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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륭 시인

by 부흐고비 2022. 6. 13.

김륭 시인
1961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본명 김영건. 신문사 기자로 일하다가 2007년 《강원일보》,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살구나무에 살구 비누 열리고』, 『원숭이의 원숭이』, 『애인에게 줬다가 뺏은 시』와 청소년시집 『사랑이 으르렁』, 동시집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 『삐뽀삐뽀 눈물이 달려온다』, 『별에 다녀오겠습니다』, 『엄마의 법칙』, 이야기 동시집 『달에서 온 아이 엄동수』, 『첫사랑은 선생님도 일 학년』, 『앵무새 시집』, 동시 평론집 『고양이 수염에 붙은 시는 먹지 마세요』, 그림책 『펭귄오케스트라』 등을 펴냈다. 1988년 불교문학 신인상, 2005년 월하지역문학상, 제2회 문학동네 동시문학상, 제9회 지리산문학상, 제30회 경남아동문학상, 제5회 동주문학상 수상 .

 



 아기고래(동시) / 김륭
뭐든 제멋대로 되지 않으면/ 온몸을 바동바동/ 울지 마 울지 마/ 달래면 달랠수록 더 큰/ 울음을 내뿜는/ 내 동생/ 아기고래다!/ 대왕오징어였으면/ 큰일 날 뻔했다/ 식구들 모두 시커멓게/ 먹물을 뒤집어썼을 테니까/ 앞이 깜깜했을 테니까//
* 초등 3학년 1학기 국어교과서 수록 동시

밥풀의 상상력(동시) / 김륭
밥도 풀이라고 생각할래요/ 질경이나 패랭이, 원추리 씀바귀 노루귀 같은/ 예쁜 풀이라고 친구들에게 말해 줄래요// 주렁주렁 쌀을 매단 벼처럼 착하게 살래요/ 밥그릇 싸움 같은 어른들의 말은/ 배우지 않을래요// 말도 풀이라고 생각할래요/ 며느리배꼽이나 노루귀 같은 예쁜 말만 키워/ 입 밖으로 내보낼래요// 온갖 벌레 울음소리 업어 주는 풀처럼 살래요/ 어른들이 밥 먹듯이 하는 욕은/ 배우지 않을래요// 치매 걸린 외할머니 밥상에 흘린/ 밥알도 콕콕 뱁새처럼 쪼지 않을래요/ 풀씨처럼 보이겠죠// 잔소리 많은 엄마는 잎이 많은 풀이겠죠/ 저기, 앞집 할머니도 호리낭창/ 예쁜 풀이에요//

내비게이션(동시) / 김륭
귀를 쫑긋 위성안테나처럼 세우고/ 눈으로 레이저광선을 쏘아요// 우리 집 나비는 야옹야옹/눈 깜빡할 새 지나간 새 한 마리, 벌레 한 마리// 놓치지 않고 귀신처럼/ 찾아내요// 바늘에 실 따라가듯/ 소리가 만든 길을 찾아내요// 아빠 차에 달려 있는 것보다 성능 좋은/ 내비게이션이 달려 있어요// 야옹야옹 우리 집 나비 머릿속에/과학이 살아요//

달려라 공중전화(동시) / 김륭
할머니 집과 학교 사이, 목발 아저씨가 지키고 있는 구멍가게 앞 공중전화를 보면 아빠 생각이 난다 회사에서 물먹고 돈 벌러 간 아빠, 잘나가던 한때는 찾아오는 친구들도 많더니 소식이 뚝 끊겼다 전화 한 통 없어 외로웠을 거다 훌쩍 엄마마저 떠나자 외로웠을 거다 너무 외로워 서울로 갔을 거다// 나는 할머니가 준 용돈을 아껴 아빠에게 전화를 걸곤 하는데 오늘은 짝꿍 생일, 선물을 사는 바람에 빈털터리다 서울까지 달려갈 수도 없고 할머니에게 과자 사 먹는다고 조를 수도 없고// 나는 공중전화 박스 속에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콧구멍을 벌렁거린다 외로운 아빠 품속처럼 독한 담배 냄새 진동하지만 참 따뜻하다 휴대폰에게 물먹은 뒤 밤마다 달을 낳는 공중전화, 나는 반짝 이마가 빛나는 동전 한 닢이다 쌩쌩 찬바람 불고 있을 아빠 호주머니 속에서 둥글게, 둥글게 부풀어 오른다// 달려라!//

수박(동시) / 김륭
아파트 단지로 쳐들어온 트럭에서 군인들이 통통 뛰어내렸어요. 꾸벅꾸벅 졸고 있던 경비 아저씨 허겁지겁 뒤를 쫓지만 꼼짝 마, 움직이면 쏜다!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용감한 군인들의 포로가 되었어요. 번쩍,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어요. 화단에 핀 해바라기와 나팔꽃도 파르르 겁에 질렸어요. 눈 깜빡할 새 아파트를 점령한 군인들이 807동 504호 우리 집까지 쳐들어왔어요. 투항하라, 투항하라, 너희들은 독 안에 든 쥐다!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던 엄마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어요. 피-웅 피-웅 하늘에서 불화살 쏘아 대던 태양마저 백기를 들었어요. 수박이 왔어요! 달고 시원한 수박이 왔어요! 아파트 단지 구석구적 생쥐처럼 숨어 있던 여름이 몽땅, 잡혀가요.//

샤워 / 김륭
열대식물을 생각했다./ 당신은 마음에 손잡이가 달려있다고 했다. 당신이 아름다워 보였지만 내가 아름다워지는 건 아니었다./ 털이 북슬북슬한 몸으로 마음까지 걸어 들어갈 궁리를 하다보면 사막과 친해졌다./ 짐승이란 말을 들었다. 나는 손잡이가 몸에 달려있었고 사막여우 같은 당신의 마음이 걸어 다니기엔 더없이 좋아보였다. 그때부터였다./ 사는 게 말이 아니었다. 벌레잡이통풀, 끈끈이주걱, 파리지옥…… 사랑은 어디에 달려있던 손잡이일까, 하고 궁금해졌다./ 당신의 울음에 기여한 문장들로 샤워를 하면서 열대식물을 생각했다./ 아무래도 당신을 너무 착하게 살았다. 나는/ 꽤나 괜찮은 짐승이고 그래서/ 쫓겨난다고 생각했다.//

그 집 앞 / 김륭
내가 없으면/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방 안에 파리나 모기 대신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집, 고양이는 십 년을 넘게 키웠지만 사람이 되지 않았다// 집주인은 이미 죽었지만 죽었는지 모르는 손님들이/ 화장지나 식용유를 들고 문을 두드리는 집/ 꼬깃꼬깃 구겨져 뒹구는 유령의 그림자 몇 장을/ 세어보다가 돌아서는 집//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너무 자주/ 나마저 나를 기다리지 않는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게임처럼 사랑을 즐기는 소년과 배달 음식처럼 사랑을 잘 받는/ 소녀들이 우글거리는 집으로 꾸며야지 그러려면// 시를 써야지 사랑을 해야지 내가 없으면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이니까 내가 시인이 되어야지// 시가 오고 있다 시가 오면/ 봄은 와도 되고 안 와도 그만인 집// 그러나 시를 쓰려면 당신이 필요한/ 집, 이사를 가기 위해 지은 그런 집이 있다/ 어느 날 훌쩍 유령이 되기 위해 매일 밤 그 집을/ 들어서는 사람이 있다//

