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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강신애 시인

부흐고비 2022. 6. 8. 08:30

강신애 시인
1961년 경기 강화 출생.

1996년 《문학사상》 등단. 시집으로 『서랍이 있는 두 겹의 방』, 『불타는 기린』, 『당신을 꺼내도 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물가에 집을 지을까』가 있다.

 



팬데믹 / 강신애
닿을 수 없는 차가운 침상에/ 봄이 숨결을 다 쓴다// 마스크 쓴 구름이 홀로 간 자들을 조문하는 동안/ 창궐한 전염병이/ 수백만 생명을 구했다고도 한다// 바이러스와 테러리스트와 이산화질소 중/ 어느 것이 견딜 만한가/ 어디에 산소호흡기를 댈까// 우리는 오랫동안 독을 먹고 살아왔는데/ 기침 소리에 소스라치는 어두운 골목/ 하얀 얼굴이 라일락 향기를 휘젓는다// 나는 숙주고/ 너는 에어로졸이야// 익사하지 않고 어디든 갈 수 있는 꽃가루야// 늙은 주에서 임신한 고양이로 불안을 숨기고/ 뿔뿔이 흩어진 동굴을 봉쇄하니/ 푸른 하늘이 열렸다/ 서로 다가가지 말라는 계시처럼// 교회에서 극장에서 터미널에서/ 시취(屍臭)가 빈 의자를 징검다리 건넌다// 인류의 대멸종인 듯/ 쌓이고 쌓이는 시체들/ 맨땅에 묻혀가는 자들은 영혼의 행방이 묘연하다// 사람 없는 길을 간다 나만 밟으며// 재가 정지된 시간 위에 뿌려지고/ 매연과 무증상이 이어지면/ 벚꽃을 놓친 모퉁이를 오물거리는 개미들의 그늘에서/ 다시 기침을 해도 될까// 쓸어엎고 생겨나는 우주의 주술을 해석할 수 없으니/ 타인의 죽음으로 연명해야지//

여름 달 / 강신애
카페에서 나오니/ 끓는 도시였다// 긴 햇살 타오르던 능소화는/ 반쯤 목이 잘렸다/ 어디서 이글거리는 삼복염천을 넘을까// 보름달/ 요제프 보이스의 레몬빛이다// 내 안의 늘어진 필라멘트 일으켜/ 저 달에 소켓을 꽂으면/ 파르르 환한 피가 흐르겠지/ 배터리 교체할 일 없겠지// 달님이 이르시기를/ 차갑게 저장된 빛줄기들을 두르고 붉은 땅/ 무풍의 슬픔을 견디어라/ 우주의 얼음 조각들이 예서 녹아 흐를 테니//

무희 / 강신애
센트럴파크 모퉁이/ 대리석 발레리나// 가슴에/ 두 팔을 X자로 포개고/ 왼쪽으로 갸웃, 머리를 튼 채/ 땀조차 증발해버릴 땡볕에/ 머리칼 한 올, 토슈즈 끝까지 흰 칠을 하고 서 있다// 발치에/ 달러가 그려진 상자에는// '나를 춤추게 하세요'// 지폐를 넣자/ 마법에서 풀려나오듯/ 엉킨 팔을 풀고/ 백팔십도 스르르 허리를 굽힌다, 환영처럼/ 망사 튀튀가 수직으로 솟구친다, 분수처럼// 입술에 손바닥을 받쳐 불어 날리는 키스는/ 아스라한 치자향// 일 달러는/ 대리석의 관절을 녹이고/ 상자에 수북한 지폐는/ 애티튜드 중인 나비들인지도 모른다// 끈질기게/ 춤 출 순간을 기다리며/ 절묘한 포즈로/ 석상이 된 무희//

숲은 고스란히 나를 / 강신애
쏙독새 따라다니다 길을 잃었다/ 나무 높은 가지에서 다른 가지로 건너뛰며/ 나를 숲의 더 깊은 곳으로 이끌었다/ 번개 맞은 듯 까맣게 척추가 흰 나무 앞에서/ 문득 새소리도그치고, 두근거렸다/ 함석 차양에 빗방울 떠어지는 소리로 가랑잎 굴러다니고/ 한 발 앞으로 내디뎠을 때/ 숲은 고스란히 나를/ 낙엽 도토리 밤송이 껍질 수북한 골짜기로 빠뜨렸다/ 서걱이는 몸 일으켜 숲이 흘린 꿈,/ 허파에 하나씩 주워담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쏙독새가 나무에 줄을 매고 빙빙 머리 위를 돌았다/ 이렇게 한 사흘 숲에 취해 있으면/ 살갗에서 가지, 이파리가 뻗어나가고/ 발바닥에 스멀스멀 잔뿌리가 돋아날 것 같았다/ 온몸으로 밀림이 된 내 팔다리를 타고 오르며/ 쏙독새가 고립무원 우는 소리를/ 나는 가만히 취한 듯 듣고 있었다//

천년의 나이테가 녹아든 / 강신애
깊은 숲 속/ 우람한 참나무에 큰 구멍 뚫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 그 속에 편지를 넣기 시작했네/ 수신인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그 편지를/ 아무나 와서 집어가도 된다고 하지/ 찌르레기 맴도는 참나무 구멍에 손을 넣어/ 하얗게 접힌 글자들 펼친 처녀/ 쌉싸래한 도토리 향내 나는/ 어느 사내의 갈망에 마음 빼앗겨/ 제비꽃 살림 차렸다고도 하지/ 천년의 나이테가 녹아든/ 타닌 같은 문장을 만날 지도 모르지/ 먼 길, 초록 맥박이 뛰는 불빛 같은 소식을 만나러/ 참나무 우편함에 가고 싶네/ 잎 잎마다 뽀얀 솜털을 달고/ 갈바람, 구름 떠도는 내 물관이 가닿을/ 참나무 편지를 지금 써야겠네//

깃, 굿(巫) / 강신애
당신이 나를/ 흰독수리깃으로 정화해주던 날/ 꿈을 꾸었습니다// 코요테의 언어로 말하고/ 사슴의 뿔로 분노하라고/ 희끗한 어둠 속에 선명한 목소리로 말하였지요// 나를 가지에 꿰어 수로에 버려두세요/ 곰의 먹이로나 줘버리세요// 어떤 치병 굿으로 저 바다를 정화할 수 있을까요/ 얼마나 많은 독수리가 죽어야 거친 물결을 잠재울 수 있을까요// 심해에 엉켜버린 미래와 흔적을 발굴하다/ 무중력의 계절이 바뀌고// 당신이 나를/ 흰독수리깃으로 정화해주던 날/ 꿈을 꾸었습니다// 산속 깊은 곳에서/ 밤새 노래하고 춤을 추며/ 영원히 끝나지 않는 성인식을 치루고 또 치루었습니다// 파라고무나무 수액을 입힌 천으로/ 진즉 젖은 몸을 들어 올리지 못하였으니// 어떤 치병 굿으로 저 바다를 정화할 수 있을까요/ 얼마나 많은 독수리가 죽어야 거친 물결을 잠재울 수 있을까요// 네 영혼은 계속 나아가리라/ 네 영혼은 계속 나아가리라// 산속 깊은 곳에서/ 밤새 노래하고 춤을 출 뿐//

