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여기저기서 봄꽃 소식이 낭자하다. 매화가 먼저 봄을 깨우니 목련 진달래 산수유가 앞다투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봄에는 꽃소식이 제일 반갑다.
마음이 꽃 같았던 오래전 봄날이었다. 봄꽃이 피기 시작하면 마음이 달떠서 몸살이 났다. 그럴 때는 지리산 서쪽 자락에 있는 구례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봄 길을 여는 꽃과 단아한 고택을 보노라면 갈증 난 꽃바람이 해갈되었다. 꽃눈이 몽실몽실 움트는 하동 십리벚꽃길을 지나 섬진강을 따라가면 제일 먼저 토지면에 있는 운조루가 반겼다.
구름 위를 나는 새가 숨어 사는 집 운조루. 삶 속에 풍류를 끌어드린 고택 앞에 서니 어떤 모습이 펼쳐질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연지를 앞에 둔 솟을대문 양옆으로 뻗은 긴 행랑채가 성곽처럼 당당했다. 240년 전에 99칸이나 되었던 고대광실을 이곳에 지은 이유가 궁금했는데 여기가 금환낙지(金環落地)에 해당하는 남한 3대 명당 중에 하나라고 한다. 대문 홍살에는 이곳에 터를 잡은 류이주가 채찍으로 잡은 호랑이 뼈가 바람에 삭아가면서 아직도 달렸다.
호기심을 안고 대문을 넘었다. 앵두꽃이 활짝 핀 큰 사랑채는 봉당을 연결고리로 해서 ㄱ자로 나누어졌다. 봉당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타인도 열 수 있다)라고 글을 새긴 큰 나무둥치 닮은 뒤주가 있다. 예전에는 대문 가까이 두고 근동에 배고픈 이는 누구라도 주인 눈치 보지 말고 쌀을 가져가라고 했다. 남도 최고의 적선지가였던 이 집의 나눔 정신이 뒤주에 생생하게 남았다. 대대로 자신들의 잇속만 챙기지 않고 가난한 자의 허기도 보듬어주는 인정스러운 행동 덕분에 6.25 때 이 집을 고스란히 지켜냈다.
봉당을 거쳐 웅숭깊은 안채로 들어갔다. 봉황의 둥지처럼 아늑한 안채에 봄 햇살이 가득하다. 남향을 바라보는 안채는 좌우로 부엌과 건넌방이 ㄷ형식으로 연결되었고 앞쪽에는 작은 사랑채에서 이어진 곳간채가 막아서서 완벽하게 ㅁ형식이다. 건넌방 옆으로 뒤뜰로 나가는 쪽문과 곳간이 이어졌고 그 위를 이층으로 만들어서 며느리들이 바깥 구경할 수 있는 방을 만들었다. 그 옛날에 한옥에 이 층을 만들 생각을 했다니 기발한 발상이다.
마당 장독대 옆 목련나무에서 순백한 꽃이 피었다. 꽃그늘 아래에는 봉황알 같은 크고 작은 항아리가 볕살에 반짝거린다. 노비를 다 풀어주고 난 뒤에 왁자지껄하던 가솔들이 흩어져서 그런지 항아리 수가 단출하다. 목련꽃과 장독대, 기와의 처마 곡선이 어우러진 풍경이 유년시절 같아서 아련하게 마음속에 들어왔다.
집도 세월을 비켜가지 못한다. 사랑채와 마찬가지로 안채에도 기둥과 마루가 나뭇결 따라 삭아간다. 몇 겹의 생이 포개어진 적적한 안채의 마루 묵은내를 맡으면서 무수한 생명을 키워내고 떠나보낸 운조루의 옛 영화를 떠올려 보았다. 종부의 거친 손등처럼 집이 윤기를 잃어가지만 덕을 베푸는 정신만은 세상 사람들 가슴속에도 스며들어서 천년만년 이어졌으면.
