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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조인호 시인

부흐고비 2022. 5. 17. 08:45

조인호 시인
1981년 충청남도 논산에서 태어났다.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6년 《문학동네》 신인상 시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방독면』, 『홍대 앞 금요일』이 있다.


 

나의 투쟁 ㅡ컨베이어벨트 / 조인호
아버지는 정말 유태인이었나// 독일 나치당원이 유태인에게 채운 표지처럼/ 한쪽 팔에 완장을 차고서야 알았다/ 장례식장에서 피어오르는 향이/ 아우슈비츠의 독가스 같다는 것을,// 새벽녘 장례식장 밖 세상의 모든 공장들이 전자레인지 불꽃만큼 소리 소문 없이 뜨거워지네 삼교대 돌아가며 야근하는 공원들의 어깨가 롤러만큼 자꾸만 둥글어지네 검은 밤이 컨베이어벨트같이 흐르네 화장터의 굴뚝은 점령당한 파리의 에펠탑보다 높았을까 한 삽의 석탄처럼 불길 속에 아버지를 던져넣는 가혹한 노동이여 삼 일 밤을 샌 나의 투쟁이여 나는 코피를 흘리네 야근하는 외국인 노동자처럼 혹은 수용소 낡은 침대 위의 고요한 유태인처럼 코피를 흘리네 뚝뚝, 떨어지는 코피는 고체이면서 액체인 환한 액정화면!// 컨베이어벨트 위를 떠도는/ 바코드 찍힌 유골단지들/ 어느새 나는 그 옆에 앉아 나사를 조인다/ 나치지구에 수용된 채 포로로 일하던/ 아버지의 노동을 지탱하던 허리띠 같은/ 컨베이어벨트/ 장례식장 – 아우슈비츠의 대량학살 속,// 아버지는 정말 유태인이었나?//

​내 친구의 부대는 어디인가 / 조인호
내 친구는 군대 가기 싫어서 하루 종일 통조림만 먹었다 우적우적 먹고 또 먹어서 뚱뚱한 참다랑어처럼 잔뜩 배가 불렀다 입영통지서가 날라오던 날 마침내 내 친구는 사라졌다 식탁 위 고요한 통조림 하나 달랑 남겨두었다 내 친구의 부대는 어디인가 나는 궁금한 마음에 훈련병의 편지를 뜯어보듯 통조림 뚜껑을 서걱서걱 잘라내었다 뻥 입 뚫린 통조림 속에는 국방색 모포 같은 새벽이 들어 있었다 훅 땀냄새가 풍겼다 소금에 절여진 내 친구의 군가 소리가 찌디짜게 울렸다 사방이 철책으로 둘러싸인 밀봉의 연병장에서 완전무장 구보를 하는 내 친구가 있었다 손에 들린 소총의 총구만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내 친구의 눈빛, 캄캄한 물음을 둥글게 가둔 저 진공 상태의 눈빛, 생선 눈깔! 나는 그만 통조림을 닫아버렸다 뻥 입 뚫린 통조림의 이야기를 막아버렸다 담배를 사러 편의점에 갔다 그곳에서 나는 보았다 행군하는 병사들처럼 줄지어 서 있는 통조림들을 보았다 서로 다른 통조림 속마다 어린이 같은 병사들의 편지가 신선하게 들어 있었다 어떤 통조림 속에선 누군가의 잘려나간 검지 하나가 까딱까딱 깡통을 두들기기도 했다 나는 몇 개의 통조림을 샀다 새벽의 거리를 지나는 동안 통조림들은 비닐봉투 안에 담겨 달그락거렸다 그 둔탁한 이야기를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뻥 입 뚫린 통조림은 식사 내내 말이 없다//

철가면 / 조인호
철과 장미의 문명 속에서 그는 용접공으로 일했다 철가면을 쓰면 산소용접기 밖으로 장미처럼 피어오르는 불꽃이 보였다 그는 철과 장미를 사랑했다 불이 붙는 독한 술을 즐겨 마셨고 쇠못을 씹어 먹는 철인이었다 중금속에 중독된 그의 눈은 세상이 온통 붉은색 셀로판지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용접 불꽃이 그의 눈을 멀게 만들수록 세상에 없는 단 하나의 붉은색을 지닌 철의 장미를 그는 볼 수 있었다 그의 피는 붉은 철로 철철 넘쳐흘렀고 그는 조금씩 녹슬어갔다// 그의 철근콘크리트 지하방은 습하고 어두운 철가면 같았다 철가면은 심해 속으로 가라앉는 자물쇠처럼 무거웠다 강철 수면(水面) 위로 드러난 그의 얼굴은 점점 철가면을 닮아갔다 그는 눈을 뜰 때마다 철가면을 쓴 채 욕조 안에 몸을 담근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파이프들이 붉은 녹을 떨어뜨리며 삐걱거렸다 욕조 속의 물이 용광로처럼 부글부글 끓었다 그의 알몸은 장미 잎 같은 붉은 화상 자국투성이였다// 그는 일생 동안 불꽃만을 바라본 몽상가에 가까웠다 그는 용접 불꽃 속에서 살아 있는 구멍들을 보았다 오, 입 벌린 구멍들 모음들 비명들이 불타오르는 지옥을 보았다 그 구멍 저편에선 아름다운 붉은 장미의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의 두 눈엔 콘센트 구멍 같은 어둠이 고여갔다// 그는 철가면을 쓴 채 홍등이 켜진 도살장 골목을 붉은 쇳물처럼 흘러다녔다 도살장 골목 어둠 저편 번쩍거리는 칼날들이 뱀의 혀 같은 용접 불꽃처럼 쉭쉭거렸다 붉은 장화를 신은 인부들이 소 머리가 가득 쌓인 수레를 끌고 다녔다 도살장 담벼락엔 덩굴장미가 대퇴부 핏줄처럼 번지고 있었다 담벼락 너머 높다란 송전탑에서 철근들이 금속성의 동물 울음소리를 내며 뒤틀렸다 도살장 시멘트 바닥 물웅덩이 위로 뜨거운 김이 피어올랐고 고압전류 같은 찌릿찌릿한 비가 내렸다// 그는 송전탑 꼭대기 위로 덩굴장미처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번쩍, 가시철조망 같은 번개가 송전탑에 내리꽂혔다 고압전류 속에서 그는 자신의 철가면과 함께 흐물거리며 녹아들었다 철가면이 송전탑의 철근 속으로 들러붙고 있었다 송전탑 밑 지상의 사람들이 붉은 뼈를 드러낸 채 해골처럼 웃고 있었다 번개가 번쩍거릴 때마다// 송전탑은 거대한 한 송이 붉은 장미로 피어났다//