천장(天葬) / 강신애
나는 야크 똥을 주우러 다니던 아이/ 설수로 목을 축이던 처녀/ 놋주발을 돌리던 라마승이네// 죽은 것 다시 죽여 살아나는 활개/ 냄새가 다른 피, 코와 팔다리들 삭혀 부유하는/ 천년의 짐승이네// 나는 높은 곳 연모하던 살점들이/ 빛으로 짓고 빛으로 글자를 써 빛의 헝겊을 날리는/ 하늘사원의 전서구// 모든 길은 허공으로 통해/ 부풀어오른 설풍마저 질긴 구애를 하네// 신조(神鳥)도 설산에 푸른 그림자를 매달고/ 까마득한 공복에서 출발하네// 긴 겨울과 희미한 볕뉘의 제물/ 누군가의 전 생애가 불이 되고 물이 되어가는 곳에/ 발톱과 초점이 나의 전부일 뿐// 땀에 젖은 모자가 세 번 원을 그릴 때/ 튕기듯, 붉은 언덕으로//

툭담* / 강신애
얼마나 오래 거기 앉아계셨는지요/ 갈치 비늘 같은 은하수가 흐르고/ 눈 내리는 소리 듣던 찬 구릉에서/ 고립의 무아지경을 도굴꾼에게 들키고도/ 무릎을 펴지 않는 당신// 입적인지 명상중인지/ 시베리안 타임스도 BBC도 분분하네요/ 저도 명상중입니다만// 이백 년 넘도록 깨지 않을 명상이라면/ 차라리 죽음 아닌가요/ 젤라틴처럼 녹아내린 눈, 흉곽이 꺼진 잿빛 몰골은/ 기도로 가둔 악몽 아닌가요// 몸과 맘 잘 다스린 수행자는/ 마지막 숨까지 조절하고/ 티벳의 어느 린포체는/ 물구나무서서 가기도 했다지만/ 살아 있는 부처가 되기 직전에/ 얇게 저민 고서(古書) 같은 머리카락 햇볕에 말리니/ 연꽃좌에서 그만 툭, 일어나고 싶지 않은가요// 건드리면 몸안의 혈점들 빛으로 새어나올 당신/ 부윰한 숨을 쓸어보아요// 사실 당신의 명상에 자주 실마리를 놓치는/ 제 명상을 끼워놓고 싶은 거지만//
* Thukdam: 죽은 이후에도 유지되는 특수한 깊은 명상.

물무늬 / 강신애
정오의 햇살이/ 숲과 뱀차즈기 향기를 녹여/ 물속에 풀어놓는다// 산 아래 수영장에는/ 물을 가르는 희미한 호흡뿐// 수소와 산소 그득한/ 이상한 별의 욕조에서 그녀는/ 살얼음 헤치듯/ 무너져가던 냄새를 공기 방울로 돌려놓는 중이다// 엉덩이에 달라붙은 수영복/ 진분홍 꽃이/ 빛을 움켰다 튕기며 부드럽게 자맥질한다// 동요 없이 헤엄치는 그녀는/ 어딘가 잠적해 들어가는 것만 같다/ 쨍한 물결이 그녀를 뒤로 안고 기우뚱거린다/ 빛이 얼굴을 삼켜/ 나를 보지 못한다// 뜨거운 타일에 맨발이 데인다/ 해를 등지고 의자에 앉는다// 긴 투병 끝 첫 여행지/ 물에 누워버린 그녀 몸에 다른 자궁이 생길지 몰라// 돌아갈 차편을 잊으라고/ 모래시계가 거꾸로 간다// 하늘타리 환하다 물무늬 어룽댄다//

나를 점령한 상아 / 강신애
나의 새는 당신의 조롱/ 나의 살얼음은 당신의 노란 모래// 상아들의 뼛조각 부는 소리 들려오면 사바나로 떠나요// 종일 반짝이는 눈빛으로 고백하고/ 하얀 목소리를 흘려 넣어도/ 당신은 불신으로 엉거주춤한 사람// 코끼리는 죽은 형제의 뼈를 알아본다고 하지요/ 긴 코로 흙 속에/ 썩은 뼈 하나를 건져올리고 오래오래 주억거리듯// 뒤늦게 당신의 비골(腓骨)에 묻히는 영혼의 혈흔들// 초콜릿 하나에 당신의 내음을/ 초콜릿 하나에 당신의 무심을/ 초콜릿 하나에 당신의 극렬을 녹여 마시고// 내가 몰두한 궤도 밖에서/ 검붉은 날개를 퍼덕거려도/ 다시 이 창백한 방언들의 세계로 끌고 오지는 마세요// 끝이 보이지 않는 염전을 부리에 소금 하나 물고 가는 새처럼/ 닫힌 말문에/ 꼭 하나 움켜쥐고 나는 사라져가요// 나를 만지지도 않고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했다는 것을// 맨 나중 불탄 흔적을 뒤적여/ 내 늙은 애인의 주름진 코가 건져올리는 뼈 하나// 나를 점령한 상아/ 나의 노래하는 병(炳)입니다//
* 영화 <엘리펀트 송>에서.

가장 조용한 죽음 / 강신애
몽골에서/ 양 잡는 것을 보면/ 사람 둘, 짐승 하나가 사랑/ 을 나누는 것 같다// 한 사람은 뒤에서 양을 꼭 껴안고/ 한 사람은 앞발을 잡고/ 명치를 찔러/ 애인의 가슴을 움켜쥐듯 심장동맥을 움켜쥐고/ 가장 고통 없이 즉사시킨다// 내가 너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살리는 것이다// 속삭이는 주인의 품에 폭 안겨/ 양은 한마디 비명도 없이/ 커다란 눈만 껌벅이고 있다// 하늘의 솜다리꽃이/ 하강한 양// 초원의 말발굽에 밟혀 진동하는 꽃향기처럼/ 제 몸 냄새를 들판에 퍼뜨리지만/ 에튀겐*에게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조용히 별로 돌아가는/ 아름다운 환생을 지켜보는 것 같다//
* 몽골 대지의 신

미미야 미미 / 강신애
133층에서 뛰어내린 고양이// 민들레 풀섶, 난간에 휘날리는 이불 호청, 하수구 속을/ 암만 찾아도 없네/ 죽거나 다치거나 떠났을 고양이// 후사 하겠습니다/ 7개월 된, 두 귀와 코만 까맣고/ 하얀 고양이를 찾아주시면// 아파트 벽마다/ 코팅한 고양이가 웃고 있네// 엘리베이터, 맞거울마다/ 미미야 미미-/ 유리 이빨들 챙강챙강 부서지는 소리// 지하 주차장 자동차 바퀴 틈에 숨어/ 오직 내 목소리에/ 절룩절룩 우는 고양이// 133층 너머가 궁금한/ 스밀 곳이 고작/ 지하 주차장뿐인 고양이// 미안해, 미미-/ 널 발견해서/ 무거운 그림자들 틈이어서//

