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詩 느낌

조용미 시인

by 부흐고비 2022. 5. 23.

조용미 시인
1962년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90년 《한길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일만 마리 물고기가 山을 날아오르다』,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기억의 행성』, 『나의 다른 이름들』, 『당신의 아름다움』등이 있다. 제16회 김달진문학상, 제19회 김준성문학상, 제20회 고산문학대상, 제24회 동리목월문학상을 수상했다.

 



백모란 / 조용미
​ 저 모란은 흰색과 붉은색의 양가감정을 가지고 있다/ 저물녘 극락전 앞에 내가 나타났을 때 모란은 막 백색의 커다란 꽃잎을 겹겹이 닫고 있었다/ 학의 날개 같은 꽃잎 안에 촘촘한 노란 수술을 품고 노란색 수술은 무시무시하게 붉은 암술을 감추고 있었던 것/ 모란은 환희와 비애라는 두 세계를 손금처럼 정밀하게 나누어가졌다/ 뜨거운 방바닥에 몸을 누이고 개울 건너편 모란의 기척을 듣다 잠들었다/ 백모란은 흰색과 모란이라는, 지난여름과 이 봄이라는 극단을 지니고 있기에/ 마흔다섯 절에서 객사한 명창 백모란과 나는 아프고 나은 몸이라는 낡은 비밀을 지니고 있기에/ 백모란 벌어진 꽃잎은 노랗고 붉은 꽃술 때문에 캄캄해지고, 아침의 백모란 향은 앞이 안 보이도록 막강해지고/ 모란이라는 절벽 앞에 나는 위태롭게 서 있다//

가시연 / 조용미
태풍이 지나가고 가시연은 제 어미의 몸인 커다란 잎의/ 살을 뚫고 물속에서 솟아오른다/ 핵처럼 단단한 성게같은 가시봉오리를 쩍 가르고/ 흑자줏빛 혓바닥을 천천히 내민다/ 저 끔직한 식물성을,/ 꽃이 아니라고 말하기엔 너무나 꽃인 듯한/ 가시연의/ 가시를 다 뽑아버리고 그 속을 들여다보고 싶어 나는/ 오래 방죽을 서성거린다/ 붉은 잎맥으로 흐르는 짐승의 피를 다 받아 마시고 나서야 꽃은/ 비명처럼 피어난다/ 못 가장자리의 방죽이 서서히 허물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아무도 들을 수 없는 금이 가고 있는 소리를/ 저 혼자 듣고 있는/ 가시연의 흑자줏빛 혓바닥들//

양귀비 / 조용미
불씨가 하얗게 숨을 쉬고 있는,/ 아직/ 불이 나지 않은 집/ 이제 막/ 불이 붙으려 하는 집/ 창 틈으로 내다보이는/ 흰 양귀비가/ 가득 숨쉬고 있는 마당/ 단 하루만 타올랐다 꺼지는 불/ 양귀비,/ 빛을 내뿜고 있는/ 아편꽃이 피어 있는 마당 안으로/ 누가/ 걸어들어왔다/ 불이 붙기 시작하고 있는/ 적요한 마당 안의/ 흰 양귀비/ 아래 너울거리는 붉은 꽃들/ 단 하루의/ 양귀비, 양귀비/ 활활 빛을 내뿜고 있는 흰 꽃에 바쳐지는,// 불타고 있는/ 빈 집//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 조용미
꽃피운 앵두나무 앞에 나는 오래도록 서 있다/ 내가 지금 꽃나무 앞에 이토록 오래 서 있는 까닭을/ 누구에게 물어보아야 할까/ 부암동 백사실(白沙室)은 숲 그늘 깊어/ 물 없고 풀만 파릇한 연못과 돌계단과 주춧돌 몇 남아 있는 곳// 한 나무는 꽃을 가득 피우고 섰고/ 꽃이 듬성한 한 나무는 나를 붙잡고 서 있다// 이쪽 한끝과 저쪽 한켠의 아래 서 있는/ 두 그루 꽃피운 앵두나무는/ 나를 사이에 두고 멀찍이, 아주 가깝지 않게 떨어져 있는데/ 바람 불면 다 떨구어 버릴 꽃잎을 위태로이 달고 섰는/ 듬성듬성한 앵두나무 앞에서 나는멀거니 저쪽 앵두나무를 바라보네/ 숨은 듯 있는 별서의 앵두나무 두 그루는/ 무슨 일도 없이 꽃을 피우고 있네/ 한 나무는 가득, 한 나무는 듬성듬성// 나는 두 나무 사이의 한 지점으로 가서 가까운 꽃나무와/ 먼 꽃나무를 천천히 번갈아 바라보네/ 앵두가 열리려면 저 꽃이 다 떨어져야 할 텐데/ 두 그루 앵두나무 사이에 오래 서 있고 싶은 까닭을/ 나는 어디에 물어야 할지무/ 슨 부끄러움 같은 것이 내게 있는지 자꾸 물어본다//

메밀꽃이 인다는 말 / 조용미
​ 메밀꽃이 인다는 말 아는지요 바닷가 사람들의 오랜 말로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을 어부들은 메밀꽃이라 부릅니다흰 거품을 일으키는 물보라를 메밀꽃이 인다 하는데 그 꽃은 피는 게 아니라 이는 거예요피는 꽃이 스러지는 꽃을 알 수 있을까요 지는 꽃이 일어나는 꽃을 숨쉴 수 있을까요/ 먼 파도에서 일어나는 물거품을 나도 이 순간부터 메밀꽃이라고 부르기로 합니다/ 잠에서 일어나고 연기가 일어나는,먼지가 일어나고 두통이 일어나는,아지랑이가 일어나고 혁명이 일어나는, 산불이 일어나고 지진이 일어나는,불꽃이 일어나고 모래바람이 일어나는/ 일어나고 일어나 스러지고 또 스러져 다시 일어나는그 꽃을 당신은 벌써 알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마음이 일어난다는 말은 어떤가요/ 메밀꽃처럼 흰 거품을 일으키며 솟구쳤다 스러지고 또 스러지는 는 이 마음 참 오래되었지요 메밀꽃이 또 인다고 당신께 소식 전하지는 못합니다그저 메밀꽃이 피고 졌다 말할 밖에요북쪽으로, 매서운 메밀꽃이 이는 한겨울의 바다로 가만히 당신을 보러갑니다//

국화잎 베개 / 조용미

국화잎 베개를 베고 누웠더니/ 몸에서 얼핏 얼핏 산국 향내가 난다/ 지리산 자락 어느 유허지 바람과 햇빛의 기운으로 핀/ 노란 산국을 누가 뜯어주었다/ 그늘에 며칠 곱게 펴서 그걸 말리는 동안/ 아주 고운 잠을 자고 싶었다/ 하얀 속을 싸서 만든 베개에/ 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아픈 머릴 누이고 국화잎 잠을 잔다/ 한 생각을 죽이면 다른 한 생각이 또 일어나/ 산국 마른 향을/ 그 생각 위에 또 얹는다/ 몸에서 자꾸 산국 향내가 난다/ 나는 한 생각을 끌어안는다//

치자꽃 근처 / 조용미
치자꽃 근처에서 눈꺼풀이/ 자주 경련을 일으키는/ 봄밤/ 꽃치자를 밀어 올린 것이 기다림이 아니라/ 괴로움이었음을/ 꽃그늘 아래/ 눈부시고,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따스해지고/ 햇빛 아래/ 몸이 바스락거린다/ 사람의 목소리가 치자 향을 흩뜨린다//

꽃잎 / 조용미
높은 곳에 서 있으면/ 바람의 힘을 빌려 몸을 날리는 꽃잎처럼/ 뛰어내리고 싶었다/ 허공으로 한 발짝씩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는/ 봄 저물녘의 흰 꽃잎들/ 삶이 곧 치욕이라는 걸,/ 어떤 간절함도/ 이 치욕을 치유해주지 못한다는 걸/ 함석지붕에 떨어지는 소나기처럼,/ 붉은 땅 위로 내리꽂히는 장대비처럼,/ 어둑한 겨울 숲에서 혼자 계곡으로 굴러 떨어지는/ 동백의 모가지처럼/ 높은 곳에 서 있으면/ 발아래 까마득한 것들 다 공중으로/ 불러들이고 싶다/ 역류하는 것들의 힘으로/ 떨어지는 나는 폭발물이다.//

