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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리산 시인

by 부흐고비 2022. 5. 30.

리산 시인
2006년 《시안》 신인상에 〈장미꽃 무늬가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진단서〉 외 9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 『메르시, 이대로 계속 머물러주세요』가 있다.

'센티멘털 노동자동맹' 동인

 




인생이 이렇게 어두워서야 쓰겠나 싶어 / 리산
어두워지는 행성의 저녁에서/ 어두워지는 반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 잔 차를 끓이고 있노라면// 밤은 비단처럼 부드러워지고// 한 세월 잊었던 꿈처럼// 지구의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이며/ 불곰들 연어를 잡던 풀이 무성한 개울 생각// 있었지 모든 것이 있다고 생각한 날이 있었지/ 모든 것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날이 있었지// 밤새 찻물은 끓어오르고/ 어두워지는 반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인생이 이렇게 어두워서야 쓰겠나 싶어// 어두워지는 반도 옆에/ 등불을 걸어둔 적이 있었지// 고드름이 다 녹을 때까지/ 지구의 처마 끝에 서 있던 적이 있었지// 인생이 이렇게 어두워서야 쓰겠나 싶어//

검정은 색깔이다 / 리산
시간을 읽는 방법으로는 4997개의 길이 있지만/ 그건 완전히 다른 식으로도 할 수 있다는 의미다// 나는 웅크린 고양이의 눈을 들여다본다/ 새벽 세시 낯선 고도// 상처받은 채로/ 가책도 없이// 지난밤에는 죽은 사람들의 손톱으로 만든 배를 타고/ 긴 불면의 강을 떠다녔다/ 처녀들의 노래를 듣고 싶었는데/ 길 잃은 양과 말을 위해 나 혼자 노래를 했다// 두고 온 것도 기다리는 것도 없지만/ 귀환하는 국경수비대처럼 산림감시원처럼/ 얼굴을 가리고 황금빛 사막으로나 가고 싶다// 일람표와 통계로 가득 찬 서랍에 못질을 하고/ 작은 황조롱이 하나 머리 위에 띄우고/ 그곳으로 가면 불면이 완성될 수 있을까/ 사라져버린 외로운 창자를 만날 수 있을까// 바람은 불어 사막을 서성이는 차도르가 펄럭이고/ 검은 눈동자 속 주홍빛 허벅지/ 흥청이는 바람을 다 먹을 수 있다면 좋겠지/ 아무도 배가 고프지 않도록// 먼 산에 눈이 쌓이면 독사의 입 냄새가 약해지고/ 새들의 가슴에 살아남은 들꽃의 씨앗이/ 모래산을 넘어 먼 곳까지 날아간다// 몇 번의 그믐을 더한 어둠/잊혀진 도시를 수십 번 뒤덮을 모래 먼지 속에/ 뒤적뒤적 이름들을 새겨 넣으며/ 불면의 시간인지 불멸의 시간인지나 탕진해야지// 꽃송이 팡팡 터지는 화승포를 쏘아대며/ 10월의 혁명이 가고/ 11월의 혁명이 온다// 상처받은 채로/ 가책도 없이//

황산의 먹 만드는 사람 / 리산
산벚나무 그늘 밑 밤이 있었나/ 무엇인가 내게 안겨왔던 것도 같은데/ 우리 마냥 희었던 그때// 괜찮다 다 괜찮겠지/ 나는 내 별자리 아래 서 있을 뿐이니/ 바람소리 빗소리가 그리우면/ 꺼지지도 살지도 않는 불씨를 뒤적이며/ 밤을 잊었네// 첩첩 어둠이 밀려들 텐데/ 핏빛 달빛 웃자란 열매들 떨어지고/ 송화골짜기는 구름바다 속으로 사라지네// 바람이 불지 않아도 나무가 흔들리는 건/ 산이 우는 까닭이지/ 산울음 울음소리 나무 그늘 밑을 맴돌면/ 산벚나무 꽃잎에 먹먹히도 물든 내 먹빛들 있음을//

양계(兩界)의 금(禁) / 리산
거문고 여섯 줄을 다시 매어 비단주머니에 넣고/ 지난봄의 노래 한 수를 생각하며 잠긴 문 앞을 서성였네/ 다 부르지 못한 노래는 산버들 울타리 아래 묻으니/ 소멸의 즐거움에 함께 할 미물들이여 안녕히// 누구는 귀로라 하고 누구는 출행이라 일컬은 외길을 가네/ 어둠은 급히도 찾아와 길 위에 당도하겠지만/ 막 이울기 시작한 석양빛은 눈이 부셔라/ 흐려진 등 뒤로 내리는 그렁그렁한 눈발들/ 애이불비 애이불비 내 발자국을 지우네// 눈 덮인 언덕 너머엔 감자꽃이 만발하다 했지만/ 그 멀리로 편지를 쓰는 밤이면/ 밤하늘과 맞닿아 나부끼는 희디 흰 갈기/ 아득하여라 먼 바다 파도 같아만 보였네// 당신을 사모하기 위해 나는 더욱 먼 길에 서 있으려니/ 용서하길 당신이 성 안으로 돌아온다면/ 나는 당신에게 더 이상 편지를 쓰지 않으리//

