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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겨울 툇마루 / 박혜숙

부흐고비 2022. 1. 21. 09:24

수필문학회 행사가 있었던 다음날 아침, 식당에서 밥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뜻하지 않게 시집 한권을 선물 받았다. 목소리 낭랑한 김 선배가 그 중 한 권을 골라 읽는데 주제가 무겁다. 이런 좋은 아침에는---. 눈은 목차를 훑는다. '칼' 이라던가 '작살' 이라는 섬뜩한 제목을 지나 시선이 딱 멈춘 곳은 '겨울 툇마루', 세상에! 이런 말을 알고 있는 이가 또 있다니. 오래 전에 헤어진 친구를 우연히 만나면 이만큼 반가울까.

때론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이 불씨처럼 살아나는 수가 있다. 그 아침에 그랬다. 가슴 속 저 밑에서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잠자고 있던 추억이 이제 막 허물을 씻은 나비처럼 날아올랐다.

작가는 아마도 볕이 잘 드는 툇마루에 앉아 종이접기를 했었나 보다. 비둘기를 접었다는 것도 같고, 천 마리 학을 접었다는 것도 같고, 눈은 글자를 따라가며 글줄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데 상념이 자꾸 뒤엉킨다. 지난 밤 잠을 설친 탓도, 겨우내 매달린 감기 탓도 아니다. 내 머릿속에는 시처럼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전혀 엉뚱한 그림이 덮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채 바깥으로 툇마루가 있었다. 집안도 아니고 그렇다고 밖도 아닌 그런 공간이지만 겨울이면 볕이 잘 들고 여름이면 또한 시원한 곳이다. 대청처럼 정성을 들여 닦지 않으니 반들거리지는 않으나 그래서 오히려 편한 곳이다. 신을 신은 채로 흙 묻은 엉덩이를 들이밀어도 좋고, 웬만큼 어질러 놓아도 꾸중거리가 되지 않는다.

할머니와 풋콩을 가던 날의 그림에는 추석 명절을 기다리는 설렘도 있고, 배 깔고 엎드려 숙제를 하다가 늘어지게 낮잠을 자던 기억도 있다. 갑작스레 소나기라도 내리면 마당에 널어놓은 곡식을 비걷이도 했다. 선선한 가을이면 책읽기에 좋은 곳이다. 석양에 기대앉아 책 속에 빠져 있노라면 어느 새 땅거미가 내려 글자가 잘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일어나질 못했다.

처마 끝에 달린 고드름이 녹아 내리는 한 낮이면 동생은 온갖 연필을 툇마루에 늘어놓고 부산하다. 제 것은 외발로 만들고, 겁이 낳은 내게는 두 개의 날을 달아 넓적한 썰매를 만들어 주느라고 신이 났다. 어른의 도움 없이도 척척 만들어 낼 때는 오빠 같던 연년생인 동생. 앞 논에는 벌써부터 얼음판이다. 밥 때가 되는 줄도 모르고 썰매를 타다보면 겨울은 짧았다.

이런저런 기억 중에서도 느린 화면처럼 조심스럽게 살아나는 장면이 있다. 볕이 아주 따뜻했던 어느 날 혼자서 툇마루에 앉아 있었다. 그 즈음 나는 수일 동안이나 심하게 앓았다. 감기를 앓던 여느 때와는 달리 어머니는 내 머리맡을 떠나지 않았는데 홍역이 돌았다고 했다. 누구네 집 몇 째 아이도 걸리고 아무개도 앓는다는 두런거림에는 긴장이 실려 있었고, 누구는 이제 한 고비 넘겼다니 다행이라는 말끝에는 희망이 걸려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은 처마 끝에 찬바람을 묻혀 가지고 들어온 할머니가 어머니를 붙잡고 말소리를 낮췄다.

"‘샛말’ 아무개가 잘못 됐다는 구나. 오늘 산에 묻고 왔다더라."

자는 체하면서 듣고 있던 나는 무서웠다. 막연히 알고 있는 죽음이라는 단어보다 '산에 묻고 왔다'는 그 말이 엄청난 공포로 나를 몰고 갔다. 추운 겨울산에 혼자 묻혀 있을 그 아이의 모습이 그려지면서 종일토록 두려움이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심한 열에 시달렸다. 다행히 열꽃이 피었다내리고 차츰 회복기에 들었다. 내 몸이 아프지 않은 것에서가 아니라 가족들의 안도하는 낯빛에서 병세가 호전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처음으로 바깥출입을 허락받은 날, 툇마루에 앉았다. 하늘에 파란 햇살은 눈이 부셨고, 바닥에 내려앉은 볕은 따뜻했다. 찬 공기에서는 비릿한 냄새가 났는데 갓 따낸 오이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나던 싱싱한 냄새 같기도 하다. 숨을 깊이들이 쉬면 빈속에 냉수를 들이켰을 때처럼 쏴한 느낌이 폐부를 통해 몸의 구석구석까지 퍼졌다. 오싹 한기까지 들게 하는 그러한 느낌은 가벼운 흥분을 가져왔다.

그렇다 그건 봄기운이었다. 생명을 느끼게 하는 겨울이 지루해 질 무렵이면 바람이 아무리 차갑더라도 그 속에서 봄의 냄새를 맡을 수가 있으며, 똑 같아 보이는 햇살에서도 그 빛은 다르다. 그건 나니까 알 수 있는 느낌이라고 고집하고 싶을 만큼 각별했다. 다른 계절, 이를테면 봄에서 여름으로 옮겨 갈 때에는 이러한 느낌을 젼혀 감지할 수도 없다. 생동감, 기다림, 그리고 은근한 떨림이 있다. 가물러질 듯 피로감을 느끼면서도 괘 오랫동안 기둥을 의지하고 앉아 있었던 건 시리도록 눈부신 하늘을 보면서 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파트에는 툇마루가 없다. 그러나 남향받이다. 넓은 유리를 통해 베란다 가득 볕이 들어 앉은 그곳에 발판을 놓았다. 툇마루 같은 여유로운 공간 하나 내어 달고 싶어서다. 그곳에서 보면 수직으로 둘러선 아파트 가운데로 하늘이 빼꼼하다. 지난여름 장마 끝엔 눈부시게 흰 목화송이 같은 구름을 보았었다. 무르익은 봄볕이나 짙은 가을 햇살을 즐기는 것도 행복하지만 요즘같이 추운 겨울을 털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때 더욱 오롯한 장소다.

홍역은 한 번 앓고 나면 평생 면역이 생긴다는데 나는 지난해 또 한 차례 그 열병을 겪었다. 남편의 퇴직으로 인해 여느 해 보다도 추운 겨울이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봄을 기다린다. 넓은 거실을 비워 두고 그곳에 앉으면 아직도 기온은 차다. 그럼에도 깊이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뿜으면 답답하던 가슴속이 말갛게 행궈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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