느티나무의 몸 속에는 / 조용미
폐사지를 찾아나서는 길은 숨은 그림 찾기/ 절터를 알리는 푯말도, 길도, 불빛조차 없는/ 낯선 곳을 찾아 헤매다보면/ 늙고 오래된 나무들이 이정표가 되어 사람을 끌어당긴다/ 숨은 그림 찾기의한 모서리를 다 맞추며 닿게 되는 옛절터는/ 천년 된 느티나무의 聖地/ 거돈사, 그 폐허의 비밀을 읽다 돌아간 사람들의 눈빛은 얼마간/ 갈라진 삼층석탑과 석축을 뚫고 뿌리 뻗은 저 느티나무나/ 쓰러진 당간지주를 닮아 있으리라/ 폐허의 냄새에 이끌러 찾아온 사람의 등을/ 자꾸만 어디로 떠미는 찬바람과 짙어가는 날빛,/ 늙은 느티의 몸 속에 들어갔다 나온 뒤/ 쉽게 법천사를 찾았다 아니 몸 벌리고 있는 늙은 느티나무가/ 법천사인 줄 그곳을 떠나면서 알게 되었다/ 부론은 절이 느티나무 속으로 숨어버리고/ 깨어진 석탑의 지붕돌과 부도비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곳/ 해와 달과 봉황이 노닐고 있는 저 부도비마저 느티의 몸/ 속으로 들어가고 나면/ 늙은 나무와 몸 섞어보지 않고서는 법천사를 볼 수 없으리/ 문막 지나 섬강을 거슬러오르면 강이 뿜어내는 안개는/ 내가 찾는 절터를 늙은 느티보다 빨리 감추어버리고/ 숨은 그림 찾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안개 때문이다/ 안개 속에서 나는 또다른 이정표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오동나무를 바라 보는 일 / 조용미
오동나무/ 내 앞에 서 있던 가을의 오동나무/ 한번도 그렇게 가까이는 다가갈 수 없었던/ 오동나무, 몸으로 나무의 체온을 재어보면/ 내가 알 수 없는 문자들로 가득한/ 나무의 말들, 답답하여/ 오동나무 아래 오래 서 있어/ 내가 오동의 풍경이 되고자 했다/ 누가 천산산맥을 하늘에서 보았다고 했을 떄/ 내 몸이 천산북로로 눕는 것을 꿈꾸었듯/ 나와 너무 가까이 있어 내 두근거림을 들을 수 없었던/ 너무 오래 서 있던 오동나무의 그늘/ 오래도록 쓰다듬던 그 나무의 껍질을/ 오동나무 아래를 서성이며/ 죽음도 추억도 아닌/ 나무인 오동을 보고자 했다//

유도화 긴 잎으로 / 조용미
유도화 긴 잎으로 내 가슴을 찌르고 싶다/ 그러면/ 고여있던 말들이 콸콸 쏟아져나올까/ 내가 세상에 내어놓은 말들이/ 파들파들 경련을 일으키며 마구 뛰어다닐까/ 그걸 다 끄집어내고 나면/ 냄새도 나지 않는다지 썩지도 않는다지/ 아름다운 몸만 아슬아슬 남는다지/ 그 자리에/ 진통제 대신 해와 바람과 시간을 채워넣으리라/ 그러면 나는 오동 어두운 나무 두 그루를/ 양 옆에 세워두고/ 천년이 넘도록 오래오래/ 말없는 자의 지복을 누리겠네/ 빈 몸 따스하겠네/ 그 땐 무얼 말하고 싶어지겠네/ 갈대를 타고 긴 강 건너지 않아도 좋으리/ 다라수 잎사귀에 새겨진 經을/ 읽지 못해도 좋으리/ 유도화 잎도 나처럼/ 맥이 잘 잡히지 않는다//

소나무 / 조용미
나무가 우레를 먹었다/ 우레를 먹은 나무는 암자의 산신각 앞 바위 위에 외로 서 있다/ 암자는 구름 위에 있다/ 우레를 먹은 그 나무는 소나무다/ 번개가 소나무를 휘감으며 내리쳤으나/ 나무는 부러지는 대신/ 번개를 삼켜버렸다/ 칼자국이 지나간 검객의 얼굴처럼/ 비스듬히/ 소나무의 몸에 긴 흉터가 새겨졌다/ 소나무는 흉터를 꽉 물고 있다/ 흉터는 도망가지도 없어지지도 못한다/ 흉터가 더 푸르다/ 우레를 꿀꺽 삼켜 소화시켜버린 목울대가/ 툭 불거져나와 구불구불한/ 저 소나무는//

나무 사이에 소리가 있다 / 조용미
나뭇잎 하나하나가/ 다 귀가 되어/ 한곳을 향하고 있다/ 키 큰 나무들,/ 오동나무와 대나무와 뾰족하고 잎사귀가 많은/ 비파나무들, 어둑한 날/ 그들의 손에 온순하게 갇혀 있는/ 그토록 사나운 짐승인/ 바람은/ 사각사각 내려앉고 있는/ 달빛 물어뜯으려/ 숨을 고르고 있지/ 나무 사이에, 나뭇잎 사이에/ 보이지 않는 짐승//

소리의 거처 / 조용미
비 오는 숲의 모든 소리는 물소리다/ 숲의 벚나무 가지들이 검게 변한다 숲 속의 모든 빛은 벚나무 껍질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흑탄처럼 검어진 우람한 벚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숲에서 사라진 모든 소리의 중심에는 그 검은빛이 관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마른 연못에 물이 들어차고 연못에 벚나무와 느티나무의 검은 가지와 잎과 흐린 하늘 몇 쪽과 빗방울들이 만드는 둥근 징소리의 무늬들 가득하다/ 계류의 물소리는 숲을 내려가는 돌다리 위에서 어느 순간 가장 밝아지다가 뚝 떨어지며 이내 캄캄해진다/ 현통사 霽月堂의 月자가 옆으로, 누워 있다 계곡 물소리에 쓸린 것인지 물 흐르는 방향으로 올려 붙은 달, 물에 비친 달도 현통사 옆에선 떠내려 갈 듯하다/ 비 오는 날 숲의 모든 소리는, 물소리 뒤에 숨는다//

나의 매화초옥도 / 조용미
눈 덮인 산, 무거운 회색빛 하늘, 초옥에서 창을 열어두고 피리를 불며 앉아 있는 선비의 시선은 먼데 창밖을 향하고 있다./ 어둑한 개울에 놓인 다리를 밟고 건너오는 사내는 어깨에 거문고를 메고 있다/ 멀리서 산속에 있는 벗을 찾아오고 있다 방 안의 선비는 녹의를 그는 홍의를 입고 있다/ 초옥을 에워싸고 매화는 눈송이가 내려앉듯 환하고 아늑하다/ 매화를 찾아, 마음으로 친히 지내는 벗을 찾아 봄이 오기 전의 산중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생겨나고, 부유하고, 바람의 기운 따라 천지간을 운행하는 별처럼 저 점점이 떠 있는 흰 매화에서/ 우주의 어느 한 순간이 멈추어버린 것을, 거문고를 메고 가는 한 사내를 통해 내가 보았다면/ 눈 덮인 산은 광막하고 골짜기는 유현하여 그 속에 든 사람의 일은 참으로 아득하구나/ 천리 밖 은은하게 번지는 서늘한 향을 듣는 이는 오직 그대뿐/ 밤하늘의 성성한 별들이 지듯 매화가 한 잎 한 잎 흩어지는 봄밤, 천지간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나는 그림 속 사람이 된다 별빛이 멀리서 오듯 암향도 가깝지 않다//

사이프러스 / 조용미
나무는 풍경을 길들인다—장 그르니에//
사이프러스는 마치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처럼 균형 잡힌 아름다운 나무라고 고흐가 말했을 때 그는 저 나무를 빛과 색채로 감각함과 동시에 균형으로 파악했던 걸까 가지가 위로만 향하는 타오르는 촛불 같은 저 나무는 넓이 대신 깊이를 존재방식으로 선택했다/ 사이프러스는 언제나 검은 초록으로 불타고 있다/ 사이프러스가 양옆으로 도열하듯 서 있는 어느 먼 곳의 한적한 정류장에서 내 영혼은 나무들에 완전히 압도당하여 그 기이한 풍경 속으로 선뜻 들어서지 못하고 한참을 머뭇거리다 사막으로 접어드는 늙은 낙타처럼 걸어 들어갔다/ 바람의 어느 세찬 손이 나무를 저렇게 높이 휘감아 올렸나/ 흩뿌려놓은 진홍색 물감처럼 펼쳐져 있는 들판의 개양귀비와 첨탑처럼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어두운 초록빛 사이프러스 사이에서 나의 번민은 깊어갔다/ 막 불이 붙기 시작한 듯한 밀밭과 초저녁의 소용돌이치는 하늘은 모두 저 사이프러스로 인한 것/ 사이프러스가 있는 풍경에는 지독한 아름다움에 대한 번민이 슬픔처럼 가만히 숨어 있다 사이프러스가 층층이 쌓아올린 검은 초록의 탑은 오벨리스크보다 더 높다//