오류 / 리산

모든 존재는 오류로부터 생겨난다. 오류로 가득 찬 불꽃이 있었고 사물이 탄생했다// 불꽃이 일렁거리자 사물들도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너도 그렇다/ 내 시선의 불꽃이 너의 실체를 만들었다. 고요한 밤과 침묵의 실체인 너// 내 시선이 사라지면 고요한 밤도 침묵도 우주의 가장자리로 물러나 가장 깊은 심장 속으로 침몰할 것이다// 침몰이 완성하는 부재, 부재가 완성하는 텅 빈 대륙에 너는 있다./ 빛의 한가운데, 빛의 사서함 속에 너는 수취인 불명의 편지처럼 꽂혀 있다// 침묵이 적요함의 바람을 타고 나뭇잎 대륙을 지나가 당도하는 곳, 공기들이 희박해지고 희박한 그리움이 삼각 김밥처럼 딱딱하게 식어버린 곳에 너는 있다. 있음으로써 너는 완고하게 침몰을 완성해 간다// 부재가 완성하는 궁극의 광활한 극지에 한숨처럼 너는 있다, 침몰과 우울의 제왕인 너에게 나는 피투성이 햇살을 퍼나른다// 필경사의 두 번째 거리에서 내게로 불어오는 무한의 바람을 느끼며 나는 중얼거린다// 오류에서 시작한 문장들이 무한의 백야를 질주한다// 오류로부터 시작한 문장이 강을 건너 처음 시작되는 벌판에 발을 내딛는다. 벌판을 다 횡단할 즈음 오류의 안개는 걷히고 햇살 환한 문장의 정오에 당도해 무한을 향해 흘러갈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오류로부터 시작되었다. 무한의 오류, 무한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협잡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협잡꾼 / 리산
풍각쟁이들이 노래하며 지나가네 길 잃은 것들 허방을 향해 손을 내미는 밤 나는 일찍이 우수리 강 이북에 살던 사람 뒷산 고사리만 먹기 지겨워 백이숙제가 앞뜰에 지천인 푸성귀를 먹고 채식주의자의 기원이 된 것도 다 보았지 나는 흐르지 않는 샘물을 먹고 목울대에 울혈이 맺힌 사람 시냇물이 끊어진 언덕 나무와 나무에 기대 실을 뱉어 내던 여자 무엇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들은 결절이 되었네 길 잃은 것들 허방을 향해 손을 내미는데 뒤집을 마지막 패도 없이 어디로 가나 저녁 어스름이면 눈물겨운 불빛들이 돋아났지만 어디로도 돌아갈 곳은 아니었네 아침에 진 꽃 저녁이면 다시 피고 서쪽 문 아래 오월 잠자리는 삼일을 죽어 푸른 진주로 산다는데 천지 팔방 해지는 곳 북쪽의 아주 먼 곳// 천개의 거짓말을 모아놓고 하나의 비밀이라 써보았지 먼 곳에서 밀려온 유빙이 생을 다 하는 밤 시베리아 붉은여우가 제 냄새를 눈펄에 묻히며 마지막 벌판을 지나가네 그 여자가 가진 천개의 거짓말을 헤아리는 동안 예언서는 새로 써지고 제단의 불 위로 죽은 자들의 뼛가루는 흔하게 내려앉았네 천개의 거짓말을 다 모은 나는 언젠가 그 여자를 만날 수 있을 지도 모르지 천지에 우글거리는 그 여자 어디서든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네 그럼 나는 나무와 나무를 두드리며 그 여자 없는 강가 마지막 눈물이나 길러 가야지 눈 멀어 눈 멀어 그 여자 마자막 거짓말이나 돼야지//

건초수레는 지나가고 / 리산
간신히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고 너는 말하는구나/ 아직도 옛집 화덕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고 이야기 해 주렴// 붉은 매 한 마리가 산도화 가지 위에 앉아 있는 꿈을 꾸었지/ 우리의 새가 어둠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꿈// 너는 곧 북서쪽에서 폭풍우가 온다고 말하는구나// 나는 네가 사막과 초원을 지나온 눈과 바람의 이야기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시베리아 황새들과 사다새의 노래를 들었어요’ 라고 이야기 해 주렴// 때때로 옛 정원 비가 내리고// 산도화 가지 위 붉은 매 한 마리가 생각나// 어둠속에서 나를 바라보던 새//

무질 / 리산
칠월의 글을 쓰고 싶어/ 빈 공과대학 도서관의 사서가/ 사서 임무를 회피하려/ 학교에 낸 병가사유서의 병명은/ 심장 노이로제를 동반한 신경쇠약증/ 아나키스트적 방식에 의해 내가 낸 병가사유서는/ 친절한 반려통지문과 함께 반송되고/ 지진으로 무너진 옛 등대 사이 북치는 뜸부기 숲/ 색색의 떠돌이 새 떼를 따라가는 여행은/ 책속의 주인공들이 하는 취미생활/ 내가 주머니에 한 병의 아니스주를 꽂고/ 일천구백이십 년대 켈커타항/ 갈매기 울음소리를 복기하며/ 그리스 아프리카 중동지역 해양 무역원인/ 오늘의 첫 고객을 맞이하고 있을 때/ 돌풍처럼 왔다가 불빛처럼 너는 떠난다/ 끝이 나지 않는 이야기/ 마지막 문장 따위는 주목하지 마세요//

