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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병호 시인

by 부흐고비 2022. 6. 14.

김병호 시인
1971년 전남 광주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및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1997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달안을 걷다』, 『밤새 이상을 읽다』, 『백핸드 발리』가 있다.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윤동주문학대상 젊은작가상 수상. 협성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달 안을 걷다 / 김병호
내가 한 그루 은사시나무이었을 때/ 내 안에 머물던 눈 먼 새들/ 바늘 돋은 혀로 말간 울음을 날렸다/ 울음은 발갛게 부풀어 둥근 달을 낳고/ 속잎새에만 골라 앉은 숫눈이/ 돌처럼 뜨겁게 떠올랐다// 그믐 모양으로 흐르던 푸른 수맥의 흔적/ 그 사이로 비늘 떨군 물고기가/ 해질녘 주름진 빛과 몸 바꿔 흐를 때/ 내가 제일 나중에 지녔던 울음과/ 몸담아 흐른 기억마다에 피는 상여꽃// 봄을 앓는 어머니가 누이의 머리채를 흔들고/ 꽃뱀이 누이의 다리를 휘감는다/ 한참 누이를 사랑하던 꽃뱀은/ 은사시나무로 다시 몸을 바꾸고/ 아버지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못으로 나가/ 허리를 꺾는다/ 어머니는 누이를 향해 자꾸만 손나비를 날리는데/ 검은 살의 물고기들이 달려와 은사시잎을 뜯는다/ 아버지는 자정의 종소리로 울리고// 달빛 속의 누이는 한없이 부풀어 오른다// 바람을 읽으면 별이 될 수 있을까/ 잎 큰 나무들이 바람을 모아/ 제 안에 나이테를 그려놓고/ 잎 떨군 나는,/ 눈 먼 새들의 울음을 모아 내 몸을 헹군다//

강가의 묘석(墓石) / 김병호
오래 전에 지운 아버지의 얼굴이/ 내 아이의 얼굴에 돋는다// 밤마다 강 건너에서 손사래를 치던 그 몸짓이/ 날 물리치던 것이었는지, 부르던 것이었는지// 어둔 꿈길을 막니처럼 아리하게 거스르면/ 겨울 천정에 얼어붙었던 철새들은/ 그제야 깊고 낡은 날개짓을 한다// 불온한 전생(全生)이 별자리를 밟고 서녘으로 흐르는 소리// 달이 지고, 해가 뜨기 전의 지극(至極)이/ 강물에 닿기 전, 문득 시들어버린 내가/ 잎 진 나무로 강가에 몸을 잠그면/ 가지 끝에 옮아피는 앙상한 길/ 내 몸 검게 꽃 피는 아버지// 모두가 한 물결로 펄럭인다// 생은 몇 번씩 몸을 바꿔/ 별이었다가 꽃이었다가 닻이었다가/ 유곽이었다가 성당이었다가/ 어제처럼 늙은 내 아이가 되는데// 새벽이 오는 변방의 강가에 기대어/ 아버지와 아이의 멸망을 지켜볼 뿐/ 차마 묘석(墓石)처럼 깜깜하지 못했다//

사랑의 고비들 / 김병호
쉰을 훌쩍 넘긴 여자 시인이 삭발을 하고 타나났다/ 마음에 열이 많어서, 라며 웃었다 누군가, 연애를/ 해보라고 했지만 시인은 연애를 하면 집을 떠나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숨을 수도 없고 찾을 수도 없는,/ 고비 사막 쯤으로// 마흔을 갓 넘긴 남자 시인은 보름 전에 이혼을 했다고/ 고백했다 바람 같은 여자를 잠시 마음에 품었는데/ 지병으로 심인성발기부전증을 앓아, 사랑을 하지 않으면/ 관계를 맺을 수 없어 그만, 부인에게 들키고 말았다고// 자리가 파하고 게릴라성 폭우가 쏟아지는 거리를/ 걷는데, 가죽점퍼의 사내아이와 짧은 치마의 여자아이가/ 우산도 없이, 핸들 꺾인 오토바이를 끌며 걷고 있었다/ 오빠는 오토바이를 타면서 무슨 생각을 해?/ 아무 생각도 안 해, 생각을 하면 죽어// 어디쯤에서 달려왔을까, 저녁은 벌써 고삐 풀린 짐승의/ 거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징검돌이 별자리처럼 빛날 때 / 김병호
금줄친 대문이 어둠을 낳습니다/ 대문에서 토방으로/ 토방에서 사랑방으로 이어진 징검돌이/ 별자리처럼 빛납니다/ 환하고 평평한 징검돌 안에 담긴 어린 내가/ 별을 닮아가는 밤, 할아버지는/ 저녁보다 먼 길을 나섭니다// 눈 깊어 황소 같던 할아버지/ 할머니를 맞던 해 봄날/ 강가 둥글고 고운 돌만 골라/ 새색시 작은 걸음에도 마치맞게/ 자리 앉혔다는 징검돌/ 그 돌들이 오늘밤/ 별똥별 지는 소리로 울고 있습니다// 별똥별 하나, 하늘을 가르자/ 어미 소의 울음소리가 금줄을 흔듭니다/ 미처 눈 못 뜬 송아지가 뒤척이자/ 어미 소가 송아지를 핥아줍니다/ 내 볼이 덩달아 따뜻해집니다// 하늘이 오래 된 청동거울처럼 깊습니다/ 바람은 저녁을 다듬어/ 첫 볕 뜨는 곳으로 기울고/ 내가 앉은 징검돌들이/ 지워진 별자리를 찾아 오릅니다// 삼칠일도 안된 송아지의 순한 잠을/ 이제 할아버지가 대신 주무십니다//

