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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취약지구 / 송복련

부흐고비 2022. 5. 27. 08:27

어떤 말은 광속으로 귓속에 와 박힌다. 우리들이 교정을 막 끝내고 뭉그적거릴 때 그녀가 뱉은 말이 급소를 건드렸다. 붉은 입술이 ‘뱅쇼’라고 말하는 순간 머릿속으로 어디선가 앵무새 한 마리가 날아온 듯 낯선 이미지들이 꽃을 피운다. 나의 취약지구를 건드린 말맛이 침샘을 건드렸다.

찻잔에는 붉은 와인에 잠긴 레몬, 사과, 배, 오렌지가 시나몬과 어울려 울긋불긋하다. 베일 속에 아른거리는 이국적인 맛을 상상하며 말맛에 취해 버린 나는 새큼달큼하고 진한 와인을 연신 음미하는 동안 온몸이 달아올랐다. 그녀가 욕심을 부려 와인을 좀 더 많이 넣은 탓으로 꽁꽁 얼었던 내 마음이 제대로 풀려버렸다.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뱅쇼는 북유럽인들이 혹독한 겨울에 몸을 덥히기 위해 마시는 와인으로, 우리가 진한 쌍화탕을 마시며 몸살감기를 다스리는 것과 닮았다. 프랑스어로 뱅(vin)은 ‘와인’을, 쇼(chaud)는 ‘따뜻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따듯한 와인’을 의미한다. 나라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나름대로 겨울나기를 해온 전통적인 음료였다. 축제나 가족행사가 있는 날에 즐겨 등장하는데 특히 크리스마스트리가 거리를 장식하고 캐럴이 울려 퍼지면 거리 곳곳에서 향긋한 이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한다.

내가 언어에 쉽게 빠지는 것은 무기력한 도시생활에서 생기를 되찾고 싶을 때이다. 입술을 떠난 말은 낯선 여행지를 서성거렸던 때를 떠올리게 했다. 비엔나 호텔의 노을빛 테라스는 무척 낭만적이었다. 우리들이 모히토를 마시며 바라보던 달팽이 모양의 계단은 또 다른 세계로 가는 입구처럼 보였다. 라임 즙에 설탕과 민트 잎을 넣고 잘게 부순 얼음과 럼을 넣어 만든 칵테일, 톡 쏘는 그 맛에 홀렸다. 헤밍웨이의 전설 한 조각을 일구어낸 ‘라 보데기타’ 선술집을 이야기하며 꿈같은 세계에 머물렀다.

멕시코 칸쿤에서 카리브 해를 바라보며 서 있을 때도 그랬다. 우리들에게 데킬라를 권하던 사내의 말대로 우리는 하루쯤 죽어볼 요량으로 데킬라를 마셨다. 술에 취했는지 말에 취했는지 모르지만 밤하늘에 별들은 몽롱하게 흐렸다. 처음으로 유럽여행을 떠날 때였을 것이다. 기내에서 주문한 코냑이 작은 유리잔에 담겨 나왔다. 코냑을 조금씩 홀짝거리는 동안 마음은 어느덧 센 강을 거닐고 있었다. 실은 술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맛 본 술은 그저 열 손가락 안에 들만큼 얼마 되지 않지만 몽상가처럼 어떤 말은 이렇게 미리 도착해서 취해버리게 만들었다. 아마 말은 내게 있어서 가장 취약지구인가 보다. 자주 말속으로 흘러드는 나를 발견한다.

나는 도시의 사냥꾼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다. 그건 코로나 상황이 오기 전의 일이다. 눈요기하다 걸음을 멈추거나 불쑥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 만만한 물건 하나 사들고 나오기도 하고 좁고 오래된 골목길을 지나며 손바닥만 한 살피꽃밭에 핀 달리아, 맨드라미를 눈으로 쓰다듬는다. 옥상 빨랫줄에 속옷들이 널렸을 때 빠져나간 몸뚱이를 생각하며 피식 웃거나 공중화장실에서 낙서를 하고 두리번거렸을 사람이 너인 듯도 하고 아니기도 하여 눈길을 거두어 버리든지. 미술관처럼 늘 사냥감을 수확하지는 못해도 산책 자체가 즐거움이다. 어쩌면 내가 사냥에 홀려 정신을 팔고 있을 동안 다른 이들도 어딘가에 골몰하며 정신없이 지내기에 특별히 나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물망처럼 엮인 사람들의 관계가 도시에 생기를 불어넣어 활기를 띠게 하는 것이리라.

마스크를 하고 거리두기를 한 지 두 해가 지나고 있으니 여기저기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공장에서는 콤바인더에 실려 오는 상품의 하자를 살피고 건물공사장이 분주하게 돌아가야 하지만 노동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사람과 거리 두기로 나의 관계망도 거의 끊어진 상태다. 이제 뭘 먹고 뭘 하지? 곳간을 비우며 사는 거다. 그동안 넘치던 지방을 태워 없애는 일이고 연명하며 구조를 기다리는 일이랄까? 질병은 마음먹은 대로 해결되기 어려운 일로 여기저기 툭툭 신경 줄이 끊어지고 있다. 숨구멍을 조금 열어놓았지만 딱히 갈 곳이 없는 우리는 자리에서 뭉그적거릴 뿐이다. 달콤한 것이 생각났다. 몸과 정신이 몸살을 앓고 있는 지금 ‘뱅쇼’가 꿀꿀한 기분을 떨쳐버리고 생기를 되찾아주었다. 그러고 보면 낯선 기분을 즐기게 된 것도 상한 몸과 마음을 속풀이 해주는 말 때문이었다.

이런 날에는 첫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나는 곧 어딘가 전화를 걸려고 하다가 망설일 것이다. 내 빈 자리로 찾아오는 한 번도 말 건네지 못한 당신에게. 부옇게 흐린 하늘에서 눈송이가 하나 둘 가볍게 날리는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언어에 꽂히는 내가 가진 도구는 펜뿐이다. 도시의 사냥꾼은 사냥 뒤에 남길 것들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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