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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이서빈 시인

부흐고비 2022. 1. 10. 12:12

이서빈 시인
영주 출생. 옥대초등학교와 방송통신대 국문학과를 졸업.

201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문학시대》 신인문학상 수상, 계간 마네르바작가회 이사, 한국문협 인성교육위원, 국제펜클럽 회원. 중랑문화원 ‘남과 다른 시 쓰기’ 창작교실 강사.

저서로 시집 『달의 이동 경로』, 『바람의 맨발』, 『함께, 울컥』 민요시집 『저토록 완연한 뒷모습』이 있다.

 



균(菌) / 이서빈
균들은 몸을 잃은 불구다/ 입만 있는 생물체, 먹어 치우기만 하는 포식자/ 먹고 있을 때는 증상을 느끼지 못하도록 조심하지만/ 다 먹힌 자리는 상처가 생기거나 곪는다./ 인간의 곪아가는 상처는 균의 배설이다// 꽃이 만개 하려는지 열이 오르고 몸은 파르르 떨린다./ 병원에 갔는데 균은 보이지 않는다./ 오래 굶었던 것들 동시다발적으로 창궐한다./ 약을 먹거나 예방접종은 구휼救恤하는 것/ 먹여서 입 다물게 하는 것이다// 돌림병처럼 붉은 열꽃 뿜어내는/ 꽃송이 하나하나는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꽃은 배설의 자리다./ 붉은 비명으로 공중을 꽉 채우지만 이내 땅이다./ 비 한 줄기 바람 한 가닥에도 목을 꺾는 붉은 배설의 자리엔/ 허기진 입들이 초록의 떼로 몰려든다.// 밋밋하던 살갗에 선홍빛이 생긴다./ 예쁘고 아름다운 자리지만 꽃들의 몸은 모두 짓물러터지는 것// 병원에 온 사람들을 보면 기침하는 배설 혹은 가려운 입이 팔다리 가득 붙어있고/ 어둡고 습진 곳 마다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입들이 달라붙어/ 한 순간 절체절명이 꽃잎으로 터지는 증세들// 인간들의 실패한 진화다/ 입 밖에 없는 퇴화, 보이지도 않는 균/ 그 불구의 포식자가 통로 한 입만 먹어도/ 모든 길은 차단되고 마비되는 실패한 진화// 주사약처방을 받고 보면 꾹꾹 참고 있는 입들이 생각난다./ 주사를 맞고 온 저녁 내 몸엔 배고픈 입들이 가득하다/ 오늘밤은 배부른 잠을 잘 수 있겠다.//

결 / 이서빈
나무의 결은 나무의 나이고/ 물결은 물의 나입니다.// 나무의 나이는 나무가 죽어야만 알 수 있어요. 결을 보는 것은 조문하는 일입니다./ 고요한 물의 나이를 알려면 돌멩이 하나 던져보면 되지요.// 잠깐 보여주고 사라지는 물의 나이/ 어느새 출몰했다 사라지는 뼈들입니다.// 세상의 것들은 결을 간직하고 있지요. 반질반질한 머릿결./ 여전히 가르마로 옛날 나이를 고집하는 할머니는 한 번도 구불구불한 머릿결을/ 가진 적 없지요./ 결국 나이를 감추고 있다는 뜻이지요./ 나이를 걷어내면 결은 곧 사라져요.// 봄 들판에 출렁이는 결, 어린 나이도 있고 늙은 나이도 있지요./ 가지런하고 걸음이 일정한 숨결. 나긋나긋하던 결이 거칠어지면 오래지 않아 굳어요./ 들판을 어지럽히는 바람결에 봄 살결은 늙거나 시들어 가지요./ 바람결로 나이를 먹고 시들어가는 들판이에요.// 살아있는 것들은 둥근 내면의 결을 가지고 있어/ 여린 것일수록 결이 보드랍게 잘 휘지요.// 가끔 손 없는 이불 결이 꿈결을 쓰다듬는 날이면/ 하늘은 연한 육질을 위해 햇빛과 별빛을 결대로 찢지요./ 모든 결에서 비린내가 나는 이유지요.// 청결이나 미결 같은 엉뚱한 단어들이/ 결사이로 끼어들기 때문이지요.//

시집 혹은 시집 봉투 / 이서빈
누군가 고단한 길 지우며 살구꽃 피는 소리 휘날릴 쯤 시집 한 권 받았습니다./ 담겨온 봉투는 아름답고 여느 봉투보다 작기도 했습니다./ 4각 모서리의 각오가 단단해 보였습니다./ 딱 그만큼 크기의 시집 외엔 세상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양장본 각오입니다./ 몇 페이지 몇 째줄 오타가 고쳐주길 기다리는 것 따위엔 관심 없습니다.// 살구나무집 살구꽃으로 곱게 자라며 살구꽃잎 떨어지고/ 살구 노랗게 익을 땐 신맛에 미쳐/ 치맛자락에 살구를 주워 담던 부엉재숙모,/ 어린나이에 시집와서 여전히 노랑신봉투에 넣어져 자라고 있습니다.// 한 번도 시 대신 시집말을 친정에 부쳐본 적 없이/ 살구 대신 하얗게 익은 소금꽃 짠가풍 익히던 부엉재숙모,/ 外間에서 부엉이소리 나면 행여나 뒷소문 날까 방문 꼭꼭 닫아걸었지요./ 밤마다 달빛 불러 청상심 물리친 흔적,/ 그방문 열어보면 청상 푸른시집 한 권 여전히 시렁에 얹혀있습니다.// 봉투란 그런 것 시집이란 것도 그런 것이겠지요./ 참 짝지고도 외로운 말 안성맞춤이란 말,/ 택호가 붙으면 옮겨갈 수도 없다는 말,/ 가혹하고 쓸쓸한 푸른시집 한 권이 살았습니다.//

