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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박은영 시인

by 부흐고비 2022. 5. 18.

박은영 시인
1977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났다. 동아인재대학교 졸업.

2018년 《문화일보》,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시집 『구름은 울 준비가 되었다』, 『우리의 피는 얇아서』가 있다.

제1회 농어촌희망문학상, 제2회 제주4.3문학상. ​제2회 천강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제9회 조영관 문학창작기금 수상. 품시 동인

 



발코니의 시간 / 박은영
필리핀의 한 마을에선/ 암벽에 철심을 박아 관을 올려놓는 장례법이 있다/ 고인은/ 두 다리를 뻗고 허공의 난간에 몸을 맡긴다/ 이까짓 두려움쯤이야/ 살아있을 당시 이미 겪어낸 일이므로/ 무서워 떠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암벽을 오르던 바람이 관 뚜껑을 발로 차거나/ 철심을 휘어도/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그저 웃는다/ 평온한 경직,/ 아버지는 정년퇴직 후 발코니에서 화초를 키웠다/ 생은 난간에 기대어 서는 일/ 허공과 공허 사이/ 무수한 추락 앞에 내성이 생기는 일이라고/ 당신은 통유리 너머에서 그저 웃는다/ 암벽 같은 등으로 봄이 아슬아슬 이울고 있을 때/ 붉은 시클라멘이 피었다/ 막다른 향기가/ 서녘의 난간을 오래 붙잡고 서있었다/ 발아래 아득한 소실점/ 더 이상 천적으로부터 훼손당하는 일은 없겠다/ 하얀 유골 한 구가 바람의 멍든 발을 매만져준다/ 해 저무는 발코니,/ 세상이 한눈에 보인다//
* 201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인디고 / 박은영
빈티지 구제옷가게,/ 물 빠진 청바지들이 행거에 걸려 있다/ 목숨보다 질긴 허물들/ 한때, 저 하의 속에는 살 연한 애벌레가 살았다/ 세상 모든 얼룩은 블루보다 옅은 색/ 짙푸른 배경을 가진 외침은 닳지 않았다/ 통 좁은 골목에서 걷어차이고 뒹굴고 밟힐 때면/ 멍드는 건 속살이었다/ 사랑과 명예와 이름을 잃고 돌아서던 밤과/ 태양을 좇아도 밝아오지 않던 정의와/ 기장이 길어 끌려가던/ 울분의 새벽을 블루 안쪽으로 감추고/ 질기게 버텨낸 것이다/ 인디고는/ 인내와 견디고의 합성어라는 생각이 문득 들 때/ 애벌레들은 청춘의 옷을 벗어야 한다/ 질긴 허물을 찢고 맨살을 드러내는/ 각선의 방식/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대생들이/ 세상을 물들이며 흘러가는 저녁의 밑단/ 빈티지가게는/ 어둠을 늘려 찢어진 역사를 수선하고/ 물 빠진 허물,/ 그 속에 살았던 푸른 몸은 에덴의 동쪽으로 가고 있을까/ 청바지 무릎이 주먹모양으로 튀어나와 있다/ 한 시대를 개척한 흔적이다//
* 인디고: 청색염료.
* 2018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만두 / 박은영
우리의 피는 얇아서/ 가죽이라고 말하기 부끄러웠다/ 비칠까 봐 커튼을 치고 살아도 속내를 들켰다/ 틈은 많은데/ 쉴 틈이 없다는 것은 조물주의 장난// 우리는 섞이지 않는 체질이지만/ 좁아터진 방에서 꾹꾹 누르며 지냈다/ 프라이팬과 냄비 손잡이에 덴 날은/ 입술을 깨물었다/ 부대끼고 어우러지고 응어리지고/ 그러다가 터지면 알알이 쏟아지던 찌끼 같은 시비들//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은/ 아직 찢어지지 않은 것/ 찢어질 듯 불안을 안고 사는 일이었다// 처녀가 아이를 배도 이상하지 않은/ 무덤 같은 방,/ 깊이 쑤셔 넣은 꿈속에서/ 개털과 나무젓가락과 실반지가 나왔다/ 온도를 잃은 이물질들// 방으로 들어오는 건/ 사람이 아니라/ 짙게 밴 냄새라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의 피는 얇아서/ 가죽, 아니/ 가족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웠다//

오늘의 사과 / 박은영
흠과를 샀습니다/ 잘난 놈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시시각각 못생겼죠/ 요즘 시대에 흠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청문회 한 번 하면 다 나와요/ 기억이 안 난다고요?// 퍽퍽한 사과입니다// 멍이 많아요/ 익다가 설익다가 크기도 제각각이죠/ 간혹, 썩은 사과가 섞여 있지만/ 그건 자본주의의 핵심,/ 한두 개 쯤은 알고도 넘어가야 합니다// 흠과를 먹습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건/ 고전이에요/ 껍질을 깎으면/ 그놈이 그놈이더라고요/ 빨갛게 웃는 얼굴에 속지 말아요/ 그렇게 화도 낼 거예요// 때깔 좋은 것보다 흠과를 선택하세요/ 갈아먹기도 괜찮아요/ 장담하건대,/ 오늘은 죽지 않을 겁니다// 빨간 사과가 독 사과잖아요//

비만 / 박은영
거울은 비좁은 공식// (덧셈은 쉬운데 뺄셈은 어렵다) 괄호 안의 식을 대입하며 숫자를 더한다 무게에 눌려 야식을 더하는 날엔 밤은 무한대로 흐르고 정육면체 치킨 무만 남는다// 아침은 버릴 것인가// 모든 문제는 죄다, 뺄셈으로 이뤄졌다 빼기를 못하는 것은 이 시대의 비극, 비 사이로 막 가는 당신은 나를 징그러운 눈으로 쳐다본다 스멀스멀 오늘의 정수에서 스물을 더하면 근의 공식 따윈 외우지 않아도 되겠지 마이너스통장을 만들거나 삼십 센티 자를 장롱 밑에 숨기지 않아도 되겠지// 채점을 한다 나는 틀린 게 아니라 다른 무게인 거라고 말하고 싶지만 거울에 비친 창밖은 같은 식으로// 비만 내리고//