살아도 못살아 본 것처럼 / 김병호
집이 비었다/ 베란다 감 타래의 감들만 반짝인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지나는지/ 오후는 주홍빛으로 말랑해진다// 어머니는 어디 가셨을까// 알력밥솥 김 빠지는 소리가/ 기우뚱 집을 흔든다//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현관에 서 있는 사이// 저녁이 다 건너오고/ 무릎이 무거워진다// 미루어 놓은 말들도/ 지워졌으면 싶은데// 이치(理致)도 없이 한 아홉 살쯤을/ 이어살고 싶어진다// 다녀왔습니다,라는/ 밥그릇 같은 말도 없이//

환한 길 하나 / 김병호
홍제동 봄산부인과 병원 앞/ 수줍은 아내와 난감한 나는/ 서둘러 친가와 처가에 소식을 전하는데// 아이가 먼저 닿아 있었다// 고향 어머니는 산기슭에서 내려와/ 방문 앞에서 서성이던 호랑이를 맨발로 안으셨고/ 처제는 무지개 환한 과수원에서 복숭아를 깨물었다고 하고/ 시골의 처외할머니는 댕기머리 처녀가 되어/ 꽃뱀 한 마리를 치마에 담으셨단다// 호랑이로 복숭아로 꽃뱀으로/ 깜깜한 길을 내달은 아이를/ 홍제동 비탈길 검은 가지의 감꽃들이/ 환히 비춘다// 내가 잠시 우주의 저녁이었을 때/ 한 숨 한 숨/ 거닐었던 숨들이 모여 별자리를 만들고/ 내가 다시 바다의 새벽이었을 때/ 한 눈 한 눈/ 몸 비벼 만든 종소리들이 아침을 이끌었듯이// 슬그머니 아내의 배에 손을 가져다대면/ 아내의 오월 한복판엔 잎 푸른 감나무가 자라/ 지극한 우주가 감씨마냥 잠기고// 손끝에 타오르는 환한 길 하나//

어디만큼 왔니 / 김병호
종소리가 비탈을 타고 내려오네/ 하루내 마치지 못한 기도처럼 간절하고 지루하다네// 절룩거리는 여자는 층계참에 앉아 있네/ 어스름을 기다리는지/ 주름 없이 하얀 무릎이 가파르고/ 약지에 새겨진 반지 자국이 초승달보다 환하네// 사람들은 여자를 독하다 하지// 고이 접어둔 사진이나/ 깨진 거울 조각이 없이도/ 먼발치의 새들은/ 함부로 울음을 지어 일가를 이룬다네// 그런 날은 오한이 깊어 마당이 비어지고/ 밤새 이불 밖으로 나온 발처럼/ 망설이며 지나쳐버린 봄처럼/ 난처한 기색도 없네// 여자의 집은 비탈 아래에 있어 아주 깊지/ 시퍼런 독이라도 있으면 넌지시 풀어주고 싶지/ 종소리도 여자도 저녁도/ 텅, 비어가고// 저 어둠은 누가 녹이는지/ 돌아보면 한낮의 내력은 그새 말라버리고// 삶은 다시 경이에 가까워지지//

난생처음 봄 / 김병호
풀 먹인 홑청 같은 봄/ 베란다 볕 고른 편에/ 아이의 신발을 말리면/ 새로 돋은 연둣빛 햇살들/ 자박자박 걸어 들어와/ 송사리 떼처럼 출렁거린다/ 간지러웠을까/ 통유리 이편에서 꽃잠을 자던 아이가/ 기지개를 켜자/ 내 엄지발가락 하나가 채 들어갈까 말까 한/ 아이의 보행기 신발에/ 봄물이 진다/ 한때 내 죄가 저리 가벼운 때가 있었다//

봄도 없이 삼월 / 김병호

사람이 사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무릎보다 낮은 반지하/ 쪽창에 핀, 손바닥만 한/ 보행기 신발과/ 앞코 해진 운동화/ 봄빛을 모아 출렁이는/ 두 켤레 꽃을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봄도 없이 그 앞을 지나던/ 수백의 연분홍 맨발들도/ 한 번씩 발을 넣어보겠습니다/ 얼굴 없는 걸음들이 지나칠 때마다/ 뽀드득뽀드득 햇살 미끄러지는/ 아이의 잠을 덮겠습니다/ 봄이 혼자만 오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햇살에 힘줄이 돋습니다.//

봄 말고 4월 / 김병호
겨우 1년 남았는데/ 벌써 4월인데/ 자퇴서를 내미는 너에게/ 아무런 말도 묻지 못했다// 분할납부한 등록금이라도/ 돌려받아야 하는 속내를/ 꽃도 피지 못한 한낮에/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들고 온 마음을/ 감히 더듬을 수 없었다// 감추다 들킨 울음처럼/ 여미지 못한 마음처럼/ 천천히 녹아가는 커피만 바라보다/ 너를 보냈다// 언제 좋은 날에 다시 학교에서 보자는/ 헐렁한 인사라도 해 줄걸/ 성마른 등이라도 말없이 한번 토닥여줄걸// 나는 무엇이 두려웠을까// 힘을 다해 피울 것도 없는 것에 대한 경의?/ 지금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안부?// 얼굴 없는 표정과/ 침묵이 위태로운 봄날/ 염려도 없이 수심도 없이// 4월만 옹색하게 되었다//