콧노래 ㅡ월간 벌레 2 / 김륭
남들이 집을 보러 다닐 때 나는/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 안고 조용히 집을 불렀다./ 신문지를 깔고 앉아 톡톡 발톱 깎는 장면을 보여주었는데/ 벌레다, 하고 집안에서 수군대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집을 강에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집이 스스로 몸을 던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벌레로서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나는 게으르고, 가난했고, 정신이/ 여치와 노래를 부를 만큼 야위었는데 남의 집 창문을/ 책장처럼 뜯어먹고 살아서 그럴 것이다./ 살아가는 냄새보다 죽어가는 냄새에 더 가까워진/ 나는 없던 집이 갑자기 나타나 까맣게/ 잊고 살던 애인을 무당벌레처럼 보여줄까 봐/ 더럭 겁이 났다. 집에 혼자 남겨져 전화번호를 뒤적거리는/ 일보다 가난한 일은 없었다. 종이식탁 위에/ 막 끓인 라면냄비를 올려놓고도 달걀처럼 굴러온/ 무덤이 보였다. 나는 도망가는 내 이름을 붙잡아 문패로/ 달아주었다. 집은 떠내려가거나 부서지기 쉬운/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나는 가만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배가 고프거나 아파야 했다./ 집은 얼굴 없는 물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집이 스스로 몸을 던질 때까지/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며 볼펜을 입에 물었다./ 나는 집이 더 이상 나를 찾을 수 없는 곳을 찾아/ 막 돌아다니는 한 마리 벌레라고/ 썼다. 끝은 언제나 밤이었다. 마른 물고기처럼/ 내가 시작된 곳이었다. 사랑은 오늘도/ 집에 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또 떠나야 했다//

 

레밍쥐 / 김륭
기왓장처럼, 하늘에서 떨어진 심장을 주워 여기까지, 흙 묻은 엉덩이를 툴툴 털며 지금 여기, 생의 막장까지 내가 올 수 있었던 것은 당신이라는 지붕 위에 올려놓았던 또 하나의 내 심장을 받아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갯지렁이 / 김륭
당신을 걸어 나오는 날, 나는/ 섬이 될 것 같으다 나마저 살지 않는/ 외딴섬, 거기서 고깃배 같은 건/ 기다리지 않을 것 같으다/ 그저 가느다랗게 남은/ 목숨을 뱃속의 아기를 지운/ 어느 여인의 울음처럼/ 밀고 다닐 것/ 같으다//

사마귀 / 김륭
내 입술을 버리고 당신 입술을 가졌다/ 공중에 걸려 있던 모든 길을 먹어치웠다 교미 후 수컷의 머리를 씹는 암컷 사마귀처럼 그렇게 나는 당신에게 못다 한 사랑을 전해드리고자 했지만, 당신의 입술이 내 몸을 꿰매기 시작했다// 태어나 좋은 꿈 한번 꾸지 못하고 간다 그러니까 나는 저만치 내 무덤 속에서 팔다리를 꺼내는 데 한평생이 걸렸다고, 당신의 부서진 어깨 위에 머리 하나 기우뚱 달처럼 얹어놓고 간다// 혀를 뽑아낸 자리에 애기똥풀 피었다//

황태 / 김륭
아버지 바지가 빨랫줄에 걸려있다.// 헐렁헐렁한 바지를 빠져나간 아버지는 젊은 운전기사에게 멱살 잡혀 있었지만 편안해 보였다. 아니, 어르신 낮술 꽤나 드셨으면 집에 가 주무시지 도로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버스를 가로막으려 했다고 벌레 씹은 얼굴로 투덜거리는 金순경 입가로 스멀스멀 기어오르던 아버지 밥알 같은 눈빛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가로막은 건 버스가 아니라 번쩍, 손들어도 서지 않는 길이었다고// 제발 한번만 봐달라고 金순경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어머니, 염소울음소리에 새 울음소리까지 섞어낼 줄 아는 당신 치마폭에 쌓인 아버지는 아버지의 어머니 그러니까 나는 얼굴도 모르는 할머니가 낳은 게 아니라 동해안 어느 깊고 푸른 바다에서 잡아온 게 틀림없었다. 조마조마 불꺼진 아궁이를 살피듯 불안한 어머니 눈동자 속으로 또다시 겨울이 오고 있었다.// 간과 쓸개 다 빼주고도 물먹은 명퇴 아버지에게 세상은 공중누각이었을까 펑펑 눈발 날리는 황태덕장이었을까 멈추지 않는 길에서 배가 뒤집어진 아버지의 낡은 구두 한 짝, 내장을 빼낸 다음 낮엔 녹이고 밤새 얼린 황태 한 마리 어머니 치맛자락에 매달리고 드르렁 드르렁 푸, 푸후 푸후 내 등에 업혀 코고는 아버지에게 고래가 사는 바다는 얼마나 멀까// 아버지를 주르륵 벗어 내린 아버지의 바다가 빨랫줄에 매달려 꽁꽁 얼어붙고 있다.//

고라니 / 김륭
두 발로 올 때가 있고 네 발로 올 때도 있다, 비는// 나는 비를 그렇게 구부린다 가만히 엎드려 지켜본다 오늘은 두발이다// 온다, 비가, 새끼고라니처럼 온다고 써 놓고 운다고 읽는다// 두 개의 발이 더 필요한 지점에서 심장은 이불보다 착하게 만져지지만 슬픔은 끝내 목줄을 놓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빗소리는 그렇게 질기다 두 발로 왔다가 네 발로 돌아간 神이 있고, 내가 나를 애완용으로 키우지 못한 것은 사후의 일이다 함부로 들어 올렸던 앞발이 가죽나무 잎사귀 위에 몇 개의 빗방울과 함께 떨어져 있다 어미를 찾는 새끼고라니의 눈망울을 두드려 볼 수도 있겠다 그렇게 비는 오고 이미 죽었다는 생각이 드는 지점에 섬이 있고 손님 온다// 온다, 사람은 사람으로 부족해 가늘게 눈 뜬 도둑고양이를 사용하거나 개나 염소에게 끌려다니기도 한다 참 다행이다, 오늘은 두 발이고 뿔이 없다 나는, 죽은 척 지켜본다// 우산들은 좀 앉으시지, 늙은 몸 가만히 두고// 하늘을 기어오르는 구부러진 송곳니//

쥐 / 김륭
개처럼 목줄 묶어 아침 산책이라도 나가면 세계 각국에서 보낸 도둑고양이들의 관광엽서가 발밑에 쌓였다. 그때마다 나는 히잡을 쓴 무슬림이 주인으로 있는 여인숙을 떠올렸고 거기서 내가 처음 울었다는 말을 생각해냈다.// 옥수수 밭을 지나 어미 쥐의 꼬리를 잘라 먹는 아기 쥐처럼 그렇게 나는 나를 숭배했지만, 두 번 다시 내게 오지 않을 말을 물어 나르며 세상에 저항했지만, 하나의 목숨으로는 받아 낼 수 없는 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 죽음은 너무 오래된 거짓말, 모종의 숨구멍을 둘러싸고 암투를 벌이던 두 마리의 쥐가 기념 조형물로 변했다. 도둑고양이들의 조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나는 다시 발이 귀보다 작은 묘족들의 동장(洞藏)*을 떠올렸고 거기서 내가 죽었다는 말을 생각해 냈다.// 나는 다시 태어날 것이다. 내게 세상의 모든 말들이 쥐똥처럼 까맣게 익어 갈 때까지// 내 왼쪽 귀는 수컷이고, 오른쪽 귀는 암컷이다.//
* 동장(洞藏) : 죽은 사람을 절벽 속에 묻는 묘족의 풍습. 한족을 비롯한 다른 부족의 침입에 맞서 조상의 묘를 안전하게 보존하려는 묘책이다.