운조루 근처 우리나라 최고의 장수마을 사도리에 접어들면 쌍산재가 나온다. 그 집 대문 앞에는 우리나라 10대 약수인 당몰샘이 있다. 원래 집안에 있던 것을 마을사람과 나누려고 대문을 고쳐지으면서 집 밖으로 내놓았다. 물을 나눈다는 것은 생명을 나누는 인심이다. 청량한 물 한 모금 마시고 대문으로 들어섰다. 민박으로 운영되는 쌍산재에 숙박하지 않는 낯선 객이 아무 때나 불쑥불쑥 대문을 열어도 친절하게 맞이해주시는 주인분의 마음 씀씀이가 갈 때마다 따뜻했다.
안채와 아래채는 잘 다려진 모시옷처럼 정갈하다. 기웃거리며 둘러보고 뒤채로 가는 돌계단으로 올랐다. 하늘을 덮은 댓숲길을 지나 산수유꽃이 핀 좁다란 길을 따라가니 작은 대문이 나타났다. 대문 안에는 온갖 화초와 나무가 많고 개미허리만큼 좁은 길 위에는 사계절 푸른 사철나무가 아치형 터널처럼 낮게 굽어서 무성한 잎이 커튼이 되어 안을 가렸다. 비밀스러운 그 안으로 들어서면 인계(人界)와 다른 선계(仙界)의 세상이 펼쳐질 것만 같다. 쌍산재 현판이 걸린 이곳은 이집 선조 분이 학동들을 가르치던 서당이었다.
햇살이 퍼지는 고즈넉한 쌍산재 마루 끝에 앉았다. 세상의 소리가 차단된 이곳에 저녁 어스름이 몰려오고 서쪽 하늘에 뜬 초승달이 가슴 속을 헤집는 근심덩어리처럼 나뭇가지에 걸려있을 때 적막한 밤이 도적눈 내리듯이 소리 없이 찾아오면 온 세상의 시간이 멈추어지겠지. 온전히 그 순간에 파묻혀서 하룻밤을 보내봤으면. 밤새도록 마음속에 쌓아둔 수많은 말들을 토해봤으면. 간간이 새소리만 들려오는 서당이 절대자의 경건한 성소처럼 생각되는 것은 봄바람 탓이었을까. 갑자기 처마 끝에 달린 풍경이 땡그랑거리는 바람에 헛된 생각이 산산조각 났다.
뜰 앞 동백나무가 꽃샘바람에 신열이 타올랐는지 빨간 홍역꽃이 숱하게 돋았다. 머지않아 근처 큰 귀룽나무에도 새하얀 꽃이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열리겠지. 비밀의 화원을 걸어 쌍산재 후문인 영벽문을 나서서 사도저수지 앞에 섰다. 푸른 물속에 지리산이 통째로 잠겼다.
지난겨울 예능프로 윤스테이를 이 집에서 촬영했다. 포토존이 많은 쌍산재를 여태 무료 개방했는데 2년 전부터 입장료를 받는다고 한다. 그 대신 차 한 잔은 덤으로 나온다.
아슴푸레한 광양의 산자락을 한낮처럼 밝힌 매화꽃잎이 속절없이 떨어진 후에 화엄사 홍매화가 핀다. 노고단 능선을 타고 내려오는 찬바람이 시샘을 해서 다른 곳보다 한참 늦다. 웅장한 각황전 곁에 선 홍매화가 화사한 꽃등불을 켜 놓았다는 소문이 돌면 프로와 아마추어 작가들이 카메라를 들고 벌떼같이 모여든다. 그들 틈에서 진홍빛 홍매화를 향해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우아한 자태에 짓눌려서 숨이 멎을 지경이다.
홍매화 나무 아래서 하늘거리는 꽃잎을 올려다보았다. 서로의 마음이 닿을 수 있게 가까이 다가온 사람들에게만 아련한 향기를 내어준다. 내 마음 끝에 닿은 홍매화는 모든 것은 한순간이니 가슴 졸이며 복작대지 말고 초연하게 세상을 살아가라 한다. 그게 어디 쉬운 일이냐고 되묻지도 못하고 향긋한 꽃내음에 취해서 한참도록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각황전 축담으로 올랐다가 나한전과 원통전을 오가며 홍매화의 자태를 요모조모 살폈다.