무사 / 리산
북쪽 호숫가 백문동 소리도 없이/ 흰 옷을 입은 사람이 나무 밑을 지나가니 열매들 또 지는구나.// 달빛 아래 창포잎에 맺힌 이슬로 눈을 씻으면/ 한낮에도 가느다란 별빛이 보여/ 저기 잃어버린 새끼를 찾아 철책을 넘어가는 염소 치는 여자들// 밤거미들 이파리마다 집을 짓고/ 담장 밑에 심은 꽃나무도 인적을 찾아 기우는데/ 혼자 북을 치며 술잔을 기울이네.//

장고 라인하르트氏 / 리산
유리병을 만드는 여자가 처음 이 거리에 왔을 때/ 그 여자의 집 벽과 내 집의 벽에 빨랫줄을 이어 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내 일의 전부였고 아직 어두워지기 전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간다// 허공 속에 오래 머물며 이쪽과 저쪽의 줄을 이어주고 싶지만/ 어둠이란 너무도 쉽게 줄이란 줄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줄이 보이지 않는 밤이면/ 자화 수분하는 꽃과 휴화산과 자웅동체에 관한 필름을 보고/ 그레고리력과 혁명력 농부와 유목의 달력에 관한 글을 읽는다// 그렇지만 자꾸 배가 고파// 어딘가 따뜻한 음식을 파는 식당이 있으면 좋겠네/ 어딘가 밤새 환한 거리가 있으면 좋겠네// 배가 고파지면 따뜻한 음식을 하는 식당에 들러/ 오이와 부추를 넣은 만두를 먹거나/ 낙지와 당면을 가득 끓인 뜨겁고 매운 국물을 먹어야지// 가끔은 내가 좋아하는 곡조를 흥얼거리며/ 카페의 한구석에 앉아 있을 수도 있겠지// 단지 그뿐이다// 어딘가 밤새 불을 켜 놓고 있는 거리가 있다면// 바람이 부는 밤이면 누군가 떠난 창문 저편/ 아직 거둬들여 지지 않은 줄들이 허공에서 운다// 검은 레이스 모자를 쓴 여자들이 대롱을 불어/ 곧 깨어질 유리병을 부풀리는 동안// 허공에 매달린 것의 흐느낌을/ 보이지 않는 것의 뒤척임 소리를/ 나 혼자 다 듣는다// 내가 불멸인가//

잉크병 속에 남아있는 전나무 꿀 / 리산
바람이 분다면 더 좋을 것이다/ 돛이 달린 배와 자동차/ 얼마나 놀라운 장치와 속력으로 달릴 수 있는지 알고 싶다면/ 처음부터 목적지는 없이/ 약간 떨어진 위치에서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천둥소리 비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 그토록 오래/ 눈먼/ 조심성 없는 여행자가 되어/ 동굴 속에 잠든 파수꾼을 지나/ 깊은 진흙탕/ 잠시 커튼을 내리고/ 뭉치고 구겨지고 주름지고 포개지고 할퀴고/ 두 개의 악기가 같은 음을 내려 애쓸 때//

러기드 파이터 / 리산
누가 수건을 던져야 이 게임을 끝낼 수 있을까/ 너덜너덜한 글러브 속 손가락은 부러지고/ 찢어진 가죽 사이 피가 스며 나와/ 끄티 보이지 않는 광막한 링 위에 서서/ 하루에도 몇 번식 해가 지는 걸 봤어/ 등 뒤에서 슬그머니 떠올랐다 정수리쯤에서 급하게 지던 태양/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두 발자국 뒤로 밀리는건/ 이곳에 늘 높새바람이 흉흉하기 때문이지/ 비를 뿌리지 않는 메마를 바람/ 가슴팍을 떠밀며 보이지 않는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울컥울컥 흰 수건 위로 토해지는 검은 담즙들/ 발목을 담그고 다만 서 있는 거야/ 먼 데서 불어온 바람 저 혼자 깊어지면/ 차가운 비를 몰아오기도 한다는 풍문에 기대어//