너구리 ㅡ너무 오래 / 김륭

팔순 노모가 지어 준 밥, 일인분씩 먹기 좋게 나눠 냉동실에 넣어 두었던 밥, 전자레인지에 한 번만 돌리면 갓 지은 밥이나 마찬가지니깐 굶지 말고 꼭 챙겨 먹으라는 밥, 꽁꽁 얼어붙은 밥 덩어리 앞에서 또 궁금해진다 어떻게 혼자 살면서도 외롭게 살았을까? 아무래도 나는 나를 너무 오래 오해했고 너무 쉽게 생각했다 밥을 아무리 맛있게 먹더라도 나는 결코 인간이 되지 않을 거야, 너구리가 인간이 될 수 없듯이 어떻게 홀아비로 살면서도 외롭지 않게 살았을까? 그러나 아무리 쉬쉬해도 세상은 인간이 엉망이란 걸 알게 된다//

구름에 관한 몇 가지 오해 / 김륭
1.// 실직 한 달 만에 알았지 구름이 콜택시처럼 집 앞에 와 기다리고 있다는 걸//
2.// 구름을 몰아본 적 있나, 당신/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단 한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가 내 머리에 총구멍을 낼 거라는 확신만 선다면 얼마든지 운전이 가능하지 총각이나 처녀 딱지를 떼지 않은 초보들은 오줌부터 지릴지 몰라 해와 달, 새떼들과 충돌할지 모른다며 추락할지 모른다며 울상을 짓겠지만 당신과 당신 애인의 배꼽이 하나인 것처럼 하늘과 땅의 경계를 가위질하는 것은 주차딱지를 끊는 말단공무원들이나 할 짓이지 하늘에 뜬 새들은 나무들이 가래침처럼 뱉어놓은 거추장스런 문장일 뿐이야 쉼표가 너무 많아 탈이지 브레이크만 살짝, 밟아주면 물고기로 변하지//
3.// 구름을 몇 번 몰아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해나 달을 로터리로 낀 사거리에서 마음 내키는 데로 핸들만 꺾으면 집이 나오지 붉은 신호등에 걸린 당신의 내일과 고층아파트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보다 깊은 어머니 한숨소리에 눈과 귀를 깜빡거리거나 성냥불을 긋진 마 운전 중에 담배는 금물이야 차라리 손목과 발목 몇 개 더 피우는 건 어때? 당신 꽃 피우지 않고도 살아남는 건 세상에 단 하나, 사람뿐이지 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건 새가 아니라 벌레야 구름이란 눈이나 귀가 아니라 발가락을 담아내는 그릇이란 얘기지 잘 익은 포도송이처럼 말이야 그걸 아는 나무들은 새를 신발로 사용하지 종종 물구나무도 서고 말이야 생각만 해도 끔찍해 구름이 없으면 세상이 얼마나 소란스러울까//
4.// 아주 드문 일이지만 콜택시처럼 와 있는 구름의 트렁크를 열어보면 죽은 애인의 머리통이나 쩍, 금간 수박이 발견되기도 해 초보들은 그걸 태양이라고 난리법석을 떨지//

관음죽 / 김륭
함께 살지 않고도 살을 섞을 수 있게 된다// 이불 홑청처럼 그림자를 뜯어내면, 그러니까/ 내게 온 모든 그녀는 반 토막/ 주로 관상용이다// 베란다에는 팔손이, 침실에는 형형색색의 호접난// 그녀와 나는 도마 위의 생선처럼 서로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모르면서도 아는 척 손만 잡고/ 죽음을 꺼내볼 수 있게 된다// 화분에 불을 주듯 그렇게 서로의 그림자로/ 피를 닦아주며 울 수 있게 된다// 神과 싸우던 단 한 명의 인간이*/ 두 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 윤이형, 단편소설 「분의 여행』 중에서.

구름에 관한 몇 가지 오해 3 / 김륭
지겹다고, 사는 게? 그럴 수밖에 지겨운 게 사람을 살게 하지// 바람처럼 살게 하지 그런 날의 구름이란 몽당연필처럼 당신을 움켜쥐고/ 세상에 긋는 밑줄, 먹물처럼 목숨이 흘러내린 당신 발목을 뿌리는일이니까/ 적당량의 물과 빛, 휘휘 저어주지 않으면 나무로 변하는/ 바람이 구름의 신발이지// 밥상에서 책상으로 다시 책상에서 밥상으로 곰곰이 생각해보면/ 너무 가깝고도 먼길, 하루도 빠짐없이 바둑돌처럼 몸을 들어다놓는/ 겨드랑이 사이 새 한 마리 잡아 구워 먹어봐 지글지글/ 물고기로 변해 살을 발라내는 혓바닥// 김밥에 계란말이는 소풍 때나 구경하고 자장면은 생일에나 먹을수 있던/ 코흘리개시절로 지지배배 지지배배 종이배처럼 곱게 접어보내고 싶은/ 신발들은 왜 하나같이 왈칵, 입이 찢어지는 건지/ 헷갈려 죽겠어! 날 버린 말라깽이애인의 나이키운동화는/ 새였을까 물고기였을까// 어머니 행주질 한번에 뚝딱 책상으로 변하던 밥상,/ 시뻘겋게 김칫국물 얼룩진 책상모서리에 꽁꽁 머리 찧을 때마다/ 풀풀 밥알처럼 싸락눈 날리고 꼬르륵 배꼽 밑으로 잠겨들던 집,/ 술 취한 아버지 마당귀로 날리던 건 책상이었을까? 밥상이었을까?// 어머니는 술상이라며 밤새 울었지만 랄랄라 배부를수록 가벼워지던 발걸음으로/ 상다리 부러지도록 밥 대신 책이 놓인 밥상이, 책 대신 밥이 놓인 책상이/ 얼마나 훌륭한 구름이었는지, 세상에// 물간 고등어 한 마리 없는 구름 따윈 죽어도 받아쓰지 말라는/ 우리 아버지의 말을 의사마누라가 된 첫사랑 순이는/ 무슨 재주로 알아먹었을까// 천둥벼락이 바퀴벌레처럼 우글거리던 하늘이야/ 구름도 가끔씩은 돌아버리지/ 밥상을 엎어버리지//

눈물을 말하다 / 김륭
나를 뛰쳐나가는 순간 다리가 꼬인다/ 저기 봐라 슬픔이 머리 하얗게 센 할머니처럼 쪼그려 앉아 오줌눈다/ 울컥, 꽃잎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큰일이다/ 그는 이미 나뭇가지에 목을 내준 것이고/ 나무는 그 목을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이므로/ 엉엉 길을 버둥거릴 때가 있다/ 꽃 그늘에 앉아 훌쩍훌쩍 공중에 매달린 몸 꼬인 다리를 풀면/ 흘러내리는 살과 피/ 눈물은 흘린 자의 몫이 아니다/ 한 봉지 사탕봉지처럼 받아먹는 누군가가 있다/ 아무래도 우리는 너무 달콤하게 태어났다/ 산짐승들마저 슬슬 피해 다니는 길목/ 우물이라도 깊게 파야한다//

