨우 알게 되었습니다//

버드나무 강변에서의 악수 / 손택수
버드나무 아래 아이들이 도마뱀을 쫓는다/ 모래톱에 꼬리만 댕강 잘라놓고/ 버드나무 썩은 둥치 속으로 사라진/ 도마뱀은 좀체 고개를 내밀지 않고/ 초등학교 가족 동반 동창횟날/ 한쪽에선 빌려온 노래방 기계에 술판이 한창인데/ 악수를 나눌 때면 늘 가슴이 먼저 아려오던 친구가/ 돌 갓 지난 아기를 보듬고 온다/ 의자공장 잔업을 하다 그만 변을 당했어/ 덕분에 4급 장애인 혜택을 다 받게 되었지 뭐냐/ 만나고 헤어질 때면, 잡아줄 수 없고/ 흔들어줄 수 없는 손가락 셋을 흔들며 쓸쓸히 멀어져가던 친구/ 나는 친구가 제 손 대신 내민/ 아기의 손가락 다섯을 두 손에 감싸쥔다/ 그러는 나를 친구는 봄햇살보다 더 환하게 바라보고/ 버드나무 둥치 속으로 사라진 도마뱀 꼬리처럼/ 내 딱딱하게 굳은 손아귀 속에 들어와 꼼지락거리는 마디마디/ 지친 아이들이 잘려나간 도마뱀 꼬리를/ 모래흙 속에 묻어주고 있는 게 보인다/ 모래톱날에 드문드문 잘려나간 물줄기는/ 땅속으로 숨었다가 멀리서 다시 고개를 내밀고/ 지난 겨울 뭉툭하게 쳐냈던 버드나무/ 연초록 가지들도 새로 막 흐드러지고 있는 강변//

오동나무 지팡이 / 손택수
오동나무 짙은 잎그늘이 어리자 담벼락이 일렁인다/ 담벼락 아래 계단이 딱딱하게 굳은 관절을 꺾었다 펴며 술렁거린다/ 저 그늘 속엔 얼마 전까지 노파가 혼자서 앉아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 나와 해종일 우멍하게 깊은 눈구멍으로/ 오가는 이들을 무연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런 거동도 없이 스쳐지나가는 풍경들을/ 그늘 깊숙히 빨아들이고 있었다/ 아마도 가끔씩 들려오는 마른기침 소리만 아니었다면/ 아무도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으리라/ 노파의 소매 스적이는 소리와 잎그늘/ 뒤척이는 소리가 한몸이 되어 들려오던 골목길/ 언젠가 나뭇잎 그늘이 가만히 어깨에 손을 얹어왔을 때/ 이봐 젊은이, 손을 얹고 알아들을 수 없는 수화를 건네 왔을 때/ 나는 어깻죽지가 욱신거리는 통증을 느꼈는지 모른다/ 빛이 감춰둔 늪 속에라도 빠져들듯 더럭 겁을 집어먹었는지 모른다/ 녹물을 끼얹은 나뭇잎 하나가 남은 햇살을 그러쥐고/ 작심한 듯이 뚝 떨어져내릴 무렵/ 떨어져내린 나뭇잎이 제 그늘과 바짝 붙어서/ 바쁘게 오가는 발길들에 바삭바삭 부서져내리고 있을 무렵/ 자리를 뜬 노파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고/ 이듬해 밑동에선 어린 가지 하나만이 쑥 올라왔다,/ 허리 구부정한 나무가 짚은 지팡이였다//

새 / 손택수
점 하나를 공중에 찍어놓았다 점자라도 박듯 꾸욱/ 눌러놓았다// 날갯짓도 없이/ 한동안/ 꿈적도 않는/ 새// 비가 몰려오는가 머언 북쪽하늘에서 진눈개비/ 소식이라도 있는가// 깃털을 흔들고 가는 바람을 읽고 구름을 읽는/ 골똘한 저,/ 한 점// 속으로 온 하늘이 빨려들어가고 있다//

범일동 블루스 / 손택수
1/ 방문을 담벼락으로 삼고 산다. 애 패는 소리나 코고는 소리, 지지고 볶는 싸움질 소리가 기묘한 실내악을 이루며 새어나오기도 한다. 헝겊 하나로 간신히 중요한 데만 대충 가리고 있는 사람 같다. 샷시문과 샷시문을 잇대어 난 골목길. 하청의 하청을 받은 가내수공업과 들여놓지 못한 세간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간밤의 이불들이 걸어나와 이를 잡듯 눅눅한 습기를 톡, 톡, 터뜨리고 있다. 지난밤의 한숨과 근심까지를 끄집어내 까실까실하게 말려주고 있다.//
2/ 간혹 구질구질한 방안을 정원으로 알고 꽃이 피면 골목길에 퍼뜩 내다놓을 줄도 안다. 삶이 막다른 골목길 아닌 적이 어디 있었던가, 자랑삼아 화분을 내다놓고 이웃사촌한 햇살과 바람을 불러오기도 한다. 입심 좋은 그 햇살과 바람, 집집마다 소문을 퍼뜨리며 돌아다니느라 시끌벅적한 꽃향, 꽃향이 내는 골목길.//
3/ 코가 깨지고 뒤축이 닳을 대로 닳아서 돌아오는 신발들, 비좁은 집에 들지 못하고 밖에서 노독을 푼다. 그 신발만 세어봐도 어느 집에 누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지, 어느 집에 자고가는 손님이 들었고, 그 집 아들은 또 어디에서 쑥스런 잠을 청하고 있는지 빤히 알아맞힐 수 있다. 비라도 내리면 자다가도 신발을 들이느라 샷시문 여는 소리가 줄줄이 이어진다. 자다 깬 집들은 낮은 처마 아래 빗발을 치고 숨소리를 낮춘 채 부시럭부시럭거린다. 그 은근한 소리, 빗소리가 눈치껏 가려주고 간다.//
4/ 마당 한 평 현관 하나 없이 맨몸으로 길을 만든 집들. 그 집들 부끄러울까봐 유난히 좁다란 골목길. 방문을 담벼락으로 삼았으니, 여기서 벽은 누구나 쉽게 열고 닫을 수가 있다 할까, 나는 감히 말할 수가 없다. 다만 한바탕 울고 난 뒤엔 다시 힘이 솟듯, 상다리 성치 않은 밥상 위엔 뜨건 된장국이 오를 것이고, 새새끼들처럼 종알대는 아이들의 노래소리 또한 끊임없이 장단을 맞춰 흘러나올 것이다. 젖꼭지처럼 붉게 튀어나온 너의 집 초인종 벨을 누르러 가는 나의 시간도 변함없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질 것이다.//

