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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우리나라에 전래된 불교는 약 1,700년 동안 단순한 종교적 기능을 뛰어넘어 한국 문화의 큰 축을 담당해 왔다. 그렇기에 과거 사찰이 운영되었던 사지(寺址)는 겉으로는 빈터처럼 보이지만 뛰어난 가치를 지닌 다양한 문화재가 내재되어 있다. 그리고 이는 유형문화재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사상과 신앙, 예술혼도 함게 담긴 역사와 문화 부존자원 보고이다.

발굴유물로 확인한 『삼국유사』 속 이야기

사지(寺址)란 법등이 끊긴 사찰의 터를 의미한다. 석탑이나 석등, 사적비나 고승비, 승탑 등 유형문화재가 남아 있으며, 지표면 아래 또는 절터에 남아 있는 석조 문화재 내부에는 사찰이 운영되던 당시 사용하던 수많은 유물이 매장되어 있다.

백제 무왕대에 창건된 미륵사는 아름다운 풍경과 고즈넉한 분위기로 사진 명소로 꼽히는 곳이다. 『삼국유사(三國 遺事)』 무왕조(武王條)에는 ‘왕위에 오른 무왕이 왕후(선화공주)와 함께 사자사(師子寺)로 가던 길에 용화산 아래 연못에서 미륵삼존(彌勒三尊)을 친견하자, 왕후가 그곳에 큰 절 짓기를 청하였고, 이에 왕은 그곳에 전(殿)과 탑(塔)을 각각 세 곳에 세우고 미륵사(彌勒寺)라 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은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삼원가람 배치와도 일치 하고, 2009년 미륵사지 석탑 해체 중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를 통해 석탑 건립연대가 639년임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무왕의 재위 기간인 600~641년에도 부합하는 결과이다.

‘금제사리봉안기’는 얇은 금판으로 만들어졌으며, 앞뒷면에 각각 11줄, 총 193자가 새겨져 있다. 내용은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시주해 사찰을 창건하고 기해년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이다. 봉안기가 발견되면서 『삼국유사』를 통해 미륵사 창건설화만 알려졌던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성 연대와 건립 주체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밝히게된 계기가 되었다. 이 외에도 금동사리외호, 금제사리내호, 각종 구슬과 공양품을 담은 청동합(靑銅合) 등이 함께 출토되어 보물로 지정됐다. ‘금동사리외호 및 금제사리내호’는 모두 동체의 허리 부분을 돌려 여는 구조로, 동아시아 사리기 중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려운 독창적인 구조로 주목받고 있다.

사지 속에 잠들어 있는 기나긴 역사

『삼국유사』에는 ‘절이 별처럼 많고 탑이 기러기처럼 늘어서 있었다’라는 신라시대 경주를 그린 기록이 있다. 황룡사는 미륵사보다 70년 앞서 창건된 신라의 국가대표급 사찰이다. 진흥왕 14년(553) 봄에 월성 동쪽에 새로운 궁전을 짓다가 황룡이 승천하는 모습을 보고 계획을 변경해 건립했다. 569년에 담장을 둘러 사역을 완성했고, 진흥왕 35년(574)에는 장육존상(丈六尊像)을 안치했으며, 10년 뒤 진평왕 5년(584)에는 금당(金堂)이 조성됐다. 선덕여왕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온 자장법사의 발원으로 645년 구층목탑을 세웠다. 이 탑은 조성된 지 50년이 지난 효소왕 7년(698)에 벼락을 맞고 불탄 이래 다섯 차례의 중수를 거듭했으나, 고종 25년(1238)에 몽골군의 병화(兵火)로 가람 전체가 불타버린 참화를 겪은 뒤 중수되지 못했다.

1964년 목탑의 가운데 기둥을 받치던 심초석 상부의 사리공 안에 있던 사리함이 도굴되었다가 1966년 수습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수장되었다. 사리내함에는 황룡사 구층 목탑의 건립부터 중수에 이르는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금동찰주본기(金銅刹柱本記)」가 적혀 있었다. 이는 고대 탑지(塔誌) 중에서 최고의 가치를 지니는 기록문화유산인데 처음에는 녹이 두껍게 덮여 몇 글자만 확인할 수 있었 으나, 1972년 복원작업을 통해 명문을 거의 판독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기록이 『삼국유사(三國遺事)』 탑상(塔像)편의 황룡사구층목탑 이야기와도 거의 유사해서 이 찰주본기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

1978년 7월 28일 황룡사 구층목탑 심초석(心礎石, 목탑을 지탱하는 중앙 기둥의 주춧돌)을 들어 올리자 그 아래 에서 사리기(舍利器)로 추정되는 중국제 백자호(白磁壺· 달 모양의 백색 항아리)와 청동거울, 금동 귀고리, 유리구슬 등 3,000여 점의 유물이 발견됐다. 이들 유물은 신라인이 실생활에서 직접 사용하던 것이어서 신라문화사 연구의 중요한 1차 자료가 되었다.

현재 사지는 신라왕경복원정비사업 내 8개 단위사업 중 ‘황룡사 복원사업’의 대상으로 선정되어 복원과 정비를 위한 심화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2016년 사지 서편에 ‘황룡사 역사문화관’이 건립되어 황룡사 9층 목탑 모형 전시, 황룡사 3D 입체 영상 및 신라 역사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다. 황룡사지 발굴조사와 정비공사 당시 출토된 유물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국립중앙박물관 등에 보관되어 있으며 건축 유구와 관련된 석조물은 현장에 일괄 전시되어 있다.

사지 조사는 이미 조선시대부터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1481년에 편찬돼 1530년에 증보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1760년대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불우(佛宇)’와 ‘사찰(寺刹)’ 항목을 두어 각 지방에서 운영되고 있던 사찰과 사찰의 터를 기록했다. 18세기 후반에는 『범우고(梵宇攷)』, 『가람고(伽藍考)』와 같이 불교사원을 중점적으로 다룬 문헌도 편찬되었다. 이들 고문헌은 이 땅에서 존폐를 거듭했던 수많은 사찰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20세기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고적 조사가 행해졌는데 옛 문헌에 기록된 사찰 중 많은 수가 폐사돼 그 터만 남아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사지만을 대상으로 한 전국 단위의 문화재 조사는 대한불교조계종단의 노력과 관심 아래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는 1997~1998년에 발간된 『불교사원지(佛敎寺院址)』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러한 조계종단의 사지 보존·관리에 대한 관심과 요구로 2009년 문화재보호기금법이 신설되었다. 이 법을 근거로 대한불교 조계종단과 문화재청이 힘을 모아 전국 사지의 전수조사를 계획했으며, 2010년부터 문화재보호기금법 최초 사업으로 사지조사사업이 시작되었다. 사지 현황 파악은 2021년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결과 북한 지역을 제외하고도 5,700여 곳의 사지가 알려지게 되었다.

매년 사지 현황조사를 통해 자료를 구축하고, 정리할수록 대다수의 사지는 이제 ‘터’조차 찾기 힘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2000년대 이래 중장비를 사용하여 대지 정비를 하는 것이 보편화하면서 이러한 상황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그럼 우리가 잊고 지낸 그 많은 절터는 이제 포기해야 하는 걸까? 지금부터라도 문화재로 지정받지 못한 채 방치된 절터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합리적 처우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모두가 고민하고 논의해야 한다. 사지 안에는 우리 민족의 현재를 만든 역사와 문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글: 이석규(불교문화재연구소 학예실장)
출처: 문화재청/문화재사랑

사적 익산 미륵사지에서 발굴된 돌무더기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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