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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장날 / 김해남

부흐고비 2022. 1. 25. 08:59

오일장이 서는 날, 집을 나선다. 고무줄 바지에 스웨터 하나 걸치고 나서면 흙마당에 이는 바람처럼 푸석거리던 마음도 진득하게 가라앉는다.

말 그대로 닷새만에 한번 서는 오일장은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여유와 인정이 있다. 자본의 힘이 시장구조를 장악한 도시의 시장에 비해 아직도 원시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게 시골의 오일장이다.

나즉한 장터로 들어서면 텃밭에서 키운 푸성귀 몇 단으로 전을 벌려 조무래기들의 과자 값이라도 마련하려는 할머니들이 부스스한 머리를 이고 나물단처럼 모여 앉아 봄볕을 쬐고 있다. 눈물겨운 가난도 봄볕이 될 수 있는 게 시골의 오일장이다.

나이 든 농부 한 사람이 꼬깃꼬깃 접은 천원짜리 지폐를 침을 발라가며 세고 있는 철물점 앞을 지난다.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몇 버인가를 셈하여 바꾸어 쥐는 호미 한 자루, 주름 투성이의 손에도 봄 햇살이 내려앉아 따뜻하다. 농부의 더딘 발걸음이 차츰 멀어질 때 어디선가 딸그락 딸그락 밭고랑의 자랑에 부딪히는 호미 끝 날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어릴 적 아버지의 모습이 문득 떠오른다. 설핏 해 기우는 저녁, 체인이 벗겨진 자전거는 늘 아버지와 함께 비틀거리며 돌아왔다. 자전거 손잡이에 대롱대롱 매달려 온 비릿한 생선냄새, 긴 골목을 돌아 집에 당도할 때까지 내 입안에서 달그락거리던 굵은 알사탕의 달디단 맛, 지금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아버지의 자전거 소리는 아직도 내 귀에 쟁쟁하다. 채릉, 채르르릉.

봄볕이 절정인 한낮, 장터는 점심요기를 하려는 장꾼들로 또 한 차례 북적인다. 먼 데 살아 서로의 안부가 궁금하던 사돈을 만나 막걸리 한 사발로는 대접이 소홀해서 자장면 한 그릇을 같이 비우고 나서야 마음이 놓이는 게 우리네 인심, 장터의 풍경은 그래서 정스럽다.

칼국수집 할매의 거동이 오늘은 영 마뜩잖다. 손수 홍두깨로 민 국수 한 그릇에 조밥 한 공기를 곁들이고 그래도 좀 헐하다 싶으면 쌈 한 소쿠리도 슬며시 내놓던 인심이 오늘은 국수 그릇의 양부터 눈대중으로도 좀 야박하다 싶다. 모처럼 먹고 싶었던 칼국수는 목구멍에서 자꾸 걸리적거린다. 괜히 씁쓸해지는 마음에 양념장이 전과 다르다고 티를 잡았더니 할매, 기다린 듯 푸념을 뱉어낸다.

"이느므 국시집도 이제 오래 못할 것 같으오, 저어기 좀 봐아."

할매가 가리키는 곳에는 번듯한 이층 건물이 이제 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뭐 쌈밥집이라나, 서울 양반들이 양념까지 다 만들어 보내준다 그러드만, 시상 참 좋아졌제. 암."

할매집 아랫목에 쓸쓸하게 드러누워 손님을 기다리는 때 절은 방석들이 궁상맞아 보인다. 그래도 할매 손 맛, 누가 따를까, 인사치레 같은 말만 두고 나온다.

휘장이 둘러쳐진 옷가게 앞에서는 이제 파장 덕을 보려는 젊은 아낙들과 상인이 실랑이가 팽팽한 긴장감을 준다. 나는 슬몃 웃음을 흘리며 그 앞을 지나친다. 결국은 처음 흥정한 가격으로 낙찰을 보겠지 뻔한 수작을 보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생선가게 아지매는 오늘도 여전하다. 몇 년 전 남편을 바람으로 여의고 혼자서는 못살아, 나도 따라 간다고 발버둥치더니 세월이 약이라고 했던가, 지금은 아주 헤 풀어져서 과부 아지매라고 해도 웃음으로 받아넘길 만큼 마음도 한가롭다.

"요새 젊은것들 말이야 손바닥에 털 안나나 몰라, 안 그려?"

"왜 아니것소, 생선 도막 다 쳐서 가시까지 발라주지."

내가 입을 맞춰주면 아지매 입심은 기운이 솟는다.

"희한한 세상이제. 언년은 그렇게 퍼질러 놀며 살고 어떤 년은 평생 요로코롬 생선 모가지나 비틀며 살고."

그네의 거친 입심도, 장바닥에서 만난 그와의 귀한 인연도 내게는 언제나 정겹다. 자반 고등어 한 손을 사면 한 물간 가자미라도 두어 마리쯤 덤으로 얹어주는 그네의 마음은 빙어의 속살처럼 맑고 투명하다.

파장 무렵의 장터 거리는 옻오른 듯 벌개진 남정네들과 아낙들이 뒤섞여 또 한번 흥청거린다. 나는 숨겨 둔 사람을 만나러 가듯 슬쩍 뒷길로 빠져든다. 장날이면 으레 찾아드는 곳, 시장통 맨 끄트머리 나즈막히 엎드린 '미친 환쟁이가 사는 집'사람들은 언제부턴가 그 집을 그렇게 부른다.

열려있는 대문 안으로 빠꼼히 고개를 들이민다. 안 마당 한 구석에는 빈 의자만 뎅그렇다. 어딜 갔을까? 요양소, 아니면 정신병원? 장날이면 언제나 폼 나게 앉아 그림을 그리던 화가 아저씨. 여자의 눈을, 입술을, 그리고 코와 이마를 그려 고운 색을 입혀 온전한 여자의 모습으로 살아 나오게 하던 그림.

누굴까? 나는 그림 속의 그녀가 언제나 궁금했다. 괜한 짓인줄 알면서도 오늘은 그림의 실체에 대해 물어 볼 참이었다. 일년이면 절반을 정신병원으로 실려 가는 남자, 그는 정말로 미쳐버린 걸까. 이 세상과 타협할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 그 속에서 숨쉬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살다보면 켜켜이 쌓인 번민이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때면 나 또한 이 세상과의 단절을 꿈꾼다. 미친 화가 아저씨, 또는 장터 거리의 사람들, 그리고 나의 운명은 나란히 함께 가는 철길 같은 것은 아닐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푸성귀 한 줌, 고등어 자반 한 손, 그리고 내 장바구니엔 과부 아지매의 정과 국시집 할매의 남루한 일상과 자갈밭을 일구는 농부의 희망이 소롯이 담겨 있다.


김해남 수필가   <에세이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마당, 그 시간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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