방어진 해녀 / 손택수
방어진 몽돌밭에 앉아/ 술안주로 멍게를 청했더니/ 파도가 어루만진 몽돌처럼 둥실둥실한 아낙 하나/ 바다를 향해 손나팔을 분다/ ( 멍기 있나, 멍기 - ) / 한여름 원두막에서 참외밭을 향해 소리라도 치듯/ 갯내음 물씬한 사투리가/ 휘둥그래진 시선을 끌고 물능선을 넘어가는데/ 저렇게 소리만 치면 멍게가 스스로 알아듣고/ 찾아오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하마터면 실성한 여잔가 했더니/ 파도소리 그저 심드렁/ 갈매기 울음도 다만 무덤덤/ 그 사투리 저 혼자 자맥질 하다 잠잠해진 바다/ 속에서 무엇인가 불쑥 솟구쳐올랐다/ 하아, 하아 - 파도를 끌고/ 손 흔들며 숨차게 헤엄쳐 나오는 해녀,/ 내 놀란 눈엔 글쎄 물 속에서 방금 나온 그 해녀/ 실팍한 엉덩이며 볼록한 가슴이 갓 따올린/ 멍게로 보이더니/ 아니 멍기로만 보이더니/ 한잔 술에 미친 척 나도 문득 즉석에서/ 멍기 있나, 멍기 - 수평선 너머를 향해/ 가슴에 멍이 든 이름 하나 소리쳐 불러보고 싶었다//

꽃그늘 / 손택수
꽃그늘 아래 구덩이가 생겼다. 구덩이 옆에 피어난 벚꽃잎은 고개를 수그린 채 하나같이 땅을 쳐다보고 있다.// 그늘 속에서 산역꾼은 털이 숭숭한 돼지비계에 막걸리를 마신다. 사내의 아내는 오늘 출산을 한다. 이 땅을 다 파야 미역줄기 고깃근이라도 사갈 수가 있다.// 꽃이 어지럽게 술잔 속으로,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어 온다. 꽃을 받아먹으며 파르르 떠는 술잔, 잘게 저민 살점 같은 꽃을 받아먹으며 허기를 감추고// 떡 벌린 아가리를 좀처럼 다물 줄 모르는 구덩이, 깊숙이 다시 삽을 꽂는다. 헛구역질처럼 한 삽 두 삽 퍼올릴수록 시큰하게 허리를 꺾는, 우두둑 무릎 관절을 꺾는// 저 육중한 꽃그늘, 꽃이 거느린 구덩이, 점점이 흩날리는 구멍 속으로 어칠비칠 불콰한 해가 떨어진다.//

꽃단추 / 손택수
내가 반하는 것들은 대개 단추가 많다/ 꼭꼭 채운 단추는 풀어보고 싶어지고/ 과하게 풀어진 단추는 다시/ 얌전하게 채워주고 싶어진다/ 참을성이 부족해서/ 난폭하게 질주하는 지퍼는 질색/ 감질이 나면 좀 어떤가/ 단추를 풀고 채우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안다는 건/ 낮과 밤 사이에,/ 해와 달을/ 금단추 은단추처럼 달아줄 줄 안다는 것// 무덤가에 찬바람 든다고, 꽃이 핀다/ 용케 제 구멍 위로 쑤욱 고개를 내민 민들레/ 지상과 지하, 틈이 벌어지지 않게/ 흔들리는 실뿌리 야무지게 채워놓았다//