봉황꽃 / 이서빈
처음부터 날진 못했다/ 龍袍에/ 일편 단심을 가두고 싶었다.// 왕을 사모했던 옛날이/ 봉황으로 피어나/ 손톱마다 초승달로 뜨고지며/ 붉은전설 피우고있다.// 꽃대궁속엔 천둥 한 알/ 바람 한 종지/ 햇살 한 톨 피돌기하다/ 봉황 神으로 피어나 전설 엮고/ 한 나라를 펄럭이게 했다.// 툭툭 터지는 외로움에 술약같은/ 상사알맹이들 쏟는다./ 왕의 흔적이 땅거미로 내릴 때면/ 날개는 놀빛울음으로/ 허궁에 길을 낸다.// 미처 뜨지 못하고 날아간/ 봉황새 눈알/ 울밑에서 울울한 비바람 맞으며/ 봉황經 소리가 봉숭봉숭 우는 여름/ 뱁새도 황새도/ 서로의 속내를 몰라 운다.// 걸음이 버리고 간 발자국들,/ 계절 한 채 끌고간다./ 한 계절은 늘/ 한 계절을 거슬러준다.//

복사꽃 / 이서빈
붉었던 꽃 지는 소리/ 바닥에/ 뚝뚝 떨어진다/ 지난 아픔을 씹는/ 한 숨 소리/ 꽃그늘 위에 겹겹 쌓인다//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가슴에/ 신열로 불을 켜는 밤/ 낯익은 영혼 하나 복사꽃 울음을 운다//

개복숭아꽃 / 이서빈
어느 생에선가 나는/ 너를 짝사랑 한 것이 분명하다// 심장에서 꺼낸 휘파람으로 너의 집 울타리를 넘어가/ 불러보다가 혼자 타오르다가/ 눈썹 하나 까딱않는/ 너의 집앞을/ 왔다가 갔다가 서성이다가/ 문 한 번 두드리지 못하고 돌아와/ 애먼 개살구꽃잎만 똑똑 따던// 너는 알지 못하겠지만/ 지금도 내 심장은 개복숭아빛이다/ 잘 쪼개지지 않는 너의 가슴을 못 열어/ 벌레먹은 심장은 상처가 아물지 않아/ 매일 심쿵심쿵 주먹질한다// 육시랄,/ 그놈의 짝사랑 언제나 끝날지/ 아직도 봄마다 눈알을 알알붉붉 찔러대며/ 심장을 날뛰게 만드는/ 너는 분명 어느 생에선가/ 내 젊은 봄날을/ 붉게 물들였던 짝사랑이였던 게 분명하다//

魂혼을 흔드는 댓잎 / 이서빈
방울소리는 소리만 날아다닌다./ 무거운 소리,/ 모시적삼 훨훨 춤추며 하얀영혼을 위로하고/ 아기魂 살결위로 포동포동 흘러내리는/ 달빛울음….// 이승 뒤뜰 대밭서 차고푸른 휘파람소리 난다./ 작두날 번뜩이며/ 시퍼런 메아리로 떠도는 대나무들의 몸짓/ 암호를 전송하는 청청한 마디들/ 철철 우는 아기울음소리의 댓잎들이다// 먼 산사 처마끝에 매달린/ 새끼목어 울음소리 맑게 달래지고 있다./ 여의주 하나 손에 쥔 채/ 죽음 놀고 있는 아기는 저승으로/ 엄마가 오기를 기다린다/ 나부끼는 춤사위에 업장 풀어내고/ 모시적삼 한복이 여승보다 슬피 운다.// 바람에 빈 들녘이 흔들린다./ 달빛이 쏟아지는 처연한 몸짓사이/ 神아기야, 넌 푸른안개 몸을 가린 서천꽃밭이다./ ‘살주는 살살꽃 뼈준 뼈살꽃 피준 피살꽃/ 영혼 되살아나는 도환생꽃’*/ 이꽃밭은 저승이승 연결해 준다는 기별인데/ 생불꽃 불망꽃 울음꽃 웃음꽃 …자정꽃**/ 이저승 오가는 섣달그믐 황금마차를 탈 걸 그랬다//
* 전설 속의 꽃, ** 전설 속에 꽃

소금사막길 / 이서빈
낙타들, 지루한 행렬로 소금사막 건넌다./ 낙타몸엔 경적이 흘러나오지 않는다./ 무릎 꿇어 소릴 내거나 기다릴 뿐/ 스스로 창을 닫은 긴눈썹과/ 발굽닿는 자리에 소금 부서지는 소리가 짜다./ 푸른바람 걸린 나뭇가지위를 지나다보면/ 흰소금 쌓인 지점을 지나가게 된다./ 어느새 끼어든 제설차가 염화칼슘 뿌려대며 지나간다./ 흰사막인 듯 눈천지가 돼버린 길/ 가끔 낙타울음 닮은 경적이 끼어들어 미끄러운 길/ 닭들이 득실거리는 트럭 저만치 앞서가고/ 파란술병 든 빨간치마와 야자나무그늘이 느리게 지나가는 길/ 길들은 순간 자기를 다스리지 못하는 일이 종종 생긴다./ 그 옛날 소금길은 좁아터져 정체되었지만/ 오늘 이길은 넓어서 더 엉킨다./ 갓길표지도 없이/ 서로 서로 위험 속도 내며 지나갈 뿐이다./ 터널을 지나 저물어가는 산 돌아가/ 저녁대문을 향해가는 후미등 붉은행렬들이 흐른다./ 모래언덕은 속도를 잠그고 바람을 풀어놓는다./ 처음 보는 겨울그림자 한 폭이/ 길 한복판에 걸려있다./ 긴장한 낙타의 귀들이 허공에 펄펄 살아서 걸려있다./ 다쉬테캐비르* 사막, 그 어디쯤 지나가고있는 걸까./ 지구공 소금사막길 혹속에 남은 연료양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 이란 최대의 사막

