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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학중 시인

부흐고비 2022. 5. 27. 08:35

김학중 시인
197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현대문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2009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창세』가 있다.

제18회 박인환문학상을 수상.

 

 




벽화 / 김학중
1// 눈먼자가 처음 그 벽에 부딪쳤을 때 벽이 거기 있다는 그의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사람들이 벽을 발견하게 된 것은 눈먼자가 자신의 몸을 뜯어 그린 벽화를 보고 나서였다.//
2// 벽화는 아름다웠다. 거친 손놀림이 지나간 자리는/ 벽의 안과 밖을 꿰매놓은 듯했고 스스로 빛을 내듯 현란했다. 색색의 실타래들이 서로 몸을 섞어 꿈틀대는 그림은 벽에서 뛰쳐나가려는 심장 같았다. 그 아름다움은// 벽의 것인지 벽화의 것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벽화를 본 사람들은 구토와 현기증을 호소했다. 그들은 벽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고, 환희인지 고통인지 알 수 없는 감각을 느끼며 벽에서 뜯어내기 시작했다. 벽화가 부서지고 있었다. 벽 앞에 모여든 사람들이 무너지고 있었다.//
3// 벽화의 잔해를 손에 쥐고 나서야 사람들은 거기 벽이 있었음을 알았다. 벽화를 그린 자에 대해서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단지 그들은 그 자를 눈먼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를 부를 이름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붙인// 이름 아닌 이름/ 벽을 나누어 가지고도/ 벽을 볼 수 없었던 자들은 흩어지며/ 그 이름만을 나누어 갔다.//
* 제18회 박인환문학상 수상작

리듬 / 김학중
숲이 있다. 거기 있다는 것이 숲인 깊은 숲./ 희미한 달무리에 둥글게 젖는 밤이 오면/ 숲은 자기의 숨인 리듬에/ 고요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 고요의 리듬은 느슨하고 느슨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흐릿하고 어두워서/ 어두워짐으로 풍성해지는 세계로/ 리듬은 흘러간다. 가늘게/ 흘러가는 고요의 리듬은/ 세계 속에서 늘 무력했다.// 그러나 리듬은 무력함이 힘이므로/ 무력함의 힘으로 무럭무럭 숲을 키운다./ 가지런한 잎사귀들이/ 바람과 물속에서 푸르러지는 것은/ 늘 리듬 속에서 이루어졌으므로/ 새들이 제 부리로 노래하는 것은/ 늘 리듬의 온기 때문이므로/ 가까이 또 멀리에서 넓어지는/ 숲은 고요의 뿌리로 가만히 다른 숲을 부른다.// 숲의 리듬이 공명하며 펼쳐지는 것은 그 때문이리라./ 지금 여기 어디에서나 조금씩 멈춤 없이/ 리듬은 가는 뿌리를 내린다.// 숲을 비추는 달무리는 숲의 리듬에 맞춰/ 희미한 손끝으로/ 지구를 돌리고 있다.// 리듬은 그렇게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세계를 움직이는 일 이외에는.//

시간의 현수막 / 김학중
늦여름 새벽, 새벽마저 첫차를 기다리는 정거장에 서서 뒤돌아보니 그늘막 속 희미하게 밝아오는 자리에 앉아있는 시간이 보였다 시간은 침묵하고 있었다 아니 침묵이 시간을 펼쳐두고 있었다 그 사이 마스크를 올려 쓴 몇몇 사람들이 정거장에 왔다 그들은 익숙하다는 듯 침묵에 귀를 기울이며 점멸하는 정거장의 안내판에만 가끔씩 눈길을 주었다 그늘막 뒤편 포도밭에는 줄지어 영그는 포도송이가 무심하게 가지런했다 농익은 포도향이 시간의 침묵으로 스며들었다 포도알처럼 무슨 말인가 하고 싶었지만 하려는 말이 무언지 알아채기 전에, 환하게, 아침은 오고 버스는 승객들을 태우고 떠났다 정거장에는 현수막만이, 아침햇살 속에 색이 바랜 글자들을 펼쳐두고 남겨졌다 아무도 읽지 않는 글자의 빛깔을 더듬으며 여전히 시간은 그 자리에 있었다//

나의 밤은 오랫동안 불면이라 / 김학중
그대를 기다리는 시간은 밤이다/ 아름다움은 보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도착하는 것이다 지나쳐 가는 스침이여/ 나를 흔들지 못하느니/ 이 긴 밤이 내게 이미 삶이었듯이/ 먼저 당신에게 눈먼 나의 삶이 밤이었듯이/ 기다림이 더듬어 닿은 땅의 신호들을 따라/ 나는 다만 걷고 걸어 걸음 속에 잠들었네/ 그대를 보았다는 말이 들려도 멈추지 않았네/ 이 걸음들 속으로 그대의 곁이 깃들도록 그렇게/ 나의 밤은 오랫동안 불면이라/ 그대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네/ 다만 음성으로 오는 순례의 신호들이여/ 소리는 견뎌온 세계로 삶의 무게를 견디는 것이니/ 밤이여 우리가 서로를 일으키는 무게였구나/ 그때에는 밤의 길을 따라 걸으며 모르고 있었구나/ 우리 스스로 깃들었네 길들의 바닥이여/ 이렇게 밤은 우리의 몸을 얻었구나/ 여기에서 우리가 시작하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도착하는 질문이 흔드는 데로 우리는 불안을 다 맡겼으니/ 그대 곁에서 숨쉬는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의 삶이었으므로/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세계를 사랑하였으니 밤이여 따듯하여라/ 나의 밤은 오랫동안 불면의 노래였으니/ 너의 곁에서 노래는 늘 깨어/ 와서 너를 안을 것이다 밤이여/ 모든 것을 몸으로 마주하게 하는/ 나의 영원한 당신이여/ 내가 끌어 안은 그대의 곁이여.//

교환과 교환수 / 김학중
화폐가 왕관을 쓰던 날이 끝이었다고 해. 교환수가 그 왕관을 보았을 때 믿을 수 없었지. 그들이 선물에 양도한 것이 왕관이었는데 거기에 있었으니까. 교환수는 다시 한번 자신의 실패를 바라봐야 했다고 해. 그것은 모든 것에 파고드는 힘을 가졌지. 하늘을 찌를듯한 뾰족한 돌기들로 마치 하늘의 가치마저 파고들어 여기에 실현시킬 듯한 왕관이라니. 파고드는 힘이라. 그것은 무엇인가를 탈취하는 힘일지도 몰라. 그 강력한 힘을 오직 교환수만이 티끌이라고 불렀다지. 모든 사물의 등가교환이 무라는 것을 교환수만이 알았다고 해. 그래서 교환수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형벌에 처해진 사람. 모든 것을 무로 돌아가게 하는 숫자를 그들이 이 세계에서 교환해 냈을 때, 최초의 그 교환을 위해 그는 자기를 폐기했다고 전해. 그들은 그 비밀을 교환수의 기록에만 적어 두었지. 최초의 희생. 열매 없는 나무의 문장. 그것이 교환수의 세계수. 교환수는 열매 없는 나무를 잇는 자들이란다. 교환수가 비밀을 알려주듯 해준 말을 들은 적이 있어. 그들은 그렇게 자기를 잃고서야 가치를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었지. 그들이 그 가치를 위해 만든 게 티끌이라는 화폐지. 그게 그들의 이야기야. 그들의 일이 무슨 대수냐고 물을 수 있을거야. 그럴 수 있지. 그들 스스로도 이것을 실패라고 했다니까. 그래도 잊지 말아야 해. 우리가 지혜라고 부른 그들의 실패에 대해. 교환수들이 모든 것을 가치로 환원하여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시장에서 아무것도 사지 못했을 것이야. 지금 이렇게 우리가 이야기를 교환하는 것도 어려웠겠지. 그들은 이야기의 교환자이기도 하니까. 가치의 교환 이후 그들은 줄곧 사람들의 이야기를 교환하여 주고 있지. 그것마저도 지금은 잊혀진 직업이긴 하지만. 이해하기 힘든 진술이지만 그 이야기가 만든 것이 왕관이라고 하는군. 우리의 가슴을 파고드는 그 이야기들 말이야. 그들은 이야기를 선물이라고 했어. 모든 것을 교환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고도 그들은 어쩐지 이야기와 화폐는 교환시키지 않으려고 했지. 교환수만이 이야기의 교환자가 되려고 했어. 그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을지 몰라. 이제 그들은 사라졌거든. 화폐가 왕관을 쓰던 날에 그들은 모두 자기들이 처음 세계로 끌어낸 무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해. 근원으로의 회귀. 그것만이 그들이 다시 여기에 나타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다지. 그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마을 바깥에 살아왔고 누군가 쓸모없는 물건들을 가져오면 자신들에게는 쓸모를 다한 은화를 내어주곤 했다고 전해지지. 우리들의 역사와 함께 살아온 그 최초의 추방자들을 교환수로 불렀지. 이제 그들은 누구도 아닌 자들이지. 그들을 부를 수 있는 교환의 이름만 남긴 채 사라진 자들.//