늦은 장마 / 강신애
한 달 알을 먹지 못해/ 목이 잠긴다// 사료와 물만으로 우화를 잊은 철창// 폐기된 5000만 개의 알들이/ 조롱조롱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 한 나라의 인구가 물구나무 서 있다// 닭들이 죽어버린 도시/ 오리, 메추라기들이 퍼드덕 거린다// 파묻힌 미물들의 맥박이 창을 두드리는/ 마른장마 후의 장마// 아침에/ 계란을 깨트리면/ 당신이 내게 보내준 아른아른한 햇덩이// 하양 노랑 찰랑이는 윤곽에 구원의 침이 돌았다// 알 하나에/ 악 하나가 소멸된 줄 알았는데// 냉장고에 손에 상처에/ 진드기들이 우글거린다// 나는 얼룩진 헝겊과 치자 잎을 태워버린다// 살충제 같은 습기가/ 지리하게 머물고 있다//

푸른 옷의 여인 / 강신애
창가 햇빛에 불거진 힘줄은/ 두 손으로 받친/ 편지 한 장의 무게를 짐작케 한다// 팽팽한 이마/ 반쯤 벌어진 입// 홍조 띤 뺨 너머/ 벽에 걸린 세계지도는/ 그녀를 먼 나라로 데려간다// 등받이 높은 감색 의자 앞에 아득히 서서// 의자를 장식한 금빛 테두리는/ 고요를 못 박고 그녀는/ 어떤 고백에 못 박혀 있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편지를 읽는 푸른 옷의 여인처럼// 혼을 빠트린 채/ 어떤 편지를 읽은 적 있다// 편지를 읽고 쓰는 것은 나의 재능이기도 해서/ 숲에다 뿌린 오디 같은 글씨들이 많다/ 흙 속에서 소곤소곤/ 밀고 올라오는 귀엣말이 많다// 우리는 시간 방향으로/ 빛의 속도로 이동 중이라고 한다// 애착도 은유도 없는 메일과 문자들/ 삭제하고 삭제하며/ 신기루가 사라진 곳에 빛의 빙하기는 어떻게 당도하는가// 뜨거운 종이 한 장에 멈춘 숨/ 서늘한 무아지경이/ 소리로 가득 찬 액정의 도시로 건너온다//

DMZ / 강신애

고라니는/ 무장하지 않고 물을 마시는 동물*// 어느 나라에선/ 물사슴이라 부르지// 물처럼 파랗게/ 손전등을 들이대면 그 자리에서 얼어붙기/ 남북한계선 철책 구멍을 넘어/ 헤드라이트 불빛을 향해 전력질주하기/ 북쪽 고라니 생각에 울다/ 투두둑!/ 미확인지뢰지대에서 몸통이 쪼개지기도 하는// 여기는 낙원입니까/ 시간을 무성한 초록으로 감금해버린 망각입니까// 풀물 든 발굽으로/ 산양이 지나간 물웅덩이/ 개연꽃잎 머금은 고라니가 해작이고 있다// 물구름을 타고 물처럼//
* 고라니 학명, Hydropotes inermis.

잃어버린 매 / 강신애
공포와 분노로 날뛰는 매 앞에서/ 보이지 않는 기술을 익혔을 때/ 매의 발목에서 줄을 풀어 날렸을 때/ 나는 사라지고 매가 되었다// 후드를 쓰고 잠든 털 공룡/ 슥 날아 산비둘기를 덮치는 중일까 우비깃이 펄럭인다// 아직도 매잡이 같은 것이 있다니!/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피의 희생제의를 즐기는 은둔자라고 수군거릴 때/ 낚아챈 토끼의 흉강을 쪼는 야성이나/ 오직 현재뿐인 발톱/ 사다리 타듯 위쪽가지로 오르는 날갯짓의 아름다움에 대해/ 굳이 말하지 않았다// 적운이 하얀 물푸레나무 언덕/ 허기와 광기로 끓는 매를 상승기류 속으로 던진다/ 빼곡한 줄무늬 깃털을 펼치고/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듯 아득한 호루스의 비행// 해 저물도록 어디선가/ 꿩 만찬을 즐기고 있을까/ 신출내기 매잡이에게 불안과 인내는 매와 시치미의 관계와 같다// 뒤얽힌 덤불 속 작은 부스럭거림에도 쫓아간다/ 컴컴한 숲을 헤치고 가쁜 입김을 뿜으며 매를 부른다/ 현기증 일도록 오싹함이 밀려온다// 그날 나는 매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어떤 성역에 들어가듯/ 지금도 그 들판에 가면/ 가느다란 가지 끝에서 바람을 가늠하는 나의 매를 볼 수 있다/ 내가 아무리 소리치고 미끼를 던져도 다가오지 않고/ 머리 높이 원을 그릴 때는/ 꼬리깃에 달아준 황동 종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휘파람 불면 주먹 위로 탁, 내려앉던/ 매의 무게를 그리워하며 나는 집으로 간다// 사냥꾼의 독재와 피 냄새를 간직한 후드가/ 참매 형상으로 갸름하게 횃대에 걸려 있다/ 포획된 매는 더 이상 매가 아니라고/ 푸른 하늘로 휘 떠오를 듯하다//

귀순병사 / 강신애
멀리서도/ 헤드라이트 불빛이 심장처럼 헐떡였다// 노랗게 물든 들판과/ 가로수가 아름다운 포장도로였다// 채널마다 희뿌연 폐쇄회로 영상 속/ 질주하는 지프를 쫒아갔다// 초소와 검문소를 돌파하는 너/ 깊은 배수로에 빠진 너/ 축축한 낙엽에 미끄러지며 전광석화처럼 뛰는 너// 추격조의 총알이 튀었다// 뛰어, 제발,/ 나는 숨이 조였다// 너는 군사분계선 너머 울타리 벽에 짐승처럼 쓰러졌다/ 수북한 낙엽더미가 검은 비린내로 물들어갔다// 고독한 영웅은 반복적으로 상영되었다// 이 세계는 스크린에 불과하다/ 우리는 아슬아슬한 총질을 너의 출신성분을 저울질하며/ 찌개를 뜨고 커피를 마신다// 축 늘어진 너를 끌고 나오는 열감시장비 영상이며/ 볼 수 없는 것까지/ 보고 또 본다// 총알이 뚫고 지나간/ 너의 배를 열었을 때/ 허옇게 눈 먼 손과 잘린 귀가 가득했다//

마더* / 강신애
북서풍과 흉금 사이/ 낙엽이 산다// 저 불그레한 몰락도 다 내 뜻이다// 마더의 배를 쪼개니/ 또 하나의 크리스털 우주가 찬란했다// 난장의 불탄 폐허 속에/ 솜털 보송한 아기 지구가 예비 되어 있다면// 내 배를 쪼개/ 금강을 꺼낼 수 있다면// 초대하지 않은 욕망의 오장육부를 다 소진해도 좋을까// 낙엽과 모퉁이 사이/ 사력을 다해 분계선을 넘어온 빡빡머리 청년이 아직, 숨 쉬고 있다// 꾸부러진 장 속에서/ 옥수수알 잡초 끄덩이만 끌려나왔다// 옥수수알을 심으니/ 누룩처럼 부풀어 올라 커다란 빵이 되었다// 마더가 이 빵을 고루 나누자/ 눈물과 환희가 얼크러졌다// 낙엽과 유두 사이/ 새싹과 북두 사이// 마더가 산다//
*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 (2017)