감꽃 / 손택수
1// 감꽃 핀다, 어디선가 소식 없는 사람들 편지라도 한 장/ 날아들 것 같다/ 사람도 집도 땟국물이 흐르는 기차길 옆 오막살이/ 기우고 기웠지만 어딘지 정이 헤퍼보이는 철망을 달고/ 옥수수 한줌 쌀 한줌 가난을 폭죽처럼 터뜨리던/ 뻥튀기 할아버지, 잠들어 계신 언덕일까/ 아지랑이 아지랑이 마술의 주문이 오르고/ 햇빛에 달궈진 선로 끝 아득히 멀리서부터 기적이 울리면/ 뻥 튀긴 희망에 주린 배를 달래본 적 있니 설사를 하며/ 속아본 적 있니/ 속을 줄 알면서도 튀밥이 튀면 허천나게 달려든 적이 있어!/ 꽃이 튄다, 저만치 떨어져서 귀를 막는다/ 너를 묻은 땅속 꽃씨 한줌도 성급하게 피어날까/ 튀밥처럼 뻥 하고 튀어오를까, 귀청이 다 떨어지도록/ 치밀어오르는 그리움, 아그데 아그데 감나무 굶주린/ 꽃이 핀다//
2// 감나무 아래 들어 잠에 들고 싶다/ 떨어진 풋감처럼 떫디떫은 잠이라도/ 헤 입 벌린 채 빠져들고 싶다/ 나무 둥치에 탯줄처럼 줄을 묶어놓고/ 밭일 간 어머니를 기다리는 동안/ 아가 울지 마라, 자꾸 울면 쐐기가 떨어진다/ 이파리로 다독다독, 자장가를 불러주던/ 유모(乳母)의 품속으로 들어가 잠들고 싶다/ 헤 벌린 입에 젖을 물려주기 위해/ 흘러내리는 젖을 입속에 넣어주기 위해/ 아래로 축 처져 있던 감나무 가지 아래//

감자꽃을 따다 / 손택수
주말농장 밭고랑에 서 있던 형이 감자꽃을 딴다/ 철문 형, 꽃 이쁜데 왜 따우/ 내 묻는 말에/ 이놈아 사람이나 감자나 너무 오래 꽃을 피우면/ 알이 튼실하지 않은 법이여/ 꽃에 신경 쓰느라 감자알이 굵어지지 않는단 말이다/ 평소에 사형으로 모시는 형의 말씀을 따라 나도 감자꽃을 딴다/ 꽃 핀 마음 뚜욱 뚝 끊어낸다/ 꽃시절 한창일 나이에 일찍 어미가 된 내 어머니도/ 눈 질끈 감고 아까운 꽃 다 꺾어냈으리라/ 조카애가 생기고 나선 누이도/ 화장품값 옷값을 말없이 줄여갔으리라/ 토실토실 잘 익은 딸애를 등에 없고/ 형이 감자꽃을 딴다/ 딸이 생기고 나선 그 좋은 담배도 끊고/ 술도 잘 마시질 않는다는 독종/ 꽃 핀 마음 뚜욱 뚝 분지르며/ 한 소쿠리 알감자 품에 안을 날들을 기다린다//

모기 선(禪)에 빠지다 / 손택수
죽비(竹扉)// 열대야다 바람 한 점 들어올 창문도 없이 오후 내내 달궈놓은 옥탑방 허리를 잔뜩 구부러트리는 낮은 천장 아래 속옷이 후줄근하게 젖어 졸다 찰싹, 정신을 차린다 축축 늘어져가는 정신에 얼음송곳처럼 따끔 침을 놓고 간 모기//
불립문자(不立文字)// 지난 밤 읽다 만 책장을 펼쳐보니 모기 한 마리 납작하게 눌려 죽어있다 이 뭣꼬, 후 불어냈지만 책장에 착 달라붙어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체액을 터트려서 활자와 활자 사이에 박혀 있는 모기, 너도 문자에 눈이 멀었더냐 책장이 덮이는 줄도 모르고 용맹정진 문자에 눈 먼 자의 최후를 그렇게 몸소 보여주는 것이냐 책속의 활자들이 이 뭣꼬, 모기 눈을 뜨고 앵앵거린다.//
향(香)// 꼬리부터 머리까지 무엇이 되고 싶으냐 짙푸른 독을 품고 치잉칭 또아리튼 몸을 토막토막 아침이면 떨어져 누운 모기와 함께 쓰레받기 속에 재가 되어 쓸려나가는 배암의 허물//
은산철벽(銀山鐵壁)// 찬바람이 불면서 기력이 다했는가 날쌘 몸놀림이 슬로우모션으로 잔바람 한 줄에도 휘청거린다 싶더니, 조금 성가시다 싶으면 그 울음소리 엄지와 집게만을 가지고도 능히 꺼트릴 수 있다 싶더니, 갈수록 희미해져가는 울음소리, 사라진 그쯤에서 잊고 살던 시계 초침 소리가 들려온다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 화장실 물 내려가는 소리, 간간이 앓아 누우신 아버지의 밭은기침 소리도 계단을 타고 올라온다 저 많은 소리들을 혼자서 감당하고 있었다니//

폭포 / 손택수
벚꽃이 진다 피어나자마자/ 태어난 세상이 절벽이라는 것을/ 단번에 깨달아버린 자들, 가지마다 층층/ 눈 질끈 감고 뛰어내린다/ 안에서 바깥으로 화르르/ 자신을 무너뜨리는 나무,/ 자신을 무너뜨린 뒤에야/ 절벽을 하얗게 쓰다듬으며 떨어져내리는/ 저 소리 없는 폭포/ 벚꽃나무 아래 들어/ 귀가 얼얼하도록 매를 맞는다/ 폭포수 아래 득음을 꿈꾸던 옛 가객처럼/ 머리를 짜개버릴 듯 쏟아져내리는/ 꽃의 낙차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서//