뉴키즈 온 더 블록 / 조인호
1/ 오늘 소년의 45구경 매그넘이 죽었다. 그는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처럼 허공에 가느다란 목을 걸었다 그는 알코올중독자 노인이었고 베트남전(戰) 참전용사였다. 그의 사타구니 사이 몰락한 이데올로기처럼 축 처진 45구경 매그넘 아래// 한 소년이/ 탄피처럼, 쪼그려 앉아 뜨겁게 울고 있을 때/ 차르르, 탄창이 돌아가듯/ 회전하는 얼굴들 탄알들 공포들//
2/ 재개발 지역 옥탑방에서/ 전기가 끊긴 방구석에서/ 납처럼 무거운 어둠 속에서// 소년은 녹슨 면도날로 머리카락을 밀었고/ 소년의 입은 발간 마스크로 침묵했고/ 소년의 한 손에 쇠파이프가 들려지던 순간/ 소년은 변형됐다// 시나브로, 소년은 생존했다/ 척후병처럼 적에게 발각되지 않았다/ 옥탑 난간 위 붉은눈비둘기를 사냥했고/ 물탱크 속에 기어들어가,/ 여러 날을 그 속에 잠입했다/ 옥탑 위, 상공에서/ 거대한 타워크레인 골리앗이/ 지상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 강철의 거신병기(巨神兵器)가/ 블록들을 끌어올리던/ 상승하는 노동의 나날 속//
3/ 죽은 자들이 온다/ 소년의 인계철선을 무너뜨리며 참전용사들이 온다/ 소년은 단독자로서 죽은 자들 앞에 우뚝 선다/ 타워크레인처럼 쇠파이프를 머리 위로 번쩍, 끌어올리며/ 소년은 기능(機能)하기 시작한다/ 쇠파이프로 방패 위를 내리찍을 때마다/ 소년의 머리 위로/ 회전식 탄창 같은 궤적이 돌아간다/ 지하 터널 속 인부의 곡괭이처럼/ 관자놀이 때리는 소리 들린다/ 매 초 매 순간/ 소년은 단 한 발의 실탄처럼/ 실존했으므로//
4/ 타워크레인 꼭대기 위한 소년(少年)이 서 있다// 소년은 원숭이 두개골을 닮은 스킨헤드다 빨간 마스크를 쓴 채 한 손에는 차갑고 무거운 쇠파이프를 들었다. 서울특별시는 체스판처럼 혹백의 분노로 불타올랐다. 화르르 화염에 휩싸인 프로판가스통이 굴러다니는 거리 속// 45구경 매그넘의 방아쇠 같은/ 크레인 갈고리가/ 소년들을 하나둘 지상으로부터,/ 번쩍번쩍 들어올리고 있었다//

스스로 재래식무기(在來式武器)가 된 사나이 ㅡ불발탄의 뇌(腦)관은 '빵과 우유'를 생각한다 / 조인호
1/ 스킨헤드 소년이 빨간 마스크를 쓴 채 N서울타워 꼭대기 위에 서 있다// 철탑 밑으로 케이블카가 멈춰 있다 지상에서, 불발탄을 어깨에 짊어진 사나이가 우뚝 선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을 향하여 육탄들격한다// 해발 479.7m/ 철탑 101m/ 탑신 135.7m// 거대한 구름기둥과 불기둥 속,/ 스킨헤드 소년은 탑이 움직이는/ 두렵고 경건한 음성을 들었다// 그 탑이/ 대륙간탄도미사일처럼 상승하는 것인지/ 우르르 땅속으로 무너져내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 탑이 사라진 후/ 원숭이 두개골을 닮은 스킨헤드 소년은/ 지상(地上)에 고아처럼 버려졌다//
2/ 11번가 철근콘크리트 공사장,/ 그때 인부들이 불발탄을 발견한 것은 한낮의 무더운 폭염(暴炎) 속이었다. 포클레인이 붉게 녹슨 그것을, 땅속에서 서서히 퍼올렸을 때// 붉게 탄 석탄 같은 광대뼈와/ 횡단철도 같은 쇄골을 가진/ 한 사나이의 어깨 위,// 묵직한 해머처럼 얹혀 있던 불발탄이여// 한낮의 태양 아래/ 붉게 녹슨 그것이, 한 사나이의 어깨 위에서 역사하고 있었다//
3/ 보아라, 불발탄을 어깨에 짊어진 채 북(北)으로 행군하는 한 사나이가 있다// 그는 스스로 재래식 무기가 된 사나이다/ 그는 철과 화약을 먹고 회귀하는 사나이다/ 그는 외부의 충격에 분노하는 사나이다// 그가 군사분계선(軍事分界線)을 넘어서자,// 그곳에 콘크리트의 대지가 무한궤도처럼 영원히 펼쳐져 있었고/ 밤하늘의 별빛은 가시철조망처럼 숭고했다// 비로소/ 뱀과 우유가 그려진 정물화처럼/ 사나이는 노동을 멈췄고// 지평선 끝에서 원시의 두개골처럼 새벽이 밝아올 때// 사나이는/ 불발탄의 뇌관을/ 해머로 내리쳤다//

