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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뒷방 큰 항아리 / 김사랑

부흐고비 2022. 1. 25. 08:53

지난 유월에 매실을 담가 두고 잊은 듯이 지냈다. 항아리 밑에 거무스름한 것이 고여 있어 손가락으로 찍어 보니 조청처럼 찐득하다. 항아리를 자세히 살펴보니 실금이 나 있다. 아쉬움에 뚜껑을 열자 열여덟 아가씨처럼 탱글했던 매실은 수분이 빠져서 쪼글쪼글하다 못해 초라하기 그지없다.

볕이 좋아 베란다 한쪽에 둔 항아리 뚜껑을 열어 놓는다. 바람도 볕도 제한되어 있어, 마치 시골에서 평생을 지내다 기력이 쇠하여 어쩔 수 없이 도회지 자식들에게 얹혀사는 뒷방노인처럼 애잔하다.

창문을 연다. 가을볕은 성품 좋은 사람처럼 온화해서 좋다던 당신. 가을이면 으레 곱고 청명한 볕을 갈무리하고 싶어 했던 당신이시다. 긴 줄에 매달린 빨래가 만국기 되어 새물내를 휘날리는 날이면, 고추 쪄 널고, 고구마 줄거리 삶아 볕에 펼쳐놓고, 무말랭이 썰어 짚멍석에 내다널기 바쁘셨다. 종종걸음에 말려진 것들은 항아리에 담아 두고 겨우내 밑반찬으로 내놓으셨던 당신. 어깨너머로 보며 자라서 그런지 볕 좋은 가을날이면 이것저것 내다 널며 당신을 추억하게 된다. 광목치마 앞에 두르고 분주한 발걸음이던 당신을 이 계절에는 그냥 뒷방노인으로 놔두고 싶지 않다.

“어무니, 팩 할 건데 같이 하셔.”

“매지근한계 구차너 실타.”

“이거 진짜 조은 겨. 먹는 보약보다 직접 바르니 더 조은 겨. 이거 한번 하구 나믄 아가씨 피부처럼 반질반질하고 탱탱해진댜. 글구 또 알어유. 약수터 할아부지들 줄을 쭉 슬지. 글구 뻔대나는 곳에서 식사하믄 기운이 확 날지두 모르잖어.”

“실타 구차너.”

팩 한 번에 다림질한 듯이 피부가 반질해지기야 할까마는 해드리고 싶다. 누워 계신 어머니의 얼굴 위에 팩을 고루 펴서 발라 드리니, 얼굴에 티껍이 붙은 것 같다며 떼라고 하지만 못 들은 척하며 곁에 누워 어머니의 쪼글쪼글한 손을 잡는다. 따습고 좋다.

봄이면 수건 한 장 머리에 얹고 배추흰나비처럼 밭고랑에서 지내셨던 어머니다. 그녀는 커다란 꿈을 품었던 항아리였다. 그 품에 할아부지 내외를 비롯하여 고욤 열매 같던 자식을 다복하게 품으셨던 분이다. 고명딸이어서 고생을 모르고 사셨다는 당신은, 큰집이 있음에도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셨다. 가족들이 두레반상에 앉아서 수저 부딪히며 식사하는 그 시간을 행복으로 아셨던 분이다.

옛날에는 대부분이 형제가 많았다. 그러나 우리 집은 동네에서 자식이 제일 많은 집이었다. 친구 따라 타 동네에 놀러 가면 어른들의 첫 질문은 으레 몇 남매인가였다. 대답을 하고 나면,

“어유, 글키나 많아?, 그럼 넌 미 번째냐?”

그 말이 듣기 싫어서 꾀를 냈다. 금방 탄로날 것도 아니고 확인될 리도 없으니, 세 명은 빼고 육 남매라고 대답을 해 버렸다. 첫 번째 하얀 거짓말에 친구 부모님은,

“마치맞게 자녀를 두셨구먼.”

그 한마디에 나의 하얀 거짓말은 아홉을 여섯으로 만들고 양심에 가책을 느끼면서도, 그다음부턴 누가 물으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육 남매라 대답을 하며, 상대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땅을 보며 대답을 하였다.