비누방울/ 조용미
비누방울을 날린다/ 크고 작은 것들,/ 아이는 비누방울을 날리기 위해 태어난 듯/ 온 정신이 거기에 다 팔려 있다./ 담장을 넘어 옆집으로, 지붕 위로, 나뭇가지 위로/ 골목으로......./ 날아가다 그것은 꺼진다./ 아이 눈에 꺼지는 비누방울은 없다/ 허망을 바라보는 것은 오직 나의 눈/ 내가 보지 않았더라면/ 누가 알았을까/ 저 비누방울이 잠시 공중을 흔들어놓았다는 걸/ 저렇게 가벼울 수 있다면,/ 비누방울은 그 속에 무엇을 가득 담고 있다/ 그래서 저리 가벼운 것이다.//

옛집 / 조용미
나와 동생이 탯줄을 잘랐다는 이십 년도 넘게 내버려진 폐가에/ 아침 안개를 걷고 올라가 보면/ 잡풀과 도꼬마리 옷에 쩍쩍 들러붙어/ 마당 어귀에서부터 발목이 잡힌다/ 안으로 들어서려는 그 어떤 힘도 완강하게 거부하는/ 폐허의 城, 깨진 옹기 뒹구는 장독대를 바라보며 폐허와 내가/ 반대편에서 자라고 있었음을 알겠다/ 메주를 메달아 놓아 늘 쾨쾨한 냄새가 가시지 않던/ 사랑방 문짝까지 닿으려면/ 허리까지 오는 잡풀들만 걷어내면 되는 것일까/ 길을 낼 한치의 빈틈도 내주지 않는 잡풀과 나 사이의 경계가/ 산맥처럼 멀다 폐허를 더듬으려면/ 내 몸 구석구석을 만져보면 된다/ 동생이 구운 참새 다리를 물고 서 있다 작은아버지가 타작을 한다/ 할머니가 애호박을 삶는다 고모는 보이지 않는다/ 장독대 옆에 참나리가 핀다 뒤란에 까마중이 까맣게 익는다/ 내가 그걸 탁탁 터뜨린다 옛집이 잠시 붐빈다/ 죽어 한가로운 앞마당의 감나무,/ 이사터 옛집과 내가 헤어지고 나면 서로 어디까지 치 닫을지 모른다/ 옛집은 낙타의 걸음걸이로 세월을 향한다//

비가역 / 조용미
창밖으로 자동차 소음이 끊임없이 들어오는 낯선 곳에서 나는 당신을 생각하지 않는다잘 읽히지 않는 이 책의 한 페이지에서 여러 번 책장을 덮었다 다시 펼칠 때 나는 당신을 생각하지 않는다들길을 걷다 노랑꽃창포와 골풀이 피어 있는 습지를 만나고 거기서 고라니가 뛰어나오는데 당신을 떠올릴 겨를이 없다어떤 깊고 얕은 풍경 앞에서도 나는 당신을 떠올리지 않는다이렇게 많은 것들이 온전히 다 나의 것이었다니이제 나는 당신을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을 생각하지 않으니 당신을 떠올리지 않아도 되는 한가함이 더해진다당신을 생각하지 않자 새로운 일이 일어난다 당신을 생각하지 않는 새로운 일과는 또 다른 새로움이 생겨난다//

당신의 아름다움 / 조용미
당신은 늘 빛을 등지고 있다/ 내가 만든 구도이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객관적이어야 한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넘어서야 한다 더불어 / 당신의 아름다움은/ 윤리적이어야 한다/ 당신은 최종적으로 아름다워야 한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빈틈없어야 한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고독한 사건이 되어야 한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나로부터 발생한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내게 늘/ 가장 큰 시련이다/ 당신 뒤에는 빛이 있다/ 당신은 빛을 조금 가리고 있다//

​​ 연두의 회유 / 조용미
​ 당신과 함께 연두를 편애하고 해석하고 평정하고 회유하고 연민하는 봄이다/ 물에 비친 왕버들 새순의 연둣빛과/ 가지를 드리운 새초록의 찰나/ 당신은 연두의 반란이라 하고 나는 연두의 찬란이라 했다 당신은 연두의 유혹이라 하고 나는 연두의 확장이라 했다/ 당신은 연두의 경제라 하고 나는 연두의 해법이라 했다/ 여러 봄을 통과하며 내가 천천히 쓰다듬었던 서러운 빛들은 옅어지고 깊어지고 어른어른 흩어졌는데/ 내가 아는 연두의 습관/ 연두의 경계/ 연두의 찬란을 목도하는 순간, 연두는 물이라는 목책을 둘렀다/ 저수지는 연두의 결계지였구나 당신과 함께 초록을 논하는 이 생이 당신과 나의 전생이 아닌지도 모른다//

​​ 운구차 / 조용미
우리는 운구차를 타고 있다/ 운구차를 타고 간다/ 오래 갔다/ 운구차는 어딘가로 계속 가고 있다/ 검은 리본은 겸손하다/ 셀 수 없는 거리와 집들이 멀리 줄지어 지나갔다/ 우리는 운구차 안에 있다/ 창밖은 어둑해지고 우리의 얼굴은/ 검은 유리창 위로 여럿이다/ 우리는 아무 말이 없다/ 내가 듣는 것, 느끼는 것, 숨 쉬는 것, 만지는 것이/ 모두 다 느리다/ 정지화면을 이어 놓았다/ 운구차는 같은 시간을 달린다/ 운구차는 낡았다/ 이제 아무것도 캄캄한 창으로 떠오르지 않고/ 운구차는 봄바람처럼 덜컹덜컹, 또렷하고/ 느리고 느리다/ 나 혼자다//

어둠의 영역 / 조용미
여긴 아주 환한 어둠이다/ 조금 다른 곳으로 가 볼까/ 천천히/ 휘익/ 명왕성 탐사선 뉴호라이즌스호처럼 나도 9년 6개월을 날아서 걸어서 그곳으로 갈 수 있다면 수차례의 동면 과정을 거쳐 자다 깨다 하며 어둠이라는 심연에 다다를 수 있다면/ 당신은 명왕성보다 멀어야 하지 조금 더 멀어야 하지/ 누구도 당신의 아름다움을 훼손할 수 없다/ 아름다움의 영역에 별보다/ 죽은 자들이 더 많으면 곤란하다/ 빈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까마귀들, 어둠 속 저수지 근처 폐사지의 삼층석탑, 차창으로 얼핏 보았던 과일을 감싸고 있는 누런 종이들이 내뿜는 신비한 기운/ 이런 것들에 왜 잔혹한 아름다움을 느끼며 몸서리쳐야 하는지 슬픔이 왜 이토록 오래 나의 몸에 깃들어야 하는지 당신은 알고 있을 것만 같다/ 당신은 명왕성보다 멀어서 아름답고/ 나는 당신을 만날 수 없다/ 당신과 내가 이 영역에 함께 있다//

빗소리 위의 산책 / 조용미
빗소리가 방을 녹인다/ 뜨거운 열기에도 단단하던 방이 소리에 녹는다/ 빗소리가 책장을 덮는다/ 이 공기에는 어딘가 규칙적이고 질서정연한 모래알들이 숨어 있다/ 아카시 꽃이 느리게 젖어간다/ 하늘색 창이 빗소리를 증폭시킨다/ 아카시꽃 색이 짙어진다/ 창은 비의 門이 된다/ 책갈피에 접힌 소리들이 납작하게 말라 간다/ 글자들이 소리의 향기를 포위한다/ 빗소리 위로 높이 발자국을 찍는 산책,/ 소리가 녹이는 방은 향기로 둘러싸인다/ 빗소리가 방을 녹인다/ 아카시꽃이 젖어 창을 열어 둔다/ 이 공기의 모든 소리에는 門이 달려 있다//

연극적인 비 / 조용미
공중에서 노란 비가/ 툭 툭 굵은 소리를 내며 내려왔다/ 머리에 닿으면 아팠다/ 누군가 튼튼한 우산을 내게 주었다/ 바닥에 떨어진 빗방울을 보니 앞쪽엔 앞의 죽음이/ 다른 쪽엔 뒤의 죽음이 새겨진 은화였다/ 세상에 은화비가 내리다니, 난 이런 환상이 싫다/ 이건 환상이 아니라구, 하듯 사람들이 옆에서/ 반짝이는 동전을 하나씩 주워 담는다/ 어쩐지 허리를 구부리고 싶지 않다/ 은화비는 더 세게 내 머리를 두드린다/ 도대체 하늘에서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 누구란 말인가 나는 커다란 공간 안에 들어 있고/ 하늘에 보이는 단지 몇 개의 구멍에서/ 은화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은화비가 쏟아지지 않는 안전구역으로 나가/ 우산을 구석에 던져버리고 조금 떨어져/ 수북이 쌓인 은화비를 바라보는/ 그들의 몸짓을 바라보았다/ 우산의 곡선도 노란 비를 만지는 그들 팔의 동작과/ 허리의 구부러짐도 모두/ 지나치게 연극적이었다/ 이걸 보라구, 비를 더 세게 내려 봐/ 하늘색 뭉게구름이 중얼거리며 투명한 천장 위로 지나갔다/ 은화비는 계속 물처럼 쏟아졌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수북하게 쌓인 죽은 비를 만져보았다//