형상기억합금(形狀記憶合金) / 조인호
1/ 서울 메트로 지하공구 속에서 누군가 모닥불을 피운다 그는 동굴 속 원인(原人) 같다. 터널 시멘트 벽에는 원인의 손모양이 아우성치듯 찍혀 있다. 오래전 공장에서 볼트와 너트를 조이던 그가 해고되던 날 그는 손에 쥔 몽키스패너를 뉴턴의 사과처럼 툭, 떨어뜨렸다 그날 그는 태곳적 원인을 발견했다. 시간의 컨베이어벨트가 거꾸로 가동되기 시작했고 그는 퇴화해버렸다// 캄캄한 터널 속으로 원인은 걸어들어갔다. 지하철역에서 그가 찾은 것은 소방방재용 국민방독면이었다. 터널 끝 어둠 속에는 조용히 그를 기다리는 것이 있었다 맥박처럼 다가오는 원인의 발소리를 온몸으로 흐느끼고 있는 것, 그것은 그가 싸워야 할 괴물 같은 형상들 기억들 합금들// 방독면을 쓴 채/ 터널 끝 형상기억합금과 조우하던 순간/ 거대한 기계 앞에/ 원인은 알몸으로 우뚝 서 있었다// 기계가 달려들 때마다 그는 도구를 휘둘렀다 기계의 비명이 스파크처럼 파지직 튕겨나갔다 어둠 속 불꽃 속에서 생명이 생산되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기계와 싸울수록 마른 뼈 같던 육체는 몽키스패너의 턱관절처럼 강력하게 발달해갔다 도구를 내리치는 노동 속에서 정신은 아킬레스건까지 떨렸다. 혁명가처럼 피땀으로 점철된 육체는 실천했다. 매일 밤 계속된 기계와의 싸움 속에서 그는 움켜쥔 손에서 도구를 놓지 않았으므로// 보라, 벼락처럼 떨어지던/ 몽키스패너의 궤적 속/ 고통 받으며 절규하는 기계들을,/ 마지막 기계가 쓰러져 죽던 밤/ 원인은 마침내 불을 발견했다//
2/ 그가 터널 밖으로 걸어나왔을 때 기계의 무덤이 붉은 철의 산을 이루고 있었다. 붉은 철의 산 위로 거대한 자석 구(球) 하나가 달처럼 떠 있었다. 기계들이 공중으로 하나둘 빨려 들어갔다. 스르르 기계로부터 이탈된 볼트와 너트가 모빌처럼 둥둥 떠다녔다. 서서히 동쪽 저편 하늘 끝에서// 붉게 녹슨 몽키스패너가,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무지갯빛 광석 rainbow stone / 조인호
오늘 밤 누군가는 오함마를 닮은 어느 영혼에/ 대하여 상상해야 한다/ 오함마를 들어올리는 상상력으로 맨홀 뚜껑을/ 들어올린 한 사나이에 대해서/ 그 어깨 위에 얹힌 오함마에 대해서 오늘 밤/ 누군가는 상상력으로/ 그 노동을 상상해야 한다//
그가 맨홀 속에서 몇 해를 살았는지 알 수 없다. 그가 지하배관 속에서 붉은눈쥐를 잡아먹으며 생존했는지 방진마스크를 썼는지 축축한 양서류 같은 우비를 걸쳤는지 오함마를 어깨에 짊어졌는지 알 수 없다. 낮은 포복으로 좁은 파이프 속을 통과하는 지하인에 대해서 국회의사당의 속기사가 어떤 기록을 남겼는지 알 수 없다// 백색증(白色症)에 걸린 사나이가 온몸에 붉은 페인트를 끼얹고 맨홀 속으로 투신했는지 알 수 없다. 오함마를 짊어진 그가 어느 파이프 속에 꾸역꾸역 처박힌 돼지 한 마리를 발견했는지 알 수 없다 그 순간 돼지에게 오함마가 필요하고 그의 손엔 오함마가 들려 있었을 뿐// 붉은 정수리 위로/ 오, 침묵 같은 오함마/ 한 대 내리친 후/ 오함마를 어깨에 짊어진 채/ 그는 돼지로부터 떠난다// 시장 좌판 뾰족한 생선 머리가 어느 쪽을 향해 누웠는지 알 수 없다. 어느 파이프 속에서 삐라 한 장 해파리처럼 휘적휘적 떠내려왔는지 알 수 없다. 어느 파이프 끝에서 그가 밀봉된 콘크리트 벽과 맞닥뜨렸는지 알 수 없다 그 순간 오함마를 투석기처럼 휘두르던 그를 상상할수록// 강력하게 벽화가 그려진다/ 습기 찬 콘크리트 밖으로/ 쩍쩍 갈라져나오던 금/ 그 수천의 나뭇가지 사이로/ 무지갯빛 광석이/ 그 천연의 빗살을 드러낸다// 이윽고 달이 지구의 그림자를 벗어났는지 알 수 없다 콘크리트 벽이 뚫리자 그가 땅굴을 파고 비무장지대를 통과했는지 알 수 없다 붉은 흙벽을 타고 그가 지상으로 기어올라갔는지 알 수 없다 우라늄 같은 그의 눈동자가 어떤 풍경에 노출됐는지 알 수 없다. 지평선 멀리 떨어지던 붉고 거대한 오함마여// 오, 오함마를 생각하는 밤/ 지하실 식탁에 홀로 앉아/ 누군가 녹슨 통조림 뚜껑을 따고 있다/ 전구알이 깜빡거린다// 유리구 안에는 하늘도 땅도 언덕도 벽도 집도 없었다//