ㄹ(리을) / 박은영
무릎을 꿇고 걸레질을 합니다// 어디론가 흘러가는 느낌/ 배밀이를 하는 파충류처럼 기어서 기도를 하듯/ 얼룩을 닦고 모서리 틈으로 스며들어/ 옆방과 옆방과 옆방을 지나/ 성자에게 입을 맞춘 가롯 유다의 목을 휘감는,/ 리을은 차갑습니다// 밧줄처럼 동여맨 죄의 형식/ 여인의 발꿈치를 물고 도망가는 뱀은/ 흐르는 원죄를 알고 있습니다/ 배면이 닳도록 흘러가/ 회칠한 벽에 닿으면 긴 소름의 허물을 벗고/ 탈피하는 리을,/ 어제의 내가/ 옆구리를 지나 찢어진 휘장 안으로 달아납니다//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 허물고 싶은 글자// 리을이 없는 세상은/ 허무합니다//

구멍을 감추고 / 박은영
상주 근무를 했다/ 발꿈치가 서늘하게 그리운 날이 있다/ 하나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둥글게 살았다/ 거울을 보며 하품 참는 연습을 하고/ 상사의 마음을 사로잡는 백한 가지 대화법을 읽거나/ 정수리가 뜨거워지면 숫자 열을 세었다/ 저녁은 도넛, 돈 나올 구멍은 없고/ 매달 십오 일이면 새어 나가는 게 많았다/ 허리둘레가 늘었고 돌려 막기를 했다/ 양말을 꿰매다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날은/ 작은 바늘을 물려받은 것을 원망했다/ 내가 가진 바늘로는/ 기름에 찌든 끼니를 먹고/ 손가락을 따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구멍의 시작, 돌반지를 팔고/ 담배 연기로 도넛을 만들어 쏘아 올렸다/ 마이너스 통장엔 동그라미가 하나 더 생기고/ 자동 이체로 빠져나가는 보름/ 저 밤하늘도 구멍 난 양말을 신었다/ 발꿈치가 환하다//

​풀 스윙 / 박은영
9회말, 타석이다/ 나는 한 번도 선두에 서 본 적이 없다/ 수없이 방망이가 부러졌지만/ 빗맞은 공은 파울, 뒷그물을 흔들고/ 한 방 날리고 싶은 마음을 크게 들키고 나면/ ​쓰리 아웃 체인지,/ 눌러쓴 모자 깊숙이 눈빛이 휘청거렸다/ 2할이 되지 못한 날들/ 저무는 하늘을 등지고 헛스윙을 할 적마다/ 한숨은 구장을 에우고 ​더그아웃 구석​/ 배배 꼬인 그림자가 오래 풀어지지 않았다/ 쏟아지는 공,/ 포볼을 골라내 회를 넘길 때까지/ ​몸을 던졌다 기습 번트나 데드볼을 맞고 진루할 때면/ ​원정 온 치어리더 머리 위로/ 국화꽃 같은 함성이 피어나곤 하였다/ 삼진으로 죽어 나가기에 알맞은/ 환절의 그라운드/ ​2사 주자 만루 투 쓰리 풀 카운트/ 더 이상 물러설 자리가 없는 계절이다/ 나의 생사는 공 하나에 달렸지만/ 아직, 겨울은 오지 않았다/ ​직구 뒤 변화구를 숨긴 세상을 향해/ 방망이 끝을 단단히 세운다//

이글 아이(Eagle Eye) / 박은영
나는 오른팔이 발달된 타자,// 슬픈 일이 많아 야구장 매표소에서 일을 했다// 해는 뜬공처럼 날아오르고 오래 보고 있으면 눈이 시큰거렸다 멀리 내다보는 일은 공이 담장을 넘어갈 때 하는 것이라고 쪽창에 비친 눈주름이 이글거렸다// 거스름돈을 내주듯 계절은 바뀌고 연장전 같은 날들, 때론 맞아야 진루를 했고 밀어내기로 홈을 들어갈 수 있었다 멀리 보라고 채근하던 시간은 돋보기 너머로 갔다 눈을 크게 떠도 보이지 않는 공백// 어디로 가고 있는가// 작전처럼 바람이 불고 독수리가 오늘의 거리를 두고서 날아올랐다 입장권을 구할 수 없는 먼 곳, 한쪽 눈을 가리고 보는 아득한 날의 깨알 같은 일들// 구름은 울 준비가 되었다//

북촌리의 봄 / 박은영
한 여인의 젖을 아이가 빨고 있었다/ 말 못하는 어린 것의 울음이 서모**에서 부는 바람소리 같았다/ 핏덩이를 등에 업은 어미의 자장가가 들리는 듯한데/ 젖몸살을 앓던 아침, 붉은 비린내가 퉁퉁 불어 마을을 떠돌아다녔다 새들이 총소리를 물고 둥지로 날아갔다 소란스런 포란의 방향, 꽃을 내준 가지가 동쪽으로 기울었다/ 그것은 서쪽에서 해가 뜰 일/ 서모에서 부는 바람소리가 말 못하는 어린 것의 울음 같았다/ 뚝뚝, 지는 목숨들 사이/ 아이는 나오지 않는 젖을 한사코 빨아대고 있었다/ 어미를 살려내려는 필사적인 몸부림,/ 그 힘으로 동백꽃이 피고/ 젖 먹던 힘을 다해 봄이 오고 있었다//
* 2014년 4·3평화문학상 수상작
** 서우봉

모자이크 / 박은영
모자가정이 되었다/ 정권이 바뀌고 수급비가 끊기자/ 국밥 한 그릇 사먹을 돈이 없었다/ 아홉 살 아이는 식탐이 많았다/ 행복포차식당에서 두루치기로 일을 하고/ 눈만 붙였다가/ 등만 붙였다가/ 엉덩이만 붙였다가, 부업을 했다/ 아이가 손톱을 물어뜯을 땐/ 국밥 먹고 싶다는 말이 나올까봐/ 야단을 쳤다/ 반쪽짜리 해를 보며 침을 삼키던 아이는/ 일찍 침묵하는 법을 배웠다// 찢어진 날들을 붙이면 어떤 계절이 될까// 내가 있는 곳은/ 멀리서 보면 그림이 된다고 했지만/ 인형 눈알을 붙이며 가까이 보았다/ 초점이 맞지 않아 희부옇게 보이는 내일,/ 아이의 슬픔이 가려지고/ 밀린 눈알 너머/ 조각조각, 조각조각/ 깍두기 먹는 소리가 들렸다//

