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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윤이산 시인

부흐고비 2022. 5. 21. 07:50

윤이산 시인
1961년 경북 경주 출생. 경주 문예대학,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9년 《영주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물소리를 쬐다』가 있다. 계간 《문학청춘》 기획위원. ‘시in’ ‘응시’ 동인.

 



선물 / 윤이산
늙은 두레상에 일곱 개 밥그릇이/ 선물처럼 둘러앉습니다/ 밥상도 없는 세간에/ 기꺼이 엎드려 밥상이 되셨던 어머닌/ 맨 나중 도착한 막내의 빈 그릇에/ 뜨거운 미역국을 자꾸자꾸 퍼 담습니다/ 어무이, 바빠가 선물도 못 사 왔심니더/ 뭐라카노? 인자 내, 귀도 어둡다이/ 니는 밥 심이 딸린동 운동회 때마다 꼴찌디라/ 쟁여 두었던 묵은 것들을 후벼내시는 어머니/ 홀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비바람이 귓속을 막았는지/ 추억으로 가는 통로도 좁다래지셨습니다/ 몇 년 만에 둥근 상에 모여 앉은 남매는/ 뒤늦게 당도한 안부처럼 서로가 민망해도/ 어머니 앞에선 따로 국밥이 될 수 없습니다/ 예전엔 밥통이 없어가 아랫목 이불 밑에 묻었지예/ 어데, 묻어둘 새나 있었나 밥 묵드키 굶겼으이/ 칠남매가 과수댁 귀지 같은 이야기를/ 손바닥으로 가만가만 쓸어 모으다가/ 가난을 밥풀처럼 떼먹었던,/ 양배추처럼 서로 꽉 껴안았던 옛날을 베고/ 한잠이 푹 들었습니다/ 문밖에는 흰 눈이 밤새/ 여덟 켤레 신발을 고봉으로 수북 덮어 놓았네요/ 하얗게 쏟아진 선물을 어떻게 받아얄지 모르는 어머니/ 아따, 느그 아부지 댕겨가신 갑따/ 푸짐한 거 보이, 올핸 야들 안 굶어도 되것구마이/ 미역국처럼 뜨끈한 묵소리를 싣고/ 일곱 남매가 또 먼 길을 떠나는 새벽//
* 2009년 영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그 바다에 다시, 서다 / 윤이산
아버지가 고등어를 들고 오시는 날엔/ 통째로 걷어온 바다로 온 집안이 출렁거렸다// 어딘가 닿기 위해 온 바다를 휘젓고 다녔을 고등어/ 불판 위에서도 해류를 거슬러 가는지/ 몸 뒤집는 소리가 거셌다// ―쪼매마 더 기다리거래이/ 부레처럼 부푼 어머니 음성이 살짝 밖으로 튀었고/ 거센 파랑을 잠재울 때까지/ 우리는 침 삼키는 일조차 끈질기게 얌전했다/ 앉은뱅이책상 다리 같았다// 물결을 떼어내 오래오래 씹으며/ 동생은 GPS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고/ 나는 그물과 미끼를 구상했다/ 언젠가는 바다를 통째로 삼켜버리리라, 다짐한 것도 같다// ―이 양반 고등어 잡으러 어디까지 가신 기고?/ 아버지를 잃고 점점 그물 되시는 어머니/ 입매에 날물 때가 지나고 있었다// 그물을 들고/ 등 푸른 바다를 찾아나서는 늦은 오후/ 누군가가 이미 가두리해둔 바다에서/ 수평선이 점점 목을 조여 왔다// 그물을 버리고/ 왈칵, 온 바다를 들이켜기 시작했다//

