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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다영 시인
1989년 태어났다. 201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데뷔.
너무 작은 숫자 / 성다영
도로에 커다란 돌 하나가 있다 이 풍경은 낯설다 도로에 돌무더기가 있다 이 풍경은 이해된다// 그린벨트로 묶인 산속을 걷는다/ 끝으로 도달하며 계속해서 갈라지는 나뭇가지// 모든 것에는 규칙이 있다 예외가 있다면 더 많은 표본이 필요할 뿐이다 그렇게 말하고 공학자가 계산기를 두드린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만 그렇기에 더 중요합니다 너무 작은 숫자에 더 작은 숫자를 더한다// 사라져가는 모든 것은 비유다// 망할 것이다// 한여름 껴안고 걸어가는 연인을 본다 정말 사랑하나봐 네가 말했고 나는 그들이 불행해 보인다는 말 대신 정말 덥겠다 이제 그만 더웠으면 좋겠어 여기까지 말하면 너는 웃지// 그런 예측은 쉽다/ 다영 씨가 웃는다/ 역사는 뇌사상태에 빠진 몸과 닮았다// 나무 컵 받침이 컵에 달라붙고 중력이 컵 받침을 떼어낸다// 물이 끈적인다 컵의 겉면을 따라 물방울이 아래로 모이는 동안 사람과 사물은 조금씩 낡아간다// 조용한 공간에 금이 생긴다// 되돌릴 수 없다//
* 2019 경향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투명한 얼굴 / 성다영
(여기서 시작해)/ (여기서 시작해)/ (여기서 시작해)/ 도시에서 열리는 과일은 대체로 수확하지 않는다 새가 그것을 먹는다 살을 제외한 열매의 다른 부분이 가지에 붙어있다/ 겨울이 지나갈 동안 그것은 얼고 녹는 것을 반복한다 이제 그것은 딱지처럼 나무에 앉았다/ 봄이 되면 저것은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떻게 되지 않는다// 봄에 새로 돋아난 잎과 썩어서 말라비틀어진 열매가 한 가지에 붙어있다// 반복한다// 고기는 고기이기 전에 귀엽고 고기인 다음에는 맛있다 여자는 여자이기 전에 귀엽고 여자인 다음에는 맛있다/ 이상하지 않니?/ (여기서 시작해)/ (여기서 시작해)/ (여기서 시작해)*/ 그러나 누군가에게 법을 지키는 것은 어렵다// 사람들이 내게 말한다/ 죽지 마세요// 고무찰흙으로 포스터를 고정한다/ 더 세게 해봐/ 나는 은유를 해체한다/ 이미지가 흘러내린다/ 남편이 없다면 어떤 죄는 없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간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만든다/ 그는 숲을 헤매다 생각한다/ 이 산에도 주인이 있다는 것이 이상하다/ 우리는 사랑과 정의를 부정한다**/ 우리는 선택하지 않는다/ 왜 멜로드라마는 계급투쟁으로 읽히지 않는가/ 우리는 우리를 이용한다/ 우리는 우리를 구분한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부정한다// 거기서 무얼 하나요, 어린 남자여// 인간에게는 시간성이 없다/ 나는 고향이 없다/ 고기가 그렇듯이// 나는 흘러내린다// 나는 너를 죽여야겠다//
* 데버라 리비, 알고 싶지 않은 것들
** 푸른잔디회 행동강령 중 하나
레디-메이드 / 성다영
지구의 시작은 봄일까 가을일까// 동네에서 강아지와 내가 산책한다/ 대문에서 할아버지가 나와 말을 한다/ 왜 사람 다니는 길에 강아지 다니게 해요?// 공원에서 강아지와 내가 산책한다/ 강아지는 흙과 풀이 있는 곳을 좋아한다 공원은 그런 곳/ 여기는 잔디 보호 구역 들어가면 안 돼/ 벤치에 앉은 연인이 강아지의 목줄을 세게 당기는 사람을 본다/ 무엇으로부터 잔디를 보호하는 걸까?/ 사람?/ 왜 잔디를 보호하는 거지?/ 공원에 놀러 온 사람들이 앉으려고?/ 잔디는 사람이 쓰려고 사람으로부터 보호한다// 나는 오늘 보는 것을 멈추기로 한다/ 나는 선을 넘는다/ 현재는 비윤리적이다/ 거기는 들어가면 안 되는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공원을 지나가는 평범한 사람/ 법을 지키는 것은 쉽다/ 그림자는 가둘 수 없다/ 신은 질서가 없다/ 나는 먼저 웃고 먼저 슬퍼한다/ 나는 정리에 반대한다/ 어두운 기도실에서 기도를 시작한다/ 개인의 욕망은 기도해도 들어주지 않는다/ 이타의 끝은 자살/ 저는 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의식의 흐름대로 쓰는 것이 문학 기법이듯/ 그냥 사는 것도 방법이다/ 버찌가 터진다/ 어디에선가 무언가가 태어난다//