동전 분수대 / 김학중
동네에 분수대가 생기자/ 소원을 빌러 사람들이 찾아왔다/ 어느 날 아침 한 사내가 생수통 하나를 하나 가득/ 채운 동전을 가지고 분수대를 찾아왔다/ 그는 분수대에 동전을 묵묵히 던져넣었다/ 소원이 아니라 하루를 던져넣기 위해 온/ 그가 가져온 동전들은 처음 보는 외국 동전들이었다/ 버스 회사 오 년, 누군가/ 무임승차 때 넣은 외국 동전들을 모으며 버티던 날들/ 돌아갈 곳이 없는 자들의 기념물인/ 동전들은 퐁퐁 소리를 내며 분수대에 안긴다/ 바닥의 동전들은 환전해주지 않아 버려진 동전들과/ 서로 몸을 포갠다. 분수대에서/ 하얗게 떨어지는 물방울은 물소리로/ 동전들을 닦아준다/ 연인들 몇몇이 소원을 빌고 가고/ 나무들은 잎사귀를 던져넣으며 내년 봄을 기원했다/ 분수대는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지만/ 누구도 고장난 자판기 대하듯 발로 차지는 않았다/ 지갑을 잃어버린 사람이 차비를 빌려갔다/ 굶주린 사람은 한끼 식사를 위해 동전을 건져갔다/ 분수대는 말없이 그들의 손을 씻어주었다/ 젖어도 찢어지지 않는 동전처럼/ 단단한 소원들을 혼자서만 기록하고 있었다/ 늦은 밤, 청소부들은 거름으로 팔 낙엽을 쓸어 담고/ 노인들은 자루에 신문을 주워 돌아갔다/ 분수는 멈추고 공원엔 작은 가로등 한 개 빛났다/ 남겨진 동전들은 빛을 받는 행성처럼 빛을 냈고/ 희미한 물빛이 밤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때까지 돌아가지 못한/ 사내의 눈가를 몰래 닦아주고 있었다.//

창세기 1 / 김학중
둘이 기원이었다/ 혼자인 것들의 기원/ 몸의 혈액인 기원/ 손이 손가락을 낳고/ 얼굴이 눈과 코와 입을 낳고/ 귀를 낳고/ 나의 해골인 너를 위하여/ 너의 피부인 나를 위하여//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듣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맛보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혼자 돌려주고// 돌아오는 고요는 그냥 고요가 아니나니/ 시계를 향해 손을 뻗어/ 만나서 울지 않는 마주함/ 둘이 맞잡은 고요가 있다// 마른 돌 위로 흐르기 시작한/ 첫 강물을 아직/ 강물이라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둘이 고요였다//

창세기 3 / 김학중
역사는 고물상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물과 사물// 쓰이고 지워진 것의 경계들이 남긴 물결 위에/ 떠 있는 건천 고물상/ 부서진 신전들의 더미// 신은 마른 강에서 물고기를 건져 올려/ 그 자리에서 껍데기를 벗겨 인류를 만들었다고 한다/ 화석인 채로 태어난 인간들은/ 살아가려고 동족을 먹어야 했다// 그대로 두어라// 잔인한 이야기들은 미끼도 없이/ 다시 걸린 낚싯대/ 나의 벌은 목이 마른 질문을 받는 것이다// 오직 이 강의 순례자들만이 찾아와/ 창세전에 묵시록을 쓴 신에 대해 물었다/ 나는 조용히 화석이 된 나의 두개골을 열어 보였다// 나는 종이요. 울리지 않는 종이요// 그들은 질문의 값으로/ 자신들의 얼굴을 두고 돌아갔다// 창조란 늘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일/ 신이 우리에게 준 벌// 나의 이빨. 말하지 못하는 이빨들은/ 삼키지 못하는 강의 뼈를 씹으며/ 입의 어둠으로 세계를 보고 있다// 여기 사라지며 남겨진 껍데기들의 성지/ 고물상의 목록에는 역사가 없다.//

창세기 4 ㅡ텐트 시티 / 김학중
집은 늘 늦게 오는 것인가/ 산을 넘어/ 뒤늦게 오는 도시들 속에 세울 집만을/ 기도하며 바라는가/ 무겁다. 어디에서 어디로/ 밤이 재우지 못한 눈물을 이어도/ 배가 고파서 말하지는 못하는 손들아/ 짐은 차가운 공기를 만지고/ 사랑스러운 온기는 한 번도/ 찾아보지 못한 자들만이/ 여기에서 하루. 밤을 위해 불을 피운다/ 인류가 낙원을 잃은 날부터 따라다닌 추위여/ 너는 너의 집을 아는가 바람이여/ 천을 펼쳐 일으키고/ 이웃이 있는 집을 잇게 하라/ 하루를 잠재우기 위해 세운 도시를/ 너희가 수고하며 지고 온 집을/ 오늘은 여기 세워 낯선 도시를 만들리라/ 한번은 살아서 어디에도 없는/ 도시가 지어지고/ 숲에 둥지를 트는 새들은 잠시 안식하는/ 하룻밤의 도시. 너는/ 어디로 가는 것이냐/ 저물어가는 날을 견디며 세우는 안식의 도시/ 이 산과 사막의 어디에서/ 너는 목마를 것이냐 도시여/ 그들은 산을 오른다 태양이 오르듯이/ 그들의 손은 하루를 짓느라/ 매듭이 굵어지고 그 굴곡을 움직여/ 노래로 집을 짓는다/ 집을 잃은 자들만이 지을 수 있는 도시/ 늦어도 늦어도 기다리는/ 남겨진 텐트들의 도시/ 가질 것이 없어 창세를 가진 버림받은 자들이/ 오늘 지고 간 도시.//

