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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태풍과 칼 / 이인주

부흐고비 2022. 6. 3. 08:07

사과나무 포도나무가 실하게 영근 과일들을 하혈하듯 쏟아 내렸다. 다 털린 빈 몸으로 아랫도리를 휘둘리고 있었다. 짓밟힌 채마밭은 울고 있었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태풍의 공습이었다. 열대의 바다에서 태어난 루사는 잉태된 그 뜨거운 입김을 몰아 제주도의 목덜미를 핥고 정확히 한반도의 심장부를 뚫었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잔혹한 입김의 자취가 화인(火印)처럼 남았다.

그야말로 벼락같은 자연의 위력 앞에 손쓸 수 없는 한낱 인간의 허약함을 증명받고 싶었던 것일까? 독기를 품었으나 심중을 알 수 없는 여자처럼 그렇게 루사는 한반도를 관통했고 인간은 내장을 다친 어린 짐승처럼 신음했다.

이백 명이 넘는 사상자와 실종자, 그리고 수조 원의 재산 피해 앞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막힘으로 오열했다. 하루아침에 집과 가재도구와 일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위로란 한낱 사치에 불과하다는 걸, 제법 솔솔한 마을들을 거뜬히 삼키고도 껌벅껌벅 시치미 떼는 수마의 표정을 보고 알았다.

그것은 가열하기 짝이 없는 전쟁터 같았다. 이긴 자는 부리부리한 눈매를 부라리며 자신의 흔적을 가는 곳마다 훈장처럼 새겨 나갔고, 진 자는 그 상흔을 초췌하게 받아안았다. 폭격의 세례를 받은 집과 공장과 자동차와 그 아래 깔린 사람들, 황톳물에 하염없이 녹아내린 논밭의 곡식들, 물 밖으로 고개만 내민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가축들, 포탄처럼 흩어진 과일들... 숱한 피와 땀들이 날마다 거리마다 산더미처럼 불어나는 쓰레기로 변해버렸다. 그 위를 군홧발의 수장(水將)은 거침없이 진군하였다. TV에서는 연일 쉬지 않고 실전을 보도하듯 속출하는 피해 상황을 생중계했지만 별다른 방도는 없었다. 태풍의 거친 숨결은 자신의 분노를 대상들의 생살에 이빨로 깨물면서 자국 깊게 표시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해, 상처 입은 자를 거듭 상처 입히는 잔인한 칼이었다.

​ 처참한 장마였다. 누런 벽지 안팎으로 곰팡이가 덕지덕지 세 들어 살았다. 골방 안에서 여름 내내 어떤 정신을 부정하며 뒹굴었다. 과연 하나의 육체가 절규하며 죽어간 곳에서 하나의 새로운 정신이 태어날 수 있을까? 태풍이 분간할 수 없는 폐허와 한데 뒤섞이는 엄청난 혼잡 속에서 무엇인가 다듬어져 인간에게 사라진 터전과 고독과 더불어 인내를 측정할 수 있는 절도를 부여하는 것일까?

그런 회의들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밀려갔다. 창문 너머로 상반신을 드러낸 사철나무 이파리들이 빗방울에 키들거리며 몸을 씻었다. 조소처럼 태풍이 덧없는 무늬를 만드는 가운데 나는 망연자실 돌들 중의 돌이 된 듯한 고독을 느꼈다.

새벽에는 바퀴들이 불안 속에서 그들만의 제의(祭儀)를 몰래 치렀다. 그들처럼 나는 어둠이나 폐허 같은 것들과의 저 모진 정대면(正對面)을 할 수 있을까? 희망을 품지 않는 인간의 절박한 절망에, 고통하는 육체에 쓴맛과 고귀함의 진실을 동시에 부여할 수 있을까? 검은 불꽃처럼 빛에 대한 환상을 거세한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을까?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수재민처럼 알몸으로 나는 인간이 일생의 종말에 가서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으려면 자기의 것이라고 지니고 있었던 몇 안 되는 추억이나 덧보탠 생각 따위는 던져 버리고 자신의 운명과 대면한 빛나는 저 무구(無垢)를 다시 찾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 여름 내내 그 방에서 칼을 벼렸다. 남들이 물으면 빛나는 상상력을 키우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사실 나의 오랜 취미이기도 했지만 때가 오면 딱 한 번, 한 획을 긋고 싶었다. 내가 세상과 승부하기를 바란 적이 있다면 그건 내 탓이 아니다. 이 세상과 자연 앞에 나는 얼마나 순연히 서 있고 싶었던가! 그러나 느닷없이 몰아치는 태풍처럼 세상은 나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내가 구질구질하면서도 만만찮은 세상을 향해 항변할 몸짓이 있다면 바로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얌전히 있어도 시시각각 숨통을 조여 오는 가공할 얼굴 앞에 저의도 모른 채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느낀 분노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천 개의 얼굴을 가진 그 실체의 베일을 날렵하게 포착해 베어낸다는 것, 그것은 언젠가부터 내 일생일대의 과제가 되어 버렸다.