달의 이동 경로 / 이서빈
첫 이마를 숙인 밤하늘에 생채기난 달 하나가 떠있다. 고원의 순례자들은 출발할 때 이마에 달 하나를 챙겨간다. 그 밝기로 험로를 5체 투지로 간다. 이마가 땅에 닿을 때 마다 신들은 따끔따끔거릴것같다. 이마가 헐고, 조금씩 상처가 나 오래된 표시로 딱지가 앉는다. 거뭇한 이마에 굳은살로 뜬 붉은달.// 티벳 여행길에서 5체 투지를 하며 가는 순례자를 만났다. 몇 달 며칠을 이마에 달띄우며 간다. 달은 언제나 찬란한 가난을 닮았다. 한동안 배고프고 또 한동안 배부르다 다시 배고픈 달. 장엄한 사육제다. 태어나는 것 보다 더 어려운 거듭나기를 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바닥을 함께 기는 그림자 푸른밤. 살 다 내리고 채우기를 몇 번 함께 기는 그림자의 눈이 푸른밤, 지순한 보름달에 세상이 환하다. 지나가던 차를 멈추고 순례하는 사람들에게 푸르스름한 지폐 몇 장을 보시한다. 고개 하나를 넘을 때마다 붉은 피가 나고 딱지가 앉고 또 넘으면 붉은 피가 나고, 딱지가 앉고 마지막 사원앞에 가서야 남루한 달 하나가 뜬다./ 거뭇한 이마를 밝힐 평생의 달 하나 얻는다.//

36.5+36.5=1 / 이서빈
사람에겐 사람이 플러그다./ 곁이 있어야 사람이다./ 힘없이 축 늘어져 누운 사람/ 죽 떠먹이며 아침부터 잔소리 주입시키는 사람/ 주사바늘들은 새싹처럼 봄 지류를 찾고/ 눈물방울 말랑말랑한 위로도/ 눈 껌뻑이는 저 몸속에 피를 보내주는 곁이다.// 언제 방전될지 불안한 사람/ 보이지 않는다고 플러그가 빠진 건 아니다./ 섣불리 플러그를 뽑는 일은 위험하므로/ 모든 곁이 플러그를 찾는다./ 36점 5도를 유지하는 몸/ 밤은 별과 달을 곁에 두고/ 빛은 늘 그림자를 곁에 둔다.// 손가락에 낀 반지가 닳듯/ 날마다 조금씩 보이지 않게 닳아가는 의식/ 두 손으로 허공 휘휘 젓는 것도 곁을 찾는 일이다./ 눈금이 빠르게 오르내리는 몸 저울/ 곁들의 불안을 부추기는 서풍저울이다./ 늘 곁과 곁이라는 협력체의 살갗/ 살갗끼리 식지 않고 같은 체온 유지하지만/ 옆에 아무것도 없을 때는/ 헛것이라도 잡아 두어야 체온이 유지된다./ 세상 보든 곁을 먹어치운다면/ 뜨끈하게 속이라도 뛸 것이다.//

口 / 이서빈
저 조그만 네모 하나에 모든 목숨들이 다 빨려 들어간다.// 먹다·굶다가 한통속으로 들어가거나 나간다, 밥먹고 욕먹고 일도 시켜 먹는다. 녹을 먹고 나라를 말아먹는다.// 먹는 것 입 꾹 다물면 굶는 것도 끝난다.// 때론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굴레를 쓰고 사람을 가두어 囚人이 되게도 하는 口. 하루의 끝이 꾸역꾸역 모여 잠을 볼모로 잡고 있는 口.// 조금 먹은 놈은 도둑이라 하고 많이 먹은 놈 영웅이라 하는 저 口. 끝내 삼킨 것 다 뱉어내고 저 조그만 속 口로 들어가 꽝꽝 못질 당하는.// 살도 뼈도 수식어도 없는 막대기 네 개 저것안에 4주가 들어 있고 4방이 들어있고 온갖 사연 다 들어 있어 죽음까지도 4망이라 한다면 저 ㅁ는 모든 비밀 다 틀어쥐 고 있는 것 아닌가.// 우리 모두 저 네모안에 들어가기 위해 오늘도 꽃도 새도 나비도 끊임없이 태어나 날고 있다.//