창세기 7 ㅡ퀴푸의 노래 / 김학중
1// 소멸한 문자로는 노래할 수 없다고 했어/ 모든 것이 창조되고 난 뒤에 소멸되는/ 일곱번째 날/ 소멸한 문자로/ 남겨진 날과 사라진 날을 엮은 노래를/ 다시는 부를 수 없다고 했어//
2// 네 머리를 땋으며 글자를 만들었지/ 내 말은 네 귓가에서 사라져/ 너의 머리칼 속에 깃드는 것들은/ 따뜻하게 어두워지는 잎사귀의 안쪽/ 손가락이 닿도록 볼 수 없는 너의 입/ 한 매듭을 만들 때마다 열렸다 닫히는/ 여기에 우주는 항상 뒷모습인 거니/ 풀을 흔드는 바람으로 널 엮어/ 글자를 만들었지/ 매듭이 만든 글자엔 이슬이 내려앉기도 하고/ 바람이 드나들기도 해/ 흔들리는 글자들의 머리채/ 숨은 숲으로 너를 안고 나는 길을 떠나/ 마디마디로 되돌아오는/ 말로는 다 말할 수가 없어서 노래해/ 노래의 숨이 만나는 길의 우주/ 적막 속에서 다 흩어지도록/ 사라지는 노래는 뒤로 뒤로 발자국도 없이/ 말없이 난 너의 전부를 안을 수는 없을까/ 어둠은 가까이 있을 때의 온도/ 나의 체온을 나눠줄게 따뜻해지렴/ 길 위로 오는 별의 눈물이 다 타도록/ 나는 읽을 수 없는 매듭을 묶고 있을게/ 머리채의 매듭이 늘어가도 너는/ 여전히 말하지 않는 문자/ 들리니. 여기 한 세계가 만들어졌다가/ 사라질 거야. 그래 떠나/ 어두워진 일곱째 날의 숨/ 글자들이 남기지 못한 소리들을 가져가/ 노래가 끝나면 너의 매듭이 완성될 거야/ 내게는 항상 둘인 너의 귓가에/ 풍성한 머리채의 글귀//
3// 창조의 마지막 날에는 사라진 날이 있었고/ 그날의 노래가 있었다.//
*잉카의 결승문자를 말한다. 퀴푸는 새끼 꼬기와 같은 방식으로 중심이 되는 굵은 줄에 여러 가닥의 줄을 묶어 만든 문자이다. 현재까지 많은 연구자들이 매달렸지만 결승문자의 의미를 완전히 해독해내지 못했다고 한다.

세기 2 / 김학중
닿지 않는 자리가 있었다/ 몰라보게 시간이 맞서는 가장자리/ 두께를 가지고 사는 것들은 피할 수 없지/ 반복이 덧나며 출렁이는 선/ 페이지를 넘기는 바람에/ 읽지 못한 일기를 뜯어내며/ 너는 거기에 누구의 이름을 적어놓았을까/ 몰래 떠나보낸 걸 기억하려고 하면/ 강가의 나무들은 가지를 꺾어 하류로 떠내려 보내고/ 사는 건 왜 이렇게 아무 것도 아닐까/ 나의 나라에서 시간이 간다/ 말할 수 없이 작은 낙담에도 너를 기억하려고 했는데/ 흔들리는 이름들의 경계의 곁으로/ 닿지 않은 물결이 흘렀다/ 세기를 읽어버린 물결은 푸르게 썩고/ 나는 이 나라를 떠나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 시간이 나라를 가진다는 건/ 네가 세운 나라에서만 가능한 일이었으면/ 사랑한다는 말로도 목숨이 닳는 건/ 네가 서 있는 거리가 잃어버린 손들로/ 어두워지기 때문일 거라고/ 흔들리며 넘치는 것은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어디로 고여 드는 걸까/ 허물이 긴 너의 이야기를/ 나는 아직도 다 읽지 못해서/ 여기에서 너를 바라본다/ 눈이 눈물을 잃는다/ 너의 손으로는 가릴 수 없는 지금//

시인의 말 / 김학중
어떤 수식어도 허락되지 않은 채 삶이 남겨졌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오래 걸어야 했다/ 어느 날 멈춰보니 중앙 우체국이 있는 거리에 서 있었다/ 그때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는 나의 삶이/ 나를 두드렸다/ 이것으로 무엇을 하지 질문했다// 질문을 하니 용기가 생겼다/ 그리고 시를 써나갔다// 삶이 스스로의 삶을 두드리던 그 힘을 위하여/ 산다는 것이 창세인 시대를 위하여/ 아무런 선언 없이 선언을 완성하는 언어를 위하여/ 이것들이 다만 시작으로 무너질지라도. 괜찮다// 시를 믿는다/ 시를 믿는다// 그 거리/ 탄흔을 품은 중앙 우체국의 기둥은/ 아직 굳건하게 서 있다.//

선사 / 김학중
1// 소리가 쌓여 한 송이 꽃으로 피었다//
2// 꽃은 얼핏 악기의 모습이지만/ 고대로부터 소리를 모으는 귀/ 소리가 모이면/ 소리의 주름을 접어/ 꽃잎을 만들고/ 리듬의 빛깔로 물들이지/ 꽃까지 달려온 소리들은/ 날갯짓들이어서/ 목소리가 없는 꽃은 향기에 날개를 달아본다네/ 소리의 발에 꽃가루를 묻혀본다네/ 가만히//
3// 꽃의 이름을 부르네/ 꽃은 언어 이전의 소리를 듣는 귀/ 차별 없이 모든 소리를 듣지만/ 제 이름을 불러도 모르네/ 말하지 않고 피는 꽃/ 아름다움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그게 꽃의 이름일 수 있을까/ 모르겠네. 꽃 하나의 이름이/ 온 세계의 언어만큼 있다는 건/ 꽃이 인간에게 준 선물/ 혹시 음악을 함께 듣는다면/ 본명을 알려줄까. 알 수 없지만/ 나는 꽃의 이름을 노래해보네// 꽃은 제 이름을 듣느라/ 이름이 없네//

공명 / 김학중
소리가 뼈를 흔든다/ 뼈와 뼈 사이 비어서 꽉 찬 호흡/ 소리는 눈물처럼 고여/ 울어야 할 때에 흔든다/ 누군가의 걸음걸이를 기억하는 물결로/ 천천히 리듬으로/ 흔들며 노래가 되는 것들은/ 춤추며 노래가 되는 것들은/ 들리는 것이 아니라 흔드는 것이다// 이스터의 석상들처럼 서있는/ 이 도시의 신앙/ 저 거대한 마천루들을/ 흔들어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이여/ 춤추라/ 눈물이 흐르듯/ 소리와 소리가 공명하는/ 그것은 공명한 일// 이제 여기에 있는 빈/ 소리들이 심판하려고 운다.//

워크맨 / 김학중
생일 선물로 어머니가 사 주신 워크맨/ 이제 중학교에 들어간다고/ 꼭 영어 공부하는 데 쓰라고 사 주셨는데/ 영어 공부는 하지 않고 팝송만 들었다/ 세상의 모든 영어 문장이 단지 음악일 뿐이라는 듯/ 뜻도 모르고 들리는 대로 그저 따라 부른 노랫말// 워즈 돈 컴 이지// 영단어들은 내게 쉽게 와 주지 않고/ 스텝 바이 스텝으로/ 귓가에서 걷고 걷기만 했다// 외국인을 만나면 머뭇머뭇/ 입 밖으로 나와 주지 않는 영어가/ 테이프가 끝나면 다시 처음부터 걸어와 주던 날들/ 그렇게 걸어 나간 나의 길// 아이 디드 잇 마이 웨이.//

막다른 곳에서 / 김학중
막다른 곳에서 건너오는 바닥/ 먼먼 주기율을 가진 바닥/ 오는 날은 그래도 오늘이라서/ 갑자기 바닥을 마주하는 우리들/ 그 순간이 늘 건너편에 있기를 바라지만/ 꼭 넘어오는 사막/ 손이 긴 오늘/ 사막이라는 바나나/ 원숭이는 잃어버린 오늘의 바나나/ 빛깔은 다 익어 모래바람/ 미끄럽게 불어오는 막다른 곳/ 거기 어디에서나 바람은/ 바닥의 먼지들을 조금씩 데려오지/ 매끄러운 샛노란 빛깔을/ 긴긴 빛깔의 우주에서 바라보는/ 우주인이 바라보는 끝의 대기/ 대기의 바닥/ 길고 긴 바나나의 향은/ 어느 날보다 길어서/ 아무 곳에서나 우린인 안부의 끝에/ 두꺼운 편지를 봉하고/ 바나나의 끝 어딘가를 가리키는 수많은 손가락들이/ 무너진 사막의 귀퉁이를 끌고/ 끝내는 건너고야 만다는 거기/ 오늘 너의 어딘가/ 마지막 얼굴을 확인하며 불고 있는 듯/ 바나나는 어디에서나 길고/ 우리가 처음부터 잃어버린 열매들의 이름은/ 길어서 낯설기만 해/ 닿지 못할 귀퉁이의 손이여/ 네 손이 잃어버린 그 첫장을/ 가만히 바닥에 두고 보는 날이다.//