감자를 먹습니다 / 윤이산
또록또록 야무지게도 영근 것을 삶아 놓으니/ 해토(解土)처럼 팍신해, 촉감으로 먹습니다/ 서로 관련 있는 것끼리 선으로 연결하듯/ 내 몸과 맞대어 보고, 비교분석하며 먹습니다/ 감자는 배꼽이 여럿이구나, 관찰하며 먹습니다/ 그 배꼽이 눈이기도 하구나, 신기해하며 먹습니다/ 호미에 쪼일 때마다 눈이 더 많아야겠다고/ 땅속에서 캄캄하게 울었을,/ 길을 찾느라 여럿으로 발달한 눈들을 짚어 가며 먹습니다/ 용불용설도 감자가 낳은 학설일 거라, 억측하며 먹습니다/ 나 혼자의 생각이니 다 동의할 필요는 없겠지만/ 옹심이 속에 깡다구가 들었다는 건/ 반죽해 본 손들은 다 알겠지요/ 오직 당신을 따르겠다*는 그 일념만으로/ 안데스산맥에서 이 식탁까지 달려왔을 감자의/ 줄기를 당기고 당기고 끝까지 당겨 보면/ 열세 남매의 골병 든 바우 엄마, 내 탯줄을 만날 것도 같아/ 타박타박 떨어지는 눈물을 먹습니다//
* 감자꽃의 꽃말

노을 / 윤이산
누가 펄펄 끓는 하루를 들고 가다 그만, 양동이를 엎질러 버린 게 틀림없다. 이녁까지 뜨끈하다.//

가만 ㅡ스승 / 윤이산
모두 우르르 몰려나간 뒤, 불 끄고 문 닫고 돌아서는 맨 나중 사람의 가만한 손놀림처럼 비가 온다 가만 다녀가는 이 겨울비가 ‘첫’을 불러오고 싹을 틔우고 애채*를 키울 것이다/ 가만, 나의 뒤를 닫아 주고 돌아서던 맨 나중 사람의 얼굴이 나를 열고 있다//
* 애체: 나무에 새로 돋은 가지.


저녁의 높이 / 윤이산
저무는 것 앞에 서면/ 다 내려놓고 엎드리고 싶어진다/ 아귀힘 풀고 무조건 다 져 주고 싶어진다/ 아비의 애첩이 곧 임종할 것 같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랬다/ 늘 고개 숙이고 걸었던 사춘기/ 다 그년 때문이었는데/ 노파의 병상 아래서/ 무릎이 문드러져 질질 흘러내리고 있었다/ 호주머니에 손 넣고/ 일몰을 바라보고 섰노라면/ 세상 모든 오빠들이 한꺼번에 달려와/ 휘파람을 불어 주는 거 같아/ 나를 에워싸고/ 그렇제 ! 그렇제 ! 그렇제 !/ 그러는 거 같아/ 무조건/ 응 ! 응 ! 응 !/ 그래야 할 거 같아/ 오늘도 수굿이 해가 진다/ 그러라고 하루 한 번 해도 져 준다//

별 / 윤이산
캄캄한 밤, 막차를 놓친 막막한 사람들의 정류장. 이 정류장은 높이 떠 있어 길의 세세한 정보가 잘 보인다. 외통수가 빠져나간 샛길의 속속들이까지 발칵, 드러난다. 이 정류장에 오래 앉아 있다보니 좀전 놓친 막차가 목적지에 안 내려 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디 그 길뿐인가. 노선을 변경할 기회를 얻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누구든지 앉았다 떠날 수 있는 정류장은 어느 방향으로도 열려있다 무엇보다 이 정류장은 곁이 생긴 듯, 겹을 걸친 듯 혼자 앉아 있어도 외롭거나 무섭지 않다. 차렵이불 한 장 같은 잠을 덮고 기대 누우면 아무데도 가지 않고 그냥 여기 눌러 앉고 싶어진다. 여기가 내 목적지고 종착지라는 생각도 든다.// 내가 가장 어두워졌을 때, 딸칵, 별이 켜졌다 굳은데가 생겼다.//

길 / 윤이산
죽음이간다죽음이죽음을따라간다죽음이죽음을끌고간다죽음이죽음을밀면서간다죽음이꼬리를물고간다떠밀려가던죽음이슬쩍,샛길로빠져버리자빈자리를향해액셀러레이터를밟는다간혹뒤집혀찌그러진죽음이새어나오기도한다죽음이죽음을향해서간다와이퍼로죽음을닦으며간다내비게이션의안내를받으며간다죽음끼리마주보며간다맞은편죽음이건너올까찐-한썬팅속에숨어서간다죽음에도착하기도전에갑자기죽음이벌떡,튀어나올까봐보험들고간다//