· / 이서빈
마침표 하나 찍어놓고 보면 가장 좁은 문같기도 하고, 감옥을 막고있는 철문같기도 하다. 마침표가 없는 책은 없다. 어떤 빛나는 철학이나 슬 픔, 기쁨에도 마침표는 있다.// 외눈박이 눈은 그 사람을 막고있는 점이다. 내 어렸을 때 던졌던 조약돌 같아 읽고있던 책에서 퐁당퐁당 소리가 물방울처럼 튀어오른다.// 이야기 하나에는 수많은 점이 있다. 점 하나 잘못 찍어 님이, 남이 되기도 하고, 궁이 공으로 굴러 떨어지기도 하고 마침표가 미침표가 되기도 한다.// 작은 점 하나에서 아주 큰동그라미를 그리기도하고, 글자가 걸어 나오고 초록 선율과 붉은신비가 콩나물 자라듯 자라기도 한다.// 모든 것을 마무리 짓는 점 하나, 절 안 모셔놓은 부처도 점안을 해야 비로소 눈뜬 부처가 된다. 부처의 눈알은 지구 공같기도 하다. 바둑을 두면 집 한 채를 지을 수 있고, 마지막 돌 하나로 길을 막을 수도 있다.// 말이나 문장뒤에 찍지않고 슬쩍 넘어가기도 하는 점. 긴장감에 꿀꺽 삼킨 침 한 방울같은 것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한 뒤 살짝 열어놓기도 하지만, 며칠뒤엔 사라지는 점. 한적하게 비어있는 곳엔 작은 점 하나 찍혀 있다.// 실수·노여움·슬픔은 모두 마침표를 안찍은 것들. 지구를 반복하는 저 꽃잎도 언젠가 한 번은 찬란한 마침표를 꾹 찍을 것이다.//

? : ! / 이서빈

늑대는 달의 젖을 빌어먹고 산다.// 보름달은 초승달로 여위어가고 늑대눈엔 밤마다 초승달이 뜨고진다. 퇴화한 달빛들 땅속에 묻혀 있다가 푸른싹으로, 나비로 태어난다. 어린떡잎 들썩임과 아기나비 날갯짓엔 우주를 들어올리는 힘이 있다. 둥근 열매가 익는다, 혹은 영근다는 말이나 하늘, 하늘하늘 날아다닌다는 말은 모두가 거짓말이다, 땅으로 추락한다는 젖은 말이다.// 발 달린 것들 허공 딛는 시간이 더 많고, 날개 달린 것들도 알고 보면 땅밟는 시간 더 많다. 초원은 바람을 낳아 기르고, 햇빛은 그늘을 낳아 기른다. 싱싱한 빗줄기는 샛강을 낳아기르고있다.// 파도지느러미,애간장 다녹이며 쉬지않고 시를 짓지만, 壯元은 文魚의 가문에 뼈대와 같은 취급이다. 다만 머릿속 가득 저장된 먹물로/ 괴발 네발 문어발로 구불링구불링 쓴 획들은 모두 달필이다. 조팝꽃그늘은연둣빛 더듬이의 서툰 몸치로 둥둥 물살을 저어간다// ? 에 줄줄이 걸려드는!// 물음표와 느낌표는 아무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 사이의 부호다. 날개 굳은 나비 한 마리가 개미떼를 까맣게 몰고 하얀경계 밖으로 날아가고 있다.//

무릉도원숲 / 이서빈
사람들 5장 6부 투명하게 보이는 곳/ 이승 여덟 가지 공덕 쌓은 몸의 집합체/ 솥뚜껑 열면 초록김 튀어나오고/ 칠보연못엔 황금물 출렁맘 씻어준다./ 비파 타는 선녀들 살결서 내뿜는 복숭아빛 환하다./ 못바닥은 부레 없는 無憂 빛 물고기들 심부름한다./ 시 쓰고 글 읽는/ 말하면서 뻐끔거리는 바람입 지느러미엔/ 끊임없이 파도소리 일렁인다./ 배나무꽃 피고지고/ 이승 오려다 안개로 핀 꿈./ 신발 없는 그곳엔 신발이름도 없다./ 신발에 끌려다닐 형벌도 없다./ 눈만 뜨면 원하는 모두를 볼 수 있고/ 냄새소리도 듣는 귀가 있다./ 입안엔 향주머니 달려있고, 카락마다 수양버들 꽃핀다./ 풀무에는 끊임없이 바람 만들고, 북천둥 만든다./ 싸리비마다 살짝만 건드려도 폭우가 쏟아진다./ 장엄한 누각엔 만다라 꽃피고/ 연못엔 연꽃들이 이빨 드러내며 웃는다./ 안개는 세수를 시켜주고, 수양버들은 머릴 감겨주고/ 솔바람은 카락을 말려준다./ 빗줄기는 국수타래를 만들어 내리고 햇살은 타래를 잘라 울타리를 친다./ 오요요, 뭉게구름 불러 강아질 만들어 내는 곳/ 앞뜰엔 달빛 내리고 뒤뜰엔 별빛 심는다./ 어둠이 부르면 어둠이 되어오고/ 빛이 부르면 빛이 달려와 시중드는 곳./ 이숲마을을 무릉도원이라 부른다.//

무풍지대 / 이서빈
외할머니는 혼수품에서/ 선풍기를 뺐다./ 딸 곁에 바람 한 점 불지 말라고/ 바람이라는 서늘한 목록을 지워버렸다.// 오만가지 잡 바람에/ 집을 날리고 전답을 날리더니,/ 딸만은 바람맞는 일 없이 살아야 한다며/ 선풍기를 사러 나간 이모에게/ 바람을 맞혔다.// 무풍지대로 시집을 간 이모는/ 바람은 없을 거라 굳게 믿었다./ 분명 바람 한 점 가져가지 않았는데/ 웃음 뒤편에 검은 구름이 돋고 있었고/ 먹구름 묻은 돌풍에/ 우지끈 서까래와 대들보가 내려앉았다./ 이바람, 저바람, 만지던 이모부/ 어느날 바람으로 사라졌다.// 바람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바람과 더불어 사는 것/ 그것을 알기까지 이모는/ 갖가지 된바람을 만나야했다.// 딸이 일으킨 바람에 쓰러진 외할머니/ 대신 바람을 막느라 중풍을 맞았다./ 이 세상 어느 곳에도 무풍지대는 없었다.//