 장대비 / 조용미
오래된 쇠못의 붉은 옷이 얼룩진다/ 시든 꽃대의 목덜미에 생채기를 내며// 긴 손톱이 지나가는 자국/ 아픈 몸마다 팅팅 내리꽂히는/ 녹슨 쇠못들/ 떨어지는 소리// 하얀 마당에 푹 푹 단내를 내며/ 쏟아지는 녹물들/ 붉은 빗금을 그으며 머리 위로 떨어지는/ 닭벼슬! 맨드라미! 백일홍! 해당화! 엉겅퀴! 큰바늘꽃붉은잎!/ 신음소리를 내며 막 벌어지는/ 상처의 입들,/ 눈동자를 붉게 물들이며/ 나쁜 피를 다 쏟아내는 저녁//

당분간 / 조용미
지루하고 괴로운 삶이 지속된다/ 집요하게 너는 생의 괴로움에 집중하고 있다/ 생의 아름다움에 완전히 미혹당했던 적 있었다/ 주전자의 뜨거운 물이 손등에 바로 쏟아지듯 고통과 환희를 느끼며 펄펄 뛰었다/ 여긴 생이라는 현장이다/ 이렇게 생생하므로 다른 곳일 수 없다/ 무서운 집중 앞에 미망과 무명이 사나운 개의 이빨 앞에 선 어린아이처럼 뒤로 물러나기를 바란다/ 통쾌하다 비명을 지를수록 생은 더욱 싱싱해지고, 생생해지고/ 지루한 열정이 나를 지치게 한다/ 이 괴로움은 완벽하게 독자적이고 완벽하게 물질적이다/ 누구나 완벽하게 평화롭기는 어렵다 그래도/ 생의 괴로움에만 집중하는 순교자가 되고 싶다 아름답고 끔찍한 삶이 당분간 지속된다//

​나의 다른 이름들 / 조용미
페르난두 페소아는 알베르투 카에이로이자 리카르두 레이스이고, 알바루 데 캄푸스이다/ 그의 이름은 수십 개, 이들은 이명동인이지만 또한 이명이인이고자 한다/ 나는 어디까지 나일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나임을 증명할 수 있으며 어느 순간 나의 다른 얼굴을 드러내어서는 안 되는가/ 나는 내가 아닐 수 있는 가능성으로 똘똘 뭉친 이 진실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한순간 전의 내가 한순간 후의 내가 아님을 부정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내가 내가 아님을 완벽하게 실현하는 일은 무척이나 고독한 일/ 나의 삶을 살다가 또 다른 나의 삶으로 돌아오는 것은 치밀한 환상이 필요한 일/ 내가 죽기 전에 다른 나의 죽음을 목도해야 하는 일은 정교한 시간 배치가 필요한 일/ 나는 왜 시종일관 오로지 나 자신이어야만 하나/ 오늘도 내 속에 적절히 숨어서 내가 아닐 가능성을 엄밀하게 엿본다/ 진정 나는 그였으며 그는 다른 나였을까/ 나는 내가 아닐 수 있는 가능성으로 똘똘 뭉친 이 진실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을까//

저녁의 창문들 —베네치아 / 조용미
이곳에는 말을 거는 창문과 침묵하는 창문들이 있다/ 낮엔 거의 침묵하고 있지만/ 어둠속에서는 제법 말이 많다/ 한 집에 속한 각각 다른 크기와 모양의 모든 창문들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집의 창문들 위로 밤이면 조금씩/ 물의 더듬이가 움직여 맨 위층까지 올라간다/ 불빛이 물의 일렁임을 벽으로 밀어올린다/ 물빛은 담장이처럼 천천히/ 집의 벽을 타고 이동한다/ 집은 밤마다 물의 화폭에 휩싸인다/ 벽에 새기는 물의 부조들을 맞은편 창에서 내려다본다/ 집이 물의 무늬에 잠기는 것을,/ 가로등이 켜질 때마다 물의 색이/ 어룽어룽 스며드는 것을,/ 창안의 그는 몸에 물의 무늬가 드는 것도 모르겠지/ 속삭이고 침묵하는 온갖 창문들의 습식 프레스코화가/ 완성되는 물의 도시의 길고 휘황한 밤/ 밤의 창문들마다 아가미가 달려있다//

​​ 기이한 풍경들 / 조용미
사막에서 안개가 일어나 공중에 숲 같기도 하고 나무 같기도 한 것이 나타나 가보면 없고, 호수의 섬들이 출몰하고 나무의 그림자가 2백 리에 걸쳐 펼쳐진 듯 보였다는 연행 길에 사로잡힌다/ 드넓은 평원이 호수처럼 보이려면 얼마나 많은 안개가 필요한 것인가 얼마나 많은 나무가, 아니 얼마나 많은 환상이 필요한 것인가/ 그곳을 지나간 사람들은 하나같이 환상을 말하였다 환상을 말하지 않은 자는 계주를 지나가지 않은 자이다 연행록의 글과 그림은 환상도 꿈도 아닌 그저 기이한 풍경이라 말할 뿐/ 기이한 풍경이 역사를 바꾸었다 기이한 풍경이 오래 나의 정신을 점령했다 기이한 것들이 자라나 손발이 되었다 기이하고 기이한 풍경이 우리를 신비롭게 했다 거기서 우리는 문득 태어났다//

생에 처음인 듯 봄이 / 조용미
현통사 앞 물가의 귀룽나무는 흰 꽃을/ 새털구름처럼 달고 나타났지/ 귀룽나무, 나는 놀라 아 귀룽나무 하고/ 비눗방울이 터지듯 불러보았지/ 귀룽나무, 너무 일찍 꽃 피운 귀룽나무/ 귀룽나무 물가에 가지를 드리우고/ 바람결에 주렁주렁 흰 꽃향기를 실어 보내고 있네/ 귀룽나무 새초록 가지마다/ 연둣빛 바람이 샘솟네/ 개울물 소리 따라 늘어진 가지의 흰 꽃망울들이/ 조롱조롱 깨어나네/ 저 귀룽나무 흰 꽃들 받아먹는/ 물소리 따라 봄날은 살며시 가는 거지 또 그렇게/ 가는 거지 건듯건듯 봄날은 가고/ 귀룽나무 아래 어루만졌던 어떤 마음도/ 드문드문 아물어가는 거지/ 누군가 한 세월 서러이 잊히는 거지/ 아 그리고 생에 처음인 듯/ 문득 봄이 또 오는 거네/ 귀룽나무는 물가에서 전생에 피운 적 없는/ 흰 꽃들을 뭉클뭉클 달고서/ 나를 맞이하는 거네//