보헤미안 랩소디 / 성다영
이제 나를 시작할 것이다/ 선언은 쉽다/ 대안이 대신할 수 없는 것을 대신하는 동안 조용히 손을 잡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남자/ 나는 꿈에서도 꿈을 꿔요/ 우리는 여기에 있다 집에 가 집에 가/ 엄마 나 여기 있어 돌아가 돌아가/ 부모가 널 낳은 걸 후회할 거야 우리가 이겼다 우리가 이겼다 우리가 우리가/ 신은 견디지 못하는 슬픔을 인간에게 주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봤다 너무 슬퍼서 죽은 사람들/ 커튼이 무거운 소리를 펼치며 내려온다/ 긴장을 품은 채 잠에 들고 깨는 매일/ 여행처럼/ 내일도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더 꿈같은 꿈을 꾸고 싶어/ 커피보다 커피잔이 뜨거워서 마시지 못하는 동안 한 사람이 노래 부른다/ 따뜻한 피부/ 펄럭이는 깃발 소리/ 여름에 더웠던 만큼 겨울에 추울 것이다/ 잎이 떨어진다/ 열매의 색이 짙어진다/ 빛이 나는 겨울 전구/ 최대한으로 살기// 나는 모순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 알랭 바디우
물주름 / 성다영
우리는 합정동 까페에 마주 앉아 있다/ 너는 연필을 쥐고 몇개의 선으로 나를 그린다/ 무언가를 쥐는 방식이 어떻게 운명이 되는지 믿지 않지만 우리가 우리를 놓치거나 잡는다면/ 물 한방울이 떨어진다/ 향유고래 영어 이름이 슬퍼 인간이 뭘까, 그런 생각을 해 유자차의 유자를 씹으며 네가 말한다 번져오는 번져오는 유자 향이 좋다는 생각을 하자 건너편의 청소부가 쓰레기를 트럭에서 다른 트럭으로 옮긴다/ 오래전 인간은 향유고래의 내장을 꺼내 향을 얻었다 머리를 갈라 기름을 얻었다/ 비가 내릴 것 같다/ 쓰레기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진다/ 우리는 우리에게 기대어 걷는다//
행운은 여기까지 / 성다영
시작하기 전에 이미 시작하는 음을 들어봐// 왜 죽음이 순간이라고 생각해?// 이 까페에는 계단이 많다 계단에는 난간이 없다// 건물이 말한다/ 상상하지 않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나는 글자에 갇혔다// 재미없음이 나를 짓누른다/ 누가 나를 방해한다/ 기어코 시인이 되었구나 이제 행복하니?/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끔찍하다/ 나는 견딜 수 없다/ 나는 새를 파는 시장에 가지 않는다/ 나는 개를 사지 않는다// 박제/ 동물의 가죽을 벗긴 다음 솜 따위를 넣어 살아 있을 때와 같은 모양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새롭지 않은 상상/ 인터넷 용어로 쓰일 때에는 타인의 실수나 잘못을 스크린샷 저장 등으로 캡처하는 것을 의미한다/ 카타 콜록의 수화에는 가정법이 없다/ 볼 수 없어도 추억할 수 있다/ 발이 없어도 춤출 수 있다/ 나는 자연과 상관없이 움직인다/ 여기에 뭔가 있어/ 누군가가 누군가의 상상 속에 갇힌다/ 오해하고 싶지 않아/ 그가 둘러본다/ 얼굴은 소유를 거부한다*// 나는 유기되었다/ 쓸모있을지도 모르니 아직 버리지 말자// 원근법/ 이미지가 갇혔다/ 나는 나에 갇혔다// 예수는 겸손해서 남자로 태어났다// 길에서 오줌을 싸듯 남자가 화를 낸다/ 나는 분노를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이것은 예술이 아니다// 나는 창문을 찾아내 열고야 만다// 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여라// 창문이 없다/ 창문을 연다//
⁕ 레비나스
유리 온실 / 성다영
여기 어딘가에 열리는 창이 있을 거야// 사람들이 길을 따라 걷는다// 어는 더워져서 입고 있던 겉옷을 벗는다/ 내가 겉웃을 들어 주겠다고 하자 니는 내 양손까지 들어주고 하고// 신성한 곳에서 사랑을 나눌지도 몰라요/ 다음 가사가 외워지지 않는다// 가사가 정말 좋지 않아요?// 천장 위로 쏟아지는 햇빛// 강아지의 뼈/ 그 위로 부드럽고 빈틈없는 털// 두려움 없는 강아지는 짖지 않아요// 이게 나쁜 일은 다 잊어요// 숨기고 감추는 것은 오히려 우리를 더 해칠 뿐입니다/ 나이와 장애 유무 성 정체성 성적 지향과 관계없이 누구나 안전하게 사랑/ 할 권리가 있습니다// 콘돔 상자 뒤에 적힌 문구를 보고 사람들이 울었다 몇몇은 감동해서 친구/ 에게 메시지를 보내다// 앙상한 나무와 바깥으로 뻗은 가지/ 나무 위에는 건물이 있고/ 창 앞에는 무언가를 보는 여자의 이미지가 있다// 보는 것에는 경제가 있다//