설국열차(雪國列車) / 조인호
이윽고 달이 지구의 그림자를 벗어난다/ 콘크리트 벽이 뚫리자 그가 땅굴을 파고/ 비무장지대를 통과한다 붉은 흙벽을 타고/ 그가 지상으로 기어오른다 우라늄 같은/ 그의 눈동자가 어떤 풍경에 노출된다/ 지평선 멀리 떨어지던 붉고 거대한/ 오함마여,//
1/ 불가사의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드넓게 펼쳐진 설원(雪原)의 끝// 붉고 거대한 오함마가, 지상으로 침몰하고 있었다// 사나이는 국경의 끝에서 눈 더미 위에 엎드린 채 소리굽쇠처럼 떨고 있었다. 국경의 밤 속으로, 사나이는 흐느끼며 캄캄히 담금질돼갔다// 철의 사나이가,/ 대지 위에 누워 구소련(舊蘇聯)처럼 지워지고 있었다// 묵직한 해머처럼/ 침묵한 채/ 밤의 새하얀 밑바닥으로/ 파묻혀갈 때// 보아라, 사나이는 의식의 흐름 끝에서 붉게 녹슨 거대한 보일러를 만난다.// 그 순간,/ 사나이의 의식의 흐름이 증기처럼 뜨거워지고/ 사나이가 강력한 기관처럼 가동되기 시작할 때// 사나이는 붉게 녹슨 거대한 철의 바퀴를 굴린다// */ 보라 속...... 증기기관차처럼 국경을 달리는 사나이여// */ 대륙횡단철도처럼 의식의 흐름 끝에는 국경이 없으므로// */ 그 노동을 상상하는 철의 상상력으로.......// */ 한 인간을 상상하는 철의 견인력으로.........// */ 나는 이 불가사의한 땅 끝까지 덜컹덜컹 끌려왔으므로//
2/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1) 기관실 밖으로/ 검붉은 삽을 어깨에 짊어진 채/ 방독면을 쓴/ 한 사나이가 걸어나온다.// 붉게 탄 석탄 같은 광대뼈와 횡단철도 같은 쇄골을 가진 화부(火夫)여,/ 국경의 밤./ 내가 대지 위에 무한의 철도를 철커덩 철커덩 놓듯/ 그 고독한 노동을 상상할수록,// 그 사나이의 운동에너지는 위험하다.//
1) 1935~1948年, 소설 『설국(雪國)』

카프카의 작은 술집 / 조인호
이태원 역, 뒷골목을 걷다보면 네온사인/ 흐릿한 카프카의 작은 술집을 만난다./ 그 술집 어디에서 카프카는 찾아볼 수 없으나/ 좁은 지하계단을 내려가 침침한 까마귀 날개/ 같은 커튼을 넘기면 테이블에 턱을 괴고/ 술잔을 기울이는 그들이 있다./ 두 다리를 꼬고 앉았지만 다리 많은 지네마냥/ 지퍼는 하복부를 악물고 늘어져있다./ 악몽의 밤마다 아름다운 변신을 꿈꾸는 그들은/ 여장남자, 그들이 마시는 술은 캄캄한 기름 같아서/ 액체이면서 불타오른다./ 그 불길 속에 자신의 인면피를 남김없이/ 태운다 검은 연기가 드리우는 그들의 얼굴은/ 여자이다 남자이다 하지만 언제나/ 흐릿하다 테이블 위 잔을 내려놓을 때마다/ 술은 출렁거리며 회오리 모양 어딘가로/ 점점 빨려들어가듯 사라진다./ 술잔 끝 테두리에 묻어 있는 립스틱의 흔적/ 어둡다 두 갈래로 포개진 입술은/ 서로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듯/ 좁은 지하계단을 벗어나려 까마귀 날개처럼/ 푸드덕거리는 뒷골목에는,/ 원형의 테이블 같은 척추로 앉은 그들이 있다./ 자신의 사타구니 사이로/ 거대한 물음표처럼 고개를 파묻은 채/ 점점 둥글어지는 한 인간이 있다./ 그는 알이 되어가고 있던 것이다.//