봄의 묵서 / 조용미
당신은 몸뚱이가 가지고 있는 물질적이고 구체적인 고독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지요 살가죽의 고독, 눈꺼풀의 고독, 입술 가운데 주름의 고독, 엄지와 검지 사이 살이 구겨진 듯 오래 접혀 있을 때의 고독, 무너지지 못하는 등뼈의 고독, 종아리 속 정강이뼈의 고독, 뭉클뭉클 흘러나오는 어두운 피의 고독을// 당신도 혹 이곳에 발붙이고 있어도 늘 저곳을 향하고 있는 마음이 따로 있진 않은지요 자의식 과잉의 먹구름이 늘 폭우를 동반하고 머리 위를 떠다닌다면 그 정신과 육체는 너무 습도가 높아 목까지 찰랑이는 슬픔이 그득 차 있겠지요// 어떤 마음은 슬픔의 힘으로 무럭무럭 자라 꽃과 잎을 피우고 열매 맺고 스러져 갑니다 어떤 마음은, 몸속 어딘가에 깨알 같은 혹을 만들어 놓고 키웁니다 슬픔이 불러들인 미세한 파장으로 단단하게 뭉쳐진 혹은 몸 안에서 따뜻하고 서글프게 오래도록 머뭅니다// 생강나무에 물이 올라 노란 꽃이 맺혔습니다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도 꿰뚫어 보면 그 실체가 물질이 아닐까 두렵습니다 노랑에서 분홍으로 봄이 자리를 조금씩 옮겨 가고 있습니다 아아, 몸이 달라지고 있는 봄입니다// 늘 걷던 길이 햇빛 때문에 달라 보이는 시간, 봄볕에 발을 헛디딥니다 햇빛 때문에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가 달라지다니요 꽃과 나무와 마음을 변화시키는 봄볕에 하릴없이 연편누독만 더합니다 부디, 마음 때문에 몸을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묵매도 / 조용미
내 앞에 아른아른 떠 있는 저 여린 색들은/ 이 봄을 규정한다 지금 여기 이곳을 자주 비우는/ 내 삶을 규정한다/ 여름과 겨울의 감각을 내정한다// 지난겨울 천의와 박대를 휘날리며 허공을 날고 있는 닫집의 비천상을 고개 젖혀 어둠속에서 오래 바라보았다 어둑한 붉은색과 희고 푸른색들은 장엄하였으나 슬픔은 줄어들지 않았다// 옥룡사터 동백숲 떨어진 붉은색들이 일제히 향한 쪽으로 내 운명을 짚어볼까 잠시 망설였다 무덤이 사라지고 탑이 들어선 자리는 너무 환해 그곳으로 나가지 못했다 밝은 곳의 붉은색들은 희미해져가고 사라져 가고// 내 발아래 붉은 꽃들은/ 뭉개어지는 빛들은, 목이 메어/ 자꾸 어두워졌다// 고택의 엎어놓은 장독에 매화나무 가지 그림자가 어려 굵은 사선의 무늬가 생겨났다 늙은 매화나무가 강한 필세로 그려놓고 내가 발문을 쓴 귀한 묵매도 한 장 얻어온 후 신기하게도 이 봄의 슬픔은 약간 줄어들었다//

허공의 악기 / 조용미

허공을 연주하여 소리를 낸다/ 허공을 눌러 연주하는/ 저 손가락들/ 현이나 구멍도 없이 소리를 낼 수 있는/ 테레민처럼/ 보이지 않는 허공의 악기를/ 나도 한때 가지고 있었지/ 허공의 음계는 놀라워라/ 먼 공중에서 천천히/ 깃털이 내려오네/ 높게 떠 있거나 살며시 내려앉는/ 저 음계들/ 다정한 손이 쓰다듬는/ 나지막한,/ 숨결에 숨결이 더해지는/ 허공의 악기를 가졌던 그때/ 내 손은 자주 심장 위에 얹혀 내 숨소리를/ 듣고 있었지 가만히/ 너의 심장을 어루만지듯/ 나뭇잎들, 허공을 연주하는 내 손을/ 오래도록 쓰다듬네//

어두워지는 숲 / 조용미
​ 숲은 어둠의 기미로 달콤하다/ 잣나무 숲으로 난 오솔길은 내 얼굴을 빌려 저녁이 뿌리는 물뿌리개의 물방울들을 촘촘히 다 들이마신다/ 나뭇잎 사이마다 어둠이 출렁여도 밖으로 난 숲길 한쪽은 아직 환하다 연한 어둠의 파란에 둘러싸여 나는 몸에 천천히 붕대를 감는다/ 당신도 언젠가 이 숲에 왔을 것이다/ 숲은 폭풍의 예감으로 일렁이고 있다/ 당신도 이 숲에서 심장을 움켜쥐어보았을 것이다/ 바람이 손바닥의 붉은 꽃잎들을 날려버렸을 것이다/ 숲이 어두워지는 것이 내 몸의 어둠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물감이 풀리듯 어두워지며 흘러내리는 시간들,/ 오랜 격정으로 숲이 대낮에도 어둠을 불러들이곤 했다는 걸 당신은 알지 못하리라/ 당신도 여기 서 있었을 것이다/ 혈우병에 걸린 고래처럼 단 한 번의 상처로 멈추지 않는 피를 오래 흘리며 흰 붕대를 붉게 물들였을 것이다/ 어둠으로 회오리치는 붉은 숲은,//

가을밤 / 조용미
마늘과 꿀을 유리병 속에 넣어 가두어두었다 두 해가 지나도록 깜박 잊었다 한 숟가락 뜨니 마늘도 꿀도 아니다 마늘이고 꿀이다/ 당신도 저렇게 오래 내 속에 갇혀 있었으니 형과 질이 변했겠다/ 마늘에 緣하고 꿀에 연하고 시간에 연하고 동그란 유리병에 둘러싸여 마늘꿀절임이 된 것처럼/ 내 속의 당신은 참당신이 아닐 것이다 변해버린 맛이 묘하다/ 또 한 숟가락 나의 손과 발을 따뜻하게 해 줄 마늘꿀절임 같은 당신을,/ 가을밤은 맑고 깊어서 방안에 연못 물 얇아지는 소리가 다 들어앉는다//

삼베옷을 입은 自畵像 / 조용미
폭우가 쏟아지는 밖을 내다보고 있는/ 이 방을 凌雨軒이라 부르겠다/ 능우헌에서 바라보는 가까이 모여 내리는/ 비는 다 直立이다/ 휘어지지 않는 저 빗줄기들은/ 얼마나 고단한 길을 걸어 내려온 것이냐/ 손톱이 길게 쩍 갈라졌다/ 그 사이로 살이 허옇게 드러났다/ 누런 삼베옷을 입고 있었다/ 치마를 펼쳐 들고 물끄러미 그걸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입은 두꺼운 삼베로 된 긴 치마/ 위로 코피가 쏟아졌다/ 입술이 부풀어올랐다/ 피로는 죽음을 불러들이는 독약인 것을/ 꿈속에서조차 너무 늦게 알게 된 것일까/ 속이 들여다보이는 窓봉투처럼/ 명료한 삶이란/ 얇은 비닐봉지처럼 위태로운 것/ 명왕성처럼 고독한 것/ 직립의 짐승처럼 비가 오래도록 창밖에 서 있다//

숨구멍 / 조용미
언 못에 싸락눈이 덮인다/ 못에 숨구멍이 나 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의 정수리에 뚫려 있는/ 얇은 창호지 같은 숫구멍처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숨구멍을 가지고 있다/ 바람이며 땅기운이 드나들기도 하고/ 영혼이 숨을 내뱉기도 하는/ 그 구멍은/ 얇은 막으로 덮여 있다/ 얼음이 덮이니/ 나무그늘 아래로 물이 파랗던 여름보다/ 물은 더 살아 쌔근거린다/ 아무리 두꺼운 얼음도 물을 다 덮어버릴 수는 없다/ 눈 덮인 못에 검은 숨구멍이/ 여럿 나 있다/ 물이 숨을 내뿜는 곳이다/ 어떤 숨구멍은 장수하늘소를 닮았고/ 어떤 것은 거미줄을 치고 있는 거미를 닮아 있고/ 저 숨구멍은/ 원생동물인 아메바를 닮아 있다/ 못이 숨을 쉰다/ 저 못은 답답한지 우묵하고 검은 숨구멍을/ 가끔 들썩이고 있다/ 얼음을 지치는 아이들이 어쩌다 숨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일이 있다/ 그럴 때 숨구멍은/ 가장 큰 숨을 쉰다//

적거(謫居) / 조용미
당신이 없는데 탱자나무에 꽃이 피었다/ 당신이 없는데 당신 사진이 웃고 있다/ 보리밭에 보리들이 술렁인다/ 당신 책상 앞에 밤새 개구리 울음소릴 듣는다 당신 없이/ 걸어다닌다 술을 마신다 여행을 한다/ 돌아와서 나 혼자 우울한 음악을 듣는다/ 어쩌다 당신 이야기 하는 사람을 만나면/ 때려눕힌다/ 벽지에 탱자나무 흰 꽃이 사방연속무늬로 피어났다//

초록을 말하다 / 조용미
​초록이 검은색과 본질적으로 같은 색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 언제였을까/ 검은색의 유현함에 사로잡혀 이리저리 검은색 지명을 찾아 떠돌았던 한때 초록은/ 그저 내게 밝음 쪽으로 기울어진 어스름이거나 환희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는데/ 한 그루 나무가 일구어내는 그림자와 빛의 동선과 보름 주기로 달라지는 나뭇잎의 섬세한 음영을 통해/ 초록에 천착하게 된 것은 검은색의 탐구 뒤에 온, 어쩌면 검은색을 통해 들어간 또 다른 방/ 그 방에서 초록 물이 들지 않고도 여러 초록을 분별할 수 있었던 건 통증이 조금씩 줄어들었기 때문/ 초록의 여러 층위를 발견하게 되면서 몸은 느리게 회복되었고 탐구가 게을러지면서 다시 아팠다/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꺼내어도 꺼내어도 새로운 다른 초록이 나오는,/ 결국은 더 갈 데 없는 미세한 초록과 조우하게 되었을 때의 기쁨이란/ 초록은 문이 너무 많아 그 사각의 틀 안으로 거듭 들어가기 위해선 때로/ 눈을 감고 색의 채도나 명도가 아닌 초록의 극세한 소리로 분별해야 한다는 것,/ 흑이 내게 초록을 보냈던 것이라면 초록은 또 어떤 색으로 들어가는 문을 살며시 열어줄 건지/ 늦은 사랑의 깨달음 같은, 폭우와 초록과 검은색의 뒤엉킴이 한꺼번에 찾아드는 우기의 이른 아침/ 몸의 어느 수장고에 보관해두어야 할까/ 내가 맛보았던 초록의 모든 화학적 침적을, 오랜 시간 통증과 함께 작성했던 초록의 층서표들을//