나는 아직 분노를 잃어버린 자로 살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두렵지만 분노를 아는 자로서 이 불순한 폭력 앞에 상처를 가진 자로서, 세상에 대한 무서움이 있으면서도 맥없이 무릎 꿇고 싶지 않은 자로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태풍 속에서 나는 어떤 식으로든 살아남으려 애쓰지만 벌어지는 그대로의 상황을 한치의 꾸밈도 없이 바라보아야 하는 서늘함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안다. 나는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끝도 없이 부풀어 오르는 무기력과 왜소함과 싸워야 하고 지쳐서도 쓰러져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깨물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느낌에 비례해 살고 싶은 욕망을 물컹물컹 거머쥘 수 있다면 이 폐허 위에서 나는 아직도 꿈틀거리는 육체와 정신을 가다듬어 가능성 있는 것들을 살려내고 싶다.

물론 성공할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싸움이란 어차피 성공을 볼모로 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그런 날이면 나는 깨끗하게 세수를 하고 차례로 날아오르는 무수한 칼들을 읽었다. 어둠의 내장을 도려낼 듯 섬광처럼 번쩍이며 나선형으로 날아오르는 칼, 칼들의 경쾌한 춤, 독특하고 정확한 포지션. 그 칼들 앞에 나는 숨죽인 부러움으로 떨었다. 칼을 독파하고 칼을 벼리면서 내 명징한 의식이 또 다른 한 칼의 날 끝까지 나아갈 수 있기를 빌었다.

​ 짓밟힌 것들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의 공포는 기실 빛나는 삶에 대한 질투에서 온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즈음이면 우리는 태풍 뒤에도 여전히 살아있을 사람들, 꽃과 연애 따위에 대한 욕망과 살과 피로 된 의미를 갖는 모든 것들을 가슴 벅차게 껴안을 수 있을까? 영원이란 낱말이 우리에게 유혹에 찬 허상을 제공한다는 참말을 속삭일 수 있을까?

막막한 황토의 폐허를 딛고 일어선다는 것, 그것은 곧 나와 세상 사이를 갈라놓는 거리를 좁히는 것이며 잃어버린 세계의 이미지들을 가슴 저리도록 의식하면서 기쁨 없이도 대공의 마을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일이다. 이제 사람들은 거뭇하게 집터만 남아있는 자리에서 풍찬노숙의 날들을 바람과 별과 함께 영육을, 맑은 그물처럼 잣는 법을 배울 것이다.

태풍이 할퀴고 간 황토 빛깔의 저 저릿저릿한 상처 자국을 보라. 과연 세상 모든 길들은 상처가 남긴 살점*이지 않은가! 폐허가 아름다움의 한 가운데와 통한다는 사실을 동전의 앞뒷면처럼 받아들일 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세상은 살아있는 바퀴를 굴릴 것이다.

물이 빠진 집으로 철벅철벅 걸어 들어가 진흙 범벅이 된 가재도구를 씻어 말리고 이불 홑청을 희게 삶아 널리라. 엎어진 농작물을 일으켜 세우고 축사도 손질하리라. 무너진 집과 다리를 복구하며 끊어졌던 자연과의 교신음 몇 낱도 별처럼 주우리라. 산과 마을과 강 사이로 던지는 작은 돌의 비명 소리, 나는 그것이 지닌 암시를 나지막이 붙들고 싶다.

​ 며칠 전 난초 한 盆을 새로 들여놓았다. 날마다 잎이 파랗게 자란다. 조금의 햇볕에도 용케 윤기를 잃지 않는 蘭, 나의 칼도 날마다 조금씩 윤이 난다. 언젠가 난초가 골방 가득 향기를 발하듯 나의 칼도 세상을 환히 가를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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