발버둥 / 이서빈
열린 문은 반드시 닫힌다. 노인의 발치나 손끝에서 나오는 주름진 말들을 모아 지혜서를 만드는 초록의 문밖. 지주의 말속에는 짐승의 나이로 죽음이 자란다. 누전인지 정전인지 검은빛에 물든 가난. 죽음과 잠은 같은 종류의 무아지경 같은 것. 매일 이승과저승의 집 한 채를 짓느라 발버둥 친다. 빛과 그늘이 씨줄날줄로 짜여 진 촘촘한 봄날은 하루 종일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바람을 타고 있다. 종달새 노래는 풍년 소쩍새 울음은 흉년. 허기진 땀구멍엔 소금기만 서걱거린다. 달빛이 키우는 소리와 별빛이 돌보는 소리가 같은 봄밤 아래서 자란다. 올챙이 울음과 어린 뱀 웃음이 회전문처럼 꼬리를 물고 돌아간다. 회전문에서 발버둥이 튕겨져 나온다.// 발버둥은 발을 먹고 산다. 곰발바닥을 먹어 성이 차지 않으면 닭발을 먹고 뼈있는 닭발은 뼈있는 말 하는 사람의 몫이고 뼈 없는 닭발은 말랑말랑한 말을 하는 사람의 몫이다. 발가락으로 가장 낮은 수량의 셈을 배운 사람들은 다 지혜롭다. 죽음이 가까워 올수록 발버둥엔 탄력이 생긴다. 귀가 큰 발버둥소리, 바람 섶엔 빛과 그늘이 자리를 바꾸며 나뭇잎들이 발버둥치고 있다. 얼룩진 소리를 뱉어 내면서.//

달팽일 들여다보고있으면 / 이서빈
이렇게 느린 소실점이 있을까.// 불도 켜지않고 문도 잠그지않은/ 달팽이껍질을 집이라 부르면 실례지./ 들여다보면 뼈는 둥글게 말려있고/ 살은 끈적끈적하다.// 어떻게 살과 뼈를 따로 갖고있는 삶이 있을까.// 뼈안에 살을 집어넣고 일일 연속극을 보는지/ 양쪽 안테너를 뽑아놓고/ 끌끌 혀차는 소리를 내고있다./ 1인용 집이라 부르려다,/ 1회용 집이라 바꿔 부른다./ 빈달팽이껍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휑한 육탈이다.// 수억만 년 전부터 언제나 같은 보폭으로 기어가며 문명의 한 자락에 제/ 이름을 새기고 있다.// 우렁우렁 풀벌레울음 밟고/ 천둥번개 쳐도 느릿느릿/ 폭염 지나 꾸벅꾸벅 졸고있는 달팽이/ 말랑말랑한 구름입술 보다 보드라운 살갗/ 달팽이를 보면 하루가 눅눅해진다./ 습기와 폭염을 잘 섞어 짠 옷 한 벌과 베개를 마련해 주고싶다.// 겨울에 얼지도 바람에 말리지도 못하는/ 젖거나 마른소리/ 천궁으로 송신하고 있다.// 생전처음 노모들은 집을 두고 요양원으로 갔다.//

별빛 차갑게 울어 / 이서빈
간담이 서늘해/ 눈뜨고 창문여니/ 별빛 차갑게 울어내리고/ 잎새 하나/ 목 버리고 있다// 달빛 몸을 씻겨 수의입히고/ 귀뚜리 두어 마리 木棺짜는 소리/ 가을이 맨발로 달려왔다/ 담기댄 자투리 별빛 곡하고 있다// 멀리서 살살이꽃 손사래치고/ 고향집 터 고르는 소리/ 우주밖으로 밀어내고있는 상달보름밤엔/ 한조선 하늘문이 열리고 있다//

어쩌지 못하는 한 때 / 이서빈
열리지 않는 무게는/ 누가 저울에 오려주나// 귀퉁이 찌그러진 금고 하나를 앞에 두고/ 열지도 리어카에 싣지도 못하는 사람/결국, 부서져야 열릴/ 몇 개의 숫자가 섞인 문짝은 처음부터/ 내부가 없었다는 듯 요지부동이다.// 담배 한 개비가 다 타들어가도/ 떠오르지 않는 묘수는/ 함부로 섞어놓은 사내의 번호다.// 오늘 하루 저 무게만 얻을 수 있다면/ 빈 박스와 공병들의 무게쯤은 다 내려놓아도 좋다고/ 그림자에게 중얼거리는 혼잣말이 저문다./ 빈 것과 열려있는 것들만 모아온 극빈/ 한 번도 깊고 깊은 금고를 가져보지 못했음으로/ 차지하고도 싣지 못하는 사내/ 그렇지만 저 견고한 금고속의 무게는 누가/ 함께 들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름은 너무도 가볍게 흘러가고 새들은 손 없이도 손쉽게 날/ 개를 접고 비행기는 하늘을 갈아엎으며 날아가고 어김없이 해는 지고// 열지도 싣지도 못하는 무게 옆에서/ 돌덩이보다 무거워진 사내가/ 하염없이 금고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있는/ 바르르 떨리는 저울의 추//