끝없는 이야기 / 강신애
바람 부는 벌판/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어요// 일시에 까만 강물에 휩쓸린 듯 헝겊을 뒤집어쓰고/ 억센 무리에 끌려// 나는 흙 속에 항아리처럼 박혀요// 갓 스물, 우린 박하향 가득한 설렘으로/ 햇빛 속을 걷고 있었죠 단지 그뿐인데// 지금은 나머지 반이 사라질 차례// 돌이 날아옵니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이후/ 간음도 사랑도 이렇게 죽어갔죠// 돌이 날아옵니다/ 어머니…… 어디 계세요, 아버지/ 길가에서 궁륭의 문턱이 갈라진 그도/ 지금쯤 모래바람에 펄럭이고 있나요// 이 검은 피로 물든 헝겊은 알라의 수의 알라의 신음/ 막 사랑에 눈뜬 저는 지금 눈먼 알라의/ 깨진 항아리예요, 제물이에요// 돌이 날아옵니다/ 그들이 던진 돌이 수북한 들판에서/ 나는 어느 여인의 피 묻은 돌을 맞습니다// 이건 너무 오래된, 끝없는 이야기// 죽어 살인자들에게 돌을 던질까요/ 아니, 그들의 피 묻은 천국에 꽃을 던질까요// 믿음은 왜 모두 돌이 되는 걸까요//

쫓기는 족속 / 강신애
네 입과 코를 막은 모래알은/ 네 무릎을 꺾은 모래알은/ 중랑천 기슭을 흐르다 맺혀 있을 거야// 유목민도 아닌데 사막으로 내몰린 너// 풍속 5m/s/ 영하의 별빛// 쏴-/ 수소풍선이 부풀어 오른다// 하얀 입김들 위로/ 어둠을 찢으며 투명한 기둥이 솟구친다// 전단과 초코파이 1위안 지폐를 싣고/ 평양 너머 해산, 청진, 더 깊숙이/ 철민이* 철민이들을 찾아가라고// 중국 공안에게 죽도록 맞아 기억이 성치 못해도/ 가슴팍 옥죄는 쫓기는 족속이라도/ 아들아, 반짝이는 눈물줄기 같은 풍선을 날리는 것은/ 내가 너를 넘어서는 길// 열등의 시퍼런 우상을/ 피의 면류관 쓴 사내를/ 나를 넘어서는 질경이의 길//
* 아버지를 찾아오다 몽골 사막에서 사망한 탈북활동가 유상준 씨의 아들.

장갑 / 강신애
무덤에 바칠/ 꽃 한 송이 가져오지 않았다니// 장갑 한 짝이라도 두고 올까/ 망설이던 사람/ 영롱한 호수와 석회 맛 나는 포도주, 알프스가 가까운 도시였지// 보르헤스가 첫 시를 쓰고/ 최후로 묻힌 공원묘원// 돌아와 보니 없다/ 오토바이용 가죽 장갑 한 짝// 단순한 묘석에서/ 개똥지빠귀가 깡충거리는 사이 흘렸을까// 달리는 기차에서 떨어진 장갑을 향해/ 한 쪽을 마저 벗어던졌다는/ 열차 바퀴소리처럼 감미로운 이야기도 있지// 어떤 책이든/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없던 보르헤스에게/ 장갑 한 짝은 여담(餘談)일 수도 있지// 살아 육체의 감옥에 갇히고도 쉴 틈이 없던 그는/ 또 하나의 도서관/ 무덤에서 꾸던 꿈 이어서 꾸고 있겠지// 황금빛 매리골드 꽃길로 돌진하던 여름 햇살과/ 상쾌한 속력을 전해주고 싶었을 파란 장갑 하나// 픽션처럼// 눈 먼 우상의 묘석/ 어디쯤 떨어져 있겠지//

푸른 수염 / 강신애
근심 없이 빛나는 바다를 보여주는 당신/ 영원의 비릿한 혀 속에/ 허리가 잠깁니다// 늑대를 사랑하면/ 밤새워 늑대의 생애를,/ 새를 사랑하면/ 깃털에 얼굴을 파묻습니다// 매순간 환희의 미각을 선사하는 당신// 가슴 시린 물빛 수염 빛깔에 허물어지던 나는/ 당신이 주고 간 숱한 열쇠 중/ 금지된,/ 단 하나의 방을 열어젖힙니다// 피의 지하실/ 거기 처형당한 당신의 세월들이/ 살과 뼈 찐득하게/ 못에 걸려 차곡차곡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야 맙니다// 어느 순간, 돌아온 당신 칼에 쫓겨/ 나는 층계를 달립니다/ 높이 더 높이// 긴 잠에서 깨어난 해골여인이/ 푸른 아수라의 피에 물든 반지와 구두를 벗어던지고 외칩니다// 여기 사라진 영혼들이 있어요// 15세기 잔혹 실화의 한 토막을 타고/ 뚱뚱한 나비 여인 마리포사의 야성으로/ 나는 지붕에서 뛰어내립니다/ 해골여인의 들썩이는 뼈가 무너질 듯 나를 안아줍니다// 저 컴컴한 성벽 위/ 하현은 손에 쥔 칼에 산란하고/ 녹슨 실핏줄 같은 수염은 외롭게 바람에 휘날립니다//

액자 속의 방 / 강신애
고흐의 해바라기처럼 걸린 방/ 알고 보니 시든 종이꽃이었다// 키작은 주인 여자가 방문을 열자/ 잡다한 생활의 때가 모자이크 된 벽지와/ 싱크대의 퀴퀴한 냄새// 비좁은 복도를 마주하고 세든 세 가구가/ 공동 화장실을 가다 마주치면/ 서로 스며야 한다// 하루치의 숨을 부려놓고/ 햇빛 한 줄기에도/ 보증금이 필요한 세상// 모든 희망의 문짝이 떨어져나간 대문을/ 허둥지둥 나서니/ 거리의 그 많은 사람들 모두 방이 있다니!// 아니야, 방은/ 액자 그림 속에나 있는 것/ 노숙, 가망 없음/ 그게 우리 지상의 방이야// 생활정보지를 펼쳐 아홉번째 X표를 그리면서/ 방 한 칸을 얻기 위해 걸어다닌/ 일생의 거리를 생각해본다// 목 부러진 해바라기들이/ 투둑 발에 밟힌다//