 

회(回) / 윤이산
밤이면 더 길어지는 복도// 한밤에 누가 으스스 일어나/ 잠자코 복도 끝으로 흘러가고/ 복도 끝으로 흘러 간 사람이 다시/ 반대편 복도 끝을 향해 하염없이 흘러가고/ 서슬이 시퍼렇도록 새하얀 불빛 아래 밤의/ 컨베이어 벨트는 쉼 없이 복도를 실어 나르고/ 복도 끝에는 낭떠러지가 있을 것 같고/ 거기가 죽음이 앉는 자리 같고/ 누군가 복도를 붙잡아 세우고 흐느끼는 소리/ 복도가 쩔렁, 물웅덩이에 걸려/ 잠시 휘청이다 다시 흘러가고/ 우리 병원은 환자들의 쾌유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죽지도 않고 성심성의誠心誠意를 실행 중인 새빨간 전광판/ 죽고도 복도로 안 나가고 버티는 죽음은 없나/ 기록을 챙겨 들고 정기적으로 점검 다니는 필기구들/ 복도가 호명할까 봐/ 여러 개 줄로 기계장치에 몸을 옭아맨 무의식들/ 아직 뚜껑을 닫지 못한 관棺처럼/ 복도는 길게 열려 있고/ 복도만 없으면 저 너머도 한달음인데/ 복도만 없어도 절차는 한 단계 생략될 텐데/ 누가 복도를 치워줄 순 없나/ 누가 복도를 제발 좀 치워다오/ 집으로 돌아가 드시고 싶은 음식 드시면 마음이 편해지실 거래요/ 그러자 하시고는/ 긴긴밤의 복도를 둘둘 말아 접으며/ 낭떠러지 쪽으로 복도를 치우러 가신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 길쭉한 네모만 보아도 복도 같고/ 복도 끝까지 걸어가 유유히 사라진 아버지가/ 복도를 떨치며 활짝, 다시 걸어오시는 것 같고// 밤이면 더 길어지는 아버지//

큼지막한 호주머니 / 윤이산
큼지막한 호주머니 달린 옷이 좋다/ 메모지도 넣고 돋보기도 넣고/ 자전거도 넣고 여행도 넣고 휘파람도 넣고/ 달걀 한 꾸러미 넣어두면 저들끼리 알아서/ 다달이 월 수익 낼 것 같은 호주머니// 칸마다 용도별로 수납하면/ 옷 한 벌로도 한 살림 차린 것 같은/ 그런 호주머니 달고 걸으면/ 가진 것 없어도/ 걸음걸음 실실 콧노래 새겠다// 구멍 난 줄 모르고 실속을 넣어뒀다/ 덜렁 흘려 버려, 이 등신 싶은 적 한두 번 아니지만/ 호주머니 없는 옷을 입고 나설 때는/ 여윳돈 바닥난 것 같아, 숨을 데가 없는 것 같아/ 덜렁거리는 빈손이 안절부절못한다// 언 손도 텅 빈 손도/ 언제나 군말 없이 받아 주던/ 내겐 최측근이었던 호주머니/ 땅에 묻고 돌아선다// 이젠 더 넣을 것도 꺼낼 것도 없는/ 아버지//