초능력 / 조인호
나는 벤치에 앉아 있다./ 다리가 고장 난 벤치. 그래서 조금은 기우뚱하게./ 앉아 있었지./ 고양이 한마리 지나간다. 줄무늬 잡종. 귀여운 것./ 아, 귀여운 고양이를 오래/ 오래 보았더니 녀석은 줄무늬만 남기고 쓱 빠져나간다./ 공간에 고양이만 한 창살이 남았다./ 영영 벤치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아./ 나는 무슨 훌륭한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우쭐해져./ 공원 벤치는 조금 기우뚱하고,/ 옆에 거리 두기로 앉았던 사람이 일어선다./ 있는 줄도 몰랐다./ 당신이 떠나던 순간/ 벤치는 다시 기우뚱거리고. 나는 흔들린다./ 아주 잠시.// 그때, 지진이 왔다.// 구겨진다./ 나는 스타일에 신경 쓰는 남자./ 멋진 포마드 컷 스타일만 남았지./ 그것은 툭 튀어나온 풀포기 같다./ 누군가 발에 걸려 제발 좀 넘어졌으면 해./ 그런 생각을 하니까 공원 바닥에 눈 똥이 된 기분이다./ 천사가 가위로 구겨진 사람들을 오려낸다. 아이처럼. 잔인하게./ 나는 뺨을 주기적으로 맞는 사람. 뺨을 맞았을 때/ 꽃이 흔들리는 게 좋았다. 무슨 초능력처럼./ 나는 가능해진다.// 초능력을 설명할 수 없지./ 유리 겔러는 코로나 백신을 맞으면서도 숟가락을 구부렸다./ 미친놈. 그게 초능력이지./ 숟가락을 어떻게 구부렸나요?/ 내게 설명을 요구하는 것들./ 공원에 줄 세워놓고 한 명씩 차례대로 뺨 때려주고 싶다./ 너도 흔들려봐./ 꽃처럼./ 숟가락처럼.// 섹스는 스타일이지./ 내 남성호르몬보다 지구의 석유가 먼저/ 고갈될 줄 알았어./ 진심이야./ 이제 난 도무지 흔들 자신이 없다./ 흔들려야지만 가능한 것 중/ 섹스가 제일 좋겠지./ 관에 누운 당신을 흔들고 싶었지만,/ 흔들어서 뭐 하겠니.// 당신과 해변에 발 담그고/ 앉아 있으니 참 좋다./ 파도가 발을 밀어낸다. 이봐, 더러운 발 치우고 모래사장 밖으로 꺼져./ 거대한 고래 한 마리 백사장에 누워 있었다./ 있는 줄도 몰랐어. 그냥 모래언덕인 줄 알았지./ 그 덩치로는 조금도 흔들리지 못한다./ 이 착한 해변의 사람들 좀 봐./ 줄지어서 플라스틱 바구니로/ 신부 견습생처럼 성수를 뿌리며/ 눈물 흘리지./ 우리 때문에 불쌍한 고래가 죽어가./ 오늘 태어나 처음 본 고래. 놓칠 수 없지./ 고래야#미안해#플라스틱#아웃/ 고래는 바람 빠진 열기구처럼 구겨진다./ 교활한 고래./ 해변에 빠져 죽다.// 빠져 있지,// 공원을 둘러싼 담장에 벽돌 몇 개./ 자세히 보면 벽돌이 빠진 틈이/ 그래픽처럼 깨져 있다./ 무슨 능력일까?/ 이 공원의 프로그램에서 벗어난 녀석의 능력./ 나는 어깨 한쪽이 그래픽처럼 이미 깨져/ 무너지고 있다는 걸./ 누군가 날 흔들며, 유리 겔러의 숟가락처럼/ 구부리고 있었다는 걸.// 이게 바로 초능력이지.//

장미의 요일 / 조인호
가시에 목을 찔린 후 나는 우산을 쓴다/ 활짝 펴진 우산이 나의 목을 베어먹는다/ 달랑 남은 나의 몸만이 밤 골목을 걷는다/ 네온 간판 불빛을 받아먹는 붉은 핏방울/ 닫힌 너의 창문에 비스듬이 기대다가/ 달아오른 빰을 유리에 문지르며 주르륵,/ 흘러내린다 창문 너머 너는 칼로 도마 위를/ 내리친다 초인종이 울리고 축축한 나의 몸만이/ 절뚝거리며 들어와 도마 위로 가지런히 눕는다/ 송골송골 가슴 밖으로 핏기가 어려 있다/ 잃어버린 나의 얼굴 모양을 기억하던 손/ 이제 칼자루를 잡은 너의 손, 허공에 장미 잎/ 같은 궤적을 남기며 내리칠 때마다/ 창 밖을 서성이는 얼굴 빈혈을 앓듯 창백하다/ 도마 위 수북이 쌓여가는 장미 잎 붉은 무덤/ 너의 무덤은 향기로워서 목 없는 나의 몸은/ 움찔움찔 경련한다 오래 길들인 칼날 끝/ 물들어가는 붉은 비명 이마를 만지며 기절/ 하고 싶었지만 목 없는 몸뿐이다/ 잠시 비바람이 창문을 두들긴다/ 달력을 걸어둔 창틀에 박힌 녹슨 못/ 한 송이 장미마냥 피어 있다 둥글게/ 꽃봉오리가 가두어놓은 요일은 붉게 칠해진/ 비 오는 일요일 가시에 목이 찔린 후/ 당신은 우산을 쓰는가/ 가슴에 붉은 장미를 안고 우산 아래/ 목 없는 당신의 몸만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밤길을 걸어간다//