벽화 / 김학중
1// 눈먼 자가 처음 그 벽에 부딪쳤을 때 벽이 거기 있다는 그의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사람들이 벽을 발견하게 된 것은 눈먼자가 자신의 몸을 뜯어 그린 벽화를 보고 나서였다.//
2// 벽화는 아름다웠다. 거친 손놀림이 지나간 자리는// 벽의 안과 밖을 꿰매 놓은 듯했고 스스로 빛을 내듯 현란했다. 색색의 실타래들이 서로 몸을 섞어 꿈틀대는 그림은 벽에서 뛰쳐나가려는 심장 같았다. 그 아름다움은// 벽의 것인지 벽화의 것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벽화를 본 사람들은 구토와 현기증을 호소했다. 그들은 벽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고, 환희인지 고통인지 알 수 없는 감각을 느끼며 벽에서 뜯어내기 시작했다. 벽화가 부서지고 있었다. 벽 앞에 모여든 사람들이 무너지고 있었다.//
3// 벽화의 잔해를 손에 쥐고 나서야 사람들은 거기 벽이 있었음을 알았다. 벽화를 그린 자에 대해서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단지 그들은 그 자를 눈먼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를 부를 이름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붙인// 이름 아닌 이름/ 벽을 나누어 가지고도/ 벽을 볼 수 없었던 자들은 흩어지며/ 그 이름만을 나누어 갔다.//

밤은 누군가의 역 / 김학중
밤은 누군가의 역/ 순진하게 내려와 앉으며 정차하고는/ 지나간 이름들이 자라나와 내리는/ 모든 바닥들/ 바닥에 시간이 뿌려두고 간 낱알들이 살이 올라/ 바람 부는 쪽으로 아무렇게나 서걱거려도 좋은 시간/ 바닥에 앉아야 기다림이 익지/ 아무 곳이고 역이 되지/ 나지막이 다들 내려주고 남는 바닥이야/ 잠드는 역을 떠나는 막차들은 불을 끄고 천천히 떠나가고/ 이제 남은 바닥은/ 흐릿하게/ 순진한 깊이/ 마감이 임박한 오늘에게/ 시간만이 데려다 줄 수 있는 안식을 주는 깊이/ 아직 그날인 누군가/ 그대 그대로 붙잡아도/ 어둡기만 한 대답들이 충만해지는/ 가만히 내려앉아 등 뒤가 되어주는 누군가의 역/ 등으로 다가가는 일이 밤이라니/ 그대가 그대로 이 날이었다니.//

천적 / 김학중
폐차장에 들어선 차들은/ 죽음에 이르러서 자신의 천적을 알게 된다고 해요/ 차를 부숴본 사람들만이 아는 비밀을/ 살짝 알려드릴게요. 앞 유리를 부수고/ 보닛을 찌그러뜨릴 때쯤이면/ 태어나 그처럼 맞아본 적 없는 차들은/ 백미러를 보며 길을 그리워한대요/ 길이 방목해 키우던 그 시절/ 세상 그 어디에라도 달려갈 수 있을 것 같던 그때를/ 회상에 빠진 헤드라이트가 그렁거리는 순간/ 차의 숨통을 끊어주는 게 폐차장에서 하는 일이래요/ 그러면 찌그러진 차체에 천적의 무늬가 떠오른대요/ 길의 무늬가 소름 돋듯이 뜬대요/ 계기판의 주행거리가 단지/ 오랫동안 길에게 쫓겼다는 증거였던 거죠/ 질주를 충동질하는 길이/ 후미등을 흉내 낸/ 빨간 신호등으로 자신을 길들여왔던 거죠/ 먹지도 못 하는 깡통을 만들어내는 천적 따위는/ 천적 축에 못 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폐차를 해본 사람은 잊지 않는대요/ 언제나 길은 제 위를 달릴 새 차가 필요하단 걸 말이에요// 은밀한 포식을 즐기고 있는 아스팔트 도로/ 그 혓바닥 위로 당신도 막 발걸음을 옮기고 있군요.//

길을 잃으면 강을 찾으라 했다 / 김학중
길을 잃으면 강을 찾으라 했다./ 그곳에 가면 길 잃은 자의 무덤 위에/ 탑을 세운 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길을 물으라 했다./ 어째서 죽은 자들만이 이정표를 세웠는지/ 잘 알지 못해도 그 강에 가면/ 물소리에게라도 길을 물을 수 있을 거라 했다./ 이름 없는 자들의 손가락을 길잡이 삼아 걸어간다./ 강가에서는 수고하며 걸은 자들만이/ 흐르는 강에 발목을 담그고/ 물 위에 비치는 제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숙인다./ 바람이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물결 위의 오래된 발자국들/ 얼마나 오랫동안 강물이 그 발자국들을 싣고 흘렀는지/ 흐르는 것들은 얼마나 거대한 서성거림인지/ 그 앞에서 처음으로 길 잃을 자가 되어/ 제 눈이 먼 줄을 알고 울게 되리라./ 강을 등지고 떠나는 자는 이제/ 세상의 모든 길이 그려져 있는/ 여행자 지도를 버리고 빈손이 된다./ ―오직 눈먼 사람만이 지도를 버릴 수 있다―/ 그의 귓바퀴에 강물 소리가 흘러와 부딪친다./ 입 밖에 낸 적 없는 물음에 대하여/ 강물 소리가 웅성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의 발자국 소리가 출렁이며 흘러간다.//

강을 굽다 / 김학중
힘차다/ 빛을 받은 물비늘 너머로 희미하게/ 조약돌이 보일 듯 깊지도 얕지도 않은 강/ 물살은 방금 방생한 치어처럼 가쁘게/ 그 모가지를 확 잡아챈 병목 아래에서/ 선 채로 바둥거리는 강. 누군가/ 강을 구웠다. 가마 안의 열기만으로/ 강물을 붙잡았을까. 모를 일이다/ 물레 위에서 물결 안에/ 내면을 만들어내는 사람의 손을/ 미끈거리는 날것을 붙잡으려 할수록/ 자꾸 새어나갔을 물결. 손가락 사이에서/ 격한 물소리가 났을 것이다. 그 소리에/ 베었을 것이다. 대지가/ 끌어안고 있는 강을 구우려 하다니/ 태초부터의 불경을 잇고 있는 자여/ 물소리에 베인 손가락은 물결의 내면에/ 가라앉았을까. 도자기가 순간 웅크린다/ 살의를 가진 짐승처럼 노려보는 강/ 누군가 흐르는 강을 구웠다. 그는 없고/ 도자기 하나만이 남아 있다. 그 아래/ 병을 떠받치고 있는 손이 있다/ 유약이 잘 발라진 손이 있다/ 강이 천천히 굽이친다.//