눈물을 깰까봐 / 김륭
글씨, 닭이 먼저라고 알이 먼저라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나 하는 잡것들은 모른당께 얼어죽을 닭이 아니랑께 알도 아니랑께 눈물이 먼저랑께// 멕시칸치킨집 최장식 사장님 오토바이 붕붕거리며 나 다신 안 갈라요 엄니 죽고 나면 갈라요 워매 조류독감 땜시 닭집 문닫아 걸고 고향에 갔었지라 병든 닭처럼 하룻밤 묵고 집을 나서는디 워매 울 엄니, 덥석 불알을 움켜쥐더라고// 참말로 환장해불겠더랑께 방금 낳은 거라며 닭알 하나 건네는디 나는 됐어라우 그깟 깨진 알을 누가 먹는다요 뒤도 안 돌아보고 내뺄라는디 징하지라 우리 엄니 글씨 안 깨졌다니께 식기 전에 후딱 하나만 깨먹고 가랑께 그라고 왈칵, 속에 불을 질러불더랑께// 워매 징한 거… 뒤를 돌아보는 순간 사정없이 깨져불겠더랑께 냅다 달려부렸제 암만, 좆 빠지게 달려부렸는디 장식아 장식아 이놈의 자슥아 아즉 안 깨졌다니께 이거 하나만 후딱 깨먹고 가랑께 그라고 매달리던 엄니 땜시 돌아불겠더랑께 아이고 두 번 다신 안 갈라요 참말이요 울 엄니 죽고 나면 갈라요 치킨 두 마리 맛있게 튀겨 갈라요 훌쩍, 배달 가듯 갔다 올라요//

울음을 부를 때는 / 김륭
피멍 든 얼굴에 달걀을 굴리듯 그렇게/ 어느덧 쉰, 그녀는 아직도 엄마를 엄마라고 부릅니다./ 냉장고 속 열 개의 달걀 가운데 하나가 그렇게/ 늦은 아침 식탁 위에 올라가서는 무덤이 되었습니다./ 나머지 아홉 개의 달걀이 닭을 부를 때도/ 그렇게 부릅니다. 쥐뿔도 없는 세상의 불알들이/ 저를 흔들거나 울렸다는 시(詩) 한 줄 거미줄처럼 뽑아/ 허공에 피를 묻힐 때도 그녀는 그렇게/ 달걀도 그렇게, 그냥 동그랗게/ 꿈속의 그녀가 꿈밖의 저를 부르듯 그렇게 부릅니다./ 바람에 찢기거나 기름에 지글거리거나/ 제 울음을 부를 때는 그냥//

어느 로맨티스트의 산책 / 김륭
그는 자꾸 떠나려고 하고, 그런 그를, 그는 자꾸 어이없어 하다가/ 깜짝 놀라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는 툭툭 돌멩이 하나를 깨우려하다가/ 이건 뭐,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고 그는 실실 자꾸 실없이/ 웃으려고 하다가 지난밤의 섹스가 양심에 찔리는지/ 마이너스통장에도 없는 인내심을 가지고 그는 자꾸자꾸 두 발을 저어/ 늙은 배롱나무 밑으로 흘러내리는 심장을 만지작거리다가/ 식은 손을 주워 머리 위로 집어던지다가// 공기보다 가벼운 말투로 혀를 녹이려하다가 그는 자꾸/ 무거워지려는 얼굴을 피하기 위해 그는 자꾸 다정해지려고 하고/ 자꾸자꾸 형식적으로, 개개비 둥지에 벽시계를 걸어놓는 뻐꾸기처럼/ 너무 자연스러워 보이려고 하다가 인간을 벗어났다는 걸 눈치 챈 그는/ 자꾸 원숭이보다 높이 올라가려고 하고, 그런 그를, 그는 자꾸자꾸/ 눌러 앉히려하다가 궁둥이를 시계반대방향으로 돌리며, 뻐꾹/ 두 발이 살살 혀에 감기는 듯 그는, 자꾸, 뻐꾹, 뻐뻐꾹// 자꾸 그는 먹고사는 일을 한가한 취미생활로 바꾸려고 하다가/ 그는 자꾸 방탕한 선비생활을 먹고사는 일로 바꾸려고 하다가// 이건 뭐, 예술도 아니고 기술도 아니고, 깜빡 그를 지나친/ 그는 자꾸 뻐꾹뻐꾹, 하고 우는 뻐꾸기도 아니고// 그는 자꾸 붓처럼 휘어지는 다리를 들고 뻐꾹, 뻐뻐국,/ 자꾸 뻐꾹, 자꾸자꾸 뻐꾹, 자꾸자꾸자꾸//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흙을 주워 담으려고 하다가/ 이건 뭐, 사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고// 누군 딸꾹질 같은 연애하러가고 누군 집에 밥먹으러간다는데/ 그는 자꾸 돌아오려고 하고, 그런 그를, 그는 때려죽이려고 하다가// 그는 자꾸 뻐꾹뻐꾹 발밑에서 솟아오르는 땅을 살살/ 남의 여자 허벅지처럼 어루만지려고 하다가// 그는, 자꾸, 뻐꾹, 뻐뻐꾹//

비의 왼쪽 목소리 / 김륭
당신도 그래라// 비 맞은 닭처럼, 머리 꽁꽁 묶어/ 달걀 부르는 소리// 새의 몸을 얻지 못한 비가/ 노랑 손지갑처럼 꺼내는/ 왼쪽 목소리// 낮은 지붕 위로 후드득/ 날아오르기도 하고 가만히/ 내려앉기도 하고// 반바지 입고 훌쩍훌쩍/ 우는 것도 보았지만, 어디로/ 가는지는 몰랐다// 내가 그러니 당신도 그래라// 사랑한다, 사랑한다/ 목숨 갸웃거릴 줄은 알았지만// 나는 당신이, 당신은 내가/ 어디로 가는지는 정작/ 모르고 살았으니,// 오른쪽 목소리를 놓친/ 왼쪽 목소리처럼// 당신도 그래라 그냥/ 마음 좀 아파라//

숨 / 김륭
내 안에 들어와 살 수 없는 당신은 자꾸/ 이상한 음악을 만들어오고// 흑단나무도 바이올린도 될 수 없소 나는/ 당신의 선율이 아니라 전율// 당신의 음악은 내 죽음 속까지 쳐들어와/ 밥 지어 먹고 잠을 자는 것인데// 언제쯤일까? 죽기도 전에 썩은 내 몸을/ 내 발로 걸어나갈 수 있는 그날은,// 꼭 아팠으면 좋겠다 오래오래// 당신이 만들어온 이상한/ 음악이나 들으며//