술통 / 손택수
부숴버린 술통조각을 무쇠난로 통속에 던져준다/ 안주일절 벽에 금이 가기 시작한 청산옥/ 과묵했던 마개를 딸 때면 팡 하고 들려오던 탄성과/ 찰, 찰, 찰, 거침없이 흘러나와 감겨들던/ 순금의 혀는 다 어디로 갔는지/ 한평생 술이 익어가던 배는 그를 끌어안고 산/ 사내들의 위장처럼 속이 헐고 구멍이 났다/ 복수라도 찬 듯 발효되지 못한 시간의 쉰 냄새만을 풍기고 있다/ 노을빛으로 물들어 딱딱하게 굳어버린 사내들의 가슴과/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면서/ 그가 가진 향기와 빛깔을 남김없이 내어주며 늙어가던 술통/ 난로 속에서 남은 힘을 다해 타오른다/ 뼛속까지 스며 있는 알코올 기운이 아직 남아 있다는 듯/ 불콰하게 되살아나는 불, 술통조각을 던져줄 때마다/ 취해서 휘청휘청 일렁이는 불, 빛이 늙고 지친/ 여자의 맨얼굴을 발그스름하게 물들여주고 있는 한때//

옻닭 / 손택수
1// 그늘만 스쳐도 살갗에 소르르 소름이 돋는다/ 해마다 한번씩 자신을 스쳐간 폭염과 홍수/ 팔을 뚝뚝 부러뜨리던 폭설의 기억을 비벼 꼬아/ 제 속을 치잉칭 결박하는 나무/ 속을 쥐여짜 잎잎이 푸르디푸른 신음을 뱉어낸다/ 허나 독기라면 닭도 지지 않는다/ 한평생을 옥살이로 보내온 그가 아닌가/ 톱날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벼슬과 부리,/ 쇠창살 사이로 모가지만 간신히 빼내어/ 댕강 참수를 당하는 그 순간까지/ 제것이 아닌 몸뚱이를 키우며 살아온 그가 아닌가/ 지독에 이른 동물과 식물이/ 한몸이 되기 위해 부글부글 끓고 있다//
2// 독기라면 나도 지지 않는다/ 나를 무심코 집어삼킨 세상에/ 우툴두툴한 옻독을 옮기리라/ 뚝배기 그릇 속에 코를 쥐어박고/ 아버지와 함께 옻닭을 먹는다/ 두 편에 오만원 어쩌다 받은 원고료로/ 삼십년 지게꾼살이 주식으로 삼아온/ 술담배에 속을 상한 당신/ 술담배보단 서른이 넘도록 빈둥대는 아들놈 때문에 더/ 얼굴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당신/ 알코올과 니코틴의 독성, 갈수록 짐만 되는 아들놈의/ 독성/ 옻이 올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목구멍까지 차오른 가려움을 꾸욱 눌러 참는다/ 독을 우려낸 진국 한 그릇을 뚝닥 비워 삼킨다//

지렁이 / 손택수
잠깐 스쳐가는 소낙비인 줄 알았다면/ 이렇게 아스팔트가 녹아나는 도로변까지는/ 나오지 않았을 것 아닌가/ 너는 어쩔 수 없는 미물이다, 생각하는 순간/ 지렁이 한 마리 밟지도 않았는데 꿈틀한다/ 언젠가 불에 데인 흉터처럼, 열이 많은/ 내 몸을 아스팔트 바닥 삼아 기고 있는 흉터처럼/ 속살까지 뜨겁게 달아오른 무리들,/ 제 안의 남은 수분 속에/ 한여름의 열기를 다 빨아들일 듯/ 끝없이 말라비틀어져가는 무리들/ 한방에선 해열제로 쓴다고 했던가/ 열 먹고 죽어 열을 푸는 약이 된다고 했던가/ 이열치열 지극히 뜨거워져서 아픈 몸을 서늘하게 식히는 것/ 어디 그것이 한방에서만의 일이겠는가마는/ 마디마디 몸을 지지며 염천을 향해 기어간다/ 회초리자국 같은 붉은 화상자국이 꿈틀꿈틀/ 내 앞의 길을 쓰라리게 휘감고 있다//

 

집 / 손택수
알껍질은 뜯어먹는다 방금 나온 애벌레가 껍질을 깨고 나오자마자 놀라운 식욕으로, 그동안 나를 품어주었으니 이제는 내가 너를 품어주마, 뛰쳐나온 집을 하나도 빠짐없이 오물오물 뜯어먹는다// 애벌레의 몸속으로 통째로 들어간 집, 애벌레의 몸속으로 스며들어 곰실곰실 기어다니다가 더듬이를 쭉 내밀어보고, 양 날개를 활짝 펴보는 집, 알집 속에 수많은 새끼집을 짓고 눈을 감으리라 그렇게 집이 나의 양식이 되고, 나는 집의 처소가 되어 살다 가리라// 무얼 잘못 먹었는지 생똥을 싸고 자꾸 헛구역질을 한다 녹화해둔 「환경 스페셜」비디오 테이프도 다 돌라가고 차디찬 꽃무늬 장판바닥에 누워 나비잠을 청해보는 하루, 어쩐지 벗어논 허물처럼 집이 헐렁하다//