노란색에 대한 실감 / 조용미
이 울렁거림과 편두통은/ 저 나무가/ 오늘 너무 고요하기 때문일까/ 당신이 빈틈없이 규칙적이어서 내 말에 깊은 이해 없이 섣부른 답을 해서 세상이 시끄러워서는 아니다 변종 바이러스 때문은 더욱 아니다/ 왼쪽 뒤통수 끝부분은 내 머리의/ 한 부분이 아닌 것 같다/ 긴 바늘을 찔러 넣을 때만 내 것이 된다/ 갑자기 까마귀 떼가 우르르 나타나 이 도시를 휘저으며 날아다녀도 이상하지 않다 큰부리까마귀가 왼쪽 머리 끝부분을 쪼아 먹어도 안 아플 것 같다/ 소리가 있을 테니까/ 비명이 없을 테니까/ 검은색과 소리는 섞일 테니까/ 오로지 두통이라는 세목에 근거하여 인간을 이해하고 싶은 밤이다/ 죽단화가 바람에 흔들리면서/ 노란색이 마구 번진다/ 저것도 영영 아름답지는 않구나/ 머리가 잘게 쪼개어지며 보는 노란색들이 울렁거린다 두통은 나 대신 색채를 더 뚜렷하게 실감한다//

흰색, 침묵 / 조용미
이 도시는 왜 이렇게도 조용한 걸까 거미줄처럼 길은 안으로 안으로 향한다 작은 성당에 들어갔다 노인 한 사람이 제단 앞 측면 자리에 앉아 있다 문 앞에서 천장과 창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노인과 나는 다른 공간으로 멀어졌다 잠시 후 청년이 들어와 천천히 그의 앞으로 가 섰다 그들은 서로 마주보았다// 아무리 멀리 떠나도 거기에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있다// 노인이 일어나 그를 껴안았다 그들 앞에 죽은 이가 놓여 있음을 그 순간 알게 되었다 노인이 앉아 있던 시간도 청년이 내 옆을 지나 앞으로 걸어나간 순간도 그저 고요했기에 그들의 호흡에 조금의 일렁임도 없었기에 슬픔의 기류를 감지하지 못했던 것// 그들은 나란히 앉아 말없이 관 속에 누워 있는 죽은 자를 바라보았다 내가 성당에서 들은 소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 죽은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고, 그 죽음은 아무런 소리도 필요치 않았다// 하루쯤 지난 누군가의 손을 잡아보려 한 적 있다// 이 도시는 어떤 죽음을 침묵으로 애도하고 있다 식당도 텅 비어 혼자 달그락거리며 짧은 식사를 마쳤다 발을 겨우 디딜 만큼 좁은 계단이 위로 구불구불 이어진 미로의 흰색 골목은 깊이를 높이로 대신한 걸까// 제단을 향해 누워 있던 사람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두 사람이 침묵으로 지키고 있는 자의 죽음이란 마침표처럼 단정하여 내가 품고 있던 말줄임표는 낯선 도시에서 죄 없이 자꾸 무거워졌다 치스테르니노의 골목과 흰 집과 계단들은 모두 침묵의 복잡한 기호들 검은색 슬픔을 흰색으로 완고하게 덧칠한 계단과 골목들이 나를 포위했다//

흰빛의 궤적 / 조용미
지는 목련 아래의 비참에 대해 상세하게 말하지 말자/ 누렇게 말라가는 꽃잎은,/ 저 고요히 흘러내리는 커다란 흰 귀는/ 너의 작은 죄를 들으려 바닥으로 내려왔다/ 타들어가는 목련 잎들에서/ 상한 향이 난다/ 물고기 썩는 내음이 풍긴다/ 나무 위에서 상해가는 흰 귀들이/ 너를 괴롭히는 봄/ 비릿한 향이 저 적막한 생의/ 소멸의 궤적이라면/ 별의 궤적 사소하고 은밀한 죄의 궤적/ 몰락의 궤적 흰빛의 궤적/ 미혹의 궤적 또한 저리 비린 길을 걷는 걸까/ 나무 아래 죽은 물고기들이 수북하다/ 부패가 진행되면서/ 연둣빛 새살은 돋아난다/ 지는 목련 아래의 비참은 밤늦도록 피어난다//

푸르고 창백하고 연약한 / 조용미
빈소에서 지는 해를 바라본 것 같다/ 며칠간 그곳을 떠나지 않은 듯하다// 마지막으로/ 읽지 못할 긴 편지를 쓴 것도 같다// 나는 당신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천천히/ 멱목을 덮었다// 지금 내 눈앞에 아무것도 없다// 당신의 길고 따뜻했던 손가락을 느끼며/ 잡고 있다//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이었으며 우리의 다짐은 얼마나 위태로웠으며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얼마나 초라했는지// 푸르고 창백하고 연약한 이곳에서// 당신과 나를 위해 만들어진 짧은 세계를/ 의심하느라// 나는 아직 혼자다//

적막이라는 이름의 절 / 조용미
적막이라는 이름의 절에 닿으려면 간조의 뻘에 폐선처럼 얹혀 있는/ 목선들과 살 속까지 내려꽂히며 몸을 쿡쿡 찌르는 법성포의 햇살을/ 뚫고 봄눈이 눈앞을 가로막으며 휘몰아치는 저수지 근처를 돌아야 한다/ 무엇보다 오랜 기다림과 설레임이 필요하다/ 적막이라는 이름의 나무도 있다 시월 지나 꽃이 피고 이듬해 시월에야/ 붉은 열매가 익는 참식나무의 북방 한계선, 내게 한 번도 꽃을 보여준/ 적 없는 잎이 뾰족한 이 나무는 적막의 힘으로 한 해 동안 열매를 만들어낸다/ 적막은 단청을 먹고 자랐다 뼈만 남은 대웅전 어칸의 꽃문을/ 오래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이내 적막이 몸 뚫고 숨 막으며 들어서는/ 것을 알 수 있다 적막은 참식나무보다/ 저수지보다 더 오래된 이곳의 주인이다/ 햇살은 적막에 불타오르며 소슬금강저만 화인처럼 까맣게/ 드러나는 꽃살문 안쪽으로 나를 떠민다 이 적막을 통과하고/ 나면 꽃과 열매를 함께 볼 수 있으리라//

용산성당 / 조용미
사제 김재문 미카엘의 묘/ 1954 충남 서천 출생/ 1979 사제 서품/ 1980 善終/ 천주교 용산교회 사제 묘역/ 첫째 줄 오른편 맨 구석 자리에 있는 묘비석/ 단 세 줄로 요약되는/ 한 사람의 生이 드문드문/ 네모난 봉분 위에 제비꽃을 피우고 있다/ 돌에 새겨진 짧은 연대기로/ 그를 알 수는 없지만/ 스물다섯에 사제복을 입고 다음해에/ 죽음을 맞이한 그의 젊음이/ 내게 이 묘역을 산책길의 맨 처음으로 만들었다/ 창으로 내려다보면 커다란 자귀나무 가지에/ 가려진 그 아래/ 내가 결코 알지 못할 어떤 사람들의 生이/ 숫자들을 앞세우고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들의 삶을 해독하는 데/ 한나절을 다 보낸 적도 있다/ 그는 이 묘역에서 가장 젊은 사람이다/ 그의 죽음이 봄날을 오래 붙들고 있다//