리틀보이의 여름방학 ㅡ21세기 소년에서 20세기 소년에게로 / 조인호
*// 내 별명은 리틀보이랍니다. 다른 꼬마들처럼 꼬추 만지는 게 버릇이라서 곧잘 부모님께 꾸중을 듣곤 합니다. 친구는 가끔 내게 이런 말을 합니다. 리틀보이! 내 꼬추는 우리 아빠가 잡아온 메기만큼이나 크다구! 무척이나 메기를 좋아하는 녀석이었죠. 불쌍하게도 그날 밤 녀석의 엄마가 아빠의 메기를 먹어버렸지만 말이에요. 나 리틀보이는 키가 작아서 학교에 가면 맨 앞자리에 앉습니다. 내 꼬추만큼이나 짧은 거리에 언제나 선생님이 계십니다. 나 리틀보이처럼 키가 작으면 꼬추를 함부로 만지지 못해 참 불편합니다. 그래서 내 별명은 리틀보이랍니다.//
*// 오늘은 나 리틀보이의 즐거운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지구의 어떤 꼬마들보다도 꼬추만지기를 좋아하는 나 리틀보이는 스쿨버스를 타고 집으로 갑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울립니다. 사이렌 소리는 선생님 몰래 나 리틀보이가 지퍼를 열고 꼬추를 만지작거릴 때마다 양배추머리 짝꿍이 앙,하고 터뜨린 울음처럼 시끄럽습니다. 스쿨버스는 도로 한가운데 멈춰 섭니다. 창밖으로 막대사탕처럼 서 있던 사람이 피식, 쓰러집니다. 막대사탕은 들것에 실려 갑니다. 자세히 보니 머리통이 빨간 피로 물들어 있습니다. 저 막대사탕은 딸기 맛인가 봅니다. 막대사탕은 들것 위에 누운 채 막대사탕을 손에 쥔 개구쟁이처럼 키득키득 웃고 있습니다. 도로엔 놀이공원에 놀러 갔을 적에 귀신의 집에서 보았던 하얀 연기가 나직이 깔립니다. 방독면을 쓴 군인 아저씨들이 길바닥에 쓰러진 사람들을 트럭에 옮겨 싣습니다. 그때 어떤 녀석이 우리 아빠다! 아빠, 하고 소리칩니다. 녀석의 검지 끝에 누워 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고 재빨리 바나나 껍질처럼 널브러집니다. 나 리틀보이가 꼬추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보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던 스쿨버스 운전사 털보 아저씨도 핸들에 머리를 박고 죽은 척을 합니다. 버스 앞 유리창은 지리시간에 보았던 세계지도 모양으로 금이 쩍쩍 갈라져 있습니다. 나 리틀보이의 나라는 어디쯤일까요? 나 리틀보이의 꼬추처럼 너무 작아 보이지 않습니다. 라디오에선 데이트 약속시간에 늦은 나 리틀보이의 막내 누나 하이힐처럼 높고 가는 목소리가 다급하게 흘러나옵니다. 살짝 열린 창문 틈새로 비릿한 피 냄새가 풍깁니다. 친구 녀석의 엄마가 또 메기를 맛있게 잡아먹나 봅니다. 광장에 삐죽 솟은 시계탑의 시곗바늘은 자동차 바퀴에 깔려 죽은 이웃집 치와와마냥 뾰족하게 멈춘 채 굳어 있습니다. 건물 옥상 커다란 텔레비전에선 뉴스를 방영합니다. 국민 여러분, 오늘은 민방위 날입니다……라는 글자가 달팽이보다 느리게 기어갑니다. 달팽이가 겨우겨우 화면 끝으로 사라져갈 때 즈음 두 번째 사이렌 소리가 울립니다. 깜짝 놀란 나 리틀보이는 바지 지퍼를 올립니다. 다행히 오늘 양배추머리 짝꿍은 감기에 걸려 학교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가 품에 들고 다니던 양배추인형의 눈동자 같은 신호등이 반짝,하고 깜빡이자 도로 위 차들이 쌩쌩 달리기 시작합니다. 어느새 하얀 연기는 사라지고 스쿨버스 창밖으로 주말아침마다 재방송하는 만화영화 같은 낯익은 마을 풍경이 펼쳐집니다. 언제나처럼 과일가게는 아줌마는 과일을 팔고 복권가게 할머니는 꾸벅꾸벅 졸고 스쿨버스 운전사 털보 아저씨는 멍청한 창작동요를 틀어 우리를 괴롭힙니다. 쨍쨍한 태양 아래 나 리틀보이는 스쿨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 나 리틀보이는 지하 방에서 삽니다. 나 리틀보이는 불 꺼진 지하계단을 따라 내려가며 스위치를 찾습니다. 캄캄한 바지 속에서 꼬추를 찾는 건 쉽지만, 스위치를 찾는 건 수학문제처럼 어렵습니다. 손끝엔 끈적끈적한 거미줄만 자꾸 묻어나옵니다. 나 리틀보이의 썩은 어금니처럼 냄새 나는 검은 벽을 더듬거릴수록 문득 나 리틀보이는 이 오래된 방공호가 조금씩 기억나기 시작합니다. 멀리서 휘파람 소리가 들립니다. 천장이 흔들,흔들립니다. 콘크리트 조각들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집니다. 나 리틀보이가 호주머니에 넣고 깜빡한 초콜릿처럼 흐물흐물 불에 탄 가족사진이 보입니다. 나 리틀보이는 주섬주섬 바닥에 떨어진 썩은 비스킷을 주워 먹습니다. 배급이 끊긴 지 이미 오래입니다. 지하 방공호는 늪지처럼 매캐하고 습하고 더럽습니다. 늪지 속에서 나 리틀보이의 조그만 메기 한 마리가 꿈틀거립니다. 나 리틀보이는 늪지에 발을 담그고 앉아 메기를 만지작거립니다. 나 리틀보이가 메기를 쪼물쪼물 만지작거릴수록 자꾸만 기분이 좋아지는 메기가 쑥쑥 자라납니다. 쑥쑥! 방공호 천장을 뚫고 불뚝 튀어나온 메기가 쑥쑥 자라납니다. 쑥쑥! 구름 끝에 머리가 닿는 거인처럼 메기가 쑥쑥 자라납니다. 쑥쑥! 나 리틀보이가 사는 작은 마을과 쑥쑥! 작은 도시와 쑥쑥! 작은 나라를 뒤덮고 쑥쑥! 지구 밖까지 메기가 쑥쑥 자라납니다. 쑥쑥! 저 먼 우주 끝까지 메기가 쑥쑥 자라납니다. 쑥쑥! 빛보다 빠른 타임머신처럼 메기가 쑥쑥 자라납니다. 21세기 소년에서 20세기 소년에게로. 키가 쑥쑥! 자라는 메기에게. 나 리틀보이는 손을 흔들어 작별인사를 합니다. 나 리틀보이의 메기야, 안녕히 잘가!//
*// 나 리틀보이는 그때 죽었다/ 거대한 폭음과 빛과 태풍과 열과 함께*//
* 고형렬 장시집 「리틀보이」 중에서

