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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마음을 술에 의지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술에 취하고 나면 당돌해진다고나 할까요. 없던 용기도 생기더군요.
“요즘도 가끔 혼술 하니?” 선배가 묻더군요. 복용하는 약이 있어 뜸하다고 했어요.
그날도 가게는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지요. 단골인 나도 이름을 적고 자리가 나길 기다렸습니다. 우리 동네 아담한 초밥집입니다. 나는 혼자 술 마시는 것을 즐겼기에 가는 곳이 정해져 있었지요. 추억이 그리운 날은 초밥집을 찾았고, 술 따라주는 친구가 필요할 때는 동태탕 집을 찾곤 했답니다. 종업원이 번호를 부르네요. 나는 바텐더 자리를 원했기에 오래 기다리지 않았어요. 주문을 받으러 내 옆으로 다가오네요.
“따뜻하게, 차게, 어떻게 드릴까요?”
“차갑게요.” 짧게 말하고 초밥 몇 점과 정종을 잔술로 주문했습니다. 차갑고, 뜨거운 것은 정종을 어떻게 드릴까요. 하고 약식으로 묻는 것이지요.
나는 초밥 중에 타코와사비와 연어알을 좋아합니다. 타코와사비는 낙지를 다진 것인데요, 짭조름하면서 비릿한 맛 그리고 오돌오돌 씹히는 식감이 일품이지요. 입안에서 톡톡 터치는 연어알이 마치 옥수수가 레인지 안에서 벙그는 소리처럼 들렸어요. 이내 대포 한잔을 비웠습니다. 다시 주문한 잔을 기다리는 동안 열차를 타고 과거를 향해 빠르게 달렸습니다.
언제였던가요. 어머님은 포도주가 심장에 좋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가끔 드시곤 했습니다. 나는 몰래 주방으로 가서 어머님께서 즐기던 포도주 한 병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지요. 적적한 밤이 되면 허전한 마음에 혼자 술 마시곤 했어요.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한 병을 다 비우고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님께서 주방에서 한동안 두리번거리고 계시더군요. 그리곤 잠시 고심하는 듯 머물러 있다가 수영장에 갈 채비를 하시더군요. 실은 나도 어머님이 나가실 때만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거실 입구에 있는 괘종시계가 아홉 번을 울렸습니다. “드르륵 ”거실문이 닫히고, “쾅” 현관문 소리가 나더니 이내 대문이 “찰칵” 잠겼습니다. 집에는 나 혼자이건만, 급한 마음에 빈 포도주병에 복분자주(酒)를 부었습니다. 얼핏 보면 색깔도 비슷해서 완전범죄라 생각했지요. 그러나 내 속임수는 반나절도 못 가 들통이 나고 말았습니다.
며칠 후 어머님은 포도주 몇 명을 사 들고 오셨더군요.
“어멈아, 포도주는 병 바닥이 쑥 들어간 게 좋다고 하더라.” 다정스레 보듬어 주던 어머님이 그립습니다. 옛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보조개가 생겼습니다. 옆에 앉아 있던 손님이 이상스러운 눈으로 흘겨보고 있더군요.
내 주량은 잔술로 석 잔입니다. 이번에는 주문한 정종이 뜨겁게 데워져 나왔습니다. 정종을 담은 술잔의 외벽은 차지만, 잔에 담긴 술은 뜨거웠습니다. 나는 술잔의 겉처럼 차가운 척하며 쓸데없이 자존심만 강한 여자랍니다. 내 뜨거운 속을 남편이 알까 조바심을 내면서요. 참 우습지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한 걸음 가까이 가면 될 것을요.
오늘 밤, 술에 취해 슬그머니 남편에게 다가가면 이상하게 생각할까요. 남편과 데이트가 끝나도 헤어지기가 싫어서 그이와 함께하길 원했습니다. 그리 부부가 되고, 평생 사랑한다는 마음이 진행형일 거라 생각했죠. 이 엄청난 착각 때문에 혼자 술 마시는 건지도 모를 일입니다. 나는 예전 그대로인데 남편은 변한 걸까요? 그이는 이런 내 모습에 너를 어떡하니 하는 말만 되풀이한답니다. 남편이 나를 철부지라 생각해도 눈과 귀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이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남편도 어머님을 닮았으니 묵은 포도주 한 병을 사 오지 않을까요. 이런저런 생각으로 한 편의 짤막한 소설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 속을 눈치를 챈 건지 그이의 지인 중에 병원 문 닫게 된 사연을 넌지시 얘기하며 한약 한 재를 지어 왔더군요. 남편도 혼자 술 먹는 내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던 거겠지요. 혹여 허한 마음을 보약으로 달래라는 의중은 아닐까요. 한약 한 봉지를 냉장고에서 꺼내 미지근한 물에 데웠습니다. 그리고 와인 잔에 따랐습니다. 혼자 술 마시던 여자의 추억을 꺼내 “원 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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