오드아이 / 리산
우리는 말을 했다 평생토록 뒷마당을 서성이며 허블망원경만 들여다본 과학자에 관해 육 년간이나 계속되었다는 화산겨울의 암흑과 칠천사백 년 전 해안선을 따라 이주해 온 순다열도의 원주민에 관해 공과 새와 순록의 소리를 내며 추는 춤과 자정이 돼서야 어두워지는 여름 툰드라, 벼락의 빛으로 나아가는 한밤의 항해에 관해 우리는 말을 했다/ 우리는 말을 했다 칼에 꽂힌 양고기를 베어 먹느라 주둥이가 다 해진 늑대와 피 묻은 입술을 닦으며 생각하는 늑대의 먼 전생, 왕궁의 성벽 아래 아무도 믿지 않는 계시의 말을 읊조리던 무녀의 비애에 관해 입술에 입술을 맞대고 맹세하던 이방의 말들에 관해 칠만 년 된 언어의 마지막 구사자인 인도인 노파와 그 죽음에 관해 사기와 조개에 이름이 적힌 자는 추방당한다는 패각추방에 관해/ 우리는 말을 했다 패치워크로 감싼 주전자에 두고두고 따뜻한 차를 내려 마시며 우리는 말을 했을 뿐인데 가슴에 꽂힌 칼날들은 다 어디서 온 걸까 이건 또 무슨 풀지 못한 난수표처럼 우리가 깨닫지 못한 채 사멸돼가는 고대의언어인걸까 우리는 말을 했다 서로 다른 구석을 그리워하는 멧새떼처럼 서로 다른 곳에서 온 점령군처럼 우리는 말을 했다//

혁명 에튀드 / 리산
가족이 없는 우리는 우리가 소명을 매일 밤에 소란과 만취 이 도시는 그 성벽 안에 사회 계혁을 절대 아홉 개의 강의는 해로운 것을 무절제하게 건강을 더 나쁘게 어디를 가나 당신은 내 앞에 내가 가르치는 말들은 그 새로운 비도덕주의자들은 산만하고 두서없는 헤겔은 어디에선가 신이 애통해하실 일이다// 세계를 정복하는 자유로운 내 작은 마음에는 당신이 행복하다니 자유가 현실의 단단한 누가 옆에서 미친 듯이 지난 일요일은 갑자기 흰 수염의 다른 탁자로 스타일은 심장을 잘 겨냥하여 이것에서 유추해보면 잔다리 아래 우리라고 어느 날 저녁 검열관은 아 사랑하는 정말 사랑하는 어느 날 저녁 문밖에서 그래서 당신의 지난 편지를 제가 선생님께 느끼고 있는 아무 것도 마무리 짓지 못하고 가엾은 꼬마인형이 수많은 지겨운 행사들 가운데도 우리는 맥주 여행을 잠시 중단하기로// 일부는 침대나 트렁크에 앉았고 단편소설의 내가 1397년 겨울 전부로 워낙 특별해서 아주 좋은 분이야 집으로 돌아 가라 내 시로는 아무 것도 하, 하, 하, 사방으로 쓰레기 어떻게 천재를 질투할 수 있는지 나는 날이 갈수로 나한테 편지가 오면 이 묘한 마음의 움직임에 그 작은 집이면 우리가 여기서 어떤 생활을 원한다면 함께 협력하여 약간의 인내심과 말리지 않은 깃털 침대 가능하다면 4월에 이곳으로 우리는 한편으로는 자꾸// 소유의 공유 이론을 전파하고 이것은 은근히 내 생명을 현재 배에 승선하고 있는 무자비한 11월의 날씨였다 왜 그 친구가 계속 필요한지 어설픈 지식과 독선의 결합 나는 곤경에 처해서 당신의 답변을 우편으로 만일 내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면 나는 가짜 자유주의자들과 터키식 목욕탕을 갖춘 동양식 궁전으로 불행하게도 더할 나위 없는 내 심장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마침내 모든 것이 한편으로는// 내 병은 늘 마음에서 내가 염려했던 것은 형식뿐 내가 도잘하게 된 일반적 결과 시간이 갈수록 아픈 게 만일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그는 아킬레스처럼 젊어서 허무맹랑하고 무정부주의적인 주장이// 나는 습관적으로 늘 뒤에 창문 맞은편과 벽난로 이 아름다운 사람은 무엇 때문에 나는 이해합니다 그리고 상쾌한 기분으로 이보다 어려운 환경에서 쓴 둘 사이의 투쟁이 현재에 걷잡을 수 없는 충동이 넘쳐나는 시와 산문처럼 나는 너무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이 글이 번역될 가능성은 없습니까 이것은 새로운 사상에 대한 폭풍우가 히몰아치는 강에서 나는 슬픈 시간을 많이 겪었지만// 이제 바닷가에서 마지막 잔을 부딪치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협잡꾼 / 리산
1.// 풍각쟁이들이 노래하며 지나가네 길 잃은 것들 허방을 향해 손을 내미는 밤 나는 일찍이 우수리 강 이북에 살던 사람 뒷산 고사리만 먹기 지겨워 백이숙제가 앞뜰에 지천인 무성귀를 먹고 채식주의자의 기원이 된 것도 다 보았지 나는 흐르지 않는 생물을 먹고 목울대에 울혈이 맺힌 사람 시냇물이 끊어진 언덕 나무와 나무에 기대 실을 뱉어내던 여자 무엇으로도 태어나지 못한 것들은 결절이 되었네 길 잃은 것들 허방을 향해 손을 내미는데 뒤집을 마지막 패도 없이 어디로 가나 저녁 어스름이면 눈물겨운 불빛들이 돋아났지만 어디로도 돌아갈 곳은 아니었네 아침에 진 꽃 저녁이면 다시피고 서쪽 문 아래 오월 잠자리는 삼 일을 죽어 푸른 진주로 산다는데 천지 팔방 해 지는 곳 먼 북쪽의 아주 먼 곳//
2.// 천개의 거짓말을 모아놓고 하나의 비밀이라 써보았지 먼곳에서 밀려온 유빙이 생을 다하는 밤 시베리아 붉은 여우가제 냄새를 눈펄에 묻히며 마지막 벌판을 지나가네 그 여자가 가진 천개의 거짓말을 헤아리는 동안 예언서는 새로 써지고 제단의 불 위로 죽은 자들의 뼛가루는 흔하게 내려앉았네 천 개의 거짓말을 다 모은 나는 언젠가 그 여자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천지에 우글거리는 그 여자 어디서든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네 그럼 나는 나무와 나무를 두르리며 그 여자 없는 강가 마지막 눈물이나 길으러 가야지 눈멀어 눈멀어 그 여자 마지막 거짓말이나 돼야지//