즉석복권 / 박은영
가능성은 긁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사건// 우리는 서로의 등을 긁어줬다 꽝인지, 행운인지 손닿지 않는 곳을 긁어주는 사이가 되었지만 잔소리를 하며 바가지를 긁을 때가 많았다 긁을수록 앞날은 보이지 않고 마른 등판만 눈에 들어왔다 일확천금의 불가능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눈으로 보지 않고 믿는 것이/ 가장 쉬운 일// 긁지 않고 그대로 두는 편이 나을 뻔했다 우리는 꽝이란 것을 안 뒤 즉석요리를 먹듯 뭐든지 쉽게 화를 내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찢어지자며 인성을 높였다 어떤 날은 긁다가 혈흔을 남기기도 했다// 손톱은 피를 먹고 자랐다 우리의 관계에서 남은 건 피밖에 없다는 생각을 할 때, 등골은 물론이고 이마와 미간, 손등...... 온몸은 그야말로 손톱자국으로 이글거렸다// 그래도 한 가지// 우리가 낳은 자식은 가능성이 많은 아이라고 여겼다// 그 희망을 간직하고 살았다//

플라나리아* / 박은영
습기가 많아 잠을 자주 깹니다// 어젠, 소름끼친다는 말을 듣고도/ 상을 차렸습니다/ 징그럽다는 소리는 싫지만/ 가난의 꼬리표는 숨기고 싶지 않습니다/ 냉장고를 열고/ 빈속을 보며 놀라는 눈들/ 동공이 커진 것은 동경한다는 뜻이니까/ 의식하지 않습니다 겨울이면/ 찬물이 나오는 수도와 연애를 하고/ 여름이면 미지근한 마음으로 삽니다/ 봄가을엔 먹을 게 없어도/ 키가 자랍니다// 가난은 유전이란다/ 놀란 눈들이 저주를 걸며 치부를 들여다봐도/ 꿈틀거립니다 토막토막/ 내 몸을 절단해도 울지 않습니다/ 나는 바닥에서 태어난 이름,/ 주문을 외우듯/ 이 땅의 고통에서 풀려나리라/ 젖은 치마를 벗고 몽유하는 새벽/ 손목을 그은 자리에서/ 입이 생깁니다//
​* 재생력이 강한 편형동물

월식 / 박은영
나는 유령선,/ 두 손을 모으고 무릎으로 저어간다/ 내 몸을 끌고 가는 것은/ 흔들림이었다/ 웅크린 몸이 가라앉듯 기울어져도/ 바닥의 깊이를 알고 있어 난파하지 않았다/ 노숙으로/ 기름 창고가 빈 것은 ​오래된 이야기,/ 허기를 넘는 일은 동력이 되었다// 만월을 품고 떠도는 무릎이여/ 젖이 사무치게 그리울 때/ 전조 증상처럼/ 악몽, 무인도, 파리한 얼굴들이 나타났다/ 갑자기 사라지는 형상을 보고/ 놀라지 않는 건/ 본향을 떠난 탯줄에서 비롯되었다// 관절을 꺾는다/ 모든 간절함에는 종착지가 있다/ 환도뼈를 치는 응답이 있다// 나는 유령의 외투를 껴입은 순례자// 그들은 놀란 눈으로 멀리 서있고/ 나는 흑암으로 가까이 간다*//
* 출애굽기 20장 21절 인용

멸종의 단계 / 박은영
쉬는 날,/ 호랑이를 보러 동물원에 갑니다/ 야생에선 멸종되었죠/ 고양잇과의 포유류가 철창 안에서도 사라진다면/ 호피가죽이 프랑스 경매에 오르겠죠/ 공장에선 모형장난감을 찍어내고요/ 호랑이 서식지였을 만한 곳을 선정해/ 테마파크가 조성되겠죠//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들의 수순입니다// 지금은 동물생태도감의 시대. 우리가 총을 발명하지 않았다면 태백산에서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렸을 거예요 호랑이가 물어갈지 모를 밤들이 꿈을 꾸게 했을지도, 강도나 바바리맨으로부터 안전했을지도, 누군가 미친 호랑이가 되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몰라요// 이제, 호랑이는 무섭지 않아요/ 연신 하품을 하며/ 야생의 기억을 잊어버린 자세로 요양을 합니다/ 산중호걸은 옛말이죠/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을 거란 약속을 지킬 것처럼/ 순순합니다/ 철창 너머 하늘을 살기 없이 바라보다/ 누구시오?/ 눈만 끔벅거리죠//

해부 / 박은영
개구리의 울음주머니를 움켜쥐면/ 우는 일을 그칠 것 같았지// 나는 준비물로 잡은 개구리에게/ 언니의 이름을 줬다// 아이를 잃은 뒤 독약을 마신 언니는/ 온종일,/ 내 귀에 대고 울어 댔다// 과학실 유리판 위로 올려놓고 해부한/ 개구리처럼/ 언니가 흰 배를 보이고 풀밭에 드러누운 날/ 하늘과 땅 사이가/ 소독약 냄새로 진동했다// 메스를 쥔 손이/ 떨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만 울어,// 나는 개구리의 배를 가르고/ 심장을 꺼냈다// 그날부터였지/ 눈을 비빌 때마다 울음소리가 났다//

펠리컨 / 박은영
늙은 새가/ 주둥이를 벌리자 몸집 큰 새끼들이 달려와/ 먹이를 쪼아 댄다/ 한 녀석은 꼬리깃털을 세차게 휘저으며/ 부리를 목구멍까지 집어넣는다/ 어미가 아니었다면 견딜 수 없는 일/ 탄성 잃은 입주름을 끌어당겨 주둥이를 크게 벌려도/ 꺼내줄 수 있는 건 토사물뿐,/ 새끼들의 부리가/ 한 방향으로 길어지는 날들이다/ 어미의 입만 바라보는/ 새끼들의 몸집은 갈수록 비대해져가고/ 상처 많은 주둥이는 오래 다물어지지 않는다/ 삼킨 먹이를 역류해내는/ 멸종 위기의 서식풍경,/ 어미는 삶의 가장 쓰린 식도염을 앓는 중이다//

