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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병권 시인
1962년 제천 출생. 고려대학교 대학원 전자공학과 공학박사.
2012년 《한국문학정신》 여름호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강과 구름과 바람과 시간』, 『하늘 푸르른 날에는』, 『살며, 사랑하며』가 있다.
한국문학정신 동인, 들뫼문학 동인, 한국문인협회 종로문협 이사. 고려대학교 전기전자공학부 교수
* 주병권 시인 님 블로그
봄 / 주병권
지난 시절은 돌아오지 않아도/ 지난 계절은 돌아오고/ 시든 청춘은 다시 피지 않아도/ 시든 꽃은 다시 피고/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아도/ 빈 술잔은 채워지고//
오월의 꿈 / 주병권
5월에는/ 하얀 쪽배를 타고/ 쪽빛 하늘 흰 구름과 맞닿은/ 수평선을 향하여 노를 저어 가리라// 노 저어 가는 길/ 따뜻한 숨을 쉬는 대지로부터/ 분홍빛 꽃잔디 내음을 담은/ 바람이 불어 푸른 바다 위에/ 애잔한 물결을 만들리라// 물결에 비치는/ 어릴 적 고향, 벗들의 얼굴/ 그립다고, 사랑한다고/ 은빛 마음이 가득 담긴/ 편지를 쓰리라//
검정 고무신 / 주병권
열매를 따려 높이 던지고/ 벌을 낚아채 빙빙 돌리고/ 물을 채워 송사리도 넣고.../ 달리기에는 양 손에 쥐고/ 목을 축이려면 물도 담고/ 차를 만들어 흙도 나르고/ 영 할 일이 없으면 신었다//
고백 / 주병권
어릴 적/ 제천 읍내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울 삼남매보다/ 열 걸음 쯤 뒤에 오셨다// 뛰다가/ 앉아 놀다가/ 꽃을 볼 때도/ 나비를 쫓을 때도/ 불현듯 뒤돌아 보면// 아버지는/ 늘 열 걸음 쯤 뒤에 계셨다/ 옅은 웃음과 함께/ 나도 그네에게/ 그런 사람이고 싶다//
꺾임 / 주병권
북악을 오르는 길/ 꺾인 자작나무를 본다/ 세찬 바람때문인가.../ 삶의 역경인가/ 다시 설 수 없어/ 애달픔이 더하다/ 외진 비탈에서/ 나고 자란 세월이/ 긴 사연일진데/ 세파에 꺾여 쓰러져/ 비에 젖은 땅에/ 몸을 누이고 있다/ 눈물로 젖은 땅에/ 꺾여 쓰러진 인생들/ 날은 저물고/ 하늘빛 흐린 날/ 자꾸 뒤를 돌아보는/ 서러운 풍경이다//
기차소리 / 주병권
1970년 무렵/ 오전 수업만 있는 날/ 우리는 각 각 못 몇 개씩을 필통에 넣고/ 내를 건너고 고개를 넘어/ 기차가 지나는 마을로 갔다// 철길에 가만히 귀를 대고 있으면/ 멀리서 기차가 오는 소리가 들리고/ 못들을 철로 위에 가지런히 놓아두면/ 기차가 지나고 난 후/ 못들은 납작하게 눌려/ 적당히 날이 선 작은 칼들이 된다// 우리는 다가오는 기차에 맘이 설레었고/ 말어져가는 기차의 뒷모습을 보며/ 가보지 못한 곳을 떠올렸다// 지금도 기차소리가 들리면/ 괜스레 맘이 설레고/ 멀어져가는 기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면/ 약간은 슬픈 그리움이 된다// 2013년 봄, 금속의 열팽창 특성을/ 여름과 겨울의 철로 길이의 변화/ 철로 이음매에 틈이 있는 이유로 설명하며/ 불현듯 바라보는 유리창 밖에서는/ 기차소리가 들려오고/ 떨어지는 목련 꽃잎들 사이로/ 어린 시절의 기차가 지나고 있다//
사립문을 열면 / 주병권
어릴 적/ 들에 산에 꽃피는 계절이 오면/ 내 아버지는 사립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다/ '나가 놀아라' 하시고는/ 온종일 우리 삼남매를 찾지 않으셨다// 이 날만큼은/ 숙제도 없었고 심부름도 없었고/ 하물며 밥 묵자는 말씀도 않으셨다// 낮은 담장 밖/ 가까이 펼쳐진 들판/ 멀리 보이는 내와 얕은 산들은/ 하나 가득 우리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마당에는/ 까닭 없이 조는 강아지와/ 머리를 들지 않는 병아리들만 한가하고/ 툇마루에는/ 보자기 덮힌 소반만/ 종일 우리를 기다리고// 봄에 취하여/ 검은 눈 휑하니/ 저녁놀 따라 돌아온 방안에는/ 삼남매에게 자리를 내어준/ 아지랑이만 가득 차 있었다//