앵무새, 룰루 / 강신애
플로베르가 순박한 마음을 쓰는 동안/ 박물관에서 빌려온 새.// 석상의 수염 몇 조각은 떨어져 나갔고/ 집은 허물어져 공장이 되었지만/ 앵무새는 그의 작품들과 함께 보존 상태가 좋다./ 100년 전의 눈은 매섭고/ 에메랄드빛 몸통, 장밋빛 날개 끝은 날아오를 듯하다.// 앵무새가 죽었을 때/ 소설 속 하녀는 룰루를 박제로 만들었다.// 가슴에 앵무새 문신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죽어갈 때 비둘기 대신 머리를 맴도는 거대한 성령은/ 인간의 말을 하는 희귀한 짐승이었다.// “멋진 도련님, 감사합니다.”// 무색무취, 순수의 반복적인 발성이/ 무지한 하녀와 플로베르를 하나로 이어주었을까.// 나는 앵무새 같은 하녀에요/ 섬길 줄 밖에 모르는/ 나는 앵무새 같은 작가에요./ 엠마 보바리는 나의 모방일 뿐이죠.// 날개 한쪽이 부러지고 뱃밥이 삐져나온 몸통을/ 말끔히 박제해주는 곳으로 갔을까. 그녀는, 플로베르는// 룰루에게 시간은 단지 먼지일 뿐이고/ 벌레에게 파먹혔던 울대는/ 잊지 않은 그 대사를 말할 수 있겠는데// 박물관 횃대에 앉아/ 파란 이마에 입 맞춰주던 흐린 입술이 생각난 듯/ 갸웃거리며 방문객을 노려보는 앵무새 룰루는//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것 같다.//

유추 / 강신애
건조해지면 네 개의 탄사로/ 바람개비를 돌리는 쇠뜨기 포자.// 꽃잎으로 암벌을 만들고 페로몬 뿌려/ 수벌을 유혹하는 헤머오키드.// 불 나면 연기 맡고 급히 꽃 피우려/ 초록잎에 알콜을 저장한 그래스트리.// (그 불쏘시개는 어느 시인의 술통에서 훔쳐온 걸까)/ 불멸을 향한 씨앗들의 방책을 보면// 영혼 하나 만들어내는 것쯤/ 쉬운 일.//

움직이는 숲 / 강신애
먼나무가 걸어왔다.// 옹이진 무릎에서 방출되는/ 빛.// 나무는 멀어지면서/ 동시에 다가왔다.// 내 앞 어두운 나무들은/ 가파르게 뒤로 물러나는 듯했다.// 투명하게/ 사선으로 움직이는 소로/ 찌르는 향.// 재빨리 숨는 노루, 새와 벌레와 부러진 흙빛 둥치들까지/ 알 수 없는 기체가 얽힌 뿌리의 세계.// 내가 긁어모은 나뭇단을/ 흡수해버릴 듯한 덤불숲.// 단지 겨울을 나려했을 뿐인데// 나는 숲에 삼켜지고/ 나뭇단은 우르르 익사하듯/ 만년의 행간 사이 다른 숲으로 가라앉았다.// 그 속에/ 또 다른 절정이 있는 듯.//

파내온 나무 그림자 / 강신애
그 나무는 브니엘교회 입구/ 가지밭 모퉁이에 서 있었다./ 먼 세상을 내다보는 자세로/ 산책에서 돌아오는 어느 날 나는/ 꽃삽으로 나무 그림자를 들어내기 시작했다./ 토막 난 그림자를 날라/ 내 방에 장판처럼 드리웠다./ 어둔 물관으로 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쪼그려 앉아 나는/ 습자지 같은 잎새에 혀를 대보거나 갈색 차를 마셨다./ 그림자는 조금씩 자라났다./ 가지밭 모퉁이 나무가 그러하듯/ 제 나무가 그리울 땐/ 시선을 옆구리 깊숙이 파묻거나/ 바람도 없는데 나를 떨어뜨릴 듯/ 가지를 흔들어대기도 했다./ 길모퉁이 나무는 없어진 제 그림자를 탓하듯/ 산책길의 내 어깨를 툭 쳤다./ 나는 가만히 다가가 그 나무 밑에 서본다./ 그러면 가느다란 가지를 활갯짓하며/ 내 발치로 고속 촬영하듯 빠르게/ 나무 그림자가 생겨났다./ 가로등 환한 밤, 우리는 이렇게 만나곤 했다.//

여행의 추억 / 강신애
저 사과를 부수어 삼키던 입술은 어디로 갔나// 주루루 모래가 쏟아질 듯한 술병을 기울여/ 한 잔의 술을 맛보았던가// 책을 펼쳐/ ‘기억은 깨진 제비꽃/ 깨져 위 아래/ 왼편 오른편으로 자라나는 종유석’/ 이런 문장을 읽었던가?// 돌들의 중얼거림에 둘러싸여/ 시간이 사람보다 빨리 늙어가는 이곳에/ 다녀가긴 다녀갔던가// 그림자만 흔들흔들……/ 숨결 박힌 화석과 줄넘기하고 있는//

최초의 性 / 강신애
눈을 떴을 때/ 까치와 거리 엔진소음이 들려왔다./ 천천히/ 몸의 굴곡을 더듬어본다./ 부푼 젖/ 그 아름다운 열매가 포실하게 안기고/ 유연하게 허리께로 미끄러지는 손/ 수줍은 물봉선을 건드린다.// 칼과 불의 사다리를 타고/ 죽음 끝/ 사과 끼앗을/ 항성 깊이 심어 넣은 지옥의 시간들// 호르몬이 호르몬을/ 본질이 본질을 바꾸는 고통을/ 신조차 알 수 없었으리.// 거울의 젖을 훔쳐먹고 연명하다가/ 모순의 입술에 담겨 운반된/ 그녀// 흩어진 소설책과/ 고양이가 그려진 물 컵도 그대로/ 갈라진 건 아무 것도 없다./ 제 속에서 쪼그리고 울던 여자를/ 비로소 꺼내놓았을 뿐.// 초록과 먼지가 반복되는 세상/ 침대에서/ 불안한 아름다움 속으로/ 발끝을 세우고 내려오는/ 첫/ 아침.//

오래된 서랍 / 강신애
나는 맨 아래 서랍을 열어보지 않는다/ 더 이상 보탤 추억도 사랑도 없이/ 내 생의 중세가 조용히 청동녹 슬어가는// 긴 여행에서 돌아와 나는 서랍을 연다/ 노끈으로 묶어둔 편지뭉치, 유원지에서 공기총 쏘아 맞춘/ 신랑 각시 인형, 건넨 이의 얼굴을 떠올리게 하는/ 코 깨진 돌거북, 몇 권의 쓰다 만 일기장들……// 絃처럼 팽팽히 드리운 추억이/ 느닷없는 햇살에 놀라 튕겨나온다// 실로 이런 사태를 나는 두려워한다// 누렇게 바랜 편지봉투 이름 석 자가/ 그 위에 나방 분가루같이 살포시 얹힌 먼지가/ 먹이 앞에 난폭해지는 숫사자처럼/ 사정없이 살을 잡아채고, 순식간에 마음을/ 텅 비게 하는 때가 있다// 겁 많은 짐승처럼 감각을 추스르며/ 나는 가만히 서랍을 닫는다// 통증을 누르고 앉은 나머지 서랍처럼/ 내 삶 수시로 열어보고 어지럽혀왔지만/ 낡은 오동나무 책상 맨 아래 잘 정돈해둔 추억/ 포도주처럼 익어가길 얼마나 바라왔던가// 닫힌 서랍을 나는 오래오래 바라본다/ 어떤 숨결이 배어나올 때까지//