​ 데린쿠유 / 박은영
주소 없는 집이었다 전도지와 편지와 초승달은 치킨집으로 배달되었다 나는 빚진 자의 자식처럼 소리 없이 웃으며 신앙을 키웠다 참는 거와 견디는 거는 다른 말이었다 주소를 가지려면 단단한 벽이 있어야 한다 일기를 쓰다가 연필로 구멍을 뚫었다 한쪽 눈을 감으면 세상이 달라보였다 튀긴 닭들은 새벽에 울지 않았고 나는 새 번역 주기도문을 외우지 못했다 방석의 시대로 돌아가려면 많은 방들을 지나가야 한단다 골다공증에 걸린 엄마의 무릎에서 기름방울 같은 빈방들이 떠올랐다// 주소 없는 지하도시,// 나는 눈물이 고이도록 오래 숨어 있었다//​

오 남매 / 박은영
파지 줍던 할머니가 죽었다// 자식 놈들 키워 놔 봤자 암 소용없는 겨. 빌어먹든 어쩌든 염병 내 알 바 아녀.// 연락 끊긴 자식들을 파지 사이 끼우고 고된 길을 끌던 할머니, 구겨진 걸음에 염을 한다 빈 리어카에서 내린 바람이 창고 문을 여는 밤, 쏟아지는 파지들, 염장이가 진물 고인 발바닥을 닦아 낸다// 거기,// 옹송그려 박여있는// 티눈 다섯 개//

가늠 / 박은영
유부초밥을 상상한다 마음으로 먹은 것은 간음이라고 배웠다 몰래 먹다 체하면 손가락을 집어넣어서 게워 냈다 눈물과 함께 나오는 것은// 간절한 음식// (정사를 끝낸 후 배가 고프면 죄일까, 아닐까)// 소리 나는 대로 초밥을 만든다 수치스러운 모양들,// 헛배가 부른다거나 목구멍에서 시큼한 게 올라온다면 고난과 참회의 시기, 유부 안으로 들어가려면 뭉개져야 한다 한 세계가 찢어지지 않도록 내 몸의 알갱이들을 가만히 짓눌러야 한다// 이웃 남자의 발자국 소리를 가늠하는 저녁// 중심을 벌린다//

파레토 법칙* / 박은영
열 마리 개미 중에서 일을 하는 개미는 두 마리뿐입니다// 둘의 뼛골을 빼먹는 나머지 여덟 마리는// 아마도 정치인,// 평소엔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선거철만 되면 돌아와 열심히 일을 합니다 2 대 8 가르마를 타고서 왔다 갔다 악수를 청하고 국밥을 먹으며 서민 코스프레 놀이를 합니다 어느 아침은 환경미화원이 되었다가 시장이나 종교시설을 방문해 장보는 척, 신자인 척 흉내를 내기도 합니다// 체험과 삶은 다르다는 것을 모릅니다// 길 위에서 구두를 벗고 큰절을 하거나 전국을 누비며 다녀도// 발바닥이 닳는 건// 개미 두 마리, 근로 노동자들뿐입니다//
* 통계적 법칙으로서 전체 결과의 80%가 전체 원인의 20%에서 일어난다는 현상을 가리킨다. 일명 2대 8 법칙.

스탠딩다운 / 박은영
큰애의 장래희망은 법조인입니다/ 의자에 앉아 날을 새죠/ 아내를 닮아서 예쁜 둘째 녀석은/ 꿈이 많은 탓에 일찍 일어나지 못합니다/ 이유식을 시작한 늦둥이 막내가/ 출근하는 나를 보고/ 아파, 아파 옹알이를 하며 기어오네요/ 조만간 보행기를 꺼내야겠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는 관을 묻을 때/ 직각으로 세운다고 합니다/ 죽어서도 산 사람처럼 서 있어야 하다니/ 타이슨이 귀를 물어뜯을 일입니다// 작년부터는 키위를 못 먹습니다/ 찬물을 못 마시고/ 갈비도 엄두를 못 냅니다/ 성욕과 허리둘레와 말수와 일감이 줄었죠/ 약봉지만 늘었습니다/ 고혈압약, 당노약, 전립선약을 빼면/ 진통제와 항생제뿐인 처방입니다/ 코너에 몰렸죠// 원 투 쓰리 포… 이명이 들립니다// 나는 괜찮습니다?//

귀소본능 / 박은영
종로 낙원상가, 비둘기들이 땅으로 내려왔다/ 새의 낙원은 하늘이 아니라 종로구이다// 엄마가 내 손을 잡고 집을 나왔을 때, 버스정류장 앞에서 옷자락을 퍼덕이던 서른셋 여자의 동공은 흔들렸다 하필, 여름이었고 나는 복숭아맛 하드를 사달라고 칭얼거렸으니 당신 눈에 비친 세상은 얼마나 막막했을까 엄마가 양푼에 찬밥을 퍼 담아 열무김치와 고추장을 넣고 쓱쓱 비벼먹을 수 있는 골목으로 돌아간 것은 본능이었다 날갯죽지가 뻐근하도록 얻어맞은 비만한 몸을 이끌고 낙원의 중심으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조율되지 않은 말들이 새어나왔다// 이년의 팔자가 이 모양 이 꼴인 게지// 눈을 부릅뜨고 비벼먹던 그날의 엄마보다/ 늙고 비만한 나는/ 비둘기 발목에 쪽지를 묶는 것처럼/ 파스를 붙인다// 팔자걸음을 걷는 음표들// 비둘기가 낙원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무거운 발목 탓일지도 모른다/ 오선지처럼 전깃줄이 늘어진 하늘은/ 도돌이표로 연주되고// 먼 길, 돌아온 자리가 후끈거리는 것이다//