봄 날의 사진 한 장 / 김병호
늙은 사진사가 어둠을 감았지요/ 하나 두울, 셋/ 세상 가장 뜨겁고 환한 햇살이/ 한꺼번에 터졌지요// 성당의 먼 종소리를 타고 흐르던/ 연분홍 살구꽃잎이/ 꽃무늬 양산에 번지고/ 수줍게 웃던 어머니는, 햇살 속에/ 한없이 부풀어 올랐지요// 꽃의 시간을 모아 색을 만들고/ 뿌리의 시간으로 향을 만들 듯/ 낡은 사진 한 장에 새로 피는 봄/ 어머니는 처녀적마냥 숨이 차오르는 것이지요/ 오래된 가지에 다시 오르는 꽃기운 마냥// 햇살이 잔물결치는 뜨락에/ 연분홍 살구꽃잎 송이송이 날리면/ 그 꽃잎 타고 흐르는 노란 나비/ 너푼너푼 노닐다가 어느 햇살에 몸바꿔/ 내 어머니 되었지요// 봄햇살 양수처럼 흐르고/ 다시 살구꽃잎 날리면, 나는/ 늙은 사진사가 감은 어둠으로 들어가/ 어머니에게 연애 한번 걸고 싶은 거지요/ 봄 햇살 속의 어머니를, 나는/ 그만 처녀로 놓아주고 싶은 것이지요//

봄의 독(毒) / 김병호
화장터 뒤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 산수유보다 수다스럽다// 모닥모닥 목련처럼 피어나는/ 흰 치마저고리의 여자들/ 피고 난 그 틈새에서 만삭의 젊은 여인 하나가/ 노인의 마른 등걸 같은 울음을 연신 어루만진다// 긴 굴뚝 아래엔 내력 잃은 산수유 한 그루 서있다/ 하늘 안 천길 깊이에 묻어두었던 박편의 노랑/ 수천의 꽃잎을 떨구며 죽음보다 멀리 다녀온/ 저 나무는 하루하루 얼마나 더 울음을 삼켜야/ 붉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일렁이고 울렁이다, 살랑이고 출렁이는/ 울음 안쪽의 상처들// 아이들이 사라진 자리마다 산수유가 진다/ 바람이 지나는 연못처럼 울음이 환하다//

참 다른 일 / 김병호
보송보송 잎눈 매단 목련 아래에서/ 한나절 서성거려 본 당신이라면 알 수 있을까// 가지마다 낱낱의 불꽃을 매달고 서 있는/ 유순한 아픔과/ 적막하게 벗은 잔등에 혀를 대는/ 봄바람의 뜨거움을// 찢겨진 마지막 페이지처럼 멈춘 오후 네 시/ 명치에 닿거나 바닥에 끌리는 슬픔 대신/ 뒤돌아서서 그저, 지나가기만을 눈감고 기다리다/ 그만, 울음을 놓쳐 본 당신이라면 알 수 있을까// 먼 산 뒤로만 떨어지던 별똥별처럼 아찔한/ 사랑의 방식과/ 들판 한복판에 멈춰 버린 두 량짜리 기차처럼 막다른/ 이별의 자세를// 그늘 아래에 의자 하나 가져다 놓고서/ 낮달이 질 때까지 꽃이 놓일 자리의 기색과/ 빈 가지에 걸린 구름의 양을 재어 본/ 당신이라면 알 수 있을까// 그새 슬픔도 나의 슬픔이 아니고/ 아직 찬란도 나의 찬란이 아닌/ 그저 지워진 첫 줄 같은 눈동자를// 이른 봄날 오후 한꺼번에 밀려왔던 모든 것을//

냉이국 / 김병호
가로등은 깜박, 깜박 얇은 잠을 뒤척이고/ 담배가게 용길이 할머니도/ 난로가에 앉아 선잠을 데우십니다/ 젊은 아버지 퇴근길의 휘파람처럼/ 눈발이 골목을 길게 휘감으며/ 어깨 좁은 이웃들의 안부를 묻는 저녁입니다// 어머니 시집올 때 해오셨다는/ 자개상 위에서 서둘러 맞는 저녁/ 아버지가 좋아하셨다는 냉이국을/ 두 쌍의 수저가 어깨 세워 사이좋게/ 달그락거리고, 바닥에 가라앉은 뿌리마저 훌/ 훌 들여마시면, 한 그릇으로도 가득 넘치는/ 봄, 난 아버지의 봄마저 마십니다// 멀리 계신 아버지, 마당 한 쪽에/ 싸륵싸륵 눈 쌓이는 소리로 안부를 전하면/ 꽃시절 그리운 어머니는/ 먼 나라로 길을 나서듯 뜨개질을 하시는데/ 조개껍질 안으로 영겁을 지낸 순한 짐승들이 날고/ 꽃구름 사이로 볼 붉은 아이들이 뛰어다닐 때/ 먼 나라에서 어깨 나란히 걷는/ 하이칼라의 젊은 아버지와/ 하이힐, 나팔바지의 어머니// 밤이 깊을 수록 아버지의 안부는 선명해지고/ 어머니는 미닫이에 걸린 달빛으로/ 한 땀 한 땀 봄을 깁고/ 내일쯤 나는/ 다시, 젊은 아버지를 만날 수 있겠습니다//