감 항아리 / 손택수
풋감이 떨어지면 소금물에 담가 익혀 먹곤 했다/ 아들 둘 먼저 보낸 뒤 감나무 잎 스치는 뒤란에 홀로/ 앉아 있는 외할머니/ 떫디떫은 풋내 단물 들어라 소금물 항아리마다 감을 담가놓고 있다/ 그 항아리 속엔 구름도 들고 산도 들어온다/ 뒤란에 내린 그늘도 얼마쯤은 짜디짜져서/ 간이 배는데/ 간수가 밴 낙과로 빈속을 달래던 시절이 있었다/ 뱃속 아기를 잃어버린 외손주를 위해/ 툭,/ 땅을 찧고 뒹구는 감을 줍는 당신// 마당귀에 주인을 잃어버린 발자국 하나 아직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는,/ 짓무른 두 눈 속에서 봄날이 익는다//

외딴 산 등불 하나 / 손택수
저 깊은 산속에 누가 혼자 들었나/ 밤이면 어김없이 불이 켜진다/ 불을 켜고 잠들지 못하는 나를/ 빤히 쳐다 본다// 누군가의 불빛 때문에 눈을 뜨고/ 누군가의 불빛 때문에 외눈으로/ 하염없이 글썽이는 산.// 그 옆에 가서 가만히 등불 하나를 내걸고/ 감고 있는 산의 한쪽 눈을 마저 떠주고 싶다//

빛의 감옥 / 손택수
가로등 어디에 틈이 있어/ 날벌레들이 그 속을 파고드는 모양이다/ 입구를 잃어버린 날벌레 한 마리가/ 램프를 감싼 유리를 두드리고 있다/ 유리벽에 머리를 짓찧고 있다/ 저 환한 무덤 속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얼마나 파닥거리며 왔던가/ 무덤의 중심으로부터 밀려나지 않기 위하여/ 발버둥을 쳤던가/ 비명으로 꽉 찬 유리 속에 간신히/ 둥지를 튼다/ 쿵, 이삿짐을 풀고 내다보는 거리/ 가로등이 거리를 밝히는 대신 감추고 있는,/ 유리알 속에 아침마다 눈곱이 낀다//

물푸레나무 코뚜레 / 손택수
가지 하나가 휘어져서 땅거죽을 찌르고 들어와 뿌리를 내렸다/ 예사로만 보아오던 조무래기 새떼며/ 눈비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꽃을 탐하느라 고집스레 가지를 끌어내리던/ 어스럭송아지하며// 원을 그리며 흐르는 차디찬 물소리, 환한 달이 떴다/ 소를 잡고 난 뒤에 집안에 코뚜레를 걸어두면/ 복이 들어온다 했던가 한평생/ 소를 몰던 할아버진 땅속으로 돌아가고// 이랴, 이랴 땅의 콧김을 받아 반들반들 윤이 나는 나뭇가지/ 휘묻이한 몸을 코뚜레 삼고, 한쪽 끝을/ 놓칠까봐 팽팽하게 조바심하고 있다//

은행나무 사리알 / 손택수
아랫배에 끙 힘을 주고 밀어낸 열매들이 온 천지를 잘 익은 된장 냄새 황금빛으로 물들여준다 동제가 있을 때면 한 상 걸게 차려놓고 밥을 먹던 은행나무 고목// 사리알이 별것이간디, 언젠가 수덕사 성보박물관에서 본 滿空 스님 바리때도 저 은행나무 재목이었다 포개진 그릇마다 은행나무 가지 사이에나 들어와 있을 법한 만공이 가득 차 있었다// 스님도 한 그루 은행나무로 살다 간 것이 아닐까 아픔 몸 속에 들어와 입적한 목숨들을 품고 잘 익은 똥내음, 사리알 맺는 일에 한 평생 보내고 간 것이 아닐까// 은행나무 더부룩한 아랫배가 다 개운하다는 듯 가볍게 몸을 흔든다 앗따 뭘 퍼먹었길래 이렇게 독한고, 똥 푸러 온 인부처럼 코를 쥐고 마을 사람들이 푸지게 퍼질러 놓은 알들을 줍는다//

화살나무 / 손택수
언뜻 내민 촉들은 바깥을 향해/ 기세 좋게 뻗어가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제 살을 관통하여, 자신을 명중시키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모여들고 있는 가지들// 자신의 몸 속에 과녁을 갖고 산다/ 살아갈수록 중심으로부터 점덤 더/ 멀어지는 동심원, 나이테를 품고 산다/ 가장 먼 목표물은 언제나 내 안에 있었으니// 어디로도 날아가지 못하는, 시윗줄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산길 위에서//

탱자나무 울타리 속의 설법 / 손택수
가시 끝에 탱글탱글 빗방울이 열렸다/ 나무는 빗방울 속에 들어가/ 물장구치며 노는 햇살과 구름,/ 터질 것처럼 부풀어오른 새울음 소리까지를/ 고동 속처럼 알뜰히 빼어 먹는다// 가시 끝에 맺힌 빗방울들,/ 가슴 깊이 가시를 물고 떨고 있다// 살속을 파고든 비수를 품고/ 둥그래진다는 것, 그건/ 욱신거린는 상처를 머금고 사는 일이다/ 입술을 윽 깨물고 상처 속으로 들어가 한몸이 되는/ 일이다// 열매들은 모두 빗방울을 닮아 둥그래질 것이다/ 빗방울의 아픔을 궁글려 탱탱한 탱자알이 될 것이다// 바람이 불자, 내 어둔 이마 위로/ 빗방울 하나가 고동껍질처럼 떼구루루 떨어져내렸다//