달팽이집을 지읍시다 / 박은영
점점 작게 점점 작게// 세상의 집은 작아졌죠 설계도는 필요 없어요 민달팽이 한 마리가 들어갈 만큼만 만들면 되거든요 집 없이도 살아갈 능력을 지니고 태어난 이들에겐 이 땅의 번지가 없죠 헐벗은 생을 가리는 가림막, 벽은 갈수록 얇아지고요// 당신은 어디로 가나요 묻는 건, 분비물을 묻히는 일이에요 벌거숭이에게 세탁비를 지불해야 하는 일이에요// 오늘의 문제로부터 풀리지 않는 민달팽이세대, 연체延滯의 몸으로 바닥을 학습하는 그들은 쪽창 달빛으로 어둠을 풀어내고 가장 어려운 해법 속에서 꿈틀거립니다 채점을 마친 문제, 집엔 동선 없이 쉬이 지나간 풀이과정만 있을 거예요// 고시원엔 고시생은 없고 고단한 시간과 생만 있는,// 세상은 암기한대로 달팽이집을 짓고// 점점 크게 점점 크게// 고시촌의 태양은 떠오릅니다//

폐기물 집하장 가는 길 / 박은영
새벽 구로공단,/ 폐기물 쓰레기차가 녹슨 어둠을 수거한다/ 늙고 병들고 무능한 고철덩이들/ 며칠 전 신발공장 구 기계도 저 차에 올랐는데/ 가오리 등에 업혀 날아오르려는 꿈이 있었다지/ 나는 법을 잊어버린 가오리와 함께/ 오랜 세월 바닥을 기었다지/ 그 딱딱한 등에서/ 길잡이 새벽별을 보며 또 하루를 견뎌냈었다지/ 쓸모없는 이름이 되어 후미진 곳에 버려진 것들/ 집으로 가기엔 너무 먼 밤이면/ 가오리와 제2공단 사이 여인숙에서 쇳소리를 내며/ 제 살 깊숙이 기름칠을 하던 폐기물들/ 치워낸 바닥에서/ 이젠 낯선 기계음이 들린다/ 제 자리를 내어준 고철들이/ 녹물을 떨어뜨리며 공단을 빠져나가는 겨울/ 모든 길은 한곳으로 모여 매립 처리되고/ 다시 재생된 길은/ 새별별을 따라 구로공단으로 향하는 것이다/ 하얀 기물器物이 쏟아져 내려 오그라드는 시간/ 아버지와 오빠와 형과 누이를 만나도/ 녹이 슬어 서로 알아볼 수 없는 길/ 가오리가 눈을 뜬다//

나는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 박은영
그러나, 감자탕 大자가 아닌/ 우거지 해장국 세 개를 주문할 때/ 부끄러웠다/ 아침을 금식하고 위내시경을 받은/ 늙은 아비와 어미,/ 먹은 게 없어 깨끗한 위장 속으로/ 꺼져가는 숨을 밀어 넣었다/ 등뼈에 붙은 살을 발라먹고/ 등골을 빼먹고/ 돼지기름 뜬 국물 한 숟가락까지 긁어 잡수신 뒤/ 원고료로 먹고사는 가난한/ 막내딸의 손에/ 구겨진 지폐를 쥐어주는 것이다/ 감자탕 식당을 나와 집으로 가는 길/ 다음부턴 외식하지 말자 체머리를 흔들며/ 구부정히 언덕을 올라가는/ 가로 木과 세로 木,/ 십자가모양의 그림자에 업힌 내 가슴은/ 뚝배기보다 검고/ 뚝배기보다 무겁고/ 뚝배기보다 뜨거워지는 것이었다//

사춘기 / 박은영
소녀, 하고 발음을 하면 아까시꽃 향기가 난다// 잎점을 치며 걷던 그 길, 좋아한다는 한마디가 남으면 잎자루를 쥐고 책가방을 들썩거리며 뛰어갔다 작은 수저를 넣어둔 양은 도시락이 심장 박동처럼 두근거리고 대문 앞에서 입안의 침이 끈끈했다 허리를 꺾고 숨을 고르면 책가방이 뒤통수를 때리며 쏟아졌다// 젖 몽우리가 만져지던 날, 아까시꽃은 흰 눈물이 되어 발등 위로 떨어지고 바람이 내 몸을 구석으로 몰아갔다// 네가 가고 없는 길/ 아까시나무 넌출거리는 담장 길을 걷는다// 향기 너머에/ 가시가 자라고 있다는 것을/ 콕콕,/ 가슴이 아리면서 알았던 것이다//

습작기 / 박은영
가슴 큰 여자를 질투했다 소처럼 우는 일이 많아 눈물은 짜지 않고 얼룩만 졌다 해 질 녘이면 귀에서 종소리가 들리고 비빌 언덕이 없는 겨울엔 가죽 부츠를 꺼내야 했다 누군가 고삐를 쥐고 있는 것처럼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맑은 눈동자를 보면, 그게 별일지라도 치받을 궁리를 했다 온 생을 바쳐 갈아엎고 싶은 배짱이 생기기도, 밤새 행갈이를 하며 비문을 되새김질하기도 했다 등급을 매기는 당신에게 설탕 대신 소금을 넣고 실수인 척 사과 하고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소금 한 주먹을 뿌리는 상상을 했다// 한 백 년,// 염전 같은 이면지로 둘러싸여 있었다// 물을 먹던 날들이었다//
* 가수 남진 '님과 함께' 가사​

옥수동 / 박은영
키가 한 뼘씩 웃자랐다// 구름 밑의 옥수수처럼 껍질을 벗고 죽은 살을 뜯어먹으면/ 말을 더듬는 혀끝에 단맛이 돌았다// 혼자가 아니었다/ 알알이 많은 내가 어제도, 이번 정거장에도/ 유통기한이 넘은 깡통 속에도 있었다/ 때론 조조할인 영화를 본 날은/ 이유 없이 나를 부풀리기도 했다/ 겨드랑이와 가랑이 사이가 간지러워 실실 웃다가도/ 틀니를 낀 노인이 지나가면/ 입을 다물었다// 나는 누구의 잇몸에서 빠져나왔을까/ 가끔 유치한 상상을 했다/ 영구치도 영원하지 않고/ 바람이 검은 안경을 쓰고 하모니카를 부는 동네/ 어금니가 닳도록 치열하게 살아도/ 붓고 시리고 흔들리는 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자꾸 뭔가가 끼었고/ 속살을 깨무는 버릇이 생겼다/ 구름을 덮으면/ 죽은 동생이 이갈이를 하며 사카린을 뿌렸다// 지붕이 자라는 밤이었다//