동백 / 김병호
개척교회 마당에/ 눈이 내린다// 절름발이 목사는 처녀와/ 야반도주를 했다// 낡아 못 쓰는 악기처럼/ 캄캄하게 패인 발자국들// 혼자 남은 사모의 찬송가는/ 밤새 그치지 않는다// 겨울이 가 닿는 그 먼 나라엔/ 안개도 농담도 없겠다// 절뚝절뚝 맨발로 건너온/ 꽃이, 가지에 앉는다// 뜨겁고 부드러워/ 무를 수도 없는/ 빈/ 집//

겨울 담쟁이 / 김병호
막다른 골목/ 부딪힌 뒷걸음// 어둠 속미면/ 더 잘 보이지// 얼굴도, 목소리도 없이/ 막 다다른 맨발// 도망칠 수 없지/ 담장 밖으로 꺼낼 수도 없지// 저만치에, 멈춘/ 절름발이 고양이// 한때, 고양이였던/ 아직, 검고 바싹한 고요// 그걸 겨울/ 아니면 우리라 할까// 그물에 걸린 새처럼/ 불 꺼진 수조의 비늘처럼// 아프고/ 다정해서// 밤이 되어도 거둬 가지 않는, 입술들/ 밤새 덜컹이다 부러지는, 발자국들// 다음에/ 이 다음에, 라는 슬픈// 연고가 없어/ 이제 저는 웬만합니다//

오래된 집 / 김병호
남자는/ 돌아갈 먼 길을 생각하는데,// 한숨이 움파처럼 돋아난/ 감또개 그늘 안에서/ 여자는/ 종일 항아리를 씻었다//
* 감또개: 꽃과 함께 떨어진 어린 감

이름 없는 풍경 / 김병호
내 앞에서 짜장면 곱빼기를 먹고 있는 친구는/ 길 한복판에서 십 년 만에 마주친 옛 여자의 뒤통수를 치고는/ 곧장 달음박질쳐 왔단다// 펑펑 울 일은 아니지만/ 한 번 더 목숨 버릴 일도 아니지만/ 갑자기 급소가 사라져버렸다며/ 친구는 서둘러 면발을 끊는다// 후회나 막심 따위가 세월이나 허기와 연루된 한낮/ 배갈 두어 잔에 타박타박 기우는 친구가/ 먼 데 붉은 구름을 데불고 온다/ 구름 속에서 자꾸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난다// 개평처럼 한낮이 지난다/ 내 소관을 벗어난 안부다// 나도, 그대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나/ 고드름처럼 차갑고 가벼운 이름 하나/ 마지막 판돈처럼 반질반질 윤이 난다//

첫눈 / 김병호
밤새 짐승이 울었다/ 해질녘에 다녀간 사슴이라 생각했다/ 새벽은 검고 울음은 뜨거웠다/ 당신은 그때부터 있다/ 눈밭 한가운데서 길을 잃고 서있는 당신을 보았다/ 첫눈을 온몸에 새겨 눈물을 가리는, 당신/ 빈 가지에 별자리를 묶고 싶은, 나/ 아흐레쯤 굶은 짐승의 뱃속 같았다/ 그 안에서 입술들이 날아든다/ 울음을 떼어낸 입술들/ 내 것도 아니고 당신 것도 아닌/ 심장이 다 부르트겠다//

어제부터 첫눈 / 김병호
기척도 없이 눈이 온다/ 문상 나서는 새벽길/ 놀이터 벤치에 빈 컵라면이 놓여 있다/ 누군가 밤새 키운 붉은 열매/ 주인은 발자국도 없이 어디로 갔을까/ 주먹으로 얼굴을 닦아 내리듯 눈이 온다/ 목마른 메아리도 함께 온다/ 빈 기침이 첫눈의 배후로 남은 새벽/ 서둘러 잠을 깨운 것들이 따로 있다/ 잘 견디다 갔을까,/ 구름 속의 고드름처럼/ 눈을 감았다가 오래 감았다가//

눈 녹는 밤에 / 김병호
눈 녹는 소리에/ 한밤이 잠깁니다// 낮에 혼자서 만든/ 눈사람의 얼굴은/ 뭉개져 있습니다// 눈이 다 녹고 나면/ 다시 이름 없는 별로/ 떠내려갈 것 같습니다// 묵은 솜이불을 덮고/ 창밖 낮은 구름을 보면// 짐승처럼 당신을 껴안고/ 사는 날들이 점점/ 꿈과 같아집니다// 제 울음인지도 모르는 이 이별은/ 나의 일이 아닌 듯싶기도 합니다// 당신 바깥에 두고 온 저문 강물 소리/ 언젠가 내가 접어 두었던 울음소리/ 사이로 타이르듯, 토닥토닥/ 눈이 녹고 있습니다//

몬순(monsoon) / 김병호
주인은 어딜 가고 허공에/ 심장만 내 걸었을까요// 담벼락에 달린 붉은 발자국/ 나달나달 일렁이는 햇살// 새끼 잃은 어미의 젖가슴 같은 열매들/ 붉은 잇몸을 드러낸 둥그런 눈물들// 사내가 시인이라고 했던가요// 그늘 속에 곰곰이 몸 구부린 어머니가/ 한 장 한 장 낙과의 그늘을 헤아리는 심사// 바람의 몫처럼 섞어가는 살점의 단내/ 온몸의 뼈마디에 스민 얼룩// 다리도 전다고 했던가요/ 저편에 꽃을 놓고 이편에 몸을 부린/ 무화과처럼 시퍼렇게 녹슨 누나의 방// 괜찮니/ 괜찮아// 비구름은 떠났지만/ 웅덩이처럼 고인 기적들// 기다리는 일도 없이/ 여름이 서둘러 가는 까닭입니다//