달의 귀 / 김융
가끔씩 귀를 자르고 싶어, 내 몸을 돌던 피가/ 네모반듯하게 누울 수 있도록// 우리 집 고양이는 온통 벽을 긁어놓겠지만 혀를 붓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 나는 누군가의 뱃속에 내 숨소리를 그려 넣을 수 있을 테고 가만히 첫눈이 온다고 속삭이는 여자는 얼굴도 모르는 아이의 심장을 꺼내 뭇 사내들의 무릎을 베기도 한다더군요// 그러니까 나는 눈사람을 서방으로 둔 어머니 배꼽 위에 놓인/ 신발 한 짝이었음을 기억해냅니다// 달의 귀를 잘라 마르지 않는 그녀의 우물은 누군가의 손목을 베개로 삼아야 들을 수 있는 노래, 아무리 울어도 나무가 될 수 없는 나는 삐걱거리는 밤의 옆구리에 망치질을 해대면서 달팽이와 춤이나 출 수밖에,// 신발을 주우러 다니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어쩌죠? 귀를 잘라버린 무덤은 허공에 입을 그려 넣고/ 그녀는 밤새 눈사람에게 마른 젖퉁이를 물리지만/ 더 이상 무릎은 벨 수 없다더군요// 어머니, 나뭇잎 좀 그만 떨어뜨리세요// 뱃속에서 우는 아이의 심장을 가만히 꺼내/ 늙은 고양이를 만드는 그녀를 위해/ 밤은 가끔씩 종이가 됩니다//

쌀 씻는 남자 / 김륭
쌀을 씻다가 달이 우는 소리를 듣습니다// 밤을 밥으로 잘못 읽은 모양입니다 달은, 아무래도 몰락한 공산주의자들을 위한 변기통 같습니다// 아내가 없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 줄 모르겠습니다 속이 시커멓게 탄 사내에게 고독이란 밥으로 더럽힐 수 없는 쌀의 언어입니다 문득 살이 운다는 말을 떠올렸습니다 밤을 밥이라 썼다 지우고, 쌀을 살이라고 썼다가 지우는 사내의 입이 문밖 나뭇가지에 걸립니다// 사락사락 밤을 함께 지새울 여자가 있다면 처녀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언제나 불보다 물이 부족한 밥입니다 고물 전기밥통 가득 살이 타는 밤입니다// 달이 생쌀 씹는 소리가 들립니다//

숟가락 ㅡ心亂 / 김륭
저승에서 이승으로/ 내게 울음을 버리러 온 듯// 누군가 저 멀리 내다 버린/ 바구니 안의 아기 같은/ 당신 너머// 한번 건너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세상의 오랜/ 기도를 닮아서,// 두 발이/ 고드름처럼 녹아내리는/ 저녁// 단 하나의 이 심장을/ 나더러/ 어떻게 내가/ 나를 어떻게// 늦은 밥상이라도 차리는 듯/ 자꾸 당신을 데려오는 저 달은/ 또 어떻게// 몸 없이 우는 법만 배워/ 입안 가득 神을 넣어보라는 듯// 숟가락을 집어든/ 오른손이 왼손에게 죽음을/ 구해오라는 듯// 오로지 그렇게/ 믿었던 내 심장이/ 삽이었다니,//

식물 K / 김륭
머릿속에 살던 짐승들이 염소를 따라 가슴까지 내려와 죽었습니다// 손에 숨을 쥐고 그러니까 꽃 대신 뱀을 쥐고 나는/ 지금 누워있다, 는 문장으로 수습(收拾)된 사람// 당신은 내게서 꺼낼 수 있는 짐승들이 몇 마리나 남았을까 궁금해 하지만 그것은 내 죽은 숨들을 발밑에 심는 일, 봄이다 내 피가 내 몸을 돌아다니다 흙을 묻히듯 그렇게 봄은 까마득히 무덤 위에 올려놓은 뗏장처럼 간신히 숨만 붙은 노동이 되고 종교가 되고// 삐걱거리는 침대는 나를 비루하고 지루하게 살아낸 몇 마리 짐승들의 딱딱한 기억, 입 안의 울음들이 그랬듯이, 갔어요, 방금 출발했다니까요 퉁퉁 면이 불어터진 우리 동네 중국집 주인장 말씀을 따라// 마침내 나는, 나를 떠나 나를 끓어오르려는 숨의 임계 너머로 두 발을 녹일 수 있게 된다 너무 일찍 출발했거나 너무 늦게 도착했거나 목숨이란 게 슬그머니 문밖에 내다놓은 자장면 빈 그릇 같아서// 집으로 가자, 고 말하지 않는 식물들 사이/ 숨이 자꾸 흘러 흙이 붙은 뿌리째 떠낸 비곗덩어리처럼 나는, 내 몸을/ 따로 흘러 내가 없고 아내도 없고, 하늘을 흘러내린 썩은 동아줄에/ 딸 하나 가만히 묶여있고// 누워있다, 는 단 하나의 문장 위로 바람 간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의자와 염소가 하늘을 뒤집어 입는 저녁/ 바지가 가슴까지 올라가 죽었습니다//

당신 / 김륭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 그래서 神이다//

 

녹턴 / 김륭
함께 살지 않고도 살을 섞을 수 있게 된다// 이불 홑청처럼 그림자 뜯어내면, 그러니까// 내게 온 모든 세계는 반 토막/ 주로 관상용이다// 베란다에는 팔손이, 침실에는 형형색색의 호접난// 후라이드 반 양념 반의 그녀와 나는 서로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죽었으면서도/ 살아 있는 척 손만 잡고,// 죽음을 꺼내 볼 수 있게 된다// 화분에 물을 주듯 그렇게 서로의 그림자로/ 피를 닦아 주며 울 수 있게 된다// 神과 싸우던 단 한명의 인간이/ 두 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대부분의 연애류 / 김륭
모르는 사람들이 좋아졌다/ 행여 아는 사람이 될까 봐 나는, 나랑/ 좀 멀리 떨어져 앉아서// 트렁크를 개처럼 끌고/ 내가 모르는 곳으로 떠나는/ 사람들의 다리를 오도독 뜯어먹었다// 참 멀리도 왔다는 기분/ 이런 날의 연애는 방아깨비처럼/ 나이는 늘 먹던 걸로,// 해외여행을 조르는 애인 두 빰 사이에/ 탱- 코를 풀던 손바닥 한 장 끼워 넣는 동안// 모가지 빳빳하게 세운 뱀 한 마리 지나갔고/ 소설에게 차였다는 소설가 녀석이/ 말복을 데리고 왔다// 어쩜 아는 것들은 하나같이 교양이 없는 걸까// 내가 나를 피해 슬그머니 한쪽 발을/ 들어 올려야 할 때가 있다// 오줌 누는 멍멍이 털을 벗겨/ 애인에게 입혀 주고 싶었다// 너무 멀리도 왔다는 기분, 그것은/ 이미 엎질러진 물 같아서// 볼펜 꼭지를 똑딱거리며 나는 슬슬/ 우리 집이 모르는 곳으로 가 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청혼 ㅡ이름 없는 이름 / 김륭
가끔씩 생각한다 나는 죽었군 그리고 그녀에게 가 버린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비가 온다 이름 없는 이름처럼 피가 몰려오고 나는 한 번 더 생각한다/ 나는 죽었군 나는 우산을 그녀에게 건네주고 돌아와 버린다 그제야 내 사랑, 그녀가 나를 사람이 아니라 사랑으로 부른다 좋다, 좋다// 죽었더니 좋더군// 왼쪽 뺨을 오른쪽 뺨과 바꾸면 바나나 혹은 원숭이가 끌고 다닐 슬리퍼에 반바지/ 나는 또 생각한다 나는 죽었군 그런데도 손님이 온다 반갑지 않은 손님만 와서 웃는다 나는 또 생각한다 이제 울지도 못하는군 나는 모르는 척 그녀를 돌아서서 숨을 파닥, 내쉰다/ 죽어서도 할 수 있는 게 있군// 오른쪽 뺨을 왼쪽 뺨과 바꾸면 원숭이 혹은 바나나가 입고 다닐 웨딩드레스에 고무장갑/ 호주머니를 뒤적뒤적 껍질이 벗겨져 있는 그녀 길쭉한 발을 꺼낸다 원숭이도 바나나를 사랑했지만 나는 죽었군, 죽었어 바나나는 원숭이 입에 매달려 잘살고 있는데/ 나는 죽어서야 청혼을 하는군// 비가 온다 곧바로 피가 몰려온다 나는 그녀에게 다시 가버린다/ 언젠가 한번은 원숭이와 바나나는 결혼할 테지만/ 나는 죽었군 이름도 없이 좋다, 좋다/ 참 좋다//