도너츠의 하루 / 조인호
잘 튀겨낸 도너츠일수록 구멍은 둥글다/ 팔팔 끓는 기름마냥 꿈자리가 사나운 밤 속에 몸을 담갔다가 일어난 아침 둥근 창문을 열면/ 바람은 밀가루 반죽처럼 배배 꼬이면서 불어온다/ 소용돌이치는 바람의 지문이 내 몸에 하얀 밀가루 자국을 남기는/ 오늘은 이상도 하지/ 바로 시원하게 구멍난 도너츠의 하루이다/ 옷을 입으면 툭툭 떨어지던 단추들은 모두 어디로 굴러갔을까/ 우유배달원 대신 현관문을 두드리는 건 옆집 아줌마의/ 둥근 훌라후프 사이로 빠져나온 뱃살 소리/ 나는 그 출렁출렁한 물소리를 들을 때마다/ 오늘 내 목에 얹힌 둥근 올가미 같은/ 하루를 꾸역꾸역 삼켜야 한다/ 목마른 듯 덜 깬 잠은 커피처럼 하루 내내/ 몽롱한 향기를 풍긴다 혹은 도너츠에 솔솔 뿌린 설탕가루를 입가에 잔뜩 묻힌 채 지하철 입구로 들어서면/ 우르르 달려드는 개미떼, 구멍난 내 몸을 짊어지고/ 순식간에 열차 한 귀퉁이로 몰아내는/ 오늘은 이상도 하지,/ 박스 포장된 일터 안에서도 내 몸에 난 구멍은 점점 커져서 마침내 화장실 가듯이/ 동료들은 내 몸을 통과하여 변기 구멍에 볼일을 본 후/ 물을 내린다/ 꾸르륵, 다시금 나의 구멍난 하루가/ 내리막길 바퀴처럼 어딘가로 끝없이 달려가는 소리/ 온종일 귓구멍에서 울려대는/ 오늘은 이상도 하지,/ 바로 시원하게 구멍난 도너츠의 하루이기 때문이다//

백 년 후 ㅡ생각하는 빵 / 조인호
식탁엔 한 사람이 앉아 있다// 그는 생각하는 사람이며 그는 한 세기를 넘게 살아왔다// 백 년 전 거리의 안개 속에서 그는 우산과 함께 있었고 그때 모든 것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안개 속에서 우산을 쓴 사람과 마차가 충돌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백 년 전 가스등 아래로 검은 석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들은 지나갔다// 백 년 후 식탁엔 한 사람이 앉아 있다.// 그는 백 년을 생각하는 사람이며 그는 한 세기를 넘게 생각했다.// 백 년 동안 가스등 아래의 안개는 빵과 함께 숙성돼왔다. 그때 모든 빵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는 백 년 동안 빵 하나만을 생각해왔는지 모른다. 그 빵은 백 년 동안 생각 속에서 구워지고 있었다.// 백 년 후 그를 생각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은 모두 다 사라지고/ 백 년 후 노동은 더 이상 곡괭이의 형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백 년 동안 그는 곡괭이를 든 채 생각을 파왔다.백 년 동안 식탁 위엔 그의 빵이 없었다. 백 년 동안 그는 식탁에 앉아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백 년 동안 그의 그림자는 벽 속에서 곡괭이를 휘둘렀다.// 백 년 전 백 년 후 백 년 동안// 우리들의 숭고한 생각 속에서 녹슬고 있었다.//

알라딘과 코카콜라의 요정 / 조인호
어느 날 나는 알라딘 씨를 본 적이 있었다// 불현듯 목이 말랐고 그럴 때, 시원한 코카콜라를 마셨다/ 움켜쥔 병을 살살 문지르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콜라의 요정들/ 재빨리 공기중으로 사라지기 전, 소원을 한 모금 마셔버린 후/ 코카콜라의 마지막 일 퍼센트, 그 비밀원료에 대하여 알아차린 날 세상은 바뀌었다/ 엉뚱하게도,/ 동물원을 탈출한 북극곰들이 편의점 앞/ 파라솔 아래 앉아서 신문을 읽고 있었는데/ 활짝 펼쳐진 신문 밖으로 접혀 있던 알라딘 씨가 터번 위에 묻은/ 모래알을 툭툭 털며 걸어나오다가,/ 북극곰에게 엉덩이를 덥석 물리고/ 총탄 같은 이빨 자국을 털며 일어났지만/ 검정 선글라스를 쓴 사람들에게 붙잡혀/ 검정 차에 실린 채 도로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먼 아라비아 폭격당한 고향마을을 떠나온/ 알라딘 씨가 남긴 것이라곤,/ 내리막길 따라 또르르 굴러가는 아직 뜨거운 몇 알의 단피들/ 유언처럼 가물가물 연기를 내뱉고 있었다/ 화약바람이 불고 가로수들이 떨궈내는 코카 잎,/ 매직아이처럼 빙글빙글 어지럽기만 한 세상은/ 알라딘 씨가 꿈꾼 신기루일까/ 지난날 알라딘 씨가 낙타를 묶어뒀던/ 오아시스 대추야자나무의 그늘 속 어두운 비밀 한 가닥을/ 잘록한 허리 깊숙이 빨아들이던/ 콜라병이 우뚝 서 있었을까// 알라딘 씨가 그리운 오늘, 하늘을 올려다보면/ 제트양탄자 빠르게 날아가고 있었다//