슬래브 지붕 위의 구름 / 김병호
저곳엔 물고기 서너 마리쯤 살고 있겠다/ 그것들의 울음소리를 듣느라 밤새 몸이 시리겠다// 낭떠러지라도 생긴 양, 어떤 연애가/ 화석처럼 선연히 오려진다// 사랑이 이마에 와 닿는 사이/ 고백도 없이 구름 두 점이 지나간다// 그중 하나는 이명(耳鳴)을 닮고/ 그중 하나는 염문(艶聞)을 따라간다// 눈도 귀도 없이/ 투명한 심장들이 뛰어내린다// 지붕은 오래전 세 든 사람처럼/ 새벽을 내어 준다// 잎도 꽃도 없이 달이나 키우는 나무/ 나는, 서둘러 늙고 어진 나무가 되어야겠다// 가장 먼저 닿은 빗방울이/ 지붕에 스미는 속도를 기억하고// 함박눈에 가장 먼저 가닿은/ 창백한 마음을 잊지 않아야겠다// 사랑의 틈새와/ 생의 간격과/ 고독의 편차// 창을 열면 오래 흩날린 깃발처럼/ 구름이 지붕에서 반짝인다//

나라서적 / 김병호
순서 없이 서성거리는 사람들/ 얇은 표정으로 오목해진 걸음들// 너무 오래 기다리거나/ 아예 오지 않은/ 그이들은,/ 지금쯤 어디에 닿아 있을까// 입김 덧쌓인 창유리로/ 길고 맑은 이별은 흘러/ 캐럴을 연주하는 금관악기처럼/ 반짝이다 고이는데// 검은 목폴라 속의 짧은 목례처럼/ 따뜻하고 그윽했던 시간/ 당신은 서둘러 어른이 되고/ 나는 이제야 당신의 침묵을 읽는데// 새벽녘 창을 열면/ 생에 처음인 듯 눈이 내리고/ 당신이 가져갔던 시간 속으로도/ 눈이 내리고// 어제는 오월/ 오늘은 십일월인, 나는/ 공중전화 부스에 맴돌던/ 말랑한 구름이 된다// 내 청춘의 심장부가 있다면/ 충장로 우체국의 맞은 편// 밤새 태어난 행성처럼 반짝이며/ 금간 스노우 볼처럼 반짝이며/ 당신이 있던 곳// 짧은 서정시처럼 눈이 내리지만/ 나의 몫은 아니었던,//

나무와 나는 / 김병호
나무가 멀리로 떠나지 못하는 까닭은/ 제 몸에 쟁여놓은 기억이 많아서이다// 얼룩종달이새의 첫울음이나/ 해질녘에서야 얇아지는 바람의 무늬/ 온종일 재잘대는 뒷도랑의 물소리들/ 나무는 그것들을 밤새 짓이겨 동그랗게 말아 올린 다음/ 오돌톨한 뿌리에 불끈 힘을 주고선/ 새벽녘, 달 지고 해 뜨기 전의 막막한 시간을 기다려/ 온몸을 털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새 멀리로 돌아온 그것들이/ 하루내 팽팽해진 연두빛 그늘로 몸을 바꿔/ 나무의 부르튼 발목을 보듬기 때문에/ 나무는,// 차마 멀리로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무는 이제/ 밤마다 제 안을 헐어 바람을 내보내고/ 어두운 날개의 날것들에게 제 몸을 내어준다// 그리하여 그대의 저녁 햇살 속에 서있는/ 잎 많은 나무가, 게으른 해시계처럼/ 어둠의 부피를 줄였다 늘릴 때/ 나무가 거느린 빽빽한 어둠들이/ 그대의 기억을 흔들 때/ 혹은 그것들의 수척한 눈빛이/ 그대 언저리에 닿을 때/ 가늘게 금이 간 창문 안에서/ 오후의 해거름을 지키고 있는 나는/ 여전히 그대를 기억하는 것이다.// 나무가 제 이름을 가지에 걸쳐놓고/ 먼 곳을 그리듯이//

스냅 / 김병호
꽃이 지는 소리에/ 한밤이 잠깁니다// 꽃이 다 지고 나면/ 다시 이름 없는 별로/ 떠내려갈 것 같습니다// 지는 꽃들도 저가/ 지루합니다// 묵은 솜이불을 덮고/ 창밖 낮은 구름을 보면// 짐승처럼 당신을 껴안고/ 사는 날들이 점점/ 꿈과 같아집니다// 꽃이 지는 소리는/ 강심에 얼어붙은 배 한 척입니다/ 얼음도 햇살도 아닌/ 그저 허공의 물결입니다// 제 울음인지도 모르는 저 이별은/ 사람의 일이 아니어야 합니다// 당신 바깥에 두고 온 저문 강물 소리/ 언젠가 내가 접어두었던 울음 소리/ 사이로 타이르듯, 토닥토닥/ 꽃이 지고 있습니다//