머플러 / 김륭
들릴 듯 말 듯 하다 당신의 목소리는/ 언제나 그렇다 위층에서 내려오는 개소리에/ 목을 물리는가 하면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에 눌려/ 희미해지고, 나는 샤워를 한다// 배처럼 머리를 빳빳하게 세운 샤워기가 내 몸에 끼얹는 건/ 물이 아니라 말, 나는 물에 씻기지 않는 사람이어서/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 또한 비눗물이 나이라 언젠가/ 당신이 했던 말, 그러니까 나는 이미/ 당신의 말에 녹아 버린/ 사람// 몸이 없는 사람임을 들키지 않으려고/ 샤워를 하고 바지에 두 발을 꿰고 컬러풀한 와이셔츠에/ 검은 외투를 걸치고 외출을 한다/ 살아 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세상으로/ 나간다 언젠가 당신이 했던 말로 목을 감싸고/ 목이 없는 사람임을 들키지 않으려고// 잘 살아요 우리, 죽은 듯 살아요// 그래서 걸었다, 당신의 말을 목에 두르고/ 죽어서는 따뜻하게 잘살 수 있겠다고/ 목이 없는 사람이 키우다 버린/ 한 마리 개처럼// 나는 이미/ 죽은 사람임을 들키기 위해/ 갈 데까지 가 보는/ 사람//

118 페이지 / 김륭
여기서 세상의 모든 당신은 예언된다.// 낮과 밤 사이의 여백이 바로 당신, 흰자위와 검은자위 사이 가파른 숨을 옮겨다 놓는 한순간보다 완벽한 절벽이 있을까?// 비가 온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싶거나 피하고 싶은 당신들과 달리 나는 왜 싸우고 싶은 걸까? 그래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페이지, 여기선 모든 게 절망이어서 정말이다./ 118페이지, 하늘과 땅 사이로 밑줄을 긋지 못한 울음이 뺑소니차 번호판처럼 눌러앉은 여기서 당신은 神의 오만과 편견으로 가지런해진 기도의 자세를 인간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어느 날 문득 사라진 누군가를 찾아 헤매다 돌아왔거나, 홀연히 사라질 누군가를 붙잡다가 우산을 놓쳤거나 이건 정말이다. 절망은 그런 것이다. 여기서는 하나같이 삼류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드는 생각; 구름도 옷 벗을 힘은 있겠지요?// 누구에겐 첫 페이지가 될 테고 도 누군가에겐/ 마지막 페이지가 될 것이다. 손가락에 침을 잔뜩 발라/ 118페이지를 넘기려는 한순간, 당신은// 당신의 퉁퉁 불어 터진 그림자를/ 우산처럼 들고 인간에게 충성을 다하는/ 神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 누군가 인디언 소녀 같은 얼굴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정말이네,/ 또 비가 오네.//

백야(白夜) ㅡ공장주의자들의 序 / 김륭
인간들 품에 한 번이라도 안겼던 인형들은 점점 고약해지기 시작하는데(정신적으로)// 그는 인형공장에서 쏟아진 인형 가운데 조물주가 있다고 생각한다(나사가 풀린 듯)// 그가 조립하는 레고는 세상을 떠도는 온갖 영혼들과 외계인마저 무릎 꿇게 만드는 완벽한 인격체, 공주인형까지 공장을 나와 서둘러 예를 갖추기 시작한다(겁먹은 얼굴로)// 거 봐, 내가 말했잖아 인형들도 가끔씩 동물원에 놀러온다고, 그가 말했다(냉장고 문을 열었다 쾅 닫으며)// 곰인형이나 원숭이인형도 올까요? 공주인형이 말했다(애가 타는 눈빛으로)// 처키인형이라도 와야 할걸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해요// 아기는 아기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지금부터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치의가 말했다(송곳니를 드러내며)// 처키인형이라면 몰라도 조물주가 엄마라고 부르는 건 싫은데, 그의 아내가 말했다(신경질적으로)// 엄마가 아니라 딸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요? 동물원에서는 어미와 새끼가 낮과 밤처럼 뒤섞여 있잖아요 간호사가 말했다(엉덩이를 흔들며)// 그는 모처럼 조물주와 낮술이나 한잔 해야겠다고 생각한다(콧노래를 부르며)// 아직도 인간을 조상으로 섬기는 곰과 발이 작은 여인 몇을 데리고 술집으로 가던 그가 인형뽑기방 앞에서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한다(나사를 조이듯)// 그는 생각한다 조물주가 먼저 자신에게 술잔을 건네야 한다고,(훗훗!)// 그는, 훗훗!//

낭만주의자들의 경우 / 김륭
대개 뿔이 뭉툭한 짐승들의 목소리를 사용한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생각은 기어서 다니고/ 그러다 힘들면 걸어서 다니고// 흰 뺨에서 검은 뺨으로, 검은 뺨에서 흰 뺨으로// 생각 또 생각, 뿔을 지팡이 삼은/ 생각은 모래시계를 뒤집듯 사랑을 꺼내고/ 심심하면 시체를 꺼내고// 발 달린 구름처럼, 녹는 물고기*처럼/ 밤이 낮을 데리고 지나가고// 마침내 종이 위에 풀을 심어 말처럼 달리고 달리다/ 뿔 대신 시인들의 바지를 잉크에 찍어/ 연애에 사용하기도 한다/ 미쳤군 또 미쳤어// 길 잃은 짐승들을 잡아와 밥할 줄도 모르는/ 남의 집 여자들과 나눠 먹기도 하면서// 당신에게 간 내 그림자는 어디까지가 손님일까?// 이윽고 방죽처럼 어둑어둑해진 생각에/ 낡은 모자와 반바지를 내어 주고/ 미쳤군 사이좋게// 끝내 갈라서지 않는 두 뺨을/ 술집 아가씨 볼기짝처럼/ 꼬집으며,//
* 앙드레 브르통, 「녹는 물고기」