고등어 나르시시즘 / 조인호
만삭의 어머니가 생선을 굽던 비릿한 어느 저녁, 프라이팬 밖으로 튕겨오르던 기름방울처럼 지글지글 나는 태어났지 아기야, 생선을 먹어야지 머리가 좋아진단다! 어머니는 나무도마에 흥건히 젖은 피를 닦으며 말하셨지 그 날 이후로 나는 똑똑한 생선 한 마리, 유치원에 갈 때면 언제나 비가 내렸지 등줄기를 따라 푸른 멍 자국이 생겼지 선생님과 함께 부르는 노랫소리가 턱밑에서 뻐끔거리는 아가미 밖으로 펄떡펄떡 흘러나왔지 온몸이 자꾸만 축축해져 화장실로 쉼없이 달려갔지 오줌싸개라는 별명도 붙었지 만나서 반갑다 고등어 친구야 끔뻑끔뻑 인사하던 내 짝꿍은 개구리 왕눈이였지 점심시간마다 긴 혀로 도시락 주변을 윙윙거리던 파리들을 하나씩 잡아먹었지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집 안 가득 물이 출렁거렸지 유리거울 속에 둥글게 물이 고여 있었지 나는 거울 속을 헤엄치며 놀았지 거울 밖에서 어머니는 얘야, 숙제하고 놀아야지 그래야 똑똑한 고등어가 된단다! 소리치며 나를 찾았지 그럴 때마다 나는 낚시줄에 걸려 물 밖으로 끌어올려졌지 입 안에서 피가 흐르고 나는 말을 잃어버렸지 성장할수록 여드름 같은 비늘이 얼굴까지 돋아났지 그러다 사랑을 만났지 무슨 선물을 줄까 밤새 고민했지 사랑아 담백한 고등어 통조림 좀 먹어볼래? 그렇게 사랑은 떠났지 그리고 이제 나는 다 큰 똑똑한 고등어 한 마리, 물 좋은 직장 하나 만나지 못하고 퀭한 생선 눈깔을 지닌 실업자 방울방울 높은 수면 위로 떠오르는 토익 점수가 그리워 밤늦게 종종걸음으로 영어학원을 다니지 하루가 저물고 잠에서 깬 새벽 무렵, 냉장고를 열어보면 돌아가신 어머니가 신선하게 살아계셨지 랩으로 포장된 고등어 한 마리로 태어나셨지 얘애, 어머니 같은 생선을 먹어야지 머리가 좋아진단다! 여전히 같은 말만 하시지 무서운 나는 프라이팬 위로 도망치지 그러자 어머니는 앞치마를 두르고 아침을 준비하시지 지글지글 익어가는 나를 노려보며 내 깊은 잠을 깨우시지 때마침 따르릉 울리는 자명종은 유치원에 갈시간을 알리지 어머니가 발라준 생선살을 먹은 나는 오늘도 똑똑해져야지//

축구 / 조인호
병실 창 밖엔 비가 내립니다// 나는 아버지와 축구를 합니다 슛이 날아올 때마다 쾅쾅쾅 서정없이 번개가 칩니다 공사판 목수였던 아버지, 나무 속에 박히다 만 못처럼 병원 침대에 구부러져 있습니다 복수 찬 배를 품은 아버지의 모습은 둥근 축구공을 끌어안은 골키퍼 같았습니다 나이스캐치입니다 회전하며 날아가던 축구공, 눈물이 핑 돕니다 시합이 거세질수록 장대비는 쏟아붓고 그라운드는 암세포가 전이된 아버지 뼛속처럼 여기저기 축구화 스파이크에 짓눌린 구멍만 숭숭 늘어갑니다 혹시 오늘은 빗맞은 망치질이었을까요 아버지의 구부러진 등골 위로 잘려나간 푸른 잔디가 풀풀 날립니다 그것은 싸늘한 통증 같은 푸른 불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라운드에 그대로 누워버렸습니다 하얀 옷의 심판은 아버지의 반쯤 풀린 눈을 향해서 노란 손전등을 꺼냈습니다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릅니다 차라리, 내게 망치를 주세요! 라고 말입니다 박히다만 못을 쭉 뽑아내고 싶었습니다 수중전 경기가 한창인 휴일이었습니다 죽은 목숨 같은 오프사이드 선이 전광판을 가로질렀습니다 그 순간 어디선가 들려오는 호루라기 소리! 나보다 먼저 그라운드를 뒹굴며,// 울고 있었습니다//

다이너마이트의 미학 / 조인호
오늘밤 나의 식탁 위에,/ 불붙은 다이너마이트의 심지처럼 한 소년을 검게 세워둔다// 소년아, 너를 만지면 곧/ 캄캄한 사막의 밤이 온다/ 내가 모르는 어둠 저쪽에서 폭음이 울린다 불꽃은,/ 너의 팔다리를 하나씩 붙잡고 쾅쾅 어디로 튀었나/ 나는 두 귀를 막고 입을 벌린다/ 식탁 위에 쌓인 잿가루를 더듬거리며/ 추락한 불꽃을 집어 먹는다/ 소년아, 폭사한 너의 몸, 모래알처럼 까칠한/ 이 불꽃을 나는 씹어 먹는다/ 뜨거운 혓바늘로 돋아나는 너의 비명을/ 목구멍 너머 삼켜버린다/ 나는 불꽃을 우물거리다, 후후 입 밖으로 하얀 연기를 뱉는다/ 몸 없는 소년아, 너의 우스꽝스런 춤만이 허공에서/ 뭉게뭉게 흩어진다/ 다이너마이트를 관통하는 心地의 끝/ 나의 기름방울 같은 검은 눈동자 속에서/ 번쩍, 타오르던 저 소년의 불꽃!// 보라, 오늘밤 나의 식탁 위에/ 불꽃 한마리, 불붙은 꼬리를 세운 사막여우가 달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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