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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국과 김달봉 / 일성록

부흐고비 2021. 12. 15. 09:19

  번 역 문  

예산현(禮山縣)의 출신(出身) 현진국(玄鎭國)은 집안에서는 효도하고 우애하며 어려운 사람을 보면 잘 도와주었습니다. 작년 8월에 큰비가 내렸을 때 입암면(立巖面)의 들판이 온통 물에 잠겨 근처에 사는 백성들이 장차 물에 빠져 모두 죽을 염려가 있었는데 현진국이 사람들을 모으고 배를 빌려서 1000여 명을 구해내었습니다. 그러고는 물이 빠지기 전까지 5, 6일 동안 음식을 마련하여 먹이고, 물이 빠진 뒤에는 빚을 얻어 곡식을 구해다가 집집마다 나누어 주어 각기 편안히 살게 해 주었습니다. 전후로 들어간 비용이 거의 수천 금이 넘었습니다. 또 춘궁기에는 밥과 죽을 공급하고 돈과 쌀을 계속 나눠주어 원근에서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는 평소 이름난 부자가 아닌데도 이렇게 의로운 마음에서 사람의 목숨을 살려내었습니다. 이런 일이 혹시라도 묻혀서 드러나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억울하게 생각할 듯합니다.

  원 문  

禮山縣出身玄鎭國, 居家孝友, 急人困隘. 昨年八月大水, 立巖面一坪懷襄, 近處居民, 將有淪墊盡劉之患, 則鎭國募人賃船, 拯出千餘人名. 水退前五六日, 辦備供饋, 水退後則得債求穀, 逐戶分給, 使之各安厥居. 前後所費, 殆過數千金. 且當窮春, 飯粥之供, 錢米之惠, 鎭日相續, 遠近稱道. 渠以素無富饒之名, 而有此出義氣, 活人命之擧. 若或湮沒而不揚, 恐致民情之抑鬱.

- 『일성록(日省錄)』 순조 33년 6월 10일



  해 설  

조선 시대에는 매년 인구 통계를 내었다. 전국 각 도에서 올라온 가구 수와 인구를 경조(京兆) 즉 지금의 서울특별시가 총계하여 그해의 마지막 날 임금에게 보고했다. 1833년(순조33) 12월 30일 『일성록』 기사에 따르면 그해 전국의 가구 수는 157만 4699호, 인구는 남자 338만 1478명, 여자 335만 1311명으로 총 673만 2789명이었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20년 6월 말 기준 대한민국의 세대 수는 2182만 5601세대, 인구는 남자 2586만 1116명, 여자 2594만 333명으로 총 5180만 1449명이라고 한다.

채 200년이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세대 수는 약 13.8배, 인구는 약 7.7배로 불어났다. 엄청난 확장이다. 경제 규모를 비롯한 정치, 경제, 사회, 생활 전반의 확장과 변화는 비교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더 크다. 조선과 대한민국은 아예 다른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조선의 1833년과 대한민국의 2021년이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 전해, 그러니까 1832년 조선의 농사는 전국이 심한 흉작이었다. 기근을 구제하기 위해 내탕고의 재물을 내주고 세금을 줄여주며 상황이 조금 나은 지역의 곡식을 더 어려운 지역으로 옮겨주는 등 정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전국에서 굶어 죽거나 견디다 못해 살길을 찾아 마을을 떠나는 백성이 속출했다.

2021년, 대한민국은 두 해째 계속되는 코로나19 팬데믹에 많은 사람의 삶이 흔들리고 있다. 기업은 경영난에 허덕이고 그 바람에 적지 않은 사람이 직장을 잃는가 하면 간신히 가게를 꾸려오던 자영업자들이 더 버티지 못하고 폐업한다는 소식이 날마다 들려온다. 정부에서는 재정을 덜어내어 전 국민에게 몇 차례 재난지원금을 지급하기도 하고 영세 자영업자와 위기에 처한 기업을 돕기 위한 자금 지원도 하지만 상황이 호전될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만 보면 세상은 참 살기 어려운 곳이고 앞날은 암울하게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나라 어느 시대라고 이런저런 고난이 없었던 때가 있을까? 한자 문화권의 유토피아 같은 시대, 성인이 다스린 시대라 하여 성세(聖世)라고도, 매우 번창하고 태평하던 시대라 하여 성세(盛世)라고도 하는 요순(堯舜)시대에도 굶주림은 있었고 도둑도 있었다. 가난, 질병, 전쟁 같은 고난이 없던 시대가 없었으니, 인류 역사는 고난과 극복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어려운 시기에는 반드시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다. 바로 의인(義人)이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화재 현장에 갇힌 사람을 구하기 위해 불길 속에 뛰어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낯모르는 사람이 당한 곤경을 지나치지 못하고 맨몸으로 칼 든 강도에게 맞선 사람도 있다.

1833년 조선에서는 현진국이란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내어 살리고 춘궁기에 굶주리는 이웃을 위해 기꺼이 재산을 내놓았다. 그 덕분에 1000명 이상의 인명이 죽을 위기에서 살아났다. 현진국만이 아니다. 그와 같은 사례가 전국에서 있었다는 것이 각 지역에 파견되었던 암행어사의 보고에서 나타난다. 홍수가 나서 집과 전답이 떠내려가고 흉년으로 사람들이 굶주리고 전염병으로 이웃이 병들어 죽어 갈 때면 어김없이 누군가가 나서서 그들을 도와 살려내곤 한다.

요즈음 대한민국에선 김달봉이란 이름이 미담의 주인공으로 떠오르고 있다. 전북 부안군에 2016년부터 그 이름으로 불우이웃을 도와 달라는 뜻과 함께 적지 않은 돈 봉투가 전달된다고 한다. 또 다른 곳에도 김달봉이란 이름의 기부자가 연말마다 불우이웃을 위한 성금을 보내고 있다. 김달봉은 실명이 아닐 것이라고 한다. 다른 곳의 김달봉이 부안의 김달봉과 같은 사람인지 아니면 그 이름만을 빌린 다른 사람인지도 확인된 바 없다. 하지만 해마다 연말이면 김달봉, 혹은 김달봉들이 어려운 이웃에게 따뜻한 손을 내민다.

현진국, 김달봉의 존재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원적 해법이 될 수는 없다. 어쩌면 그들의 존재가 필요하지 않은 사회가 이상 사회일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 그들이 공공복지의 사각지대를 메워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유학에서 정치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로 회보(懷保)라는 말을 쓴다. 말 그대로 백성을 품어서 보호하는 것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한다는 현대 국가의 책임ㆍ의무와 비슷한 맥락이겠다. 그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국가는 물론 최선을 다하고 있겠지만 언제나 빈틈은 생기기 마련이다. 그 빈틈을 메워주는 그들의 존재가 국가의 거대한 품보다 더 따스하게 우리를 품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또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는 때여서인지도 모르겠다.

글쓴이 : 김성재(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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