일탈 / 윤이산
비상등을 켜고/ 두 눈알에서 빛이 나오도록 힘을 주고/ 핸들에 바짝 매달린다/ 손은 손목을 잡을 수 없고/ 이마는 뒤통수를 지킬 수 없고/ 오른 눈알은 왼 눈알을 보지 못하는/ 가장 가까운 것끼리 가장 어쩌지 못하는/ 그런 길을 달려와서/ 길을 잃었다/ 온몸이 혀로 구성된/ 넓고도 깊은 안개의 몸속에는/ 표지판이 없다/ 신호등이나 횡단보도도/ 조향등이나 계기판도/ 좌회전이든 우회전이든/ 유턴이든 후진이든/ 혀에 닿자 다 녹아버린다/ 해가 떠오르면서/ 뒤엉키고 꼬인 방향이 드러난다/ 표지판이 허공을 길로 급히 수정한다/ 브레이크와 핸들을 확인하고도/ 출발하지 못한다/ 손목을 잘라낸 손/ 뒤통수를 벗어난 이마/ 왼 눈알을 따돌린 오른 눈알/ 잃어버린 길 위에서/ 불안이 클러치를 꽉, 밟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 윤이산
한 원로 화가가 양귀비 보러 가자 했다/ 급조달한 함박꽃이 우스개를 싸왔다/ 우스개가 가속 페달을 밟았고/ 차창 밖 정물화가 속도에 튕겼다/ 하늘은 푸르고 구름은 가볍고/ 강 물살은 빠른 날이었다/ 술병이 바닥날수록/ 꼭 채웠던 품위도 단추가 풀어졌다/ 높낮이가 자빠졌고/ 좌우가벌꿀처럼 엉겼다/ 때마침 명지바람이 불어/ 생초(生草)들이 다 드러눕고 그만,/ 할배의 손바닥이 함박꽃/ 섶 안으로 쫄딱 미끄러졌다/ 술이 과했다고,/ 작별 인사 대신 근심 한 장 내밀었더니/ 괜찮단다, 아무 일 아니란다/ 그냥, 쓸쓸한 손바닥이/ 가는 봄날 한번 쓰다듬은 것뿐이란다/ 노을을 싸들고 봄날 뒤편으로 뛰어가는 그녀/ 꽃이 아니라 약초*였다/ 아무것도아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그해 봄날이 지나갔다//
* 함박꽃 뿌리는 약재로 쓰인다.

아무도 꺼내가지 않는 / 윤이산
슬기네 집은 현관문을 열어두고 산다/ 어머니가 공공근로 갈 때도/ 광훈이가 복지센터 공부 갈 때도/ 뇌병변장애 1급 슬기를 안에 둔 채/ 문을 잠그지 않고 닫아만 두고 간다// 누가 누나를 데려가면 어쩌느냐고/ 걱정을 했더니/ 선생님도 안 가져가잖아요/ 광훈이 피식 웃으며 어둑한 실내를 향해/ 손끝으로 V자를 펴 보이고는 나가버린다// 종일 열어 두어도 아무도 꺼내가지 않는,// 슬기를 목욕시켜 눕혀 두고/ 보지도 못할 티브이나 켜 두고/ 현관문 손잡이를 몇 번이고 더 만지작거리다/ 나도 그냥 문을 밀어 두고 돌아선다// 계란이 왔어요~ 계란~ 싱싱한 계란이 왔습니다~// 내 불안을 떠밀며/ 빗장을 풀어 둔 허공 속으로/ 뜨거운 목청이 뛰어든다//

아무렴 / 윤이산
봄이 온다/ '아무렴'/ 꽃이 진다/ '아무렴'/ 외할머니는 사시사철 바다 향해/ 의자를 내놓고 앉아 계셨지/ 온종일 '아무렴' ‘아무렴’ 중얼거리며/ 바다를 바라보고 계셨지/ 신열이 펄펄 끓던 밤에도/ 아무 일 없다는 듯 내 이마를 짚으며/ '아무렴' '아무렴'만 하셨지/ 몸도 마음도 너무 아파 운신조차 어려울 때/ 누군가 차려 내오는 따뜻한 미음처럼/ 당신이 건네준/ '아무렴'/ 이젠 내게도/ 아무렇지도 않게 봄이 오고/ 아무렇지도 않게 꽃이지지/ '아무렴'/ 나도 바다를 향해/ 의자 하나 내놓았거든/ 물고기 잡으러 간 외삼촌이/ 자신이 던진 그물에 걸려 돌아온 바다//