연꽃 에밀레 / 손택수
연꽃잎 위에 비가 내려 친다/ 에밀레종 종신에 새겨진 연꽃을/ 당목이 치듯, 가라앉은/ 물결을 고랑고랑 일으켜 세우며 간다/ 수심을 헤아릴 길 없는, 끔찍하게 고요한/ 저 연못도 일찍이 애 하나를 삼켜버렸다/ 애 하나를 삼키고선 단 한 번도/ 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다/ 어린 내가 아침마다 밥 얻으러 오던/ 미친 여자에게 던지던 돌멩이처럼/ 비가 내려칠 때마다 연꽃/ 꾹 참은 아픔이 수면 위로 퍼져나간다/ 당목이 종신에 닿은 순간 종도/ 저처럼 연하게 풀어져 떨고 있었으리라/ 에밀레 에밀레 산발한 바람이/ 수면에 닿았다 튀어오른/ 빗줄기를 뒤로 힘껏 잡아당겼다//

어부림 / 손택수
딴은 꽃가루 날리고 꽃봉오리 터지는 날/ 물고기들이라고 뭍으로/ 꽃놀이 오지 말란 법 없겠지/ 남해는 나무그늘로 물고기를 낚는다/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짙은 그늘 물 위에 드리우고/ 그물을 끌어당기듯,/ 바다로 휜 우듬지에 잔뜩 힘을 주면/ 푸조나무 이팝나무 꽃이 때맞춰 떨어져내린다/ 꽃냄새에 취한 물고기들 영영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말채나무 박쥐나무 꽃도 덩달아 떨어져내린다/ 木그늘로 너희들 목에 내린 그늘이라도 풀어라/ 남해 삼동 촘촘한 그늘 가득 퍼득대는 물고기를/ 잎잎이 어깨에 메고 우뚝 선 어부림/ 꽃향기는 수평선 너머로도 가고 심해로도 가서/ 앆싯바늘처럼 단숨에 아가미를 꿰어뚫는다/ 꽃가루 날리고 꽃봉오리 터지고 청미래 댕댕이 철썩철썩/ 파도소리를 흉내내며/ 뒤척이는 숲,/ 날이 저물면 남해는 나무들도 집어등을 켜든다.//

외할머니의 숟가락 / 손택수
외갓집은 찾아오는 이는 누구나/ 숟가락부터 우선 쥐여주고 본다/ 집에 사람이 있을 때도 그렇지만/ 사람이 없을 때도, 집을 찾아온 이는 누구나/ 밥부터 먼저 먹이고 봐야 한다는 게/ 고집 센 외할머니의 신조다/ 외할머니는 그래서 대문을 잠글 때 아직도 숟가락을 쓰는가/ 자물쇠 대신 숟가락을 꽂고 마실을 가는가/ 들은 바는 없지만, 그 지엄하신 신조대로라면/ 변변찮은 살림살이에도 집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한 그릇의 따순 공기밥이어야 한다/ 그것도 꾹꾹 눌러 퍼담은 고봉밥이어야 한다/ 빈털터리가 되어 십년 만에 찾은 외갓집/ 상보처럼 덮여 있는 양철대문 앞에 서니/ 시장기부터 먼저 몰려온다 나도/ 먼길 오시느라 얼마나 출출하겠는가/ 마실간 주인 대신 집이/ 쥐여주는 숟가락을 들고 문을 딴다//

홍어 / 손택수
어느날인가는 시큼한 홍어가 들어왔다/ 마을에 잔치가 있던 날이었다/ 김희수씨네 마당 한가운데선/ 김나는 돼지가 설겅설겅 썰어지고/ 국솥이 자꾸 들썩거렸다/ 파란 도장이 찍히지 않은 걸로다가/ 나는 고기가 한점 먹고 싶고/ 김치 한점 척 걸쳐서 오물거려보고 싶은데/ 웬일로 어머니 눈엔 시큼한 홍어만 보이는 것이었다/ 홍어를 먹으면 아이의 살갗이 홍어처럼 붉어지느니라/ 지엄하신 할머니 몰래 삼킨 홍어/ 불그죽죽한 등을 타고 나는 무자맥질이라도 쳤던지/ 영산강 끝 바닷물이 밀려와서'흑산도 등대까지 실어다줄 것만 같았다/ 죄스런 마음에 몇번이고 망설이다, 어머니/ 채 소화도 시키지 못한 것을 토해내고 말았다는데/ 나는 문득문득 그 홍어란 놈이 생각나는 것이다/ 세상에 나서 처음 먹는 음식인데/ 언젠가 맛본 기억이 나고/ 무슨 곡절인지 울컥 서러움이 치솟으면/ 어머니 뱃속에 있던 열달이 생각나곤 하는 것이다.//