누가 괜찮아, 했을까​ / 김병호​
온데간데없이 까맣게 흐느끼던 사내는 괜찮아 괜찮아/ 다 꿈이니까, 다독이는 말에 겨우 숨을 골랐지// 십년 전의 내가, 십년 후의 나를 보는/ 꿈속에서 다시 꿈을 꾸는, 그런 꿈// 사내는 기적 없이 기척만으로도/ 살 수 있겠다, 싶었겠지// 아주 떠날 사람처럼 발을 묶고 노래를 묶고/ 기껏 뒷모습인척, 하고 있었는데// 꿈속의 사내나 꿈밖의 사내나/ 실은 전력으로 달아나고 싶었는지 모르지// 그때 사내가 슬펐다면/ 함박눈이 되었을 텐데// 그때 사내가 두려웠다면/ 당나귀가 되었을 텐데// 거기가 어딘가요/ 우두커니, 사내에게 묻지도 못했지// 떠나온 적도 없이 함박눈이 내리고/ 당나귀의 행방도 모르고// 젊지도 않고 늙지도 못한 사내는 잠결에 오줌 누려 다녀온/ 몇 발자국이 한 생이라 여겼지// 눈 위에 다시 쌓이는 눈처럼 꿈에서도/ 깨고 나서도, 자리를 따질 순 없었지// 이다음이 없을 것처럼 너무 멀리 와 버렸으니까/ 나는 이곳에 와 본적이 있는 것 같으니까//

커브(Curve) / 김병호
소식이라도 한번 주지 그랬나요/ 하늘에도 커브(curve)가 있어 별자리나 구름이 급히 기우는 자리가 있습니다/ 당신이 봄을 앓고 망명을 오래 생각하는 동안 오후는 다만, 다정한 거짓말에 몰두하는 자세입니다/ 섭섭하지 않은 궁리와 아무렇지도 않은 수작으로 마음속에 마음을 잠급니다/ 이제, 당신 없이도 고독을 매수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짧은 치마의 백핸드 발리처럼 훌쩍, 넘어오는 명랑한 이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덜거덕거리는 울음을 들여다보면 그제야 꽃이 지는 기적이 있습니다/ 구름과 허공 사이에 놓인 당신을 넘어 질주하는 허기는 까맣고 딱딱하게 오후를 태웁니다/ 당신은 우주에 떠 있는 커브 안으로 사라집니다//

일요일 / 김병호
하늘에도 여울이 있어 별자리나 구름이 급히 휘말리는 자리가 있습니다// 당신이 봄을 앓고 망명을 오래 생각하는 동안 오후는 다만, 미적인 거/ 짓말에 몰두하는 자세입니다// 섭섭하지 않은 궁리와 아무렇지도 않은 수작으로 마음속에 마음을 잠/ 급니다// 소식이라도 한번 주지 그랬나요// 이제, 당신 없이도 고독을 매수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짧은 치마의 백핸드 발리처럼 훌쩍, 넘어오는 명랑한 이별을 기억하/ 고 있습니다// 덜거덕거리는 울음을 들여다보면 그제서야 꽃이 지는 기적이 있습니다// 구름과 허공 사이에 놓인 여울은 당신을 넘어 질주하는 허기와 연루/ 되어 있습니다// 허기는 까맣고 딱딱하게 오후를 태웁니다// 당신은 우주에 떠 있는 텅 빈 원 안으로 사라집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 / 김병호
두고 온 것이 많은 어제는 꽃나무의 어둡고 끈끈한 허기와 닮았습니다 고모는 봄을 다 산 꽃나무가 그을음 속에 시퍼렇게 숨는 도 허기 탓이라 했습니다. 새로 나고 드는지 이십삼 층 베란다엔 하루 내내 사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그르렁 그르렁 아니 그랑 그랑, 녹슨 미닫이를 기어이 여닫는 소리 같기도 하고 미움 없이 상처를 핥는 짐승의 신음같기도 한데, 죽는 것보다 늙는 게 더 무섭다고 말하던 고모는 꼽추로 팔순을 넘겼습니다 고모를 볼 때마다 먼 곳을 오래오래 걸어 다녀온 기분이 들었습니다 세상에 낳고 키운 하나 없다고 비밀도 함부로 없는 건 아니었습니다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꾸 물녘만 서성이던 고모를 보면 어쩌다가 서서는 사람처럼 깎아놓은 지 오래된 사과처럼, 어제가 멈춘 게 아니라 한꺼번에 지나갈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모의 젖은 흙발자국이 마르는 시간과 고모가 사다 준 딸기 맛 아이스바가 녹는 시간의 사이에는 또박또박 건너오지 못한 어제가 있었습니다 서른이 넘고 마흔이 넘고 쉰이 되어도 나는 다만 어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꺼워져 가는 어제의 바깥이 저물녘이 다 되어도 말입니다//

백야 / 김병호
손잡이 뜯긴 장롱은 하루 만에 치워졌는데/ 거울은 며칠째 제자리다// 빈집처럼 작은 발자국들은 얼어 있고/ 표정은 닳아 없어진 겨울 골목// 착하게 살다 가장자리로 나선 거울은/ 어떤 궁리를 하고 있을까// 외롭고 치명적인 몇 장의 구름과/ 두 겹의 생처럼 핀 십이월// 함박눈 몇 장이 얼굴을 들이민다/ 도무지 닿지 않는다//