퀵 배송된 ‘제수씨와 젖통’의 카톡 / 윤이산
아주버님, 빅 이벤트, 소식 알려 드릴게요. 오늘‘제수씨’와‘젖통’묶어서 번들 행사합니다. ‘제수씨’만 사셔도‘젖통’이 딸려 가는‘제수씨와젖통’한 다발 구조죠. 이런 찬스 일 년 가도 잘 없는데 아주버님께만 귀띔해 드려요. 어때요? 구미 팍! 땡기시쥬? 이 소식을 구미 이 아무개가 들으면 자기도 사겠다며 중뿔나게 달려올 텐데, 서로 사겠다고 개얽혀 싸우시면 아는 안면에 제 입장 곤란해지니까 소문 내지 마시고 먼저 건져 가세요. 제가 아주버님께 젤 먼저 알려드리는 건‘제수씨’와‘젖통’을 누구보다도 예뻐해 주시고 또 일전에 구매의사도 밝히신 것 같아서 이왕이면 아주버님께 드리려고 결심했답니다.‘제수씨’와‘젖통’묶어서 아이스크림 한 통 값도 안 되니 완죤 대박 찬스죠! 오늘, 날씨도 꾸릿꾸릿한데‘제수씨’와‘젖통’사이 오르락내리락하시면서 스릴 만끽하세요. 가격은 싸지만 심야 베스킨라빈스✸의 살인적인 맛보다 더 짜릿할 거예요. 아주버님, 퍼뜩 입금해 주시면‘제수씨와젖통’을 퀵으로 잽싸게 배송해 드릴게요. 그럼 빵긋^^답신 기다리며 이만 총총.//
* 조동범의 시 <심야 베스킨라빈스 살인 사건>에서 인용

간보다 / 윤이산
간 본다/ 내 간은 숨겨놓고/ 상대의 간을 꺼내려/ 간(間)을 노린다/ 여의치 않으면/ 내 간을 먼저 꺼내놓고/ 흥정을 터 보기도 한다/ 간이 배 밖에 나온 간 큰 놈들은/ 상대의 복장에 바로 손을 쑥 집어넣어/ 간을 꺼내기도 하지만 잘못 건드렸다가/ 간 떨어질 뻔한 위기도 맞는다/ 취향에 따라 달라지는 간 맞추기/ 서로 간보다 입맛 맞으면/ 친구 간이 되기도 하고/ 별 볼 일 없을 때는/ 간에 붙으려다가/ 쓸개에 가 붙기도 한다/ 간 보다 피로해진 간이/ 랑게르한스섬처럼 떠 있다//

칼맛 / 윤이산
사내가 칼을 치켜들고/ 수평선을 내리치며 워밍업을 끝낸다/ 시퍼렇게 날을 벼린, 작심의 칼 끝에/ 고등어 배가 갈라지고 뼈와 껍질에서 살점이 분리된다/ 껍질이 벗겨졌는데도 여전히 속살에 배어있는 물결무늬/ 엔진과 스크루 없이도 무늬를 저어 바다를 밀고 갈 기세다/ 칼질이 남긴 살점 위로 한 차례 거친 발버둥이 지나고/ 사내의 단호한 칼날이 단숨에 몸부림을 떠낸다/ 솜씨, 귀신 같아요 진짜, 꾼이신가 봐/ 미끌한 찬사를 꺼내놓으며 내가 즉석 상차림 앞에 끼어든다/ 회는 무엇보다 칼맛이지요/ 번개 스치듯 단박에 베어줘야 합니다/ 그것이 산목숨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고요/ 몸 안 가득 번지는 피비린내를 소주로 헹궈낸 사내가/ 바다를 향해 밀린 오줌을 갈기고는/ 칼을 좀 더 갈아두어야겠다며 사포를 꺼낸다/ 바다 한가운데, 흔들리는 상판 위에서/ 칼맛을 씹는다/ 곧 물때가 바뀔 것 같다//

문득, 생각나서 / 윤이산
침침한 눈으로/ 노선 안내판을 더듬고 있을 때/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문득, 생각나서 전화해 봤다는/ 반쯤 열린 문을 왈칵, 열어젖히며/ 맨발로 뛰어나오는/ 옛집의 불빛 같은 그 말/ 흐릿해진 기억에 불이 켜지고/ 먼 거리를 성큼 당기며/ 지하철이 들어온다//