잠드는 동네 / 김학중
집들이 새로 들어서는 동네에 가면 잠이 늘어요./ 땅속 깊숙이 기둥을 박는 소리에/ 잠이 놀라 달아날 거라고요?/ 균열이 갈수록 잠은 더 깊어지고/ 나는 꿈을 시추하기 시작해요./ 땅! 공사장에서 달리고 있는 운동화들/ 나는 바통을 받기 위해 뒤로 손을 뻗어요./ 두드드드. 먼지를 밟으며 운동화가 넘겨주는 건/ 꺼진 손전등, 땅! 아직 집을 짓지는 않아서 잠이 늘어요./ 경비원은 손전등으로 나를 비추며 물어봐요./ 입주민이십니까? 그렇지 않아요 나는/ 그저 꿈을 꾸고 있는데요. 그렇죠. 새로 지은 집은/ 로또나 다름없어요. 땅!따다당땅!/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는 아직/ 집들을 다 부수지도 못 했어요./ 경비원은 웃으며, 에이 모르시는 말씀/ 새로 집들을 올리다 보면 옆에 있는 집들은/ 알아서 무너지기도 해요./ 아직 다이너마이트는 쓰지도 않았답니다. 어서/ 들어가 잠이나 주무세요. 주무시는 사이 집들이/ 늘어서 있을 테니까요. 땅! 시추해가는 건/ 누구의 꿈인가요? 운동화들이 모래를 밟으면서/ 달려와요. 꺼진 손전등으로 그림자들을 때리는데/ 나는 그만 잠들어 버렸어요. 새로 집이 들어서는/ 동네에서는 잠이 늘어요. 도대체 손전등은 언제/ 꺼놓았는지 모르겠지만 새로 집이 들어서자/ 환해지는 동네. 부쩍 잠이 는 사람들이 서서/ 꿈을 시추하고 있어요. 탕!/ 아직 다이너마이트는 쓰지도 않았답니다.//

저니 맨 / 김학중
그는 유망주였다/ 공을 쥘 때마다/ 세계의 심장을 움켜쥐고 있다고 느꼈다/ 심장이 담장을 넘어갈 때마다/ 모자를 고쳐 썼다/ 자신의 삶이 실점에 대한 기록임을 지켜봐야 했지만/ 그는 끝까지 배트를 잡지 않았다/ ―누구도 자신을 위해 타석에 설 수 없다고 낮게 얘기했을 뿐―/ 그리고 긴 여행은 시작되었다// 그는 이제 큼직한 여행 가방을 끌고/ 플랫폼에 서 있다/ 불쑥 내뱉고 싶던 말처럼/ 가방의 터진 겉감 사이로 안감이 비집고 나와 있다/ 그 안에 그의 여행이 온전히 담겨 있다/ 언제부터 입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는/ 바지 몇 벌과 셔츠 몇 벌/ 유니폼만이 새것인 채로 매번 바뀌었다/ 그의 짐은 매일 다시 첫장부터 쓴 낡은 일기장/ 몇 장을 뜯어냈는지 알 수 없는 일생// 자신을 짐으로 쌀 수 있다는 것이 위안인 그가/ 지금 플랫폼에 서 있다./ 열차가 들어오면 그는 곧 떠나야 한다./ 한 손은 여전히 공을 쥐고 있는 듯 둥글지만/ 그는 곧 가방을 잡기 위해 손을 펴겠지./ 공 하나를 세계의 심장이라고 믿던/ 그는 익숙한 듯 모자를 고쳐 쓰고는/ 열차가 멈추는 소리를 듣는다./ 세계를 주무를 수 없는 그의 손은/ 이제 온전히 자신을 쥐고/ 문이 열리는 열차로 들어설 것이다.// 가방의 무게에 그의 팔이 살짝 떨리는 것이 보인다.//

바벨 커피전문점 / 김확중
1/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무언가를 믿는 것이다//
2/ 우리가 만날 약속장소를 쉽게 정할 수 있는 건/ 바로 바벨이 있기 때문/ ―지하철 한 정거장마다 바벨이 있지/ 그때부터 지하철은 바벨의 연결통로가 되었다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면 당신은 곧 메뉴를 만나게 돼/ 비교秘敎의 비문을 읽듯 주문해야 한다고 투정부리지는 마/ 거기에 쓰여 있는 대로 읽지 못한다고 해도/ 일단 쫓아내지는 않아 여기는 바벨이니까/ 여기서 당신은 손님이며 주인이니까/ 당신은 곧 주인의 언어를 배우게 되겠지/ 바벨, 그것은 정말 탑이었을까?/ 매장에 틀어놓은 노래를 따라 불러봐/ ―우리가 하려는 말은 어째서 언제나 유행가에 다 있을까?―/ 당신은 이제 어떤 도시에 가도 낯설지 않을 거야/ 즐겁게 커피를 마시길 바래/ 주문은 테이크아웃으로/ 그리고 거리 아무 곳이나 컵을 버려줘//
3/ 바벨, 어디선가 그 탑은 다시 세워지지 않았을까?/ 메이커가 다르다는 건 약속의 땅 바벨을 지키는 힘/ 바벨의 간판이 바뀌어도/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그곳이 바벨임을 알지/ 사실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아무도 놀라게 하지 못해/ 입가로 들어 올려지는 커피잔들을 봐/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무언가를 믿는 것이야/ 커피맛은 거기서 거기라는 믿음. 어떤 바벨도/ 맛은 탑이 아니니까.//

강변주차장 / 김학중
그날은 견인되어 온 차도 없었다. 강변주차장 휑하니 남은 건, 주인 없는 차들뿐이었다. 밤이 되자 언 강 위로 눈이 내렸다. 강변도로에는 속도를 잃은 차들이 고요 속으로 들어가고 가로등 불빛은 길을 넓히는 적막에 발이 푹푹 빠지고 있었다. 소리들의 결빙은 점점 언 강의 무늬를 닮아갔다. 철제 경비실 밖 갑작스런 경적 소리, 결빙된 소리들 순식간에 깨져 나갔다. 일주일째 방치된 차 얼다얼다 혼자 울었다. 차창을 부수고 얼어붙은 경적을 뜯어냈다. 깨진 유리처럼 눈 내리고 짧은 호각 소리 설원으로 이울어갔다. 그제서야 바람 속에서 눈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차들이 백미러를 쫑긋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날부터 이명은 혼자 힘으로 울던 경적 소리를 자꾸 견인해 왔다. 눈 덮인 강변주차장으로 날 견인해 갔다.//

무력의 텍스트 / 김학중
어느 날 책갈피에 숨겨진 텍스트를 찾았지. 종이의 먼지에 입을 맞춘 누구에게도 도착하지 못한 입술의 텍스트. 아무 말도 적혀 있지 않은 단 하나의 입술. 숨은 시작이었지. 내가 입을 맞춘 건// 시작이 건너와 숨겨진 춤을 입술에 풀어내는/ 아주 가는/ 가늘어 무력한 입맞춤의 소리.// 그 소리 속에서 보았지. 사슬에 묶인 자들. 한 사람이며 여러 사람인. 어둠에 놓여 똑같은 피부가 된 사람들. 감시자의 눈을 피해 가끔 그들은 몸을 돌려 서로의 입을 맞추었지. 들기면 안 돼. 이건 우리의 이야기야. 우리의 시간이야. 입을 굳게 다문 채 입과 입으로 옮기던 이야기는 바닥에 가까워졌지. 바닥과 바닥에서 몸을 움직이는 소리와 입맞춤의 소리가 서로 가까워질수록 텍스트는 조용히 출렁이며 옮겨졌지. 누구의 이야기인지 몰라서 우리인 텍스트. 입으로 나누는 텍스트. 갑자기 누군가가 입 맞추는 사람을 보고 일으켜 세웠지. 그들은 강제로 입을 벌리고 텍스트를 찾았지만 아무 것도 찾지 못했어. 감시자들이 끌고 간 사람은 돌아오지 못했어. 입을 찢어 죽였다고 감시자들이 말하곤 했지만 그들은 계속 입을 맞추었지. 떠나간 이를 기억하는 울먹임이 입술에 주름을 깊게 했고 사슬은 바닥에 끌려 쇳소리를 냈지만 텍스트는 이어졌어. 들키면 안 돼. 그들의 텍스트는 그렇게 이어져왔지. 자신들을 묶은 사슬이 늘 여기에 있었음을 기록하는 빈 텍스트의 입술. 입술로 이어온 사슬의 춤. 춤이 빚어낸 사람과 사람. 사람의 텍스트. 너구나. 바닥에서 바닥으로 바닥의 소리로 여기까지 왔구나. 어디에도 가두어지지 않고 여기까지. 너라서// 여기 와서 다시 시작이구나./ 시작이 입술이라니./ 나의 입술이 바닥에 가까워진다.// 누가 여기에 이 텍스트를 두고 갔는지/ 도서관의 그 누구도 알지 못하겠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기에 여기 다시 텍스트로 남겨질 것이다./ 나는 나의 입술을 포개어 텍스트에 숨겨 두었다./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하고 다만 도착하는 춤일 뿐이라도/ 텍스트는 숨겨진 채 이어져 가고 있다.//