오리시계 / 이서빈
겨울, 오리가 연못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저녁이면 다시 걸어 나온다.// 연못으로 들어간 발자국과 나간 발자국으로 눈은 녹는다. 시침으로 웅덩이가 닫히고,/ 방수까지 되는 시간들.// 오리는 손목이 없는 대신 뭉툭한 부리의 시간을 가지고 있어 무심한 시보 (時報)를/ 알린다. 시침과 분침이 걸어 나간 연못은 점점 얼어간다.// 여름 지나 가을 가는 사이 흰 날짜 표지 건널목처럼 가지런하다.// 시계안엔 날짜 없고 시간만 있다./ 반복하는 시차만 있다./ 오리 날아간 날짜들, 어느달은 28마리, 어느 달은 31마리/ 가끔 붉거나 푸른 자국도 있다.// 무게가 덜 찬 몇 마리만 얼어잇는 웅덩이를 보면/ 손목시계보다 벗어 놓고 간 시계가 더 많은 것 같다.// 결빙된 시간을 깨면/ 수세기 전 물속에 스며있던 오차들이/ 꽥꽥거리며 걸어 나올 것 같다./ 웅크렸던 깃털을 털고/ 꽁꽁 얼다 풀렸다 할 것 같다.// 오늘밤 웅덩이는 캄캄하고/ 수억광년 연대기를 기록한 저 별빛들이 가득 들어있는 하늘은/ 누군가 잃어버린 야광 시계다.//

개명(改名) / 이서빈
개명을 하고나니, 눈이 밝아졌다./ 입을 열게도 한다.// 아무렇게나 핀 망초/ 지금쯤 개명 신청 중일 거다./ ‘개’자는 모두 좋지 못한 말로만 쓰인다며/ 불평꼬릴 바람개비처럼 살래살래 흔든다./ 나만 보면 애원을 한다./ 이름엔 분명 약육 강식 있다는 것/ 남의 이름 뜯어먹으며 사는/ 배고픈 아귀를 알고 있다.// 물소리에 귀를 씻고/ 불어오는 바람에 애 다 헹궈도/ ‘개’라는 말 미칠 것만 같다며 징징거린다./ 개유학파와 개자추 전설을 끌어다앉혀/ 經을 읽어줘도 불경스럽게 운다./ 온들판이 여승처럼 몰래 슬피운다.// 돌림자라 ‘개’자를 버릴 수도 없다/ 훌쩍훌쩍 귀를 적셔도 어쩔수가 없다./ 두 손 두 발 다 들고/ ‘들안개’로 개명 한다./ 앞의 ‘개’자를 떼서 뒤로 옮겼을 뿐인데/ 8자가 바뀌었다며 여름물안개로 피어 가을 건너 펄펄 흰눈으로 날아/ 봄과 양 손 잡고 놀고있다.// 개꼬리가 내 머릿속 뱅그르르 돌고 있는 밤이다.//

애간장 / 이서빈
아슬아슬 속도를 곡예 하는 바퀴/ 피자와, 방황하는 사춘기를 싣고 거리를 활보한다/ 담보할 수 있는 목숨이 있다는 것에/ 흥겨운 콧노래/ 그렇지만 오토바이에 무겁게 실린 건/ 까맣게 타들어가는 부모의 애간장이거나/ 그 옆을 지나가는 차들의 아찔한 차선/ 넘어진 시간이 몸 털고 일어나 절뚝인다/ 달리기를 멈추고 선다는 건/ 녹슨 쇠붙이 같은 슬픔// 빙글빙글 돌아가는 지구 한 덩이 실은/ 네 바퀴가 달리고 있다/ 저 지구엔 모래나 자갈 시멘트가 들어있을 것이다/ 이것들을 공기 한 삽과 물 한 포대 섞어 집을 짓고/ 도로를 만들고 흥겨운/ 콧노래를 견고하게 굳힐 것이다// 두 바퀴를 좋아하던 아래층 사춘기는/이 가을 어디 쯤 굴러가고 있을까/ 시멘트 굳히는 일로 생업을 꾸리던 형부는/ 기어이 자신의 간까지 굳혀 버렸다/ 귀뚜라미 울음이 닿는 곳마다 초가을은 맨발이다// 언니는 목청 쉰 풀벌레 울음소리를 내고/ 조카들은 피자를 태우고 달리고/ 형부는 자신의 관모서리에/ 대못 박는 소리를 세고 있을지 모른다/ 아무것도 멈추지 않는 밤/ 바퀴를 멈추고 싶은 저녁이다//

헛말 / 이서빈
나뭇가지에 소복이 쌓였던 새발자국 새새새 날아내린다/ 오류에 젖은 날들 손전화 화면에 빼곡히 적는다/ 매혹적이고 근사한 시집 수없이 부수고 짓는 조립 골몰하며// 부재와 존재는 동색이란 붓다의 광채 나는 말/ 비구니 무릎 베고 누운 동자승 머리에 찬바람 파문 일으킨다/ 뇌에 불 번쩍 켜지는 덧니 닮은 단어들 이미지부리 은유지느러미 환유날개 달빛별빛 잘라 문장 짓는다/ 입회 허용 않는데 천 근 눈까풀 짓누르는 잠, 체념 부추기는 휘파람 불며 날아든다/ 잠 하얗게 셀 때 비극보다 연상인 낱말 문장 이데올로기에 편입 한다// 카드 결재 문 열고 들어가면 낯설고 모호한 조명 달린 직사각 방 한 칸/ 하루치 졸음과 어둠 섞어 손바닥 굳은살 박힐 때까지 삽질하는 집/ 입소식 퇴소식도 카드 한 장이면 된다/ 방문객 객식구 따로 없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고 폐 깊은 곳까지 숨결 교환한다/ 전에 살던 세간 고스란히 물려받아 잠시 쓰다 또 물려준다/ 진부해진 동네 새로운 사람들 끊임없이 이사 오간다/ 시간과 시간은 한 번도 겹치는 법 없다/ 이해 불능의 고립된 이미지 꽉 차서 텅 빈집/ 힘들고 외로울 때 따뜻한 이불속 누군가 다정하게 잡아줄 손 기다린다/ 집 짓는 일 열중하다 내릴 역 놓쳤다/ 나이도 한 역 씩 놓친다면 神보다 높은 경지 될 것이다/ 지붕으로 소나기 쏟아지는 소리 저 내려주세요! 소리 쳐봐도 둥그렇게 감긴 속도바퀴들은 못 들은 척 굴러만 가고/ 삽날 하늘 향하도록 나란히 정렬 하면 다음 또 다음 사람 삽 잡고/ 미완성 집 거꾸로 싣고 따뜻함 내 건 버스 도시를 순회중이다// 한 번도 자신의 집 가져보지 못한 사람들 오늘도 다른 사람 집 짓고/ 한 번도 자신의 시 써 보지 못한 사람 다른 사람 시집 짓고 다음 생이나 그 다음 생 위해 남의 집 짓는다/ 오막살이라도 내 집 좋다던 사람들 이사 할 때는 한 사람도 집을 가져가지 않는다//