토리노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ㅡ파베세에게 묻지 못한 것들 / 리산
일천구백오십 년 팔월 노리노의 체사레 파베세는 자신의 수첩에 적힌 이름 하나 둘 셋 넷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 같았네 "꺼져" 그래서 그는 그렇게 했다네// 처음엔 낡은 엘피를 전문으로 파는 상점에서 도어즈 혹은 넥스트 두번짼 길모퉁이 서점 한낮의 우울이라는 제목 따위의 책은 말고// 그저 무심히 긴 머리칼을 쓸어 넘길 때 희게 드러난 목덜미를 한 번 본 것뿐인데 바람이 불면 누군가는 목이 붓고 미열에 시달리네// 마지막이란 말을 말자 생크림으로 만든 파스텔 여백이 많은 흰 공책에라도 마음을 빼앗겼을까 코카 이파리 날리는 저녁에//흰 소들이 어슬렁어슬렁 들판을 돌아오네 늙은 연금술사의 파오에서 푸른 연기가 피어나네 낡은 화덕은 쉼 없이 풀무질을 하기 좋았고 무쇠솥에 그을음은 자랑처럼 깊어가네// 이미 있던 외경을 지나 이미 있던 의문문과 이미 있던 암호문을 지나 따로 또 같이 섞여 끓고 있네// 새로이 방황하는 저기 새로운 방황하는 화란인 새로이 귀환하는 저기 새로운 귀환하는 그리스인// 뭐라도 좋을 이름들의 이름들 따로 또 같이 섞여 부글부글 끓고 있네// A의 가각본 B의 약사 제사기의 제 四기, 뭐 다 그렇고 그런 거라네//

국경 트레일러 남쪽 / 리산
병 속에 남은 마지막 지폐를 꺼내/ 말린 생선과 마가목 열매로 빚은 술 몇 통/ 유황 냄새 진한 성냥을 샀어// 세상 저쪽은 안개가 깊어/ 망설이며 떠나던 누군가는/ 지연되는 편도행 승차권을 찢어버리고/ 잠결에도 기다리는 품속으로/ 되돌아오기도 하겠지// 영영 결항된 채로/ 담담해질 이름을 생각하며/ 읽지 않은 편지에 성냥을 당기고/ 오래 세워두었던 낡은 트레일러 가득/ 기름을 넣었어// 찬바람 들던 지난 꿈속 내내 늑대가 울고/ 나도 같이 울기도 했지만/ 차바퀴를 뒤덮은 풀씨들을 뽑아/ 허공으로 날려주고 나면// 마지막 기름이 다하기까지/ 나는 어디로든 가게 되겠지// 천천히 돌아오고 있을지 모를/ 무엇을 기다려/ 경적 소리 울리며 가고 싶어.//

그럴지라도 데스페라도 / 리산
한순간도 너를 잊은 적은 없지만/ 나는 이제 저무는 거리에서 혼자 서 있지 못하겠구나// 이토록 외로운데 우리/ 듀엣으로 노래를 부를 수도 없고/ 함께 승천할 수도 없으니/ 헤어지는 거리라도 같이 해볼까// 돌아올 사람도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겨울 옛집 눈은 희게 빛날 텐데// 어디론가 돌아가는 기적 소리 환청처럼 들리고/ 참기름 콩나물 밥 짓는 냄새/ 발목까지 흥건하게 고이는 이 거리는/ 너무 행복해// 나는 저무는 거리에 혼자 서 있지 못하겠구나/ 나는 저물지도 못하는 저녁이구나//

어느 날 삐아프와 꼭도가 / 리산
두런두런 말소리 담장에 번지는/ 저녁 골목을 지나네/ 꼭 한번만 들어가 살고 싶은 담쟁이넝쿨 집엔/ 누가 사는 걸까 불빛 하나 없이/ 컴컴한 창문가를 서성였네/ 내 이름을 부른 적도 없는데// 흙길에 난 발자국 속으로 스미는 눈 물/ 돌아보면 지나온 길들은 어쩌자고 그렇게 아름다운지// 마다가스카르의 눈 내리는 밤 따위는/ 다시 오지 않겠지만/ 그래도 어딘가 있을지 모를 그런 밤을 찾아/ 그런 밤 오래된 호텔에 묵었을지 모를/ 늙은 여가수에게 장미꽃을 바치는/ 마지막 팬이 되어/ 서글피 우는 사내의 블루스가 되어/ 이제는 울지 않는 작은 새나 울어야지// 북쪽엔 눈이 있고 남쪽엔 해가 있다는/ 캐러멜 초콜릿 봉봉 같은 말들/ 어슬렁거리기 좋은 모퉁이를 찾아/ 속절도 없이 시시한/ 건달이나 돼야지//