아무렇게나 사랑이 / 김병호
크루아상처럼 접힌 어둠을 뒤적이면/ 새로 생긴 주저흔이 반짝거립니다/ 맡겨놓고 찾아가지 않는 푸들 같습니다// 뒤꿈치에 붙인 반창고가 자꾸 밀립니다/ 모서리 없는 계단에서 미끄러진 슬리퍼 탓입니다// 이런 날은 자면서도 발끝을 오므립니다/ 꿈에서도 말을 더듬습니다// 문법이나 행간 없이도 이해되는 친절한 악몽입니다/ 꿈이 길지 않으니 내일쯤 당신이 당도하겠다 싶습니다//한쪽만 들리는 이어폰을 끼고 눈을 감으면 간신히 슬퍼집니다/ 거짓말을 할 때마다 혀를 씹는 버릇 탓입니다// 속도 없이 커브를 도는 심야버스처럼 당신이 덜컹거립니다// 제발, 내려주세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달래고 타일러도 소용이 없습니다/ 본래의 뜻과 당신이 멀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흐르지 않고/ 사랑이 어디인지 묻지도 않습니다//

네게 줄 이름이 없어 / 김병호
우두커니/ 늙은 나무가 꽃을 내밀고 있다// 천둥이 갈라지며 잠그는 발소리/ 천 리 밖으로 떨어지는 발자국/ 하는 수 없이 돌아가는 천 근의 울음// 가파른 물매를 다녀오고/ 수척한 바람 끝을 다녀온 것뿐인데/ 사랑은 닳지 않고// 반질반질 닳아 버린 모퉁이를 돌아/ 불현듯 저녁이 오고/ 울 일도 없이 저녁이 가고// 그 사이 덜컥, 피는/ 붉은 꽃// 늙은 나무에 기댔던 이녁들에/ 차가운 심장을 꺼내 주지만// 차마 네게 줄 이름은 아직 없어라//

한여름의 폭설 / 김병호
오후 2시는 고양이의 게으른 발걸음처럼/ 얼마나 느린 걸음을 가졌는지// 서너 개의 옹이를 지녔던/ 천변 동시상영관의 풍경들은/ 어디로 서둘러 흘러가곤 했는지// 마른 진창 같은 화면으로 비가 내리고/ 가끔 무딘 휘파람도 날았지만/ 관객들은 폭풍 속의 섬처럼 겨우 떠 있을 뿐// 남도카바레와 사직당구장, 에덴여인숙/ 층층의 네온사인에 불이 들어오고서야/ 겨우 지상으로 내려올 수 있었던 시절// 나는 천둥과 벼락의 종족이었는데/ 힘센 낙타처럼 툭툭 털고 일어서고 싶었는데/ 태양 아래 하얗게 끓어오르던/ 그 길들은 그새, 어디로 사라졌는지// 한여름의 길들이 폭설에 묻혀/ 저녁보다 먼저 어두워지던 시절//

우주사막 / 김병호
잠을 자던 아이가 갑자기 칭얼거린다/ 무슨 나쁜 꿈인가 싶어/ 얼른, 아이를 품에 안는데/ 다시금 온몸을 떤다// 어디를 다녀온 길일까// 생이 생을 건너는 순간을/ 나도 다녀온 날들이 있다// 허방을 딛고 떨어지는 별똥별처럼/ 바다보다 긴 목숨으로 시간을 밀고/ 아침을 얻기 전의 숨들이 고여 있는 곳// 그곳을 다녀온 자들은/ 별을 잃고 비밀을 얻어/ 고아가 된다// 지상에서 익힌 모든 이름들이/ 하룻밤 새 하얗게 세어버린다//

이월 / 김병호
신작시 청탁을 했습니다/ 시인은 가타부타 말이 없이 점심이나 하자 했습니다// 아직 꽃이 오지 않아 바람이 찼습니다// 시인은 냄비 속의 조린 무를 찾아 고봉밥 위에 올려주며// 시는 나중에 줄 수 있겠다, 했습니다/ 대학생이 되는 막내딸 이야기와// 새로 배우는 동시 이야기도 했습니다// 며칠이 지나고 출가 소식을 들었습니다// 툭, 툭, 돌멩이를 차며 걷던 뒷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봄이 지나도 이월이 가지 않았습니다//

​ 달그림자에 사는 일 / 김병호
당신이 그랬듯이 꽃이 다 지고서야 봄을 알았지/ 싸리비로 꽃잎을 쓸면 겨우 지운 이름에 다시 얼룩이 지고/ 누가 오는지도 모른 채 하루내 기다리는 사람처럼/ 무릎을 안고 가만가만, 가만히 눈썹을 뜯어 하늘에 붙이지/ 그러면 쇠를 부리는 대장장이가 어디 있어 꽃니 자국 같은 섬광을 비춰주지/ 당신이 그랬듯이 봄은 다시 오지 않을 테지만 녹슨 철문 닫듯 그래도, 밤이 오면/ 나는 시치미 떼듯 번듯한 표정으로 초승달을 따다 이마에 붙이겠네/ 뒷짐을 진 채 궁리도 없이 안녕을 들여다보겠네/ 마음이 묶여 다리가 없는 나는 구름 너머의 빗소리를/ 약으로 들으며 오늘도 빚지는 일만 늘어가겠지만//

잘 모르는 사람 / 김병호
한참 늙어 가야 할 얼굴로 앉아 있습니다/ 대합실은 우주의 바깥보다 고단합니다/ 아직 거슬러 받지 못한 셈이라도 있는 듯/ 닳아 없어진 표정의 사내는/ 첫차로 문상을 가야 합니다/ 부르지 못한 이름은/ 함부로 밟은 금처럼 차갑습니다/ 더는 기다릴게 없는 사람처럼/ 슬픔을 믿지 않기로 합니다/ 어제는 경이롭고 내일은 뼈아픕니다//