방심(放心) / 윤이산
먼 데 보고 걷다 넘어져/ 또, 깨졌다/ 후회막급이/ 한꺼번에 달겨들어/ 방심(放心)을 볶아치지만/ 취소할 수 없는 일보(一步)/ 깁스한 팔이/ 변명할 수 없는 입처럼 무겁다/ 방심하느라 놓친 불온한 기미들/ 매물 의뢰하러 갔다가 밥까지 얻어먹고 왔던, 그 후에서 서너 차례 더 소주와 허심탄회를 나누었던 삼천리부동산 소장이 달포 전 급사했다는 소식을 새 간판을 갈아단 삼천리부동산에서 듣는다/ 피붙이 없는 타관의 밤이 외롭다던/ 입양해간 다육이가 시무룩해졌으니 한번 들러달라던/ 넋두리들 속에/ 은폐되어 있었을 기척들/ 놓치고,/ 허방 찔리기 직전까지는/ 얼굴의 안쪽이 해골인 것을/ 잊고 산다//

환생역에서 / 윤이산
받쳐준다는 말,/ 만져볼 때마다 참, 단단하다/ 헌 자루에 척추를 박아 넣은 듯/ 자세가 꼿꼿해진다/ 보호자는/ 심을 뺀 볼펜대에 몽당연필을 끼우듯/ 슬쩍,/ 받쳐주기만 하라고 일러주었다/ 교통카드에 용기를 보충하고/ 몽당연필의 받침대가 되러가는 길/ ‘환승입니다’라는 멘트를 ‘환생입니다’로 바꿔들으며/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로 옮겨 탄다/ 염색체가 나보다 한 개쯤 더 많다는 그 애가/ 운동장을 흔들며 굴러와 내 안에 몸을 밀어 넣자/ 고였던 불안이 떠밀려나간다/ 밑돌을 괴듯/ 몽당연필과 심心을 뺀 볼펜대의 합체/ 길이가 조금 늘어났을 뿐인데/ 하늘과 땅 사이 꽉, 차는 것 같다/ 내가 꽃대가 되어주면/ 그 애는 꽃을 피울 것이다//

오른짝이 아쉽다 / 윤이산
오른손잡이인 나/ 자꾸 오른짝 고무장갑만 찢어진다/ 살수록 왼짝만 수두룩 남아/ 버리긴 아깝고/ 왼짝을 뒤집어 오른손에 껴보면/ 손에 잡힌 것들이 자꾸 미끄러진다/ 일이 안 된다/ 왼짝을 뒤집어 오른손에 끼는 나는/ 수두룩하니 남은 왼짝 중 하나 아닐까/ 명색이 오른짝의 짝이면서도/ 보조용밖에 못 쓰인 건 아닐까/ 반대를 위한 반대편에 붙어/ 옳은 편의 촛대뼈나 까다/ 허방 나가떨어진/ 오른손에 뒤집어 낀 왼짝을 벗으며/ 김수환 추기경님/ 성철 스님/ 아버님/ ……/ 불쑥,/ 사라져간 오른짝들을 떠올린다//

늘봄 / 윤이산
맞은편에서 남녀 한 쌍이 걸어온다. 잡은 손을 흔들며 걸어온다. 두 사람이 한 덩어리가 되어 걸어온다. 흔들리는 두 손의 리듬에 맞춰 절름거리는 남자의 다리가 발림을 넣으며 따라온다. 공원 산책길이 이팝 꽃을 뿌려 주고 명지바람도 거든다. 얼핏 스치며 보니 남자는 머리카락이 희끗하고 키가 몽총한 여자는 화상 흉터가 한쪽 눈두덩을 덮고 있다. 한 쌍의 초로(初老)가 지나간다. 팔다리 여덟이, 아니 사십 개 손발가락과 두 통의 머리가, 아니 그 밖의 부속품들까지 혼연일체, 한 덩어리가 되어 지나간다.// 두 사람은 똑같이 봄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평생 봄이라는 단벌만 입고 살아갈 것 같았다.//