침묵 사제 / 조용미
그는 침묵을 관장하는 사람이다 그의 일은 침묵을 세심하게 관리하기 쉽도록 분류해두는 것이다 그는 침묵을 장악하지는 못하더라도 관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침묵의 분류 관리 통제는 그의 업무 전반에 걸친 일인데 모든 침묵이 간단하게 분류되는 것은 아니어서 그는 침묵을 맡아 다루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 생의 후반부를 온전히 바쳐야만 했다/ 침묵은 명령할 수도 없고 강제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 그의 사명감은 약간 헐거워졌다 침묵을 적절히 조정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그는 침묵이 점점 싫어졌다/ 그는 침묵을 규정하여 품목별로 분류하는데 결국 실패했다 모든 침묵에는 무엇보다 그가 좋아하는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어 세부 관리의 효율성이 떨어졌다/ 침묵의 불합리와 모순은 그에게 크나큰 시련이었다 침묵은 입을 다물기보다 귀를 기울이기를 원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침묵을 관리하는 일은 무엇보다 완전한 침묵 속에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침묵을 관리하는 일은 수많은 침묵의 소란을 견뎌내는 일이었다//

나의 뒷모습 / 조용미
백 년 전 그림 속에 피가 고이듯 익숙한 모습이 있다. 나의 지문 같은 침묵과 공간과 어둠 속의 빛을 생을 다해 읽어낸 사람/ 오래전 그의 고독을 내가 숨 쉬었는데/ 그의 시선이 나의 시선처럼 겹쳐 있는데 나는 뒷모습으로 서 있고 동시에 그 모습을 바라보는 자이고/ 공기의 질감을 한 올 한 올 낱낱이 감각하는 창으로 들어오고 낮고 서늘한 빛이고/ 빛과 그늘이 솜처럼 뭉쳐져 있는 정적과 고요라면, 흰색과 검은 색의 짙음과 옅음이라면/ 무수히 많은 내가 무수히 많은 곳에서 당신의 뒷모습을 어루만진 기억을 아직도 살아내고 있고, 있고//

유적 / 조용미
오늘밤 그믐달이 나무 아래/ 귀고리처럼 낮게 걸렸습니다/ 은사시나무 껍질을 만지며 당신을 샹각했죠/ 아그배나무 껍질을 쓰다담으면서도/ 당신을 그렸죠 기다림도 지치면 노여움이 될까요/ 저물녘, 지친 마음에 꽃 다 떨구어버린 나무는/ 제 마음 다스리지 못한 벌로/ 껍질 더 파래집니다./ 멍든 푸른 수피를 두르고 시름시름 앓고 있는/ 벽오동은 당신이 그 아래 지날 때/ 꽃 떨군 자리에 다시 제 넓은 잎사귀를/ 가만히 내려놓습니다/ 당신의 어깨를 만지며 떨어져버린 잎이/ 무얼 말하고 싶은지/ 당신이 지금 와서 안다고 한들,/ 그리움도 지치면 서러움이 될까요/ 하늘이 우물 속같이 어둡습니다//

기억할 만한 어둠 / 조용미
그 어둠이/ 내게 도착했을 땐/ 늦은 저녁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둠을 맞이했다/ 새들을 놀라게 하지 않고도 새장에 들어가는/ 마술사처럼/ 그는 달빛을 밟고 서 있었다/ 발바닥에/ 달빛이 하얗게 묻어났다/ 나는 그의 발을 들어/ 하얀 그 냄새를 맡아보았다/ 찬란하면서도 혼이 없는/ 어둠은/ 어린 아이와 어른의 영혼을 합친 것처럼/ 검게 검게 빛났다//

바람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 조용미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 나의 내면이 고요할 때/ 바람은 어디에 있었나/ 생나무 가지가 허옇게 부러진다/ 버즘나무 널따란 잎사귀들이 마구 떨어져 날린다/ 개태사 앞 향나무는 뿌리째 뽑혀 쓰러졌다/ 마당에 기왓장이 나뒹군다/ 바람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키 큰 소나무들이 마구 쏟아져 들어온다/ 바람의 방향을 알 수 없는 나무들조차/ 내게로 몰려오고 있다/ 이때 폭풍은 나무의 편이다/ 나무들은 폭풍의 힘을 빌려 내게로/ 침입하려 하고 있다/ 속이 울렁인다 저 나무들의 혼이 들어오면/ 나는 무엇이 되는 걸까/ 머리칼에 바람이 갈가리 찢긴다/ 바람은/ 내 머리카락 사이에서 나와/ 약한 나무들의 혼을 찾아 멀리 달려가고 있다/ 숲이 심장처럼 펄떡이고 있다//

자리 / 조용미
무엇이 왔다가/ 사라진 자리는 적막이 가득하다/ 절이 있던 터/ 연못이 있던 자리/ 사람이 앉아 있던 자리/ 꽃이 머물다 간 자리/ 고요함의 현현,/ 무엇이 있다 사라진 자리는/ 바라볼 수 없는 고요로/ 바글거린다//

2월 / 조용미
상한 마음의 한 모서리를/ 뚝뚝 적시며/ 종일 내리는 비/ 겨울 등산로에 찍혀 있던/ 발자국들이/ 발을 떼지 못하고/ 무거워진다/ 응고된 수혈액이 스며드는/ 차가운 땀/ 있는 피를 다 쏟은 후에야/ 뒤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나/ 비의 피뢰침이 내려꽂히는/ 지상의 한 귀퉁이에/ 바윗덩어리가 무너져내린다/ 우둠지가 툭 끊어진다/ 겨울 산을 붉게 적시고 나서/ 서서히 내게로 오는 비//

반대편 / 조용미
나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신할 수 없다 저 사람은 나의 반대편에서 우선 한사코 얼굴이 없다 긴 머리만 등 뒤로 드리우고 햇살에 반짝이는 머리카락은 한 올 한 올 다 선명하다 부드러운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몇 가닥 오른쪽으로 날리고 있다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반대편이지만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긴 머리카락 사이로 살짝 보이는, 목을 두르고 있는 푸른색 스카프는 나의 것이 틀림없다 그녀가 입은 너무 환한 밝은 색 셔츠는 내가 좋아하는 색이 아니다 처음 보는 뒷모습이다 오른팔을 뻗어 어딘가에 손을 얹고 있다/ 맞은편 오른쪽에서 그녀를 다정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얼굴은 내가 아는 사람이다 밀가루 같이 풀어져 날리는 햇살을 받으며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일까 그녀는 나의 반대편이다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얇은 스카프와 언젠가 입은 듯한 기억이 나는 아주 밝은 색 옷을 입고 있다/ 등을 보이는 그녀 쪽은 너무 환하고 얼굴이 보이는 사람은 어두운 붉은색 옷에 검은 가방을 메고 있다 우연히 마주치게 된 사진 아래 이런 제목이 적혀있다 -피닉스는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다 그녀는 여전히, 반대편이다 우리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녀를 돌려세울 수 없다//

불귀 / 조용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모든 일이 다 일어난 것 같다, 이렇게 하루를 요약해본다. 우리에겐 은유가 절실하다. 눈 밑에 검은색이 웅크리고 있다. 오늘은 가득 차서 부푼 달, 윤달 구월, 다시 겨울이 온다. 시간과 공간이 슬쩍 뒤섞인다./ 미혹과 깨달음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여름 가을 겨울이 쉼표도 없이 의문도 없이 차례로 밀려온다. 어김없이 모든 것이 반복된다. 눈이 오고 또 비가 내린다. 어둠이 찾아왔다 물러난다. 사람을 얻었다 잃는다. 풀이 시든다. 꽃이 피고 진다. 이 지루하고 장엄한 우주적 반복에 안심이 된다. 여기엔, 불안이 없다 .여기엔, 그 누구라도 몸을 숨길만 하다./ 내가 살고 있는 이 행성에 겨울이 다시 찾아온다. 당신은 어디에 있나. 내가 이곳을 버리고 떠나기 전에 당신은 오지 않겠지. 당신은 나를 찾아 수세기를 떠돌겠지만 나는 이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나였던 당신을 기다릴 테다. 내 앞만 뚫어지게 바라볼 테다./ 은목서에 꽃이 피려면 어떤 다른 시간이 필요하다./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이 모든 것들이 금방 또 사라질 텐데, 당신과 나는 자꾸 만나지 못하지 은목서 꽃이 피어 만나지 못하지 은목서 흰 향기가 당신 이름을 지나 머뭇머뭇 내게로 와도 우린 알지 못하지. 기어코 알지 못하지. 내 기다림이 언젠가 이 어둠을 돌파할 수 있을 때까지.//

두문 / 조용미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없는 사람처럼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 했다./ 처음 간 곳이 다시 갈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마을이 있었다고 했다. 우물터가 있다고 했다. 병을 오래 앓고 있는 사람들이 그림을 그렸다./ 사람이 살지 않는 텅 빈 곳, 번지만 있다. 마지막으로 그곳에 가게 되었다는 게 이상하다./ 저 아래 너무 많은 아름답고 더러운 것들이 있다./ 아침 일곱 시와 저녁 일곱 시에 놓여 있게 되었다. 누구도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붕대를 감지 않아도 될 만큼 우리는 상처가 깊다.//