수의 텍스트 / 김학중
물이 쏟아진다/ 바닥으로 파고드는 수직의 빛줄기/ 물이/ 쏟아져야 보이는/ 물의 높이/ 물빛의 나신이 만드는 삼각비/ 흙이 젖는다/ 젖어서 뭉쳐지는 물과 흙의 비/ 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의 눈이 그 비를 본다/ 수학자들. 사물의 추상을 풀어내는 자들/ 모든 물질의 목 안으로 파고들어/ 그 안에서 흘러나간 추상의 물줄기를/ 차근차근 더듬던 자들/ 그들의 옆에서/ 그 빛의 핏줄이 남긴 흔적을 뭉치고 펼치는/ 말없는, 여자들의 손들/ 그렇게 점토판을/ 오래오래 빚은 여자들이 있었다/ 수학자들이 점토판이 마르기 전에 그들의 눈으로/ 뽑아낸 수들을 여자들이 빚어 넣는다/ 점토판과 점토판 글자들/ 수의 이름들// 물이 흐른다/ 흐른 물이 잊혀진다// 수의 이름들과 수학자들의 이름은 모두 사라지고/ 수를 이루는 점토판만이 남았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점토판이 몸인 나신의 여신들만이 남았다// 수는 그녀들과 분리되지 않았다.//

물고기 텍스트 / 김학중
물고기들의 정거장이 있따/ 누구도 정거장이라 생각하지 않는/ 여름의 빛이 도착하는 파도/ 물결 위에 잠깐 정거장이 선다/ 수면을 흔드는 물고기들의 은빛 비늘/ 그 빛으로 잠시 열린 정거장을 이루는 고기 떼/ 정거장 자신인 물고기들/ 다른 언어로는 읽어낼 수 없는 물고기 정거장에서/ 물고기들은 완성되지 못할 기호를 그린다/ 기호 속을 헤엄친다/ 쓰고 지우고 비추고 멈추는 순간순간의 텍스트/ 거기가 세계의 끝이라는 걸 알까/ 세계는 그때 얇은 피부이며 물이겠지/ 잠시지만 세계가 자신을 드러내는 물의 대기/ 모든 기호는 그렇게 묶여 있는 정거장일지도 모른다/ 물고기들이 바쁘게 그 순간의 정거장을 열고 닫는다/ 어떤 언어도 수확하지 않는 것이 세계라니/ 누구도 먹이지 못하고 잠시 멈추었다 떠나는/ 떠나기에 풍성한 살의 신호들/ 거기에서 모든 언어는 헤엄쳐 이별한다/ 가끔 그쪽으로 손을 흔드는 소녀들이 있다/ 건너가지 못하는 수평 쪽으로는/ 손을 흔들어주어야 이별할 수 있다는 걸/ 그 소녀들만이 알고 있는 걸까/ 바닷가 어느 언덕 아래를 지나가는/ 버스의 창문은 그래서인지 빛에 조금 젖어 눈부시다/ 소녀들은 물고기의 눈처럼 물을 본다/ 파도는 정거장을 세운 빛으로 정거장을 허문다/ 물거품을 맞으며 다시 수심으로 돌아가는/ 은빛의 지느러미들/ 버스는 서지 않는 버스의 차창이 빛나고 있다/ 손을 흔든 소녀들의 노트에/ 두 마리의 물고기가 그려졌다//

해부의 텍스트 / 김학중
오늘은 내세를 믿지 않는다./ 오늘은 해부를 배운다./ 해부자들은/ 현재를 사는 사람들을 위해 죽은 자를 해부한다./ 날카로운 메스가 살을 절개한다./ 처음으로 살의 내면이 조명등 아래 열린다./ 살은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과거의 사인을 조용히 서로 주고받는다./ 사인이 상당히 빨리 진행되었군요./ 그들의 진단은 능숙하다./ 그들의 눈은 길을 잃지 않고/ 살이 감싸고 있는 장기들 사이를 오간다./ 여기. 바로 여기가 치명적이었던 거군요./ 그가 부랑자였다는 것은 해부에 고려되지 않는다./ 길을 잃은 생은 이미 오늘이 아니므로. 사인에서 빠진다./ 몇몇의 수련의들은 이 진단과정이 서툴다./ 이를 지켜보던 그들은 조용히 커튼 뒤로 가/ 죽은 자의 살이 자신들에게 걸어온 말들을 뱉는다./ 뱉어지지 않는 말만을 구토할 수 있다./ 이것이 모두 과거이므로/ 과거의 사인이므로 구토한다./ 구토가 그들의 오늘을 구한다./ 해부가 끝나면 차가운 해부대 위의 살이 꿰매진다./ 살아 있는 고독이 거기에 놓인 채 봉인된다./ 불타는 화로 속으로 사라지는 해부의 텍스트./ 자신을 다 내어주고도/ 살은 해부되지 않은 채 오늘을 마친다.//