밤이 풀려 나왔다 / 이서빈
어디서 풀려 나왔는지/ 애벌레 한 마리 꾸물거린다./ 살펴보면 집안 어딘가가 풀려 있을 것이다.// 상형문자를 그리고/ 구불구불 기어 다녔을/ 손발 없는 글자/ 자정쯤에는 애벌레가 풀어놓은 틈으로 비가 내렸다./ 숲을 부풀리던 여름밤이 접힌다./ 썩은나무 옆구리를 뚫던 집중력은/ 주름의 힘.// 세상을 주름잡는 사람도/ 무릎과 목과 이마까지 접고 펴기를 반복하며/ 와이셔츠와 바지에 칼 주름을 만들었다.// 애벌레는 주름이 많다./ 저 징그러운 주름으로 꿈틀거리고/ 문을 여닫고 수축과 팽창을 하며/ 딱딱한 나무속을 파고든다./ 전위의 촉수다/ 할머니도 주름으로 잠을 뚫고 멀리 가셨다.// 꿈틀거리는 머리맡을 두고 잠을 잤다./ 잠껍질을 뚫고 꿈틀, 아이를 꿈속에서 깨운다./ 애벌레가 밤새 풀어놓은/ 통로를 못 찾겠다.// 주름을 잡느라 평생을 바친 감침질에도/ 어딘가 풀린 곳이 있어 그곳으로/ 전기세가 새고 수도가 새고 끝내 마음까지 새고야 말/ 쭈글쭈글한 주름./ 우리가 모르는 무량한 틈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꿈틀.//

空공 / 이서빈
외로운 날엔 방랑을 찾아 나선다// 벽에 걸린 조충도에 봄볕을 묻힌 벌나비가 흘러들고 메아리를 편집하던 산까치가/ 유리창에 비친 산을 부리에 피가 나도록 쪼아대는 공염불 같은 날// 창턱에 걸터앉아 턱을 괴고 독한 락스에도 빠지지 않는 얼룩을 만진다/ 조금씩 닳아가는 반지의 안쪽처럼 이 생에서 머물다 갈 공간이/ 조금씩 위독을 당기고 있다// 이가 갈리도록 외로운 심기는 복수초를 피운다// 깊은 곳까지 번진 슬픔을 가방에 구겨넣는다/ 굽높은 구두 손톱물감 입연지 눈썹먹 물크림이나 살결물조차 허용하지 않고/ 몸에 두른 모양새 모두 벗기고 내장조차도 최대한 무게를 줄인다// 방랑으로 가는 길은/ 꽃술보다 서럽고 학 눈썹보다 고독하고 여승의 뒷모습보다 차가운/ 퇴화가 구불거리는 곳/ 보리수나무 그늘 무렵에 멈춰서서 인도 왕자에게/ ‘안녕! 싯다르타’라고 빈 안부를 뜨겁게 건넨다/ 허공을 핥던 새가 짧은 혓바닥으로 눈물을 흘리며 싯다르타에게 노래를 선물하듯// 동물성 습을 버리고 식물성 습의 비자를 발급 받아야 한다// 식물성 습의 비자 발급을 위한 서류는 달빛보다 둥글게 넓힌 품과 별빛을 찍어/ 윤이 나게 닦은 마음 한 장이 필요하다// 언젠가 바싹 말라죽을 우담바라 싹이 눈알에 돋아나면 눈이 쏟아진다/ 눈이 추하고 더러운 세상을 하얗게 지우자 텅 빈 공이 보였다// 공이란 나라에는 공처럼 둥근종소리로 한 뼘도 안되는 ‘청춘 사용법’을 강의 중이다/ 수 억 광년의 죽은 시간이 모여 불로장생을 염불 중이다// ‘공수래 공수거’ 유통기한 지난 일기예보 같은 말/ 자신을 텅 비워 꽉 찬 우주를 굴리고 있는 空//

바람 공법 / 이서빈
세상에서 머리카락을 셀 수 있는 존재는/ 바람뿐입니다./ 8만 4천 모공을 넘나드는/ 바람 닿는 곳마다 시원한 숲이 있습니다.// 합법적 편 가르기를 할 수 있고/ 사람의 질서와 진열을 흐트려 놓을 수 있는 권한도/ 오직 바람뿐입니다.// 꽃잎 떨어뜨리며 놀다 산사의 종소릴 흔들고 목어의 마른 천(川)을 공중에 흐르게 하고 푸른 가시로 따끔따끔 찔레덤불에 빨간 사혈침을 놓고 공원의자에 앉은 책장을 넘기고 매미허물도 슬쩍 입어보는 바람.// 맨발로 뛰는 저 바람,/ 빈 집 대문을 덜컹 덜컹 흔들고/ 골목을 둘둘 감고/ 비닐봉지들의 뼈가 되는// 번민의 가시관을 쓴 별빛, 이올리아의 하프*같은 목소리로 어둠을 건너오는, 미세한 촉수로 솜털로 세상을 공명통처럼 부풀려 놓기도 하고 불량스런 객기로 비틀거리게도 하고 어떤 기호로도 표시할 수 없는 갖가지 모습으로 울며불며 우주를 떠도는 바람의 공법.//
*그리스 신화, 바람의 신 이올러스의 악기