하얗고 깨끗한 손 / 성다영
다시 비가 그치자 새가 날아들었다/새는 집도 없고 옷도 입지 않는다// 하만 그건 새잖아요// 커피가 식어 가고 있다// 교정 기계가 취소선을 긋는다// 커피가 식어 간다// 이렇게 써도 충분한데 왜 굳이 있다고 쓰는 걸까 기계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잎이 우거진 나무에서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는 새를 본다// 기계는 커피의 온도를 안다/ 따뜻한 것과 차가운 것이 식는다는 것을 안다//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는 것은 쉽다/ 카페 안과 밖에는 사람과 사물이 있다 제주도에 난민이 있고 나도 당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있다고 말하지 않아도 있다/ 그래도 말한다// 내가 나처럼 말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슬프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새가 될 수 없다 날개가 있다 해도// 비가 온다// 가지 않는다//
대게의 나라 / 성다영
횟집을 지나가는 사람이 말했다 정말 싱싱하다/ 그렇게 말하고 먹고 싶다는 욕구로 이어지는 것이 이상했다// 대게는 먹이가 없으면 동족끼리 잡아먹는다/ 그것도 없으면 자기 다리를 잘라서 먹는다// 모래도 진흙도 없는 수조에서/ 다리가 묶인 채 레고처럼 빈틈없이 쌓여 있는 큰 게야 누가 너의 이름을 대게로 지었니// 삼 년 전 강남역에서 남자에게 살해당한 여자에게 한 남자가 말했다 다음 생엔 남자로 태어나길 그리고 그는 대게에게 말할 것이다 다음 생엔 인간으로 태어나렴// 나는 바다에서 유영하는 게들을 상상한다/ 더 어둡고 더 깊은 바다/ 그리고 음식에 관하여 생각한다/ 어느 동물권 운동가의 인터뷰/ 엄마가 있거나 얼굴이 있는 것은 먹지 않아요/ 그러나 얼굴이라는 것은 너무 인간적인 생각이 아닐까/ 나는 큰 게 해삼 버드나무 플라타너스 이름을 모르는 나무 우듬지의 아주 작은 벌레의 얼굴을 떠올린다// 여기에 인사하는 나무 있잖아요/ 누군가 말했을 때/ 사람의 손 모양이 아니라 흔들리는 나뭇잎을 먼저 보는 것처럼//
그는 알고 있다 / 성다영
남편이 죽었어요 누가 좀 도와주세요/ 자코메티는 여자가 소리치는 곳으로 뛰어가 방문을 열었다 그러나 무엇을 도와 달라는 것일까/ 여자도 자코메티도 알 수 없었다/ 여행을 떠나고 싶어/ 셔츠를 다려서 가방에 넣는다/ 배우지 않아도 나는 셔츠를 다릴 수 있다/ 자코메티는 보는 것을 하고 싶다/ 알고 있는 것을 잊고 싶다/ 자 이제 모르는 것을 시작하자// 솔직히 말하면 나는 고기를 좋아한다 그래 솔직하게 말해 보자 아버지는 도축자였다 나는 동물의 머리가 꽃잎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 적 있으면서도 외면했다 나는 지나치게 아무 생각이 없었다 지금도 그렇다 더 솔직히 말해 보자 이 글을 쓰는 중간에도 동물 시체를 먹었다// 나의 사랑은 신성하다/ 내가 뭘 모르는지 모르겠어/ 널 좋아해/ 떠오르는 것이 없어도 만든다 나는 작가니까// 상기 이미지는 연출된 이미지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습니다// YH W H// 너무 사랑하는 것의 이름을 부를 수 없다 너무 사랑하면 죽이기도 하지요 봤어요 신문에서/ 왜 여자만 죽어요?/ 울었어요/ 발음하는 방법을 잊어버렸어요/ 실제 상황은 황당하지/ 지어낸 이야기 아니야?/ 너는 누구를 흉내 내고 있는 거야?/ 소재 도둑? 데이트 폭력자? 자코메티?/ 그냥 관심 끄는 거야// 자코메티는 누구를 헐뜯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렇게 덧붙이면 마음이 놓인다/ 그러나 이렇게 끝낼 수 없다 그렇게 끝낸 사람도 있지만/ 내가 몰라서 이러는 것 같아요?/ 이런 말 하면 뺨을 맞겠지만/ 그래도 한다/ 요즘엔 이런 이야기를 하면 큰일 나지만/ 이건 오프더레코드지요/ 여러분 배고프지 않아요?/ 이렇게 끝내면 안 되는 것을 알지만// 우리끼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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