나의 거짓말은 엉뚱하게도 교무실에서 밝혀지게 되었다. 우리 국민학교에는 한 집에 세 자녀가 다니면 육성회비를 한 학생에게는 면제해 주는 제도가 있었다. 몇 학년 누구 누구 동생이 확인되면서 하얀 거짓말은 이내 들통이 나서 혼구멍이 나고, 그 제도가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그날 저녁 거짓말은 큰 태풍이 되어, 오빠 언니들은 나를 달궈대며 몰아세웠다.

“혹처럼 떼어버린 세 명 중에 나도 포함된 겨 아닌 겨?”

연신 물으면서도 어이없어 하던 표정들. 다그치는 오빠 언니들이 미워서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울고 또 울었다. 뭐한 놈이 성낸다고 사랑방에 들어가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들통난 것이 분해서 오래 울었다. 엄마는 방 문고리를 흔들며 어서 문고리 풀라며 부드럽게 달래었다.

“어빠 언니가 니가 워티게 하나 보느냐고 그런 겨. 왜 그라고 있는 겨. 나와서 밥 먹어야지. 왜 생배를 곯고 있어?”

“챙피할 것두, 펄쩍 뛸 것두 하나두 읎서. 형제 여럿이믄 좋은 거지. 배 다른 형제도 아니고 감출 것도 뺄 것두 읎서.”

“엄마는 딸이 하나라서 많이 외로웠어. 나는 읎새지 않구 생기는 대루 모두 다 나서 그려. 을매나 좋아.”

“좋긴 뭐가 좋아 엄마가 내 맘을 알기나 햐?”

매지구름 되어 엄마 속을 더 박박 긁으며 버티다가 엄마 배곯을까 봐서 억지로 먹어주는 것처럼 슬그머니 손을 잡고 밥상에 앉았다. 그 시절에도 자존감을 심어주며 다독여 주던 어머니였다.

여러 자식들은 계절에 나이에 관계없이 시시때때로 어머니를 괴롭혔다. 생이가래처럼 뿌리 내리지 못하고 물결에 이리저리 떠돌던 자식, 화수분인 양 퍼 가기만 하던 자식, 드럼을 두드리며 현란함만 쫓던 자식, 학업에 뜻이 더 있다며 암상떨며 떼쓰던 자식……. 그 마음 다치지 않게 애쓰던 항아리는 용량 초과하여 빠져 나가던 액체조차 막아내지 못하는 항아리가 된 줄도 모른 채 쇠 항아리처럼 생각하고 사셨다.

담가 놓았던 항아리의 매실을 모두 건져내고, 그마저 깨질까 조심하며 항아리를 닦았다. 말끔하게 씻겨진 항아리를 손으로 두들겨 본다. 비록 갈라진 항아리는 피곤에 전 음성이지만, 다른 쓰레기처럼 버리지 못하고 더 깊숙한 자리로 옮겨 놓는다. 맑게 닦인 빈 항아리. 오래전에 어머니가 하셨던 대로 엊그제 말린 것을 집어넣고, ‘무말랭이’라 적어 항아리에 붙이고 나니 마음이 한결 따습다.

저만큼 뒤편에 나앉아 있는 항아리. 금이 간 항아리를 보면 이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란 생각을 갖고 있는 울어머니처럼 슬프다. 이제는 구순을 바라보는 꼬부랑 할머니지만, 그녀가 잉태한 세상이 얼마나 컸었는데, 저렇게 뒷방노인만 고집하신다.

아홉을 여섯이라 하얀 거짓말하던 내 어린 날처럼, 이젠 어머니가 어린아이처럼 잘 삐친다. 그런 어머니를 이젠 내가 어르며 달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아홉 자식들, 바람이 있다면 자주 삐쳐도 좋으니 우리 곁에 오래오래 건강하게 계셨으면 하는 것이다. 꼬부랑 할머니가 된 어머니의 얼굴에서 팩을 떼어내니 뒷방 큰항아리처럼 살결이 매끄러운 게 그리 고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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