추석달 / 손택수
스무살 무렵 나 안마시술소에서 일할 때, 현관보이로 어서옵쇼, 손님들 구두닦이로 밥먹고 살 때// 맹인 안마사들도 아가씨들도 다 비번을 내서 고향에 가고, 그날은 나와 새로 온 김양 누나만 가게를 지키고 있었는데// 이런 날도 손님이 있겠어 누나 간판불 끄고 탕수육이나 시켜 먹자, 그렇게 재차 졸라대고만 있었는데// 그 말이 무슨 화근이 되었던가 그날따라 웬 손님이 그렇게나 많았던지, 상한 구두코에 광을 내는 동안 퉤, 퉤 신세한탄을 하며 구두를 닦는 동안// 누나는 술 취한 사내들을 혼자서 다 받아내었습니다 전표에 찍힌 스물 셋 어디로도 귀향하지 못한 철새들을 하룻밤에 혼자서 다 받아주었습니다// 날이 샜을 무렵엔 비틀비틀 분화장 범벅이 된 얼굴로 내 어깨에 기대어 흐느껴 울던 추석달//

소가죽북 / 손택수
소는 죽어서도 매를 맞는다/ 살아서 맞던 채찍 대신 북채를 맞는다/ 살가죽만 남아 북이 된 소의/ 울음소리, 맞으면 맞을수록 신명을 더한다// 노름꾼 아버지의 발길질 아래/ 피할 생각도 없이 주저앉아 울던/ 어머니가 그랬다/ 병든 사내를 버리지 못하고/ 버드나무처럼 쥐어뜯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울던 울음에도/ 저런 청승맞은 가락이 실려있었다// 채식주의자의 질기디질긴 습성대로/ 죽어서도 여물여물/ 살가죽에 와닿는 아픔을 되새기며/ 둥 둥 둥 둥 지친 북채를 끌어당긴다/ 끌어 당겨 연신 제 몸을 친다//

흰둥이 생각 / 손택수
손을 내밀면 연하고 보드라운 혀로 손등이며 볼을 쓰윽, 쓱 핥아주며 간지럼을 태우던 흰둥이. 보신탕감으로 내다 팔아야겠다고, 어머니가 앓아누우신 아버지의 약봉지를 세던 밤. 나는 아무도 몰래 대문을 열고 나가 흰둥이의 목에 걸린 쇠줄을 풀어주고 말았다. 어서 도망가라, 멀리멀리, 자꾸 뒤돌아보는 녀석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며 아버지의 약값 때문에 밤새 가슴이 무거웠다. 다음날 아침 멀리 달아났으리라 믿었던 흰둥이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와서 그날따라 푸짐하게 나온 밥그릇을 바닥까지 다디달게 핥고 있는 걸 보았을 때, 어린 나는 그예 꾹 참고 있던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는데// 흰둥이는 그런 나를 다만 젖은 눈빛으로 핥아주는 것이었다. 개장수의 오토바이에 끌려가면서 쓰윽, 쓱 혀보다 더 축축히 젖은 눈빛으로 핥아주고만 있는 것이었다.//

가슴에 묻은 김치 국물 / 손택수
점심으로 라면을 먹다/ 모처럼 만에 입은/ 흰 와이셔츠/ 가슴팍에/ 김치 국물이 묻었다// 난처하게 그걸 잠시/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평소에 소원하던 사람이/ 꾸벅, 인사를 하고 간다/ 김치 국물을 보느라/ 숙인 고개를/ 인사로 알았던 모양// 살다보면 김치국물이 다/ 가슴을 들여다보게 하는구나/ 오만하게 곧추선 머리를/ 푹 숙이게 하는구나// 사람이 좀 허술해 보이면 어떠냐/ 가끔은 민망한 김치 국물 한 두 방울 쯤/ 가슴에 슬쩍 묻혀나 볼일이다//

버려진 집 속에 거울조각이 있다 / 손택수
집을 버리면서, 거울을/ 두고 오는 건 차마 못할 짓이다// 버려진 제 모습을 쳐다볼 수 없어/ 먼지를 풀썩이며 조용히 미쳐가는/ 집의 거울을 보라// 집은 제 얼굴에 화장을 하는 대신/ 거울에 화장을 한다/ 거울에 파우더 분가루 같은/ 먼지를 덕지덕지 처발라/ 망가져가는 제 얼굴을 흐릿하게 뭉개어본다// 그렇게 남은 날을 견뎌야 한다는 건,/ 아무래도 지나친 형벌이다// 폐가는 금이 가거나, 깨어진/ 거울조각을 품고 있다//

소금쟁이의 연애 / 손택수
바람 한 점 없는데 못물 위에 파문이 번지는 건/ 소금쟁이 때문이다 소금쟁이의 순전한 연애 때문이다/ 가만 보면 암컷인지 수컷인지 바람기 농한 소금쟁이 한 마리가/ 멀찌감치 떨어진 짝에게 무슨 신호를 보낸다/ 제 미미한 몸을 상하 좌우로 흔들어 고요한 수면을 깨우더니/ 보일 듯 말 듯 한 파문이 스르르 번져가서/ 좀체로 곁을 두려 하지 않는 짝의 발바닥을 간지른다/ 간지름을 참지 못하고 푸르르 떠는 건너편의 소금쟁이/ 가장 미세한 떨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예민하게 가늘어진 다리, 파문에 감전된/ 다리의 떨림도 답신처럼 넌지시, 보기에 따라서는 수줍게/ 잔잔한 물결을 이루며 연못을 건너간다// 소금쟁이 한 쌍의 은근한 수작 때문에/ 잠시도 잠들지 못하고 술렁이는 연못.//