우보천리 / 주병권
느리게/ 꼼꼼하게 가면/ 넘어지지 않고/ 실수하지 않고 간다// 지금을/ 소중하게 가면/ 실망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고 간다// 천리를/ 다 못 가면 어떠리/ 지금이 좋으면/ 끝나는 곳도 좋은데// 오늘도// 느리게 가자//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 지금도//
모친 / 주병권
오랜만에 모친이 오셨다// 한 손에는 세월을/ 다른 한 손에는 보따리를 들고 오셨다// 세월을 건네받으려 했더니/ 보따리를 내려 놓으신다// 잠시 머물다 떠나신다// 한 손에는 세월을/ 다른 한 손에는 긴 한숨을 들고 가신다//
고향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 주병권
3월의 차가운 바람이 부는 저녁/ 제천발 청량리행 기차에 오른다// 꿈을 찾아, 허망한 불꽃을 찾아/ 수없이 등지고 떠나버린 곳// 바람이 되어 흘러간 세월/ 희미한 첫사랑, 젊은 날처럼/ 고향은 떠나기 위해서 있었다// 3월의 빛이 꿈인 듯 오는 아침/ 기적소리를 남기고 덜어져 간다// 옛 동무들, 그리운 노모가/ 돌아올 나를 기다리는 곳// 빛이 되어 머무는 기억/ 돌아보는 그리움,/ 추억처럼/ 고향은 나를 떠나지//
그 시절 / 주병권
출근길/ 먼 곳 친구가 보내준/ 빛바랜 사진 한 장/ 족히 40 년은 넘은/ 그 사진을 찬찬히 본다// 모두가 닮은 얼굴/ 비슷한 모습들/ 우리는 왜/ 좀 더 활짝 웃지를/ 못하였을까// 하나 하나/ 그리운 동무들/ 이름은 어렴풋해도/ 그 목소리/ 그 웃음은 남아있는데//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고들 있을까/ 정겨운 고향/ 그 햇살과 바람을/ 기억하고들 있을까// 아쉽고 가난해도/ 즐거웠던 시절/ 기억을 돌아보며/ 입가엔 웃음이/ 눈가엔 눈물이 고인다//
그 시절 / 주병권
아스팔트 틈 사이에서 돋은 민들레가/ 씨앗을 바람결에 실려 보내고 있다// 보이는 곳은 전부 아스팔트 뿐인데/ 씨가 닿을 수 있는 땅은 어디 쯤일까// 이 척박한 곳에서 멀리 떠나라는/ 민들레의 염원이 귓전에 들리고 있다// 우리 어릴 적,/ 부모들이 그러했으리라/ 가난과 고생으로 일구어가는 삶에서/ 자식들만은 벗어나기를 바랬으리라// 충북 제천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진산골마을에서 청량리로 향하던 날/ 나 어릴 적,/ 부모의 마음이었으리라//
동막국민학교 추억 / 주병권
우리는 즐거웠지/ 교실에서 유리창 너머로/ 맑은 웃음이 퍼져 나가던 날// 웃음 다발이/ 넓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플라타너스 이파리에 닿던 날// 잎을 떠난 바람이/ 타지 않는 그네와/ 태극기를 높이 흔들던 날// 깃발의 일렁임이/ 이승복 어린이 동상에/ 햇살의 무늬를 만들던 날// 햇살이 창으로 들어와/ 상고머리 위에 반짝이던 날/ 우리는 즐거웠지//
동막 생각 / 주병권
우리 어렸을 때 동막만 알았지/ 산 너머에는 전기가 들어와도/ 십리길 밖에는 기차가 다녀도// 우리 자라면서 세상을 알았지/ 웃음 너머에는 울음이 있는 것도/ 걷는 길에는 돌부리가 있는 것도// 우리 살아가며 삶에 치여갔지/ 한숨 너머에는 또 한숨이 있고/ 힘든 하루 뒤에 또 하루가 있고// 우리 이제는 동막을 그리워하지/ 정든 교정에는 군부대가 주둔해도/ 마을 어귀는 철책으로 가로막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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