​보수동 골목 / 박은영
절판된 길을 읽습니다/ 읽다가 접어놓은 흔적으로 두툼한 한 권,/ 로맨스소설이고 싶었으나/ 그의 생은 고딕체/ 딱딱한 문장으로 나열되었습니다/ 최초의 독자는 글을 읽을 줄 몰랐다죠/ 한 단락 안에서 줄거리 없이 살다/ 장문의 봄,/ 별이 되어 각주로 매달렸다죠/ 겉장의 시대를 지우고 수명을 다한 날들이/ 좁은 장지(葬地)에 몸을 뉩니다/ 변하지 않는 자세로 바닥에 깔린 역사서/ 구겨진 가슴이 기운 세계를 받치고 있습니다​/ 부록 같은 자식들은 곁을 떠나고 없지만/ 책장 어디쯤 민들레 한 송이 피어있을,/ 저 두꺼운 몸을 빼내면/ 지구 한 귀퉁이가 무너져버릴지도/ 양장의 날개를 펼친 책들이 페이지를 벗어나/ 어느 문맹의 별을 반짝일지도 모릅니다/ 어깨 접힌 골목에 밑줄을 긋는/ 저녁의 행간/ 늙은 개척자의 목차에서 길을 찾던 바람이/ 한 장, 보수동을 넘깁니다//
* 제9회 조영관 문학창작기금 수상작

쑥 / 박은영
넓은 들판이었다/ 우물가 동백꽃도 다 떨어진 조용한 오후였다/ 어머니는 햇빛을 등진 채/ 어린 쑥의 시린 발꿈치를 어루만졌다/ 살아온 세월만큼 더딘 걸음으로 옮겨가는/ 당신의 갈라진 손끝은 푸른 물이 배고/ 대소쿠리는 이른 봄으로 묵직했다/ 산 벚나무 환하게 눈을 뜨는 봄/ 먼 들판을 보고 있으면 입안에 쓴물이 고였다/ 쓰디쓴 봄의 흔적을 지우고/ 양지 바른 자리에 웅크린 어머니/ 내 가슴 깊은 곳에서/ 된장뚝배기가 끓고 찰진 떡 치대는 소리가 났다/ 엄마 엄마 부르면/ 꽃대 같은 고개를 들어 낭창거리고/ 다시금 몸을 숙이던 유년의 어느 저편/ 까막눈 당신은 저물도록 들판을 읽어내려갔다/ 추운 겨울을 견뎌낸 푸른 쑥이/ 내 눈물콧물에 버무려지고 있었다/ 개구리 우는 논두렁을지나/ 산 벚꽃 흩날리는 들판을 내달리다 넘어진/ 어린 무릎에 쑥물 든 시절이었다//
* 제1회 농어촌희망문학상 수상작

번 아웃 신드롬 / 박은영
평화슈퍼마켓 옥상 빨랫줄,/ 붉은 삼각팬티가 오후를 버티고 있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던 태양의 계절/ 저 아래 깊은 곳에서부터 조여 올라오는/ 허물 한 장의 효능으로/ 여름은 붉고 매미의 울음은 탄력이 있었다/ 몇 번의 밤이 자세를 바꿔도/ 음은 늘어나지 않고/ 골목의 맨살에 달라붙어 있었는데/ 신축성 있는 날들은 가고/ 부르지 못한 후렴은/ 재개발 철거반을 돌고 올 바람의 몫이다// 허물을 남기고 사라진 슈퍼맨/ 그가 한 세계를 지켜낼 수 있었던 건/ 저 손바닥만 한 팬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구해준 이름이 빼곡히 적힌 외상장부가/ 유물이 되어 묻힐 골목/ 이제는 사각으로 갈아입어야 할 때/ 평화 위로 떠올랐던 태양이/ 걸음을 당긴다// 나타났다 사라질 붉은 망토의 시간/ 발랫줄에 걸린 불씨 한 점이/ 서녘으로 옮겨 붙는다//

토구(土狗)* / 박은영
나는 삽 한 자루를 가지고 부화했다// 땅을 팔 때마다 부하게 일어나는 흙먼지/ 배냇짓을 잊어버리고 땅파기에 열중한다/ 밤늦도록 땅을 파며 놀던 나의 멱살을 쥔 아버지처럼/ 손아귀 힘이 강해진다 파도 파도 배고픈 날들/ 밥그릇 수만큼 삽은 커다래지고/ 손톱은 딱딱해져 삽날에 찍혀도 흠집이 나지 않는다/ 비이이- 구덩이로 고여 드는 울음,/ 물기 많은 한숨이 원을 그리며 퍼진다/ 한 삽 한 삽 퍼 올린 흙더미에 아내가 딸려오고/ 부화한 새끼들이 배고픈 줄도 모른 채/ 흙가루를 날리며 웃어댄다/ 움켜쥐는 법을 터득한 후 빨라진 삽질의 속도,/ 밥그릇이 쇳소리를 내며 바닥을 드러낸다/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산자락/ 수평선 안쪽으로 각혈처럼 노을이 번진다/ 세상이 한 삽 가득 어둠을 떠먹는 시간/ 갈기를 세운 사자자리별똥별에 어깨는 움츠려들고/ 삽자루를 쥔 흙투성이 손은 굳어 펴지질 않는다/ 이제 삽을 내려놓아야 할 때/ 한평생 파놓은 깊고 어두운 구덩이/ 겨우, 내 한 몸 뉠 자리다//
* 땅강아지 혹은 땅개, 땅개비라고 불리는 곤충.
* 제2회 천강문학상 대상 수상작

백수현상 / 박은영
나는 수압이 높은 동네에서 삽니다 웃풍이 부는 방, 작은 기포들로 만든 꿈은 아침이 되면 사라져 버리죠 뜨물을 받아 세수를 합니다 우윳빛 피부를 가진 친구는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어떤 화장품을 쓰는지 물어보았는데 밤마다 애인이 만들어 준다고 합니다 자기는 없고 소개서만 쌓이는 현상, 늙은 면접관들 앞에서 머릿속은 하얘집니다 냉수를 마시고 속을 차린 어젠, 정수기가 나보다 쓸모 있다는 것을 알았고 뜨겁거나 차갑지 않은 이력을 가진 오늘은 직수로 놀고 있습니다// 하품을 합니다// 또 다시 맑은 아침입니다//