페이퍼 컴퍼니 / 김학중
그는 종이를 접는다. 출근길이라고 관찰자에게 손짓한다. 그는 먼저 종이를 접어 회사를 만들었다. 이름을 써주면 간단히 완성되는 회사. 그 회사를 위해 유리병이 필요하다. 회사는 투명한 관을 좋아하니까. 그는 그 대신 종이학을 출근시키기로 하고 회사와 계약을 맺는다. 주인도 주인의 계약을 맺어야 하니까. 그렇게 출근을 하기로 한다. 다만 종이학은 그가 주인인 줄 모른다. 그가 원하는 모양으로 접은 종이학이므로. 그래야 한다. 종이학들이 출근하는 커다란 유리병을 본다. 오늘 하루를 위해 종이학을 접어 그 병에 넣는다. 종이학의 개수는 그의 마음이다. 학이 출근한다. 날마다 출근하는 학들. 학들의 고개는 순종적이다. 그래도 목은 꼿꼿하도록 잘 접어준다. 그래야 멋진 학이니까. 유리병에는 층이 필요했는데 일단 급한 대로 아무렇게나 넣는다. 대부분의 회사가 그렇듯이 다만 유리병이면 된다. 어떻게 놓여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잘 보이면 된다. 유리는 반짝인다. 출근이 끝나면 뚜껑을 덮는다. 뚜껑의 상단에는 종이를 접어 만든 회사의 이름을 잘 보이도록 적어준다. 그러는 사이에 보니 학들은 아무렇게나 엉켜있다. 엉켜있는데도 층이 생겨있다. 종이학들인데도 층의 무게가 있다. 어떤 종이학은 위로 올라오기 위해 조용히 발버둥치는 중이다. 흔들어본다. 아무렇게나 더 섞이도록. 그 안의 모양을 보니. 재미있다. 그는 그게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해본다. 흔든다. 순종적인 고개를 지닌 종이학이지만 부리는 날카롭다. 흔들면 그것은 서로를 공격하기도 한다. 유리병은 그 모든 것이 잘 보인다. 다만 유리병 안의 종이학들은 볼 수 없는 흔드는 힘이 그것을 만들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회사니까. 폭력은 알려지지 않는다. 다만 이 모든 걸 감내하며 살아야 한다고 유리병 안에서 학들이 말할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그것을 잘 한다. 학들은 똑똑하다. 그들은 질서를 만든다. 그래서 그는 학에 대해서는 다른 고민을 하기로 한다. 학들이 유리병을 가득 채우는 날이 곧 올 텐데. 그때에는 좀 덜어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유리병이 예쁘게 보여야 할 테니까. 그는 선반 위에 유리병을 놓는다. 그리고 시선을 옮겨 빈 유리병을 바라본다. 그래 아직 할 일이 남아 있군. 그는 종이를 꺼내고 잠시 이름을 고민한다. 그가 회사라고 이름을 쓰면 그것은 회사가 된다. 그가 시작한 이 일은 관찰자에 따르면 매우 병적인 모습으로 보였지만 놀랍게도 현실이 되곤 했다. 처음에는 출근할 곳을 만들기 위해 시작한 놀이었다고, 그는 주장했다. 관찰자들은 그에게 거리를 두었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 그의 숭배자가 되었다. 그는 㰡”페이퍼 컴퍼니―회사의 기원㰡•이라는 유작을 관찰자들에게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관찰자들은 오늘도 그의 유작을 읽으며 종이를 가까이에 두고 있다. 그들은 종이 위에 쓰고, 무엇보다 종이를 접는다. 그들에게 이 종이는 투명하다. 종이는 종이에 쓰는 것을 읽지 못하므로 종이다. 그들은 그 종이를 접을 때에만 잠시 고개를 숙인다. 학의 모양이다.//

마트 / 김학중
세계를 번역하면서 마트는 시작했어요. 여기에 실존하는 수많은 신의 얼굴은 우리의 이름으로 통합될 수 있어요. 그래요. 그것은 당신의 심장의 무게를 다는 표정입니다. 가격이라고 편리하게 부를 수도 있겠네요. 피라미드 형태가 세계의 상징이 된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지요. 계층의 어디에 속하든 간에 당신은 마트 안에서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신의 친절한 표정을 보세요. 당신이 죽음의 법정 앞에 설 때까지는 늘 반갑게 인사할 거예요. 그것이 이 세계를 주관하는 법의 표정이라고도 할 수 있죠. 그렇다고 이곳에 오는 일이 딱딱한 법무를 보는 것이라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즐기세요 이 일과를, 세계에 입장하는 사소한 일상의 사건들을. 물론 이 세계에 입장하시려면, 수납 먼저 하세요. 당신은 회원이니까요. 이곳이 야전병원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놀라지마세요. 여긴 기막힌 쇼핑몰입니다. 아주 거대한 창고의 모습이죠. 층층이 놓인 것은 모두 당신의 상품입니다. 그것들이 진열된 모습이 차곡차곡 쌓아 놓은 병상으로 보이는 것은 당신의 과장이에요. 마트. 모든 것은 사실 질병이죠. 우리는 질병마저 사고 팔 수 있거든요. 거래가 질병의 일종이라는 것을 폭로하는 것은 이제 진부합니다. 마트. 그래요. 구입하고 싶으십니까. 지르세요. 바로 그것에서 모든 덧없음이 시작되지만, 이 투명한 덧없음이 말하는 건 간단하답니다. 수납부터 하시죠. 아프지 않아요. 입장은 값싸게 바꿀 수 있지요. 당신이나 나나 이 마트의 입장입니다. 입장의 바깥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고, 이 연결에서 끊어질 수 없어요. 마트의 번역은 모든 연결이며 단일한 얼굴이죠. 이 지상에서 최고의 부자도 마트의 법 앞에서는 모두 평등합니다. 마트의 주인은 마트니까요. 그/그녀는 사자의 서를 들고 저울의 무게를 재듯이 우리가 지불할 수 있는 잔고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이 세계의 마지막까지. 우리는 다만 투명한 천장을 꿰뚫고 도달하는 저 빛의 은총 속에서 쇼핑할 뿐입니다. 마트.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회원입니다. 수납을 마치셨으면 회원님 이쪽으로 오시죠. 저기 거대한 카트를 끌어 보세요. 당신을 거기에 수납할 수도 있는 카트입니다. 즐기세요. 마트를. 그와 그녀의 모든 얼굴을 한 신의 이름을 부르세요. 마트의 이름에 대한 기원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신의 이름에 대한 오해라고 주장하시는 것도 포함해서. 그것이 마트의 약관입니다. 이 지상의 끝까지 마트의 법이 통치합니다. 당신의 입장을 축하합니다.//

처음의 노래로 돌아가려 하네 / 김학중
끝에서 끝으로 이어지는 길 위에서였네/ 낯선 이의 목소리가 미지를 열 때가 있네/ 처음 듣는 노래의 첫 소절에게/ 마음을 모두 내어주듯이/ 당신의 부름에 나는 그대를 향해 서네/ 그 순간 당신은 그대의 목소리로만 열 수 있는 문을 여네/ 그것은 이미 나의 문이 아닌 낯선 이의 문/ 나를 닮았으나 나를 벗어나 있는/ 미지의 빛으로 밝아진 문턱에서/ 경첩이 펼쳐지는 소리를 듣네/ 놀랍게도 그 안에 그대의 모습이 있네/ 이미 와 있었던 모습으로/ 내가 그대를 안다는 것이/ 내 삶의 유일한 비밀이라는 듯/ 비밀은 온기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이여/ 이 모든 다정함은 이미 그대의 것이네/ 다시 있을 낯선 곁의 온기여/ 가까이에 오는 그대를 나는 부르지 못하고/ 당신은 먼 곳으로 떠나는 모습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네// 미지의 문은 끝까지 닫히지 않은 채로/ 흘러나오는 온기에 목소리를 맡기네/ 미지는 그렇게 처음의 노래로 돌아가려고 하네//

가족들은 뷔페를 먹는다 / 김학중
가족들은 뷔페를 먹고/ 비워진 접시들은 대화를 한다/ 음식찌꺼기와 얼룩들로 보내는// 접시와 접시 사이의 친밀한 신호들/ 그 사이 가족들은 서로의/ 위치를 확인한다 그것은 말로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일. 똑 같은 모양의 접시들은/ 가족보다 가족 같아서/ 뷔페의 직원들은 가족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빈 접시들을 치워간다/ 접시들은 서로의 얼룩을 껴안으며/ 포개진다 가족들은 각각/ 테이블에서 일어나/ 새로운 접시를 찾아들고/ 자리에 앉아 담아온 음식을 먹는다/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들은/ 점점 빨리 접시를 비우고/ 서로의 눈에서 서로를 비운다/ 뷔페의 다양한 음식을 찾는 가족들은//