인디 시인에게 무상급식을 / 리산
은빛으로 빛나는 돔 아래 작은방에 있는 듯했지/ 세계의 지붕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저기 어느 나라에는 지붕 마이스터라는 직업도 있다 하네// 나는 무슨 애이불비의 마이스터가 되어/ 휴가의 마지막 밤 센티멘털 노동자들은 어떤 노래를 듣나/ 태생이 계면조인 심수봉의 백만 송이 장미를 듣는 밤/ 이제는 문을 닫고 추억 속으로 사라져간/ 배고픈 저녁이면 찾아가던 밥집과/ 화덕에 불을 피워 음식을 내던 식당과/ 지난해 마지막 눈을 바라보던 나무 창문 안 자리와// 나는 무슨 측은지심의 마이스터가 되어 생각하네/ 미열에 시달리는 토요일 저녁/ 서랍 속 마지막 아스피린도 떨어지고/ 으슬으슬 해열제를 찾아 거리로 나서면/ 세상엔 온통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사람들 사람들// 그럴 때 당신은 어떡하나/ 나는 무슨 센티멘털의 마이스터가 되어/ 불멸의 좌파에게 맥주를 부어주던 밤들이 자꾸 생각나/ 테이블에 올라가 장미꽃 마술을 부리던/ 모나리자의 얼굴에 수염을 그려 넣던/ 아무것도 아닌 자들의 아무것도 아닌 고독이// 비무정 비슬픔 비애인 셀라비//

폭풍추적 전문가 / 리산
그때 너는 내 몸에 감기던 수초였을까/ 강기슭에 오래오래 묻혀 있다/ 내 주머니 속으로 담겨지던 이끼 뒤덮인 돌멩이였을까// 몇 번째의 생이었는지/ 그 강가에서 나는 너를 만난 적이 있다// 소설의 주인공이 죽는 장면을 쓰던 밤/ 비 오는 미라보 다리 위를 밤새 울며 서성였다는 너를 기억한다/ 나는 그때 그 다리를 지나 더 먼 강으로 나아가던 그날의 마지막 배// 나무에서 떨어진 어린 새를 보랏빛 제비꽃 아래 묻던 여자아이/ 한 생이 끝나고 또다른 생을 시작하려는 죽은 새의 뜬 눈// 내가 히말라야산맥에 깃든 성스러운 나무를 오르며 몇 통의 꿀을 모으고 있을 때/ 너는 천산의 여름 들판 천 개의 꽃들 사이에 벌통을 놓고 있었다/ 그때 내 머리칼을 간질였던 건 한입의 꿀을 베어 물며 웃던 먼 곳의 웃음소리// 또 언젠가의 너는 푸른 젤리를 만들어 식탁 위에 올려놓고/ 네가 가장 아끼는 모자를 쓰고 구두끈을 매었다// 텅 빈 식탁을 쏘아대던 한낮의 햇살을/ 통째 녹아 식탁 아래로 흘러내리던 끈덕진 육신을// 달콤하게 얼어붙은 푸른 별빛 속에서/ 늑대와 같이 우는 사람의 울음소리를/ 야회가 끝난 새벽 거리 혹독한 추위를 나는 기억한다// 그후로도 여러 겹의 생이 지났다/ 밤의 호랑이에 관한 예언서 갈피 속으로/ 마술사의 모자에서 날아오르는 비둘기 날개 속으로/ 사람과 고양이의 시간 사이로// 몇 번째의 생이었을까/ 너는 나를 만난 적이 있다//

리산 / 리산
밥 말리는 제 이름이 아닙니다/ 저는 아직 제 이름을 알지도 못합니다/ 1976년의 밥 말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경성을 떠나왔습니다/ 조국의 들판은 겨울이 한창이고/ 일생에 단 한 번 험한 길을 여행하고/ 다시는 되돌아가지 못했다는/ 낙타며 노새 들 생각이 났습니다// 눈벌판을 내내 달려와 반쯤 멀어버린 두 눈에/ 산림조합 산불조심 흰 기둥에 쓰인 초록 글씨가 보이면/ 비로소 귀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뭇가지에 쌓인 눈은 안개처럼 풀어지고/ 짐작으로만 알 뿐인 짐승들 검은 울음소리/ 겨울 숲을 떠나 배고픈 새들이/ 또다른 겨울 숲으로 허기져 날아갑니다// 떠돌이 이야기꾼의 끝내 헛것일 뿐인 이야기에 취한 듯/ 두고 오다와 남기고 오다의 차이를 생각하며 지나가는 한 시절// 땔감을 울타리처럼 쌓아놓은 들판의 집에선 종일 연기가 오르고/ 그 문의 안쪽으론 눈구름을 머리에 인 산이 보입니다/ 이지러지고 뭉개진 채 꿈에서도 제 경계를 보이지 못한 산/ 그래서 나도 묻지 않았습니다/ 담배가 없으니 울지도 못하고//