검은 악보 / 박은영
우주가 검은 건 어둠이 아니라고 하지// 나는 피아노학원을 다닐 때부터 콩자반을 좋아했다/ 머리가 흰,/ 동네 할아버지들이 무서워 마디 밖으로 다녔지/ 종이와 눈사람과 가루약이 없는 세상에서/ 검은 옷을 입고 살았다면,/ 이라고 쓸 적마다 연필심은 부러지고/ 나는 혼자 발톱을 깎았다/ 그것은 그림자를 자라나게 하는 일/ 흑조를 보고 온 날/ 마스카라를 사고 까만 눈물을 갖게 되었다/ 흑해는 아주 먼 바다였지/ 세계지도를 펼쳐 흑채 한 통을 뿌리면/ 겨울비가 내렸다/ 아스팔트는 상습적으로 얼었고/ 그늘진 당신이 블랙아이스를 조심하라고 했지// 말은 깊을수록 검은색을 띠지/ 까마귀가 되고 싶은 밤들/ 간혹, 눈을 감고 점이 되기도 했지만/ 먹물은 차지 않았다/ 우주는/ 인간의 손으론 칠 수 없는 물질로 이루어졌다고 하지/ 손가락이 백 개였다면 어땠을까/ 블랙리스트에 올랐겠지//

어메이징 그레이스 / 박은영​​
뉴기니섬 다니족 여인은/ ​친족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제 손가락 마디를 자른다/ 몸의 한 마디를 잘라냄으로써 슬픔에 동참하고/ ​상처가 아물면/ ​자른 마디를 이어 붙여 돌림노래를 부른다/ 결국, 성한 손가락은 남지 않게 되는/ ​지독한 생의 레퍼토리// ​오금행 열차 안이다/ ​한 여자가 잘린 손가락 마디로 연주를 한다/ ​프레스에 절단됐다는,// ​글귀 적힌 악보가 사람들 눈으로 전조되고/ ​마디 없는 손이 음표를 단다/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더 이상 놀라운 노래가 아니다/ ​사방이 놀라운 일투성이라/ ​슬픔을 환승역으로 둔 이들은 노래를 돌려 부르지 않는다/ ​종점은 가까워오는데/ ​그녀의 선율을 오선지에 옮겨줄 손은/ ​어느 칸에 있을까/ ​몸의 온 마디를 잘라내도 다시 죽순처럼 돋아나고/ ​한 계절을 차지할 슬픔의 길이// 뉴기니섬 다니족 여인을 태운/ 오금행 ​열차가 절정의 구간을 지나간다/ ​ 지네가 손가락을 휘감고 기어가는 듯/ ​오금 저리는 밤// 별 하나가 못갖춘마디를 뚫고 나온다//

장미의 습도 / 박은영
밤길을 다녔다// 어둡고 습한 곳은 늘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했다// 마른하늘에 번쩍, 가시가 돋칠 때마다 전선에 걸린 모가지들이 위태로워 보였다 그러나 해를 보는 날은 화장을 두껍게 한 늙은 여배우의 편이 되기도 하였다 시들지 않으려고 혈자리를 누른 일과 그물스타킹으로 당신을 붙잡아 놓은 일이 부끄럽기도 하였다// 장마가 시작될 즈음// 눈 속의 가시는 울어야 뽑힌다는 것을 알았다// 내 몸의 가장 낮은 곳에서 방언을 듣던 밤, 그 많은 눈꺼풀을 감고 그 누구의 잠도 아닌 잠*을 자고 싶어서 나는 붉은 매니큐어를 바른 발톱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루 살로메 루 살로메,// ​ 먹구름이 눈 밑으로 올라왔다//
* 릴케의 묘비명.

모자의 완성 / 박은영
무거운 모자가 걸어갑니다// 모자의 무게는 코끼리 한 마리를 더한 값/ 태평양을 건너갈 뱃삯을 구할 때까지/ 모자의 위장은 만삭,/ 배부른 모자는/ 먹이의 태동을 겪어내야 합니다// 간혹, 뒤집어진 풍뎅이처/럼 버둥거리는 모자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위장의 깊이만큼 허기가 도는 세계/ 가난한 모자는/ 부자가 될 수 없으므로 태몽을 꿉니다/ 봉분이 될 때까지/ 운명을 눌러쓰는 법을 터득해야 합니다// 그늘을 분비하며,/ 한 몸이 되어 걸어가는 보아뱀과 코끼리/ 머리의 위치가 달라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지만/ 무겁게 눌러쓴 길을 밀고 당기는 사이/ 모든 먹이사슬은/ 모자관계를 형성합니다// 열 달 동안 쑥쑥 자랄 두상으로/ 모자는 완성됩니다//

모눈종이 / 박은영
나는 한 칸으로 눈을 떴다// 일흔두 칸을 검게 칠한 할머니의 눈이 오목했다// 히말라야인들은 첫 칸과 마지막 칸, 딱 두 번 초를 켠다는데 나는 한 칸에 한 번씩 생일초를 켰다 고깔모자를 쓴 엄마가 캄캄한 창문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공포는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곤 했지만 그건 모두 네모 안의 일// 또, 사각팬티야?// 나는 선물상자를 머리에 뒤집어썼다 할머니의 눈에서 네모 난 바람이 불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같은 간격의 말이 빠져나왔다 먹구름 낀 거리, 나는 미움과 마음 사이의 미음을 생각하며 보도블록을 걸었다 혼자서 금을 밟으면 죽는 놀이를 했다// 어느 칸에선가 하늘이 파랬다//

스카라베우스 / 박은영
길의 역사는 냄새로부터다/ 아버지, 말(言)의 배설물을 어디서부터 굴리고 왔나요/ 한 말을 또 하고 또 하는 숱한 말의 세계/ 당신은 경단 같은 그림자 안쪽에서/ 동그랗게 몸을 말았다/ 배설하는 자들은 따로 있는 법,/ 가장 곤욕스런 길은/ 아버지와 함께 대문을 나서는 날이었다/ 말의 흔적을 찾지 못하고 침묵하는 걸음에서/ 기하학적인 바람이 불었다/ 냄새의 각도에 따라 갈 길이 정해지는 시대/ 신화를 상속받은 가장들은 머리를 굴리고 눈동자를 글리고 바람 빠진 바 퀴를 굴려야 한다 둥글게 지나간 자리가 길이 되기까지, 아무렇게나 퍼질러 놓은 말들이 뭉쳐질 때까지 더부룩한 하루를 맞닥뜨려야 한다/ 돌아온 길이/ 양각의 주름으로 새겨진 아침/ 코끝에 붉은 인주 묻은 아버지가 대문을 나선다/ 가장 냄새나는 길을 골라/ 태양을 굴리고 간다//