마지막 문병 / 김병호
아직 이름이 없는 병이어서/ 지나가고 있는지 돌아오고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어제의 안부나 일용할 다행은 지루하고/ 그저 함부로 아름다워져 날마다 태어나고 싶다고 했다// 억울한 표정은 닳아져 여하한 밤이 많아졌지만/ 눈에 띄면 외로워지는 투명인간처럼/ 너는 매번 저만치에 있었다// 선량한 잠은 멀고, 젖은 발자국만 가득한데/ 너의 무릎을 베고 눕고 싶었다// 너는 이미 오래 살고 있을까,/ 생각하면 가장 어두워졌다// 파도처럼 바람이 분다/ 안녕도 없이 때아닌 꽃들이 피어있다/ 불시개화(不時開化)// 오로지 너만이 저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도 없는 정류장에 한참을 서 있는 막차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병실에서/ 나의 죄가 너를 알아볼까 몹시도 두려운데// 어떻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너는 묻지 않았다/ 대신 실그러진 미간을 쓰다듬어 주었다//

숲으로 행진 / 김병호
저 고양이는 단 두 개의 표정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를 위협할 때와 짐짓 무시할 때의 표정인데/ 길고 뻣뻣한 수염의 각도만으로/ 신박한 표정을 만들어낸다// 담벼락을 등지고 울음 없이 버티는 저 자세는 어느새 폐허를 건너온 연대(連帶)이고/ 표정 하나 없이 살다, 다 잃고 돌아온 나의 오늘 밤은 표류에 가깝고/ 여리고 홀연한 대치, 시커먼 벚나무를 사이에 둔 눈빛만 환하다// 오늘이, 꺾어 신은 운동화 뒤축 같은 부끄러움이라면/ 빙하에 묻힌 시신의 표정 같은 안부라면/ 내일은 저 벚나무 그루터기쯤이 되겠다// 메마른 발자국 가득한 들판을 떠돌며/ 뿔도 없이 수염 하나로 어둠과 싸우는 저 투지를/ 죽은 자리만 떠돌아, 죽어서도 떼어낼 수 없는 저 울음을/ 나의 전생이라 하면 안될까// 새들이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담벼락을 가린 나무들 사이로/ 하품을 하며 돌아서는 고양이가 말한다// 그럼, 같이 갈래?// 죽음을 데려갔다가 놓쳐버린, 숲 속으로 행진/ 검고 축축한 발자국들이 얼어붙어 있다//

저녁의 계보 / 김병호
바꿔 내온 잔에도 금이 있었지만/ 뒤돌아서는 여주인의 맨발을 보고는/ 말을 삼켰다// 창마다 고인 저녁 밖에선/ 계집아이 하나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제 몸에 그믐을 새긴 잔이나/ 뒤늦게 이혼을 이야기하는 아버지나/ 무릎 오그리고 앉아 울고 있는 저 아이나// 누구에게나 하나의 이름은/ 지우지 못한 금이다// 금이 간 저녁이/ 당신을 지난다//

 

아무의 노래 / 김병호
기차가/ 지나간다// 이곳은 바다에서 먼/ 나흘쯤의 밤낮/ 당신의 위로가 세상의/ 나머지가 되던 시절도 있었다// 느리고 텅 빈 시간을/ 모퉁이도 없이/ 기차가 지난다/ 기적은 어떤 밤이 된다// 나는/ 아직,/ 이 나라의 말을/ 배우지 못하였다// 지평선만큼 긴/ 자정을 지난다/ 기차가 지나면/ 눈이 내릴 것이다// 마음을 깃발처럼/ 펄럭일 수 있다면/ 기적은 노래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아무의 모과 / 김병호
내가 다 늙어가는 사이/ 그믐 말고 초사흘쯤 지나는 달빛으로/ 한자리에 고이는 일도 없이// 처마 끝 빈 새장처럼 움푹 패인 울음/ 음정과 박자를 잃은 거짓말/ 첫서리 같은 이름을 더듬는 마음의 바닥// 잠시 슬펐다가 외롭다가 다시, 고요해지는 사이/ 뿔 달린 짐승의 눈망울처럼 새벽이 지고/ 애먼 이 하나 없는 먼 길이 앞에 놓이고// 어느새 빈 뜰에 내리는 빗줄기를 쳐다보는 일처럼/ 새까맣게 닳아버린 당신의/ 창가에서, 혼잣말처럼 썩어가는 모과//

아무의 잠깐 / 김병호
나무로, 새로, 왕으로 태어날 수 있다면/ 바람이나 강물로도 살아갈 수 있을까// 성에 낀 창문과 말갛게 씻긴 지붕과 우듬지의 빈 새집과 서쪽 지평선 위의 성좌가/ 반짝인다, 아주 잠깐// 너는 내 옆에서 몸을 구부린 채 잠들어 있다/ 네게 이 별의 이름을 주지 않았을 때/ 네가 나의 운명에 속하지 않았을 때/ 너는 무엇이었을까// 궁리를 하는 사이,/ 새벽이 다시 어두워진다// 네가 뒤척일 때마다 바람과 얼음과 울음은/ 나의 몫이었으면/소금돌을 핥는 꿈에 시달리다 맞은 새벽도/ 다만 내 것이었으면// 창밖으론 서리가 붐비고/ 긴 유랑에서 돌아와 앓는/ 몸 밖으로 잠깐씩 달이 자란다// 아직 내게로 오지 못한 것들이 남았을까/ 순한 짐승의 뼈로 만든 피리/ 같은 울음이 밤을 흔든다/ 눈만 흰 새의 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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