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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달콤한 복수 / 박태선

부흐고비 2022. 1. 23. 11:19

언젠가 라디오에서 맨발로 다니는 부시맨 같은 원시부족들은 대지의 기운을 발바닥을 통해 온몸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건강하다는 얘기를 듣고, 나도 맨발로 산책을 시도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야말로 작심삼일을 넘기지 못했다. 등산화를 비닐 봉투에 담아 배낭에 넣고 다녀야하는 등 번거로움이 따르기 때문이었다.

​ 그러다가 이번에 텔레비전에서 ‘발’에 관한 다큐를 보게 되었다. 발이 ‘제 2의 심장’이니 ‘인체의 축소판’이니 경락이 어떻고 하는 말들은 그렇다 치고, 나는 33년째 신발만 연구한 전문가의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그의 말에 따르면, 최근 신발의 진화는 맨발로 가려는 경향과 기능을 극대화하려는 경향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전자는 인간이 본래 맨발로 걸었을 때 발의 기능을 되살리려는 것이고, 후자는 쿠션을 활용한 인텔리전트(지능형) 신발로 모래사장을 걷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란다.

​ 나의 산책코스는 1시간 30분 정도의 거리다. 반환점인 정수장 아래 약수터까지 가려면 야트막한 산 3개를 넘어가야하는 만만치 않은 코스다. 그러나 한창 공부하고 책 볼 나이에 한가하게 매일 다닐 수도 없고 해서 하루나 이틀거리로 다니다보니 산책한 날은 온몸이 녹작지근할 정도로 어지간히 피곤하다. 사람이라는 동물의 성질이 또 이상해서 남들이 다 갔다 오는 반환점을 돌고 오지 않으면 왠지 뒷맛이 개운하지 않고, 운동량도 2프로 부족한 느낌이 든다. 1시간 정도로 그만한 운동 효과를 볼 수는 없을까 생각하고 있던 차에, 신발 전문가의 말을 듣고 당장 맨발로 산책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발이 제2의 심장’이라고 말하는 것은 심장에서 발끝까지 흘러온 혈액을 발이 다시 심장으로 되돌리는 펌프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병의 근원이 혈액순환 장애라는 점을 감안할 때, 발의 기능을 온전히 되살리는 맨발로 걷는 효과를 더 이상 말해 무엇 하랴. 더구나 신발이 맨발을 지향하는 추세라니 까짓 것, 맨발로 걸으면 만사형통이 아닌가 말이다.

​ 첫날은 신발을 벗어 들고 중간 지점까지 걸었다. 맨발로 걸으니 발가락들이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그놈들이 악착같이 흙을 움켜쥐려고 하는 것을 발가락 끝에서 느낄 수 있었는데, 인간의 조상인 원숭이가 발을 이용해 나뭇가지에 매달리던 야성을 실감할 수 있었다. 동네 바로 뒷산 약수터에서 발을 씻고 짐에 돌아오니 딱 한 시간이 걸렸다.

​ 하지만 그 다음 번에는 꾀가 나서 신발과 양말을 벗어 쉼터 벤치 밑에다 두었다. 그런데 30분 정도 있다 돌아와 보니 신발이 눈에 띄지 않았다. 근처 벤치에 앉아있는 할머니에게 물어보니 모르쇠였다.

​ 그 신발(운동화)는 2년 전에 짝퉁 가방이나 헌옷, 신발 따위를 늘어놓고 파는 차고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주택가의 한 가게에서 만 원을 주고 산 것이었다. 투박한 등산화를 신고 산책을 하는 게 거추장스럽고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신어보니 실내화처럼 가뿐했다. 상표는 나이키였는데 밑창은 거의 말짱했지만 전체 모습은 꾀죄죄했다. 아마도 전 주인은 신발이 해져서라기보다는 오래 신다보니 싫증이 나고 색깔도 바래서 재활용함에 넣지 않았을까. 주인장은 또 용한 재주로 그런 신발들을 거둬다가 세탁해서 파는 것이고.

​ 신발이 없어진 걸 알고는 서운하기도 하고, 한편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그 신발을 치운 사람은 분명 신으려고 가져간 것이 아니었다. 그 신발은 엿장수한테 가져가 봐야 강냉이 한 됫박은커녕 기껏 한줌이나 주면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다. 하긴 요즘 엿장수도 눈에 띄질 않으니…. 내 생각에 그는 아마 양심머리 없는 누군가가 슬그머니 버린 줄 알고 욕깨나 한 마디 하면서 주워들고 갔을 것이다. 제 딴에는 좋은 일 한답시고 신발을 들고 가다 쓰레기통이라도 눈에 띄면 휙, 던져 넣고 양손을 쓱쓱 문질렀을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의 선행에 만족해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천당은 떼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 그런데 내가 어젯밤 꿈속에서 염라대왕에게 듣기로 그런 착각을 한 사람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일이 부지기수란다. 세상은 작은 선행을 베풀기도 무척 힘든 곳이라는 것이다. 천당을 가려면 우선 착한 일을 하려는 욕심보다 악행을 하지 말 것이고, 무엇보다도 제 물건이 아니면 절대 손을 대지 말라는 것이다.

​ 내 신발을 가져간 양반도 좀 더 현명했더라면 그 자리에서 당장 낼름 집어갈 것이 아니라 하루쯤 더 기다려봤다가 이튿날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때 갖다버려도 늦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상상이나 했을까. 자신의 선행에 시멘트 바닥을 맨발로 10여 분이나 걸어야 하는 애꿋은 고행을 치러야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바닥에 쓸리는 바짓가랑이를 연신 말아 올리며 학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중학교 앞을 지나고 골목골목을 밟아 이윽고 집 앞 차도 앞에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마침 흰 가운을 입은 ‘창신약국’ 김씨가 길가에 바람 쐬러 나왔다가 그런 몰골로 서 있는 나를 뜨악한 눈길로 쳐다보더니, 다시 한 번 위아래를 훑어보고는 ‘저 총각이 장가를 못 가더니, 아예 돌아버렸나’하는 표정을 지었다.

​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고개를 외로 꼬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도 오기가 있는 놈이다. 책 사볼 형편도 안 되는 터에 운동화를 새로 장만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산책을 포기할 수 없는 일. 나는 아예 이참에 파트타임 부시맨이 되기로 하였다. 내 신발을 가져간 사람이 나의 억울한 고행으로 인해 천당엘 가지 못한다면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러니 내가 복수하는 유일한 길은 맨발로 걸어 내 몸의 건강을 증진시킴으로써 선의에서 비롯된 그의 어리석음을 용서해주고 그이 천국행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 것이다.

​ 아직도 시멘트 바닥을 걷는 데에는 익숙하지가 않다. 발바닥 가생이에 거스러미가 일고 엄지발가락 귀퉁이에 물집이 잡히려는지 이물감도 느껴졌다. 그러나 화덕 위의 마른 오징어처럼 발가락이 오그라드는 한여름이 오기 전에 어서 발바닥을 담금질해놓아야겠다. 인간은 어떤 환경에서고 다 적응하기 마련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는 오늘도 휘파람을 불며 바짓가랑이를 걷어붙이고 맨발로 집 밖을 나선다. 달콤한 복수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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