파레이돌리아* / 박은영
얼룩입니다/ 한낱, 인간의 모습을 한 나는/ 그들이 알아보기 전까진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정일을 두고 태어난 게 아니라/ 단지, 묻은 거니까/ 교과서 김칫국물이나 청바지 생리 혈/ 흰 와이셔츠와 립스틱으로 존재합니다/ 언젠가는 탄로가 날 운명// 호랑이와 사람은 자꾸 뭔가를 남기지만/ 이미 흔적인 나는/ 화성의 건축물로 달 표면의 토끼가 부럽지 않습니다/ 그것은 미지와 지미의 차이/ 얼룩이란 글자가 얼굴로 보인다면/ 당신도 나와 같은 혈통,/ 태몽의 유래는 가장 작은 점에서 시작됩니다// 어디서 본 적 있는 얼굴이에요/ 나는 평범한 자국,/ 비 오는 날엔 조금 더 키가 자라고/ 한여름엔 매미 울음소리로 연해지다가 아침이면/ 모호한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그들은 옷자락에 묻을까 봐 피하다가도/ 무심코 큰 그림을 그립니다// 가능성은 더러운 것/ 누군가는 나를 보고 길을 찾기도 합니다//

* pareidolia: 눈 코 입이 있는 실제 생물이 아님에도 무생물의 것에서 얼굴을 그려내는 현상.

구지가 / 박은영
이 밤, 토끼는 잠들었겠지// 나는 거북스럽게 목을 움츠리고 야근을 한다// 토끼와 나의 거리는 사계, 빨간꽃 노란꽃 꽃밭 가득 피어도 삶은 정당치 않았다 정정당당한 밤은 없어 입에서 입으로 노랫가락을 넘겨주는 것// 결승점은 보이지 않고/ 토끼가 당근을 쥐고서 잠을 자는 길목이다// 비몽사몽, 목이 잘리는 꿈을 꾼다 명퇴를 당한 친구는 평생 목 없이 살아가야 한다고 했지 목 좋은 선술집, 닭의 모가지를 비틀고 나면 거북목증후군의 통증을 잊곤 하였지// 머리와 몸통을 잇는 노래에서 구운 냄새가 나는 밤, 토끼는 늦잠을 잘 것이고 나는 잘도 도는 미싱 앞에서 한 생을 바쳐야겠지만//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목주름을 잡으며// 거북이 달린다//

박쥐 / 박은영
햇빛이 닿으면 목덜미가 타는 듯했다// 송곳니는 자라고 십자가를 봐도 가슴은 찔리지 않았다 관 같은 쪽방에서 영원히 사는 꿈을 꿨다 월경은 언제 했더라 피를 생각하다가/ 갈증을 느끼며 잠이 들었다 학교 가야지, 돌아누운 엄마의 한숨에서 마늘 냄새가 풍겨도 아침은 죽은 척 일어나지 않았다// 헌혈과 흡혈 사이를 오가는 길은 깜지처럼 어둡고 어느 한 장면에서 달이 뜨곤 하였다 드라큘라보다 주삿바늘이 무섭다고 영어 단어장에 쓴 낙서를 지웠다 무서운 건 따로 있었다// 암막 같은 내일,// 체육복은 몇 반 누구에게 빌려야 할까 아무도 빌려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까지 몇 번이나 그날을 헤아려야 할까// 아버지는 아무 날짜에 대문을 걷아차고 들어와 피 같은 돈을 뜯어 갔다// 불순한 동굴// 나는 거꾸로 매달려 눈을 감았다//

가리비 / 박은영
오늘은 흐리고 비,/ 슬픔을 가리기 위해 일기를 쓴다// 일기가 숙제였던 시절, 나는 받아쓰기보다 가리는 법을 배웠다 즐거운 일을 지어내 칸을 메우고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면서 웃는 얼굴을 그렸다// 가리지 않고 사는 원시부족은/ 문자가 없고/ 벌거벗은 몸에 진흙을 발라 그림을 그린다/ 사냥한 새끼 원숭이를 구워 먹고/ 그 뼈로 귀를 뚫어/ 한 날의 감정을 춤으로 내려쓰는 것이다/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가리지 않고 사는 삶은/ 얼마나 서정적인가// 가정방문 날, 내가 쓴 일기는 거짓말인게 탄로 났지만 그 후로도 나는 칸칸이 없는 이야기를 지어냈다// 오늘은 가리고 비,/ 일기를 쓴다// 검사가 아닌 위로의/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고 싶은 것이다.//

브라자 / 박은영
촌스런 소재의 이름이다 그 흔한 꽃무늬는 없지만 도청 광장의 깃발이 되어 날려도 아무렇지 않을, 함성을 따라 흔들리는 바람의 무덤이다 지금은 텅 비었으나 버리지 못하는,// 해질 때까지 떨어지지 않고 삶을 지탱한 질긴 끈의// 낙하산,// 엄마는 늘 비상사태로 살았다//

추억의 방식 / 박은영
메모리얼 다이아몬드라고 아시나요// 새로운 장례문화인데요 유골에서 탄소를 추출하여 합성다이아몬드를 만드는 거래요 탄소의 양을 따라 변하는 빛깔, 사람마다 고유한 색을 가지고 있대요// 당신은 목걸이와 반지와 귀고리가 되어 삶의 일부로 살아가는 거지요 잃어버리거나 도둑맞진 않을까 걱정을 시키겠지만 밤하늘의 별을 따주겠다던 약속을 지킨 셈인가요 한 인생이 보석으로 가공 되다니, 이 얼마나 아름답고 슬픈 발상인가요// 기억은 플라스틱이 아닙니다. 당신이었는지 알아볼 수 없도록 썩어서 산천의 양분이 되고 이천 원짜리 화분 속 마사토가 되어 꽃으로 다녀가야 해요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처럼// 생의 순환은 잊어야할 때 잊어주는 것// 당신은 빛났습니다// 한 줄의 일기로 남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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