수영장을 공장이라고 말하는 金아무개 氏의 경우 / 김륭
그리 놀랄 일은 아닙니다// 인간이 가진 어리석음이나 게으름 또한/ 수영 무료 강습에서 배울 수 있는 영법의 하나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글쎄요 인생을 건너가기엔/ 개구리헤엄이 최고라는데 공장에서/ 생산되는 영법이라죠// 술을 마시다 보면 하늘에 발이 닿습니다/ 목욕탕 가는 옆집 아줌마를 수영장 간다고 웃고/ 수영장에 가는 딸을 공장에 간다고 우기는/ 金아무개 氏의 심오한 견해는/ 타이어공장 시커먼 굴뚝에 한쪽 발을/ 걸치고 있는 겁니다// 출근 중인 올챙이와 퇴근 중인 개구리 중에서/ 수영은 누가 더 잘할까?// 밥 먹듯이 하는 야근에도 바짝 긴장하며/ 별 볼일 없는 생각으로 골똘한/ 金아무개 氏 나이는 쉰, 그 누구보다 열심히/ 팔다리 휘둘러 초등학교 1학년 때쯤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중이죠// 그러니까 소름 끼치게도 인간적인/ 金아무개 氏의 수영 실력은/ 땅 짚고 헤엄치는 자들이 지은 공장에서/ 생산된 겁니다// 뭐, 그리 놀랄 일은 아닙니다// 金아무개 氏 머릿속의 생각이/ 金아무개 氏의 팔다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물고기와의 뜨거운 하룻밤 / 김륭
나는 아무래도 눈물 한 토막을 전생에 두고 온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펄쩍, 어항 속을 뛰쳐나와 바닥을 팔딱거리는 금붕어에게 눈이 멀 까닭이 없다 화장을 지우는 당신 입안 깊숙이 나는 아직도 새빨간 거짓말이다// 달의 속곳이라도 훔쳐 입은 듯 달달해진 그림자 밑으로 손을 집어넣으면 바람이 발라낸 당신의 살이 만져지는 밤, 텅 빈 어항 하나로 떠오른 나는 아무래도 눈물에 길을 가로막힌 것 같다// 내일쯤 눈꺼풀을 잘라 내기로 했다 푸드덕 머리를 열고 날아오르는 새들보다 먼저 태양을 필사한 금붕어 배를 갈라야겠다// 스르륵 바지부터 벗어던지는 혓바닥이 너무 달콤하고 뜨겁다// 그러니까 내게 눈물이란 까마득히 밑이 보이지 않는 바닥을 솟구치다 딱 두 눈을 마주친 물고기의 전생, 아무래도 내 몸은 영혼을 헛디뎠다 사랑에 빠질 때마다 둥둥 강을 거슬러 오르다 죽은 연어가 떠오른다// 사랑해, 라고 속삭이는 당신의 거짓말로 살기엔 가시가 너무 많다//

의자가 왔다 / 김륭
그때 그는 누워 있었다. 의자는 누군가를 데리러 왔지만 그가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의자가 왔다. 그가 의자와 엽서를 주고받은 것은 아버지가 엄마를 버렸을 때부터, 그때부터 지금까지 의자가 그에게 보낸 짐승들은 쉰 두 마리. 친애하는 염소에게, 친애하는 돼지에게, 친애하는 두더지에게, 급기야 친애하는 마담에게까지. 의자가 왔다. 누워 있는 그를 빈정대며 의자가 말했다. ‘이보시오. 여긴 당신 집이 아니오.’ 의자는 누워 있는 그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친애하는 두더지와 염소는 그런 의자의 행동에 놀란 기색이었지만 돼지가 꼬리를 자를 만큼 친애할 수 없는 일은 생기진 않았다. 의자가 왔다. 네 개의 발로 하나의 엉덩이를 받들어야 하는 사랑의 자세가 그랬다. 의자가 왔다. 그는 의자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누워 있었다. 그는 의자가 망가질 때까지 누워 의자를 기다릴 것이다. 의자가 왔다.// 의자가 당황하기 시작한다.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의자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친애하는 염소와 친애하는 돼지와 친애하는 두더쥐와 친애해서는 안 될 마담만 사랑했다. 의자가 왔다. 그는 누군가의 유언처럼 누워 발가락을 꼼지락거렸고 친애하는 염소는 옥수수를 삶고 있었다. 의자가 왔다. 친애해서는 안 되는 마담은 친애할 수 없는 남자의 아랫도리를 벗기고 있었다. 의자가 왔다. 친애하는 돼지가 식탁 위의 꽃병을 치우고 음식을 늘어놓기 시작했을 때 친애하는 두더지는 그가 누워 있는 바닥에 구멍을 뚫고 있었다. 의자가 왔다. 기도하는 자세로, 개 같군! 의자가 말했다. 그는 배신당한 유언*처럼 어디에도 꽂힐 수가 없었다. 의자가 왔다. 그의 죽음 뒤에도 남아 앞발을 모으고 있을 어미 개처럼, 그때 그는 납작 엎드려 있었다. 친애하는 염소는 삶은 옥수수수염을 뽑고 있었고, 그는 친애할 수 없는 아버지가 난생처음으로 보고 싶었다.//

잠(潛) / 김륭
비파나무 이파리 위에 발을 하나로 올려놓는/ 는개처럼, 여기서부터 또 잠이다 당신을 가늘게/ 오르내리던 숨을 따라 걸어 본다// 혼자서 되는 일이 아니다// 내 몸을 내가 나르는 일마저, 끝내/ 나는 당신을 잊지 못한 것이다 언젠가 한번은/ 물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왜 머리가 없는 걸까 도대체 왜/ 내 삶은 엉덩이뿐일까// 흘러간 물의 얼굴을 찾아내서/ 눈을 감겨 주고 싶었다 여기서부터 또 잠이다// 당신의 안일까 밖일까? 나는, 나를/ 가만히 울어 본다// 그러나 나는 이 사실을 아직도/ 나에게 알리지 못했다//

부리가 샛노란 말똥가리 두어 마리 데리고 / 김륭
내일의 날씨가 우산을 들고 뛰어올 때까지/ 빗소리를 심었다 화분 가득// 끓는다, 아직 태어나지 못한 말이 있어서, 누구십니까? 나는, 내가 만들지 않은 사람 나는, 끝이 난 다음에 다시 시작되는 이야기 나는, 시작되지도 않고 끝이 나는 이야기 나는, 빗방울처럼 움켜쥔 배꼽으로 세상을 내려쳐보는 이야기여서, 그렇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마음은 찢어지는 게 찢어지지 않는 것보다 낫다*// 천변 어딘가에 그림자를 숨긴 새들은 인간의 노래에서 도망 나온 글자들을 쪼아댔다// 벌레보다 못한 말, 서서 잘 수 없는 말로 꿴 책이라니// 엄마, 엄마는 왜 벌써부터/ 누워있는 거야// 부리가 샛노란 말똥가리 두어 마리 데리고/ 죽은 듯 가만히 누워서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떠내려 오거나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떠내려가다 보면// 내가 가진 내 얼굴을 울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니// 그래서 갑니다 이젠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당신에게/ 이번엔 엄마라고 불렀으니까 다음번엔 자기라고 불러도 될까, 하고/ 벚꽃고양이처럼 한쪽 귀 접어서// 마지막 햇볕을 쬐는 듯 오늘의 기분이 우산을 들고/ 내일로 뛰어가 두 번 다시 오지 말라고, 나는/ 나 없어도 울지 마, 라는 책에 몸을/ 비끄러매는 것이다//
* 메리 올리버
* 제5회 동주문학상 수상작