지구의 마음 / 조용미
밝고 어두운 줄무늬가 층층이 포개어져 나뭇잎을 눌러놓은 듯한 변성암처럼/ 켜켜이 쌓이고 눌린 지난 생의 격정은/ 비와 바람에 녹고 변하여/ 가느다란 띠무늬가 된 것 같다./ 구름과 풀이 변하여 다른 세상의 무늬가 되는 시간/ 땅속의 나뭇잎이 암석이 되도록 변하지 않는/ 어떤 마음이 있다./ 폐그물에 걸려 천천히 썩어가는 물고기들/ 옆으로 수초가 가만가만 자라났다./ 무늬의 성분과 질량을 분석한다./ 수억 년 전의 퇴적물처럼 뜨겁게 가라앉았다가 다시 천천히 밀려올라오는 기억들/ 그 시간을 고요히 반복했던 지구의 마음이 있었다는 걸/ 먼 훗날 누군가 알게 되겠지./ 무언가 변하여 이루어진 저 띠무늬들은 변할 수 없는 것들이 모여 단단해진 것./ 안과 밖이 다 변해야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것들은/ 내가 변하지 않아서 맞이해야 하는 이 파국은,/ 마침내 산산조각 나고 있는 이 얼굴은//

거울 / 조용미
유리잔이 문득 창가에서 느린 속도로 떨어진다/ 파멸한 단맛을 보려는 의지는 개입하지 않았다/ 기나긴 슬픔에 비해 파국은 지나치게 짧다/ 유리는 이제 아무것도 비출 수 없다/ 잔은 사라지고 유리조각만 새로이/ 생겨났다/ 부수어진 아름다운 것들을 치우지 말자/ 누구도 너를 구해줄 수 없다/ 너는 일어서도 다시 자꾸 쓰러질 테지/ 나는 가만 있는데 내가 움직이는 거울,/ 나는 움직이는데 내가 가만 있는 거울을/ 종일 들여다본다/ 너는 자꾸 쓰러질 테지/ 기나긴 출혈에 비해 피는 너무 쉽게 응고된다/ 부수어지고 부수어진 슬픈 것들을/ 치울수 없다/ 거울은 여러 개의 거짓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시라쿠사의 밤 / 조용미
비가 소리를 만든다 소리가 아주 멀리 있는 비를 데리고 온다 비와 소리가 구분 되지 않는다 세상의 아름다운 말과 소리들은 다 어떻게 합쳐지는 걸까// 여기는 비가 내리고 있고 내리는 비는 구시가지 오르티지아의 골목길을 적시고 있다 먼 곳으로 오니 그곳이 꿈같다 지옥도 멀리서 보면 타오르는 아름다운 붉은 행성처럼 보이는 걸까// 디오니시우스의 귀에 들어왔다 소리들이 안으로 모여들어 수증기처럼 올라간다 누군가의 귓속으로 들어가 그의 이명이 되는 건 원치 않았던 이상한 일// 귀가 점점 커지고 있다 내 숨소리는 높고 거대한 동굴의 환청이 되어 내가 떠난 후에도 오래 디오니시우스였던 누군가의 귀를 어지럽힌다// 말과 소리는 어떻게 다른 색이 되는 걸까 귓속의 어둠을 지나 눈부신 좁은 관을 통해 어딘가로 구불구불 돌아 나오니 어둠이 내리고 있다// 성당 앞 사도 바울처럼 생긴 긴 머리 눈이 깊은 청년이 검은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무쇠 솥뚜껑 같은 악기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번지듯 맑고 고혹적인 소리가 난다// 파피루스가 자라고 있는 연못의 난간에 기대어 나의 언어로 속삭이듯 오늘 여기, 고대, 그,리,스,의, 도,시,로, 왔,다,고 소리 내어 말해본다// 시라쿠사의 밤 나의 모국어는 핸드팬보다 따뜻하고 신비한 음색으로 공허하게 울린다 나의 속삭임이 파피루스의 언어가 되는//

검은 연못 / 조용미
저 검은 거울 아래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고랭이 부들 골풀과 수향목을 비추고 있는 대낮의 어둠이다. 맑고 무서운 검은색이다.// 연못가에서 멀찍이 서서 흑경에 비추인 물풀을 바라본다./ 물풀이 정밀하게 새겨진 흑경의 표면을// 검은 거울은 대리석처럼 누워있다.// 거울 속의 어둠이 내장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이든 파국을 예감하는 자의 두려움이 얼마나 깊은 연못을 만드는 것인지.// 저 검은 거울의 싸늘한 고요함은/ 내게 어루만지듯 말해주고 싶어한다.// 치자꽃 근처 짧은 잠은 아름답지도 쓸쓸하지도 않구나.// 치자향 어른거리는 창 앞 물뿌리개의 물방울이 흩어질 때마다 치자꽃 봉오리가 목을 떨구는/ 어스레한 저녁이 자꾸 나타나고 사라지고// 머뭇거리는 자는 흑경을 부수고 뛰어들 수 없으니// 이제는 향기롭지도 어지럽지도 않은/ 시간을 맞이하는 것이다.// 연못을 떠나면 천문대의 어두운 밤하늘을 보러 갈 것이다./ 어둠으로 어둠으로 밝은 어둠으로 가려한다. 이것이 오늘 하루 나의 어둠을 지키는 방법이니//

눈동자의 고독 / 조용미
떨리는 눈꺼풀에 불두화 꽃송이를 끌어당겨와 얹어본다./ 불두화 푹신한 꽃들이/ 몸의 열을 조금 나누어 가진다.// 속눈썹을 움직여보니 꽃송이 안에 이상한 세계가 있다. 이런 식으로 저들의 영역을 엿보려 했던 건 아니다.// 불두화들에겐 내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있다.// 둥근 꽃송이 안에 들어 있는 작은 꽃들/ 작은 꽃들 안에 들어 있는 더 작은 꽃들 더 작은 꽃들 안에 들어 있는/ 목성처럼 커다란 장소를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생각한 것처럼, 보였다.// 들어가볼 수 있을까/ 불두화 속은 내가 볼 수 없었던 눈동자, 내가 감각할 수 없었던 피부, 내가 보아서는 안 되었던 우물의 속.// 눈꺼풀 위에 불두화를 올려놓고// 고개를 들고 눈을 감고/ 반쯤 감고, 고요하게 소용돌이치는 노랗고 파르스름하고 어룽거리는/ 불두화 속 마주 보는 눈동자의 고독을 생각해보았는데//

물소리에 관한 소고 / 조용미
물소리가 높다 낮다 밝다 어둑하다 짙다 옅다 깊다 얕다 두껍다 얇다 거칠하다 부드럽다 촘촘하다 드문드문하다 고요하다 요란하다 쟁쟁하다 아늑하다……// 고요하다와 쟁쟁하다가 가장 마음에 든다// 일정한 리듬이 변주되고 되풀이되는 물소리의 화음은 보아서도 들리고 들어서도 보이겠지만 저 음표들을 속속들이 손바닥에 다 옮겨놓을 수는 없다// 내 몸속 세포의 흐름이 저 물소리의 우주적 운율과 다르지 않아 또 몸에 귀 기울여야겠구나. 이젠 몸을 떠나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알 수 있겠나 묻지 않는다// 물소리가 최대치로 밝아올 때 내 귀가 틔었다/ 소리에도 빛과 어둠이 있다는 걸, 그늘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물소리는 몸의 실핏줄을 통과해 다른 음색과 리듬으로 미묘하게 바뀐다/ 내 게으른 궁리가 마침내 저 물소리의 음영화법을 파악하게 되었을 때//

09시 09분 / 조용미
09// 09// 2018년 1월 0일 9시 9분에서 10분 사이 60초 동안 나는 검은 바탕에 위아래로 배열된 휴대폰 꺼짐 화면의 평면에 나타난 몹시도 조형적인 아라비아 숫자를 숨죽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순간을 영원이라 부르면 어떨까// 천변엔 검게 마른 가막사리 열매가 찬바람을 맞으며 있고/ 진눈깨비가 스으스윽 지나가고/ 나는 갈대숲에 서 있고// 09에서/ 10으로/ 숫자가 바뀌었다// 생활은 아라비아 숫자와 겹쳐진다// 눈은 자꾸 내려와/ 하늘은 먹빛이고// 새의 커다란 날개 속에 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 삶이 계속되리라는 환이/ 우리를 살게 만든다//

'시詩 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영석 시인  (0) 2022.05.25
권현형 시인  (0) 2022.05.24
윤이산 시인  (0) 2022.05.21
김경후 시인  (0) 2022.05.20
김민정 시인  (0) 2022.05.19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