사월 / 리산
외로워서 축구를 하고 외로워서 기차를 타지/ 외로워서 순록의 발자국을 찾아 미술관에 가고/ 외로워서 목화밭 너머 봄날의 묘비명을 적었네// 어딘가 외로운 짐승이 외로운 짐승 옆에 앉아/ 오래된 기침을 하고 있을 때/ 함께 흔들 흔들거리는/ 느낌표와 물음표가 거꾸로 된 문장들/ 한 방울의 피가 필요해// 잠의 변경을 서성이던 한 마리 짐승이/ 숫잠에서 깨어나/ 흥건해진 눈으로 바라다보는 눈// 붉은 꽃잎 다 젖도록//

너바나 / 리산
언덕을 넘어 외곽으로 가는 마지막 전차의 종소리도 그친 자정이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입술을 가진 남자와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손톱을 가진 여자가 모여드는 자정 너머 술집에 불이 켜지지// 누군가와 어깨를 겯고 먼 곳에서 먼 곳으로 가고 싶은 한쪽 어깨가 기울어진 남자와 금이 간 청동의 술잔에 제 손금을 비추어 보는 여자가 있는 그곳에는, 유효기간이 지난 달력을 찢어 불이 꺼진 화덕에 불씨를 살리고 밀봉된 병 속의 시간을 헐어 작고 단단한 주전자 가득 끓여내는 뜨겁고 진한 국물이 있지// 지금 막 일인분의 따뜻한 음식을 사기 위해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는 남자와 뜨거운 김이 오르는 노점 식당 앞에 서서 청어 향수가 뿌려진 손수건으로 지워지지 않는 이마의 허기를 닦는 여자// 멀리 가는 밤새들 울음 우는 긴 모퉁이 지나 자정 너머 술집에는, 낡은 앨범 속 램프에 그을린 가수의 목소리 흥얼흥얼 타오르는 자정 너머의 화덕, 오래도록 식지 않을 한 스푼의 온기가 있지//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 / 리산
그 박물관에 걸쳐진 코카사스산맥 가슴팍에는 백야가 출렁이고 골짜기마다엔 흑야가 깊었지 보랏빛 유리알 샹들리에 불빛으로 앵두주와 체리주가 익어가던 시절 쿠바 축음기 안의 밥 딜런과 존 바에즈는 아직 사랑을 하고 검은 모래 해안가 로큰롤가수는 은빛의 징을 번쩍이며 노래를 불렀지 까만 턱수염의 사서가 조는 밤이면 스파트필름 이파리 속 풍경은 더욱 느리게 돌아갔어 잠 깨어난 마법 등잔 속 지니가 어깨를 흔들며 긴 숨을 쉬면 지니의 숨결 속에는 작고 검은 꼬리요정이 살아 밤새 책 위를 술잔 위를 날아다니며 길고 진한 그림자를 새겼지 산초나무 여린 이파리 폴리셔스 그늘 속으로 하농 하농 지는 달과 쇠의 공항 2046 게이트를 지나면 델피의 부서진 바람이 불고 교토의 산산한 봄이 피었다 지는 박물관이 있지//

블로뉴숲의 용의자들 / 리산
지난밤 나는 그 숲에 있었다// 매꽃 하얗게 헝클어진 덤불에/ 반쯤 파 먹힌 눈알이 뒹굴고/ 부리에 피를 묻힌 검은 까마귀가/ 먼 강을 향해 날았다// 매꽃 이파리 관을 쓴 어여쁜 나는/ 두 팔을 하늘로 치켜들고/ 당나귀가 눈먼 아침을 몰고 올 때까지/ 맨발로 춤을 추었다// 먼 곳에서 침묵하던 흰 수염의 귀뚜라미/ 바람도 없이 나부끼던 측백나무 이파리들// 지난밤 내내 나는 그 숲에 있었다//

겨울 전부 / 리산
내가 떠나온 그 밤에 폭설이 시작됐다는 말을 들었다/ 누가 눈보라 치는 들판에 불을 놓았나/ 눈꽃과 불꽃 사이를 날아다니고 있을 겨울 까마귀들// 평생 그곳을 그리워했지만 다시는 가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지나온 날들을 생각하며 같이 웃고 울기도 하다가/ 다시 만난 기쁨에 손을 꼭 잡고 행복해 하였더라/ 두 가지 버전의 이야기 사이로 능동과 부정 수동과 긍정 사이로 나부낀다// 눈이 오지 않던 눈의 땅 눈보라 눈보라를 기다리며/ 올 것이다 오지 않을 것이다 한 잎씩 떼어내던 꽃잎 점 이파리들// 안개 낀 국경을 넘어가는 야간열차의 불빛을 바라보며 하루 한 번/ 한 바구니의 홍합과 꽃가루가 점점이 떠 있는 맑은 차를 구하기 위해/ 거리의 끝으로 갔었다// 그런 어떤 밤이면 길을 잘못 든 고라니들은/ 산기슭으로 난 도로를 따라 숲으로 돌아가고/ 나는 거리의 끝으로 향하는 지방도로 그 길의 한 가운데/ 전조등도 상향등도 없이 문득 멈추어 서 있곤 했다// 어둠의 빈틈을 메우며 어둠과 한 덩어리가 되어 서 있던 그 때/ 귀신이 귀신을 알아보는 밤이 있었다// 종일토록 혼선되던 전파도 툭 끊어지고 밤이면 정적만이 송출되던 단파 라디오 소리/ 제각각 제 모국어로 말하는 그곳의 이름을 칠흑의 전부라고 발음해 보는 밤이 있었다// 길이 끊어진 곳에서 다시 길을 그리며 떠돌던 그 때 겨울 전부//