이것은 필시 온갖 번뇌에 시달리는 불쌍한 인간을 위로해주려고 부처님이 천상의 꽃을 훔쳐서 심은 게 분명하지 싶다. 깊고 오묘한 향으로 세상의 시름을 녹여주는 홍매화는 향기로 설법하는 부처님이었다.
산수유가 그득한 산동면으로 접어들었다. 여기서는 어느 마을을 향해도 100년이 넘은 산수유가 지천이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노란 꽃물결이 봄바람을 타고 낮은 산등성이를 살랑살랑 내려온다. 가슴에도 샛노란 꽃물이 스며든다.
산수유 꽃길을 따라 상위마을까지 올라갔다. 마을로 들어가니 낮은 돌담장 안에도 산수유꽃이 자지러지게 피었다. 꽃 속에 파묻혀서 느릿느릿 꽃담길을 걸어 계곡에 닿았다. 계곡 울퉁불퉁한 바위틈에서 제멋대로 자란 산수유가 잠시 쉬었다 가라고 유혹을 한다. 계곡으로 내려서니 시냇물 속에도 산수유꽃이 환하게 웃고 있다.
노란 물감처럼 번진 풍경을 보려고 마을 언덕배기 정자에 올랐다. 발아래에는 지리산 온천이 가물거리고 머리 위에는 성삼재와 정령치 사이에 있는 만복대가 버티고 있다. 이쪽저쪽을 둘러보니 사방천지가 산수유꽃이라 온 세상이 노랗다. 지리산이 품은 천상의 화원, 내 가슴에도 꽃불을 질렀다.
여독을 푸는 데는 온천이 최고다. 지리산 온천수에는 게르마늄과 탄산나트륨함량이 많은 데다 일반수를 섞지 않아서 각종 성인병 예방과 치료에 탁월하다. 여기서는 노천탕이 있는 대중탕에 가도 좋고 하루를 묵을 요량이면 어느 곳에 숙박해도 온천과 사우나를 즐길 수 있다.
이곳도 골이 깊어서 밤이 되면 한기가 들 정도로 꽃샘추위가 설친다. 모든 숙박업소에서는 꽃 마중 온 여행객을 위해서 밤새도록 방이 쩔쩔 끓도록 후한 인심을 베푼다. 때마침 상위마을에서 사 온 고로쇠 수액이 있어서 소매 긴 김에 춤춘다고 더운 방에서 자다 깨다 마시면서 하룻밤을 보냈더니 체증 같은 꽃몸살이 말끔히 사라졌다. 구례는 산 좋고 물 좋고 꽃 좋고 인심 좋은 곳이라서 일상에 지친 스트레스를 풀기에는 안성맞춤이다.
구례는 그 외에도 오산 꼭대기 절벽 끝에 매달린 사성암과 국보급 승탑과 보물급 탑비가 있는 연곡사, 채색과 구도가 뛰어난 극락전 후불탱화와 미스터 션샤인 촬영지인 천은사가 있다. 국산밀 재배지역이라 옛 맛을 그대로 살린 우리밀 수제비와 칼국수도 맛볼 수 있고 다슬기탕과 은어회 등 5일장까지 있어 여행에 손색없는 곳이다.
대책 없이 꽃바람이 부는 날에는 구례로 가라.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서 더욱 서러운 봄날에는 구례로 가라. 난분분한 봄 속을 거닐다보면 세상에 지친 마음이 봄눈 녹듯이 사라지고 굳은살로 박힌 상처는 어느새 아물어서 흔적조차 없어지게 된다. 봄날 구례에 가면 옛이야기를 더듬으며 아득한 시간여행을 하면서 꽃길만 걸어라. 집으로 돌아올 때는 피고 지는 꽃처럼 봄날 같은 청춘을 가슴에 품게 될 것이다.
이번 봄에 구례를 못 간 아쉬움을 지난 추억으로 여행을 대신했다. 다시 만날 구례의 봄을 기다리면서.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언양의 세 가지 맛 / 김잠출 (0) | 2022.04.28 |
---|---|
평온한 오후 / 고유진 (0) | 2022.04.27 |
어깨 너머 / 최원현 (0) | 2022.04.26 |
간 맞추기 / 최희명 (0) | 2022.04.26 |
구름멍 / 이행희 (0) | 2022.04.25 |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