숲속의 보물찾기 / 강신애
바이올린 하나 들고 숲속 보물찾기에 나섰네/ 숲의 메트로놈, 새의 목젖은 갈참나무 잎사귀를 똑똑 끊어/ 한낮의 햇살 속으로 던지고 있었네/ 내 점심은 버섯, 새알, 흰꽃은 후식이라네/ 숲은 번식을 준비하는 야생동물의 활기로 가득 차고/ 나는 나무 밑동을 뒤지거나 딱따구리가 파놓은 구멍에/ 손을 넣어보며 덤불 헤쳐나갔네/ 이따금 곰을 만나거나 낙엽의 그물에 걸려/ 꼼짝할 수 없을 때면 바이올린을 켰네/ 신기하게도, 내 몸은 깃털처럼 가볍게 들려/ 숲의 다른 곳으로 옮겨졌네/ 햇살 꺾여 세공 안된 다이아몬드처럼 거친 빛을 발하던 숲은/ 짝을 찾은 짐승들의 벅찬 숨결로 부풀어올랐네/ 그는 늘 감추고 달아나고, 나는 무작정 찾아나서야 하는/ 이 불공평한 게임의 끝은 어딘지 따위의 의문은/ 오래 전에 사라지고 없었네/ 혹, 이 숲에 감춘 보물 따윈 없는 게 아닐까?/ 바이올린 현에 내 슬픔과 격정을 조율하다 보면/ 몸이 가문비나무 울림통처럼 가벼워져/ 우거진 숲에 가리운 늪과, 무서운 짐승을 피해갈 수 있음을 가르치려/ 나를 이 숲으로 이끈 게 아닐까?/ 한 숲이 끝나고 또다른 숲이 시작되는 곳에서/ 나는 그가 숨긴 것이 무엇인지 알았네//

두 겹의 방 / 강신애
나는 그 숲의 불가사의한 어둠을 사랑하였습니다/ 밤이면 습관적으로 음란해져/ 숲으로 들어가면, 숲은 내게로 기울어/ 귓속 차고 슬픈 전설이 흘러나와 발가락을 적십니다/ 나는 노루처럼 순한 눈망울로/ 숲이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에 빠져듭니다/ 며칠 가지 않으면 숲은/ 일없이 가랑잎이나 발등에 쌓아놓고/ 종일토록 심심해합니다/ 내가 길에 뜻없이 굴러다니던/ 옹이투성이 통나무들을 주워다/ 이 숲에 방을 들인 건 언제부터일까요/ 마지막 망치질로 문패를 달고/ 이름 석 자 적어놓습니다/ 길 위에서 방을 구할 때/ 방은 달아나고 찢겨,/ 내 잠은 줄줄 샜습니다/ 따뜻한 뿌리 베고 나는 나뭇결 고운 잠을 잡니다/ 가수가 몇 옥타브 고음을 위해/ 영혼을 수천 미터 상공 어느 한 지점에 띄우듯/ 나는 이 방에서 어떤 출생을 꿈꿉니다/ 신이 땅을 만드시고 숲으로 기름지게 하신 것처럼/ 숲은 내 방으로 그 특이한 어둠을 한 겹 벗을 것입니다/ 까막까치 울음소리로 장작 타들어가고/ 아침밥 지을 때,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흰 연기가/ 이 숲을 밥냄새 가득한 인간의 방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나는 두 겹의 방에서 삽니다//

사막을 파내려가 거기 / 강신애
종일 흰 무덤 목련꽃이 실수로 印畵한/ 저쪽/ 바라보다 퇴근한다// 자곡동 성남 분당 몇갈래로 흩어지던 마음 모아/ 탑성마을에 내리면/ 깊은 숨 몰아쉬는 숲 위로/ 잠언처럼, 떠오르는, 방// 후들거리는 서른/ 눈 깊은 숲과 살림 차려/ 이사온 후로 내 어깨 양쪽은 늘 숲에 젖어 있다// 호주머니 속,/ 치사량의 신기루는 어디론가 새버리고/ 백열등 보얀 내 방으로/ 두근두근 돌아간다// 사막을 파내려가 거기/ 꽃뱀으로 또아리 튼 숲과 나는/ 목련 같은 아이를 가지리라// 모래바람 속, 줄줄이 불려나온 진눈깨비 목련/ 사막은 더 이상 사막이 아니다//

바다의 완력은 당해낼 수 없다 / 강신애
여관 강변장은 성당 같다/ 입구의 청동 인어상을 나는 마리아라고 부른다/ 묵주 대신 커다란 소라를 쥔 한 손은 하늘로 뻗치고/ 한 손은 자신의 음부를 가린/ 半神半魚의 마리아/ 헤드라이트 불빛이 터진다, 찔린 듯 경련하는 조각상/ 비늘이 꽃처럼 떨어진다// 녹색의 개가 비늘을 뒤적거리고/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취객 하나,/ 난산의 안개가 연인의 긴 그림자를 끌고 강변장으로 스며든다// 나직하고 끊길 듯한 목소리로 나를 불러낸 이 누굴까/ 이 밤, 조각상 앞으로// 내가 해 떨어진 아스팔트 길 위에서 중생대의 숲을 그리워할 때/ 상처를 따라가듯 아무도 모르게 성호를 그어보일 때/ 강변장 입구를 뭇시선으로부터 차단한 나무들이/ 이파리를 동그랗게 모으고 속삭인다/ 널 환영해, 여기부터 古典이야// 늦은 영업집에서 전자오르간 소리는 적막을 포장하고/ 네온이 조각상의 봉긋한 가슴에 순교의 푸른 물을 들일 때/ 인어가 오랜 침묵에서 깨어나/ 가만히 소라 하나를 건넨다// 나는 굶주림과 파도와 싸우다 지친 선원처럼/ 허겁지겁 소라에 귀를 기울인다/ 검고 요요한 음향의 회오리……/ 바다의 완력은 당해낼 수 없다//

물가의 집 / 강신애
어떤 사람이 물가에 집을 지을까// 짠내 나는 상점, 좁은 골목을 통과하면/ 바다// 흔들리는 목조 주택/ 접이식 의자// 유리창 속의 항구/ 하늘과 내통하는 바다의 광휘에/ 작은 근심과 떠들썩함 따위/ 훼방꾼으로 여기는 사람이겠지// 고래 분수 위 무지개나/ 보석을 실은 채 가라앉은 선장 이야기// 옆구리에 저보다 큰 참치를 묶고 달리던 배가/ 해변 말뚝에 뚝뚝 부딪는 끽끽 소리에/ 조가비처럼 귀 기울이는 사람이겠지// 이 빛나는 덧없음,/ 광대한 심연에 무릎 꿇은/ 늙은 보헤미안이겠지//