일탈 / 윤이산
비상등을 켜고/ 두 눈알에서 빛이 나오도록 힘을 주고/ 핸들에 바짝 매달린다/ 손은 손목을 잡을 수 없고/ 이마는 뒤통수를 지킬 수 없고/ 오른 눈알은 왼 눈알을 보지 못하는/ 가장 가까운 것끼리 가장 어쩌지 못하는/ 그런 길을 달려와서/ 길을 잃었다/ 온몸이 혀로 구성된/ 넓고도 깊은 안개의 몸속에는/ 표지판이 없다/ 신호등이나 횡단보도도/ 조향등이나 계기판도/ 좌회전이든 우회전이든/ 유턴이든 후진이든/ 혀에 닿자 다 녹아버린다/ 해가 떠오르면서/ 뒤엉키고 꼬인 방향이 드러난다/ 표지판이 허공을 길로 급히 수정한다// 브레이크와 핸들을 확인하고도/ 출발하지 못한다/ 손목을 잘라낸 손/ 뒤통수를 벗어난 이마/ 왼 눈알을 따돌린 오른 눈알/ 잃어버린 길 위에서/ 불안이 클러치를 꽉, 밟고 있다//

면목 없다 / 윤이산
몰매처럼 내리치는/ 폭우를 맞으며// 누렁개 한 마리/ 주유소 모퉁이로/ 뛰어간다// 비쩍 마른 다리 셋/ 혼비백산한 눈알 대신/ 퇴로를 찾고 있다// 살과 뼈가/ 핏물에 버무려진/ 다리 하나를/ 모시듯 받쳐 들고// 질주하는 차들이/ 다리 넷의 비명을 깔아뭉개고/ 덜어져 가는/ 저물녘// 뒤돌아 욕 한 마디 내뱉을 법도 한데// 면목 없다는 듯/ 달게 받는다는 듯/ 오직 바닥에만 집중해 뛰어가는// 세상 몽둥이란 몽둥이를 한꺼번에 다 맞는다 해도/ 저들은 욕할 줄 모른다// ‘이, 개 같은 세상!’이라는 욕 같은 건/ 죽어도 할 줄을 모른다// 욕 같은 건 인간 같은 것들이나 하는 것// 세상에서 가장 험한 욕은/ ‘이, 인간 같은 것들!’이라는 말일 것이다// 누구 하나 뛰어나와/ 부축해 주는 종자가 없다//

간격 / 윤이산
폭우가 쏟아진다/ 지붕과 창문과 테라스가/ 향나무와 원추리와 채송화가/ 양철과 플라스틱과 스티로폼이/ 항구에 정박한 배들이/ 몸 흔들어 간격을 조절한다// 꽉 조여 있던/ 당신과 나 사이,/ 폭우가 들이친다/지느러미가 요동치면서/ 간격을 조정한다// 우리, 한동안 맞붙어/ 서로를 갉아먹는 일은 없겠다// 사람도 오래되면 물고기처럼 옆줄이 생긴다, 한다/ 어항 속에 넣어 둬도 서로 비켜 다닐 수 있다, 한다//

오랜 후에, 영영 오랜 후에라도 / 윤이산
당신을 읽다가/ 한쪽 귀퉁이를 접어둔다// 나를 당신에게 걸쳐둔 채// 외출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밥을 먹고/ 돌아와 또 꿈을 꾸면서// 접어 둔 쪽을 펼쳐/ 다시 읽는다// 읽다가 접어두는 페이지는/ 점점 늘어나고// 당신은 내게 너무 아득하고/ 나는 당신을 해독하는데 턱없이 서툴고/ 우리는 아직 그런 관계인 걸까/ 그렇다 치고,// 여하간 나는/ 오늘도 당신의 한 귀퉁이에/ 불은 밑줄을 긋는다// 남겨 둔 표식은/ 꽃 피울 자리를 매만져두는 일// 가끔 당신을 덜어다 쓰기도 하는데/ 당신이 나를 얼마나 깊이 물들여놓았는지/ 내가 당신 행세를 할 때가 있다// 나무도 간절히 가려운 자리에 움을 틔운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늘 한 발 늦는,/ 도착하면 파장罷場만 남아있는,/ 내겐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무모라고/ 매몰차게 당신을 닫아버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에게 나를 걸쳐두기로 한다// 당신이 점점 내게로 옮겨와 무럽도록/ 마음이 가려워져서 당신이 내게 왈칵, 쏟아질지// 생각이 간절하다면/ 어찌 꽃이 멀게 있겠는가*// 오랜 후에,/ 영영 오랜 후에라도//
* "仁遠乎哉. 我欲仁, 斯仁至矣. 인(仁)이 멀리 있겠는가? 내가 인을 원하면, 인이 바로 이를 것이다." 논어 술이편 29장 변용.