시골버스 / 손택수
아직도 어느 외진 산골에선/ 사람이 내리고 싶은 자리가 곧 정류장이다/ 기사 양반 소피나 좀 보고 가세/ 더러는 장바구니를 두고 내린 할머니가/ 손주놈 같은 기사의 눈치를 살피고/ 억새숲으로 들어갔다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싱글벙글쑈 김혜영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옆구리를 슬쩍슬쩍 간질러대는 시골버스/ 멈춘 자리가 곧 휴게소다/ 그러나, 한나절 내내 기다리던 버스가/ 그냥 지나쳐 간다 하더라도/ 먼지 폴폴 날리며 투덜투덜 한참을 지나쳤다/ 다시 후진해 온다 하더라도/ 정류소 팻말도 없이 길가에 우두커니 서서/ 팔을 들어올린 나여, 너무 불평을 하진 말자/ 가지를 번쩍 들어올린 포플러나무와 내가/ 어쩌면 버스 기사의 노곤한 눈에는 잠시나마/ 한 풍경으로 흔들리고 있었을 것이니//

지장(指章) / 손택수
도서관 책을 읽다 보니 누르스름한 지문이 보인다/ 체액과 손에 묻은 먼지를 인주밥 삼아 찍어놓은 지장// 아들놈이 하는 짓을 늘 못마땅해하는/ 아버지의 지문을/ 언젠가 내 글이 실린 잡지에서 본 적이 있다// 어린날 개학 전날 밤까지 보여드리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다 펼쳐본 통지표,/ 시원찮은 통지표에 어느새 찍혀 있던/ 당신의 도장 앞에서처럼// 나는 그때 얼마나 부끄러웠던 것인지, 지문이/ 연못물처럼 찰랑이며 번져가는 책장을 들여다본다// 희미해져가는 파문을 지켜내느라고, 책장 속의 느낌표 하나가/ 땀방울처럼 뚝 떨어졌다/ 튀어오른 것 같다!//

방심放心 / 손택수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뒷문을 열어놓고 있다가, 앞뒷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 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 지나가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물새 발자국 따라가다 / 손택수
모래밭 위에 무수한 화살표들,/ 앞으로 걸어간 것 같은데/ 끝없이 뒤쪽을 향하여 있다// 저물어가는 해와 함께 앞으로/ 앞으로 드센 바람 속을/ 뒷걸음질치며 나아가는 힘, 저 힘으로// 새들은 날개를 펴는가/ 제 몸의 시윗줄을 끌어당겨/ 가뜬히 지상으로 떠오르는가// 따라가던 물새 발자국/ 끊어진 곳 쯤에서 우둑하니 파도에 잠긴다//

낡은 자전거가 있는 바다 / 손택수
외갓집 소금창고 구석진 자리에 낡은 자전거 한대가 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녹이 슬었지만, 수리하면 쓸 만하겠는걸. 아마도 나는 길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쌩쌩 미끄러져 다녔을 은륜의 눈부신 전성기를 생각했는지 모른다. 논둑길 밭둑길로 새참을 나르고 포플러 푸른 방둑길 따라 바다에 이르던 시절, 그는 아마도 내 이모들의 풋풋한 젊은 날을 빠짐없이 지켜보았으리라. 읍내 영화관 앞에서 빵집 앞에서 참을성 있게 주인을 기다리다, 아카시아 향기 어지러운 방둑길로 푸르릉 푸르릉 바큇살마다 파도를 끼고 굴러다니기도 했을, 어쩌면 그는 열아홉 꽃된 처녀아이를 태우고 두근두근 내 아버지가 될 청년을 만나러 가기도 했으리라. 바다가 보이는 풀밭에 누워 클레멘타인 클레멘타인, 썰물져가는 하모니카 소리에 하염없이 젖어들기도 하였으리라. 그때 풀밭과 바다는 잘 구분이 되질 않아, 멀리서 보면 그는 마치 바다에 누워 즐겨 꿈에 젖는 행복한 몽상가로 보이지 않았을까. 첫사랑처럼 한 번 익히고 나면 여간해선 잘 잊혀지질 않는 자전거, 손잡이 위의 거울 먼지를 닦아본다. 거울은 오래 전부터 그렇게 나를 품고 있었다는 눈치다. 턱없이 높은 앉을깨 위에서 페달이 발에 잘 닿지 않는다고 툭하면 투정을 부리던 철부지 아이를, 맥빠진 앞바퀴 뒷바퀴 타이어에 바람 빵빵 밤 늦도록 소금자루 같은 달을 태우고 비틀대던 방둑길을.//

곡비 / 손택수
눈이 많이 내린 한겨울이면 새들에게 모이를 줘서 아들 내외에게 자주 잔소리를 듣던 함평쌀집 할머니// 세상 버리던 날 새들은 오지 않았다 밥 달라고, 밥 달라고, 아침 일찍부터 찾아와 양철문을 바지런히 쪼아대던 새들// 등쌀에 이놈의 장사도 집어치워야겠다, 그 아드님 허구헌 날 술만 푸고 있더니// 쌀집 앞 평상마루에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들려준다 장지의 소나무 위에서 울던 새울음 소리가 어째 영 낯설지만은 않더라고// 울 어매가 주는 마지막 모이를 받으러 왔나 싶어 고수레 고수레 한상 걸게 차려주었더니, 구성진 곡비 소리 해종일 끊이질 않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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