침수된 마을 ㅡ1954년, 스타니슬라프 슈칼스키 그림 / 강신애
태양을 쫓다 각막에 구멍이 난 채로/ 사막을 헤매던 슈칼스키/ 신기루 같은 연못을 발견하고 허겁지겁 목을 축이다/ 물속에 가라앉은 마을을 보았다/ 자신이 그린 성전 같기도 하고 달팽이/ 탑 같기도 한 건물 속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영감과/ 미켈란젤로의 근육과/ 로댕의 관능으로 이룩한 조각상들이/ 거꾸로 잠겨 있었다/ 한 아름도 안 되는 물가에 깊이는 헤아릴 수 없어/ 온몸을 기울여 손을 뻗어보았지만/ 청동의 분신들은 푸른 바닥 더 멀리 가라앉았다/ 슈칼스키는 헉헉 울며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교통사고 당한/ 아버지의 시신을 메고 와 해부할 정도로/ 아버지를 사랑하였고/ 그렇게 배운 해부학으로/ 신체를 학대하기를 즐겼던 이십 세기를/ 수백 점 뒤틀린 조각상으로 남겨놓았다/ 전쟁은 이 슬라브인의 작품들을 모두 폭파해버렸고/ 조국 폴란드는 그를 원치 않았다/ 물에 잠긴 그의 뇌는 뛰어난 도록圖錄이었으나/ 영광의 시절을 추억으로 고문할 뿐이었다/ 숨을 몰아쉬려/ 머리를 든 슈칼스키는 깜짝 놀랐다/ 이 가련한 천재의 물에 비친 모습은/ 자신이 만들어 쓴 알파벳처럼/ 어깨 구부정한 백발의 프랑켄슈타인/ 낯선 미래였다//

Flooded city, Stanislaw Szukalski, Painting, 1954, 61&times;71.2cm


가짜 고기 버거 / 강신애
백 프로 식물성 재료로 만든/ 가짜 고기 버거라고 한다// 콩과 코코넛 지방, 밀가루, 식물성 오일/ 분자 조합으로 만든/ 맛도 냄새도 고소한 돼지고기라고// 이제 먹고 낳는/ 철장에서 벗어난 가축들은/ 한가롭게 들로 물가로 소풍갈 수 있을까// 항생제 없는 신선한 콩고기를/ 싼값에 먹을 수 있겠지// 육식이 끊긴 대지에 성수가 흐르고/ 죽어간 짐승들을 위한/ 우리들의 비가(悲歌)는 끝이 날까// 거짓 위안에 길들여져서/ 가짜 코코넛/ 가짜 밀가루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머리를 물들이는 음모의 기미를/ 삼켜 분해하는/ 양자 오일이 등장할 수도 있겠지// 입자를 버무려 무엇이든 만들어내는 미래가/ 다정하고 모호한 얼굴로 다가온다/ 어차피 우주는 분자의 조합이지만// 미래는 하드디스크에 없고 책에 없고 계획에 없고/ 한밤중 유리창에 붙은 낙엽 쪽지처럼 다가온다/ 노크도 없이//

클라인의 병 / 강신애
꿈에 당신은/ 신혼의 남편을 꿈에 만났다며 웃는다// 스무살 낯빛으로/ 내게 참외 한 쪽을 건네다/ 당신은 문득,/ 당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노란 참외 씨가 흩어지고/ 어머니 주름진 얼굴이 쏟아진다// 꿈은 어디서 오는 후일담일까// 슬픈 자각몽을 선사하는/ 이 항아리는/ 안이 바깥이고 입구가 출구다// 검은 계단이 둥글게 자라나고/ 아치교가 그늘을 빠뜨리는 곳을 따라가다 보면/ 잠의 뒷덜미여서/ 꿈이 평면인지 띠인지 알 수 있다// 당신은 이제 내게 오지 않을 것이다// 꿈인 줄 알면서도/ 깨어나지 못하는 가위눌림 끝에/ 캄캄하고도 신비스러운 병의 내부에서 외부로 흘렀다// 뫼비우스의 띠는 둘로 쪼개진다//

터너*의 원소 / 강신애
증기, 눈, 바람, 거품은 터너의 원소들이다 모슬린 헝겊을 드리운듯 자욱한 아치형 다리들, 종소리가 허물다 만 수도원의 폐허는 터너의 용해된 기억이다// 하늘을 집어삼킨 19세기 공장 흐린 입김들이 굴뚝 밖에서 길을 잃는다 굶주린 검댕이가 골목에 폐에 스민다// 아버지가 종일 깎은 머리카락들이 서로를 끌어안고 있다 고개를 젖힌 사내 얼굴에서 하얀 비누거품이 뭉게뭉게 일어난다 이발소 가득, 거리 밖으로 둥둥 떠다닌다// 소년의 더듬이는 거울에 맺힌 물방울 필체들, 헤아릴 수 없는 터럭들, 바짓가랑이 부풀어 오르는 근대의 뜨거운 기체를 흡착한다 훗날 구름과 불기둥, 비바람으로 칠해질 물과 불의 씨앗들이 거기 런던 뒷골목 소년의 손끝에서 잉태된 것// 사투를 벌이는 증기선에서 눈보라를 직면하기 위해 부러질 듯한 돛대에 자신을 꽁꽁 묶었던 사람// 그 전설 같은 이야기가 배가, 항구가 뒤바뀐 것이든 혹 거짓일지라도 포효하는 바닷물과 폭풍우, 아련한 젖빛 유도등은 소년의 전신에 퍼진 낱낱의 내력에서 흘러나온 것// 물초 된 짐승 앞의 번쩍이는 금속처럼 직면한다는 것, 체험만이 그림이 되고 터너 자신이 되었던 것//
* 윌리엄 터너(1775-1851)

바이칼에 새긴 / 강신애
일망무제 타오르는 분홍/ 노을의 첫 마음, 만년설의 고백// 돌에 이름 새겨/ 바이칼 투명 깊이 던져 넣은 이 있으니/ 최후의 한 방울까지 바이칼은 소년의 첫 마음으로 저리 붉으니// 그날, 빽빽한 자작나무 숲 사이 문득 마주친 곰도/ 백화피白樺皮를 긁던 주머니칼을 떨어뜨리고/ 얼어붙은 너의 눈빛을 기억하겠지// 비뚤게 새겨진 이름은 수피에 돌돌 감겨/ 은빛 자작나무가 되었으리// 바이칼에서 얼어붙고/ 영원히 발굴되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가을은/ 살얼음 언 호수 한가운데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어둡고 차가운 바닥에 떠도는/ 돌 하나를 건져올린다// 밑 모를 수심에 가해진 네 팔의 관성이 박혀 붉은// 어안魚眼처럼 태허의 비밀과 사랑의 전모를/ 만곡으로 끌어안고 잊는 돌을 꼭 쥐고/ 숨을 참으며 떠올라/ 내 앞에 가만히 펼쳐 보인다// 축축한 작은 심장을//