슬픔은 이정표가 되기도 한다 / 윤이산
슬픔의 반대말이 뭐야/ 녀석이 물었다// 슬픔의 반대말이 뭘까// 슬픔의 반대말을 안다면/ 우리는 안 슬퍼도 될까/ 슬픔의 반대말은 안 슬픔이겠지/ 못 슬픔이든가// 무슨 개 하품 뜯는 소리야/ 지금껏 슬픔의 반대를 일러준 어른들의 말은/ 죄다 틀렸어// 양말을 신으며 심드렁 중얼거리는 녀석의 말에/ 나는 좀 더 골똘해지고// 슬픔의 반대말이 낮잠이라면 어때/ 소풍이라도 상관없지 아무려나/ 슬픔의 반대말이 슬픔을 다 덮는 것도 아닌데// 라면을 끓이려 올려놓은 냄비에서/ 따글따글 물숨이 솟구치네 바짝 타들어가던/ 목구녕이 누글누글해지네// 슬픔의 반대말은 아무래도/ 목구녕 하나 뎁히는 일일지도// 아파트 외벽을 청소하던 스무 살 청년이 떨어져/ 죽었다는 뉴스를 보며 양은냄비 밑바닥까지 들이킨 녀석이/ 지상으로 난 층계를 올라가고// 얘야, 내게는 네가 슬픔이고 슬픔의 반대말이란다// 슬픔의 반대말을 알려주지도 못했는데/ 새벽 노동을 배송하러 가는// 아직 네게는 도착하지 않은 슬픔의 반대말// 너무 슬플 땐 마음을 조금 빼내 보렴//그래도 슬픔은 슬픔의 반대편으로 가는/ 이정표가 되기도 한단다.//

 

공존(共存) / 윤이산
1// 갈대들,/ 모진 비바람에도/ 쉬이 뽑히지 않는다/ 서로의 발목을 꼭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2// 꺾어보면 속이 비어있는 갈대들,/ 몸을 비워야 뻘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비운 힘으로 너를 붙들 수 있다는 것을/ 내가 뽑혀 내동댕이쳐지면서 알았다//

오래된 둘레 / 윤이산
운문사 처진,/ 소나무 한 그루가 밥이다// 한 오백 년쯤 걸어왔다는/ 그 어른 발치에 공양간을 들이고/ 진드기며 개미, 지렁이 식솔에/ 해설사, 사진사까지/ 군식구들이 엄첩다*// 몸 아래 구부린 건/ 땅의 경전을 읽고 있기 때문// 절 아래 식당에도/ 개수대에 쌓인 그릇처럼/ 손님이 수북하다// 산 같은 나무 한 그루/ 거느린 식구/ 참, 많다.//
* 엄첩다: '대단하다'의 경상도 방언

삼십 미터 가웃 / 윤이산
해발 8,125미터,/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는 신들의 높이// 고미영 대원은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 설산에서 추락사했다. 베이스캠프에 먼저 도착해/ 찻물을 올려놓고 곧 내려올 그녀를 기다리던 김재수 대장을 삼십 미터 가웃 눈앞에 두고// 뼈와 살이 으깨진 겨드랑이 사이에는 애인에게 선물 받은 목걸이가 반짝이고 있었다. 한다// 삼십 미터 가을, 그 거리는/ 김재수 대장에게 목줄이 되었다// 이 년 후 김재수 대장은 그녀가 그토록 오르고 싶어 했다는 안나푸르나 등정에 성공한다/ 가슴에 품은 애인의 사진으로 설원의 칼바람을 맞받아치며// 그는 고미영이란 자일이 있어 가능했다고 술회했다// 목줄을 풀면 자일이 되는 끈// 삼십 미터 가웃, 끈 하나가/ 두 사람을 설산에 묶어 놓았다// 다큐멘터리 ‘마지막 선물’*이 끝나고도/ 나는 두 사람의 말뚝에 묶여/ 설산에서 내려오지 못했다//
* 2011년 SBS TV에서 고故 고미영, 김재수 씨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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