첫, 혹은 것들 / 이서빈
첫 잎사귀에 '첫' 이란 상형 문자를 쓰며 고물고물 기어가는 애벌레 발가락 이빨 파르스름한 것들. 첫 잎들 흔들흔들 요람타며 자라서 우르르 지기 위해 말발굽소리 내며 뛰어가는 것들. 첫은 또 다른 햇것 끊임없이 낳아 기르는 저 무지렁들. 첫 잎 연하고 부드러움 자라면 한꺼번에 숨 거두는 소리 달가랑달가랑 나는 것들. 첫사랑 지운 빗소리 파란몸으로 뛰어내리는 소리 방울방울 딸랑이는 것들. 첫순들 초록무게 내려놓으며 몸 늙히는 나무, 발목주름 주름주름 젖어 우는 것들. 첫 행 잃어버린 나무는 글자를 포기하고 밤낮 계절 견디는 법만 살갗 부르트는 것들. 첫울음 울던 날마다 죽고 태어나는 우주의 체위, 지루하게 끝을 보이지 않는 것들. 첫 이란 말 사랑이란 말이 결합하면 아련함 낳는 것들. 첫 이란 돌덩이보다 무거운 말, 전원을 꺼야 하는 것들.//

부패한 비명 / 이서빈
억겁 결빙 시간이 풀려/입 화들짝, 피어났네/ 천 개의 흡반 압착된 입으로/ 바람속에 숨어 카멜레온처럼 변하며 사냥 나서네// 인간 비명/ 교활한 세모 대가리 납작치켜올리며/ 가시덤불 구렁 절벽 탐욕 찾아 독 날름거리다/ 긴 피로 물드네// 수미산같은 욕망 겨자씨에 무너질 줄 모르고/ 멀쩡한 지구 쪼개 가격표 먹여/ 지구 생명체/ 놀랍도록 흉물스럽게 둔갑시켰네/ 바람처럼 스쳐갈 여행지에서/ 조금 더/ 조금 더더/ 신의 영역까지 웃자란 욕망키// 두려움 떨며 죽어간 무수한 짐승영혼/ 바이러스로 환생/ 새벽 눈뜨면 파랗게 자라나는/ 비명 비명 비명/ 비명 집어먹는 유령들이 거리 활보하고/ 매캐한 시간 안개처럼 자욱 깔리는 계절/ 이제 욕망수육 만들어 젓갈 찍어먹어야 할 시간/ 안부라는 말조차 사무치게/ 우리는 인간 사냥위해 꽃잠도 자서는 안되네//

애꾸나라 / 이서빈
끙끙 지구가 앓아 누웠어요/ 열 오르고 숨 가빠 응급조치 기다리지만/ 사람들 무감감무감감 귀닫고 눈닫고 오염 경작 쓰레기산 만들기에 혼빠졌어요/ 겨울호수 고니, 슬프도록 긴 목 순백 가슴 우두커니 윤슬 바라보고/ 굵은바람 굵은주름 여린바람 여린주름 호수에 수 놓으며 음정 고르네요/ 사람들 영혼엔 매마른 허연 눈동자 허연이빨 흉측스럽게 웃고 있어요/ 아무리 매서운 추위 칼바람도 봄을 이긴 적 없어요/ 사람들 고장난 시간 수선하지 않아요/ 끙끙 앓아도 치료하지 않고 방치해요/ 불효예요/ 몇몇 효자 치료 해야한다 목소리 높이면 불효자들에게 야단스럽다 바보 취급당해요/ 사람들 모두 애꾸, 두 눈 다 가진 애꾸가 사는 나라//

2인분 고독 / 이서빈
밤기차에 무작정 몸 싣고 달릴 때/ 달이 함께 동행했어/ 나뭇가지에 걸렸다 산 뒤로 숨었다/ 내 걱정 한 보따리 이고 나뭇가지 뒤로 산 뒤로 숨고 숨으며 보살폈어/ 깜깜한 무덤속에 누워 있던 엄마/ 딸 안부 걱정스러워 달뒤에 숨어서 따라 다니고 있었지// 글썽 글썽, 죽어서도 글썽이는 지독한 사랑// 엄마 며느리 아내/ 파먹기만 하는 기생충 사이서 타인의 삶만 살았지//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는 눈빛에 찔려 늘 타인의 삶을 살다/ 걱정이 팔자라 죽어서도 관뚜껑 열고 나와 근심을 따라 다녔지/ 먹구름 눈 비 바람 그림자로 따라다니며/ 뼛속까지 걱정으로 뭉친/ 기차 기적소리 멈추자 관뚜껑 닫는 소리 덜컥, 나더니/ 관뚜껑 빼꼼 열고 오랫동안 근심을 흔들고 서있는// 죽은 날짜 허공에 던지면 구름이 되고/ 산 시간 허공에 던지면 읽다만 문장 된다는데/ 그 세상도 이 세상도 아닌 중간 쯤 그 어디서/ 수천만 년을 미완성으로 기다릴지/ 귀열고도 울음소리 듣지 못해 자꾸만 뒤 돌아보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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