모렐의 섬 / 강신애
해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포스틴/ 모래밭에 펼쳐진 책/ 한 줄기 바람// 물질인지/ 파동인지// 그녀 곁에 덧붙여진/ 풀뿌리 즙에 취한 도망자의 영상이/ 편집된 것인지/ 애초의 사랑인지// 알 수 없네/ 모래알을 씹어도// 섬 전체가 상영되는 섬이라니// 사적인 천국에서 촬영되었던 일주일을/ 영원히 반복하여 사는 사람들/ 그녀 가슴의 재스민 향까지 전파라니// 모렐, 희디흰 여름빛을 반사하는 낯선 주파수 속에/ 먹고 마시던 친구들/ 공기 같은 포스틴은 어디로 갔나// 영혼을 녹슨 기계에 반납해놓고/ 어느 비탈 아래 말라가는가// 파도는 오고 가는데 시간은 가지도 오지도 않는/ 이 아름다운 형벌// 스크린 없이 펼쳐지는/ 두 개의 태양/ 두 개의 섬// 신기루 같은 이야기를 만든 이의 무덤은 부서지겠지만/ 지구가 각도를 바꾸어 조수를 몰아가고/ 기계가 작동을 멈출 때까지// 모렐, 당신의 피사체는/ 잠글 수 없고/ 포말에 젖지 않는 풍경이네//
*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모렐의 발명』에서

푸른 피, 세 개의 심장 ㅡMy Octopus Teacher* / 강신애
그녀는 변신의 귀재// 수백만 년 물속에 신경을 담그면/ 바닷속 온갖 색소를 부려 형상을 만들 수 있을까// 내 피부를 일 밀리씩 맛보며 긴 팔을 뻗어오더니/ 기꺼이 내 모델이 되어주었다// 조개껍데기 갑옷을 입은 그녀/ 아네모네 꽃 핀 그녀/ 다시마 스카프를 빙빙 두른 그녀/ 내 위에서 헤엄치는 사진들로 방은 넘쳐났다// 수시로 검정 양산을 쫙 펼쳐 꼬리를 감추는 오리무중// 상어에게 팔 하나를 뜯겨 동굴 속에 칩거할 때/ 내가 까준 홍합에 입도 대지 않을 땐 두려웠지만/ 작은 새 팔이 자라더니/ 백 일째엔 여덟 개의 팔을 그물처럼 던져 가재를 사냥했다// 온몸이 빨판인 그녀/ 뭍과 물 사이를 매일 오가는 내게/ 이천 개의 손으로 찰싹 안겨올 땐 눈물이 솟았다/ 해변 몽돌밭까지 배웅해줄 때는/ 그녀의 사랑을 확신했다// 그런 그녀가 임신을 하다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열렬히 제 죽음을 기르고 있다니/ 아이들이 태어나자/ 빽빽한 다시마숲 속 멀리 자유롭게 놓아주고/ 사라진 사내를 원망도 없이 쭈글쭈글해졌다// 질투를 하기엔/ 너무 기진맥진해 보였다// 조류에 밀려나온 그녀를 물고기가 찍어먹고/ 걸레쪼가리 같은 몸을/ 상어가 유유히 물고 가버렸다// 검은 물풀에 목이 말리는 악몽은/ 호흡이 다른 경계를 넘어선 대가였다// 푸른 피, 세 개의 심장/ 아홉 개의 뇌로 꿈꾸었을 외계가 불가사의해서// 그녀 동굴 위에 해초처럼 떠 있다// 떠서 그녀의 비린내를 맡고/ 나를 바라보던 길쭉한 동공의 어둠을 생각한다/ 반가사유상의 눈처럼/ 짙은 어둠 속의 빛을// 숨이 막혀 견딜 수 없을 때까지//
* 크레이그 포스터(Craig Foster) 감독의 다큐멘터리.

 

프로빈스타운 / 강신애
갯벌, 수세기 망자들의/ 뼛가루 섞인 재를 모래가 집어 삼킨다/ 숲을 집어 삼키듯// 허리케인이 건드려도/ 도서관은 하얗게 빛났다// 갤러리들은 뒤편에/ 괴짜들의 은밀한 성(性)을 감추고/ 무지개 색조화장을 한 청년들, 나부끼는 삼각 깃발들// 달뜬 욕망과 낙담의 거리에서/ 발꿈치를 들면/ 새끼손가락만큼 흰 등대가 보인다// 레이스포인트, 롱포인트, 우드앤드……// 가뭇없이 사라질까봐/ 등대에 가지 않는다는 말을 비웃듯/ 프로빈스타운을 완전하게 하는 것은 몇 개의 등대다// 저 하얀 등대도/ 불 밝힐 기름창고가 필요하다// 나의 등대엔/ 짐 꾸러미에 담은 고래뼈, 운동화에 얼룩진 파도/ 기원을 잃은 무적소리가 불 밝히겠지// 생수 한 모금을 마시고/ 걸어야지// 바다에 바쳐진 모래의 안간힘을 증명하는/ 케이프 코드/ 또르르 말아 쥔 미늘 끝까지// 천년 후/ 레이스포인트의 불빛이 돼야지//

마가렛, 마리안느 / 강신애
전염될까 소리칠 수도/ 한숨을 쉴 수도 없는 문딩이// 지구의 썩은 고름이 비집고 나올/ 살을 빌려주고도/ 중절과 생체실험의 천형이었지요// 진물 흐르는 등허리, 뭉개진 코/ 맨손으로 문질러 약을 발라주는 부드러운 손/ 환자들은 미안해 울고/ 없는 죄가 씻긴 듯 울었지요// 전라도의 딸 수녀 간호사/ 미감아의 엄마가 되어/ 한 달에 한 번 수탄장(愁嘆場)은 통절의 숲이었지요// 코발트블루 바다 바라보다/ 근원에 닿던 사람들// 먼 나라에서 온 투명한 담청색 눈의 두 처녀/ 칠십 할매 되기까지/ 어린 사슴 모양 섬에서 사슴처럼 어울려 살았지요// 밀려오는 파도의 거동이 배인/ 편지에는/ 늙어 짐 될까 떠난다는 말씀만 방울방울 맺혀있었죠// 낯선 모국에서/ 백사청송(白沙靑松) 그리움의 기슭에/ 치매와 암을 들이고// 마가렛은/ 소록도, 하면 방긋 웃지요//
* 한센인과 그 자식들이 소나무 숲 도로를 사이에 두고 면회 하던 장소.

르 클레지오의 바람 / 강신애
불어, 바람 désir의/ 라틴어 어원은/ 별을 잃어버리고 간절함만 남은 것// 우리 말/ 바람願과/ 바람風이/ 동음이의어라고/ 중세의 수사 같은 벽안의 작가는 말했다// 하늘을 빼앗기고/ 마음을 빼앗기고/ 분출하는 바람// 소용돌이치는 힘이 깜깜한 세계의 광폭을 찢고 떠돌다/ 향수(鄕愁)처럼 자리한/ 그 곳,// 바람은 거기서 씌어진다// 한 밤의 소네트/ 고통에 찬 노래 가락이// 강계와 비무장지대/ 이민자의 총상과 리비도를 넘어// 씌어지고 번져간다// 심연에서 풀무질하는 증오와 사랑/ 비문으로 가득한 환멸과 침묵을/ 덧없이 충만한/ 소나무 숲과 밀밭 사이로 풀어놓는 것이/ 바람의 일// 바람의 공모자들은/ 시시각각// 발효하듯// 노트에 흔적을 남기고/ 바람의 씨앗으로 튀어 날아간다// 속박과 욕망을 벗어나기 위한/ 그 숱한 바람이/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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