바탕색은 점점 예뻐진다 / 김학중
거리는/ 낮의 지평선으로/ 빛이 뿌려지는 이마/ 모든 색깔이 제 모습을 드러내도록 이어지는/ 순간의 바탕색/ 길 위에서 나는 뒤돌아서 너를 보고/ 보는 것은 깊이를 가질수록 겹겹이/ 두드러지는/ 두드리는/ 지금을 기다려왔다는 걸 느끼는 간격/ 바닥은 빛의 온도를 다 품지 못해/ 밝아지고 밝아지며 바스락거리고/ 너의 발걸음은 조금씩 숨겨둔 리듬를 풀고/ 빛의 색깔로 거리는 빛나고 빛나는 여름이고/ 여름의 빛/ 조금은 나의 빛/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빛남/ 환한 머릿결의 너를 만지는 거리의 지금/ 여기의 모든 것이 배경이 되도록 기울어지는 긴 바탕색/ 여름의 빛 속에서 다가오는 너를/ 나는 아직 무어라 부를 수 없어서/ 미소는 점점 무어라 부르고 싶은 사람의 마음으로/ 펼쳐지고/ 펼치고/ 뒤로 손을 내밀면 가닿을 수 있을 것 같아/ 너는 안 그런지 몰라도 바탕색은 점점 예뻐지는 걸/ 따라오지 않는 시간들에 장난을 걸면서 점점, 너는/ 너의 걸음은/ 가까워지는데/ 아름다워지는 순간들은 순간으로 저물어/ 거리의 바탕색으로 멀어져 간다/ 빛은 그렇게 자기 자신으로 점점/ 하늘로 이어진다//

잠의 화원 / 김학중
꽃들은 재방송을 보며 졸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도 아무도 깨지 않았다/ 주인은 꽃들이 흘리는 잠꼬대에 취해/ 꽃들보다 더 깊이 잠들어 있었다/ 손님 몇이 맙소사! 하고 발길을 돌렸다/ 나는 맙소사는 신의 이름을 호명하는 일이라고/ 나직이 농담을 해보았지만 점점 깊어가는 잠에/ 취한 꽃들은 꽃잎이 더 벙글어졌다/ 나는 꽃다발을 선물로 사기 위해/ 꽃들의 잠과 함께 머물러야 했다/ 천장의 형광등은 새것이라 밝았지만/ 거짓말처럼 눈을 뜨고 자고 있었다/ 꽃병들 옆에 고요히 꽂혀 있는 햇살을 보니/ 지구의 자전을 보고 있노라 지루해진 태양도/ 빗줄기를 흔들며 잠들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옆집 빵가게 에서 풍겨오는 빵냄새에/ 구름이 부풀고 가로수들은 하품을 하느라/ 기지개를 켰다가 그대로 멈추어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장미꽃이 아니라/ 꽃들의 잠을 선물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선물할 수 없는 것을 준 꽃집에서/ 광막하게 넓어져가는 작은 잠들의 화원에서/ 꽃들의 잠과 깨어나지 않는 주인의 친구가 되어갔다/ 끝내 지갑을 꺼내지는 못하였다//

엄마가 태어난 날 ㅡ우리 엄마 1 / 김학중
아버지가 집을 나갔다./ 장애가 있는 두 아들 키우기 힘들다고/ 고아원에 보내자고 하던 아버지와/ 격렬하게 싸우던 어머니/ 그날 이후 아버지는 몇 주 만에/ 비디오가게를 몰래 팔아 치우고는 몰래 사라졌다./ 아버지에게 가게를 매입하면서 사기당했다고/ 가만 안 두겠다고 집까지 찾아온 남자는/ 영문을 몰라하는 나와 동생/ 파르르 떨고 있는 엄마 앞에서/ 하던 말을 멈추고 오히려 되물었다.// 아니, 정말 아무 것도 몰라요?/ 여기 나보다 더 사정이 딱한 사람들이 있네// 더는 아무 얘기 못하겠다는 듯/ 잘 있으라고 말하며 남자는 돌아가고/ 우리 셋만 덩그러니 남은/ 반 지하 집 마루에서// 엄마는, 괜찮아 우리 살 수 있어/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우리를 안아 주었다./ 아마도 그날 부터였을 것이다./ 엄마가 웬만해서는/ 어떤 일도 포기하지 않게 된 날이/ 내가 아는 엄마가 태어난 날이//

시간의 필사자 / 김학중
시간은 몸도 없이 변신을 한다/ 변신을 하면 시간이 되고/ 그것은 시간의 몸이 된다/ 그 몸을/ 부를 수 있는 이름을 모르니/ 거기에 있다// 오랜 후에/ 누군가는 그 몸을 시간의 필사자라고 했다// 어느 날 창조되었는지 알 수 없는 시간/ 그 시간을 불러내기 위해 필사자들은/ 해와 달에서 베껴왔다/ 기록의 문자는 점점 뽀족해진다/ 매일 낡아간다/ 필사자들의 몸은 시간에게 주어지는 것/ 그들은 시간을 필사하면서/ 늙고, 오래전의 인간보다/ 더 빨리 늙어간다// 필사란 그들을 시간이 가져가도록/ 그들을 시간으로 만들도록 허락한 것이다//

시계탑 이야기 / 김학중
광장에 바깥이 세워지고 시계탑의 시계가 멈추었다.// 멈춘 시간들이 함부로 버려지고 있다/ 자신이 만든 시계를 분해하고 있는 시계공/ 무심하다. 누군가 멈춘 시간 속에 침몰하는 사람들을 구하려고/ 몸을 던진다. 누구도 그들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사람들은 천천히 시선을 시계공 쪽으로 옮긴다/ 그가 세운 시계탑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의 함성에 시계가 놀란다/ 아무도 안아주지 않던 시계의 거대한 팔은 그날/ 시간이 멈춘 곳을 꼿꼿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시간 속에서 마치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는 듯이/ 서로를 안고 환호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긴 했을까/ 그 자리에서 누구도 시계공을 찾지 못했다// 시간의 바깥에서 시계공은 톱니가 빠진 시간의 이빨을 다시 맞추고/ 천천히 시계를 조립했다// 바깥이 천천히 지워졌다// 흩어지는 사람들은 서로의 팔로 서로를 가리키고/ 시계탑은 그들의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바다가 기다린다 / 김학중
또 밤이다. 세계는 익힐 수가 없다. 이걸 배우라고 나를 놓아두다니. 다 그만두고 싶은 시간은 비보다 많이 온다. 계절을 계절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쉬어야한다. 익히기전에 쉬어야한다. 스승은 스승도 없이 말한다. 이걸 도대체 누가 만든거야. 다 익히다니, 네가 그러고도 손이냐 고함은 귀를 통과하지 않고 붕괴한다. 저건 어떤 세계를 세울 수 있는 걸까 한 그릇만 먹고 쉬고 싶다. 나는 이게다다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두워지는 길로 모는 바다는 밀물이 아니라서 오지 않는 휴가처럼 흔들어 돌려보낸 달력들아 너마저 뜯어내고나면 나는 가벼운 손이 되겠지. 또 손이다. 이것이 무엇을 만들 수 있다니. 그게 축복인지저주인지 손은 알리가없다. 또 손이다. 밤이 무엇인가를 만들 수있다고, 누가그래. 밤이 그래, 사람들은 왜 여기에 밤에만 오는 거지. 바다라고 부르는 데는 밤에만 열리는 문인가. 아니 낮부터 밤인가. 거기 무엇이 있다고 저렇게들 신나게 소리를 지를까. 소녀들처럼 즐거운 날들은 왜 그를 손에만쥐어지는가. 안녕하세요 누가이따위로 세계를 만들었나요. 물어볼 수 있는 곳을 알려주세요 알려주면 한방 먹일테다. 일하는 밤이다. 바다에 가면 물어볼 수 있을 것도 같은데, 바닷가라서 바다에 갈 수가 없다. 바다에서 산것들을 손본다. 손질한다. 손은 자꾸 거두어간다. 이걸 배우라고 나를 놓아두다니, 이렇게 살라고 바다에 두다니 생선 같은 손이 세계를 익힌다. 가끔 손도 익힌다. 가끔 졸다가 스승도 스승을 익힌다. 사이좋게 그때는 요리다. 소녀들은 익는 냄새를 맡고 잠시 환해졌다가 지나간다.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 밤이다. 무슨 일을 하는지 알수 없는 밤이다. 또// 손이 세계를 익히는 동안 소녀들은 바다로 떠났다. 바다가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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