 

그리워라 애니 로리 / 리산
말하자면 나는 옛날 거닐던 강가 안개와 바람을 먹이는 한 마리 검은 짐승 제 발자국 안에 다시 제 발자국을 세기며 걷는 천천히 눈 멀어가는 저격수, 함께 나부낄 깃발 하나 없이 혼자 펄럭일 때면 먼 기항지를 향해 암 부호를 타전하는 퇴락한 적성국가의 스파이// 석양이 깊어지면 갈매기 잠드는 술집 데킬라 병 흔들며 불춤 추는 과묵한 바텐더가 되고 싶었지, 낡아빠진 난수표를 말아 담배를 피우며 33과 3분의 1 빠르기 턴테이블 돌리며 그리워라 애니 로리 흘러간 결사의 노래나 흥얼대는 말하자면, 나는 흰 머리칼 애니 로리 옛날 거닐던 강가는 옛날에 다 잊었지//

춤 / 리산
인도차이나반도에 우기가 시작되면 메콩강의 수위도 높아진다// 뽕나무 이파리를 띄운 항아리 물이 깊어지고/ 울타리마다 심어놓은 바나나 나무가 무성해지는 시절// 마을에 살던 뱀들은 밀림평야를 향해 떠나고/ 여자들은 창가에 앉아 수틀이 넘치도록 차고 단 강물을 수 놓는다// 지난 시절 내내 새를 사냥하는 겨울 사냥법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이제는 아무도 새를 사냥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는 삼 일씩 내리고/ 둑을 넘어 마을 안쪽까지 범람한 호수의 물// 누가 나뭇잎 배를 타고 붉은 꽃잎 점점이 떨어진 호수/ 작고 단단한 열매를 하염없이 손바닥으로 건져 올린다//

마두각배 만리 / 리산
하늘 맑고 오월 아카시 자욱한 날에는/ 국립 김해 박물관 馬頭却盃나 보러 가야지/ 가야 천년 하늘/ 마두각 잔에 술을 따라 마시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나/ 말발굽 빠져 앞으로 나가기 힘든 오지의 땅을 지나/ 금빛 환한 물길 신천지로 떠나갔나/ 홀로 마두각 잔에 장군차를 내려 마시는 오후/ 영혼이며 영혼의 그림자 같은 것들은/ 한 무리 구름 되어/ 심장의 언덕 지나 남진 서진 하는데/ 이이제이할 영지도 없이 나는 어느 삶으로 투항하나/ 몇 모금 차를 마시며 구름의 필경사 노릇을 자처하다 보면/ 필경 빗방울에 부리를 씻는 새들의 노래 몇 곡조/ 마두각 잔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역사가/ 대륙보다 거대한 심장의 제국을 이루리니/ 홀로 마두각 잔에 차를 내리는 오후는 장엄하구나/ 대가야 소가야 모두 잔에 따라 마시고/ 오랜 세월 가슴 속에 방목하던 말 한 마디/ 푸르디푸른 말 한 마리 눈앞에 당도하는 날에는/ 국립 김해 박물관 마두각배나 보러 가야지//

광대를 보내주오 / 리산
북해로 옮겨진 말라카아의 술집은 다시 돌아올까/ 모퉁이를 돌아도 바다는 나오지 않아// 매일매일 너를 기다렸네/ 형언할 수 없는 선의의 말들을 되뇌며/ 매일매일 너를 기다렸네/ 하나의 태풍이 가기 전 또 다른 태풍이 다가오고/ 실로 짠 레이스로 정원의 꽃나무들을 싸매고/ 덧문 안쪽에 잠든 사람들/ 떠나지 못한 새들의 울음소리/ 너는 왜 오지 않나/ 서로 부딪치며 안도감을 느끼며 덜컹이는 바람/ 상처란 단지 마음에서 오는 것/ 다 지난 일이라고 말하던 고독의 입술에도/ 허공을 가르는 새들의 비행처럼 생겨나는 한없는 여백/ 긴 싸움이 지나고 한 세기가 지나도 잡초는 우거지지 않으리/ 잉크 한 병과 깃털 펜 한 자루/ 세상의 길이 한 점에서 만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야만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 매일매일 너를 기다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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