하쿠나 마타타 / 김륭
모자는 죽일 수 없다 그러니까 죽음을 수행 중이어서/ 모자 속으로 발자국을 가지고 갈 수 없다/ 모자와 무덤은 같은 장르다/ 2020년 8월 31일 동네마트에 가다가)//
컵라면 사러 가는데도 따라온다, 모자/ 시작부터 끝까지 반바지에 슬리퍼나 끌고 다니는 소설 속 망나니 주인공의 이름을 바꾸는 일보다 즉흥적이라고 쓴다, 내 코앞의 내 인생을 바꾸는 일 내가 눌러쓴 모자와 내가 들어갈 무덤은 늘 같은 방향이어서// 아 근데 뭔가 말이 안되는 게* 죄송합니다 나는, 내 얼굴을 못 뵌 지 오래되었습니다// 입이 부끄러워질 때마다 머리 위에 똥을 싸곤 했던 나는 오늘도 떠난다 지그시 눈을 감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떠나는 나를 나는 잡지 않는다 한쪽 손을 들고 건널목을 건너던 아이가 놓친 풍선처럼//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풍선 어때? 머리 대신/ (급 모자 속에서 툭, 떨어진 머리를 가지고 계신 분들은 꼭 연락 바람)// 재활용쓰레기를 비우러 가는데도 따라온다, 모자 빌어먹을 모자, 모자, 모자...... 인간이 떨어뜨린 모자를 하늘로 올려놓기 위해 새는 연습이 더 필요할 테고, 나는 어둠을 훔치기 위해 밤을 기다리는 도둑 여러분들처럼 본능적으로// 모자 안에는 머리가 있죠 그렇다고 시작은 아닙니다 모자 안에는 꼬리도 있죠 그렇다고 끝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모자는, 갑자기 흥분해서 사실 자기는 늘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고(아 근데 뭔가 여전히 말이 안 되는 게)// 머리에 눌러 앉힌 모자로 먹고사는 거리의 꽃들은 머지않아 내가 미치리라 예언했지만, 언제 어디서나 나보다 먼저 미쳐있는 세상, 나는 미친 모자를 보지 않으려고// 나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하쿠나 마타타 하쿠나 마타타// 무연고 무덤을 찾아가듯 오늘도 면도를 하며 모자의 기분을 살핀다/ 그런데 언제 죽었을까 나는,// 갑자기?//
* 사뮈엘 베케트, 『그게 어떤지/영상』에서.
* 제5회 동주문학상 수상작

​던니스(doneness) / 김륭
지옥과 지옥 사이에 천국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방풍나물 같은 채소나 심고 살면 되겠다고 나는 가금류처럼 좋아라했지만/ 거기서 살지 못했다// 양의 소문은 양고기, 송아지의 소문은 송아지고기// 그러니까 소문은 소문일 뿐, 애인에게 줬다 뺏은 거짓말처럼/ 천국과 천국 사이에 지옥이 있다고 썼다/ 나는 거기서 살았다// 내가 좋은 세상은 볼만큼 봤으니, 이젠/ 그녀가 좋은 세상을 볼 겁니다//
* 제5회 동주문학상 수상작

영원 / 김융
어느 날 밤/ 그는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고 자신의 탁자 앞에 앉아/ 자신이 일어나서 떠나는 모습을 본다/ - 사뮈엘 베케트「떨림」中에서//
눈사람의 심장을 꺼내기 위해/ 눈사람을 만드는 사람이 있다//
* 제5회 동주문학상 수상작

두부 / 김륭
밤의 입술로 흘러들지 못한/ 몇 가닥 전선 위에 잠과 애인을/ 올려두었다// 굴뚝새 둥우리에 알을 맡긴 두견이처럼/ 울진 않았지만 참 나쁜 이야기 같은 것이다/ 잠과 애인은 오지 않으면 바짝/ 신경이 곤두선다// 오늘은 또 얼마나 호주머니가 두둑한/ 꽃나무 이불 속에 다리를 뻗고 있는지, 나는/ 머리를 베개처럼 집어 던질 수밖에// 아무리 나쁜 이야기 속이라도/ 죽지 않았으면 했다 자꾸 무덤이 되려는/ 살에 못을 박는다// 몇 가닥의 전선 위에 올려놓았던/ 잠과 애인이 두부로 변했다 흰 두부가 있다면/ 검은 두부도 있을 것이다// 이런 날에는 밤이 두부로 배를 채워도/ 그리 나쁘진 않겠다, 밤이 달에게 그랬듯이/ 나 또한 당신만을 생각할 것이라고// 살을 따듯하게 데운 나는/ 검은 두부가 흰 두부가 될 때까지/ 못을 다시 박는다//
* 제5회 동주문학상 수상작

집에 두고 온 복숭아를 보러 가던 여자가 말했다, 꼭 같이 보러 가요 / 김륭
과일들은 참 착한 것 같아요/ 그래서 그래요 우리도 그럴 것 같아요// 좌판에 올라앉은 복숭아나 바나나, 그리고 수박처럼/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어쨌든 우리 함께// 원숭이처럼 사는 게 처음은 아니잖아요/ 복숭아처럼 잘 생각해봐요 지금 우린 남겨진 걸까요/ 버려진 걸까요// 단 하나뿐인 심장에게 단 한번이라도 봉사한 적이 없는/ 그래서 다정하게 우리 함께// 오늘 하루쯤은 미침, 완전한 결말을 기대하며/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의 머리를 베고 꼬리를 자른 다음/ 내일은 마침, 오렌지처럼 상큼하게// 더 이상 사랑이 아니거나 이별이 아닐 때까지/ 부엌칼이라도 좀 빌렸으면 싶었지만,/ 여자가 말했다// 그건 어제의 일이잖아, 알아? 당신/ 입술 다음엔 심장 그 다음엔 얼음이라는 거// 오늘이 다 가지도 않았는데 내일이 획- 지나갈 것 같은/ 이럴 날엔 이런 말밖에, 나도 나를 한번쯤은/ 죽여보고 싶다고// 비라도 왔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의 끝은 언제나 그립거나 외로울 것/ 찢어진 우산과는 무관하게// 여기까지 온 것만도 아무나 하는 거 아니라고/ 혼자 죽지 않을 만큼 애쓴 거라고// 꼭 같이 가요/ 잔털 북슬북슬해진 심장이 쓰는 이야기의 끝을/ 보러가요//
* 제5회 동주문학상 수상작

돼지서문 / 김륭
엄마 팔순을 맞이해 남해안 아름다운 바닷가에 펜션을 잡아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자 합니다 혹시 일박을 할 수 없는 분은 밥만 드시고 가셔도 됩니다 저녁은 자연산 회와 매운탕으로 준비할 예정입니다. 반대하는 분들은 손을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들 어렵겠지만, 그냥 지나갈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한 번 더 말씀드리지만 일박을 할 수 없는 분은 밥만 먹고 가셔도 됩니다// - 막내딸 배상(拜上)//
* 제5회 동주문학상 수상작

곰이 눈사람과 싸운다고 생각해보자 / 김륭
모든 사람은 갈 곳이/ 있지요 죽은 사람도 갈 곳이/ 있지요 그런데도 갈 곳이/ 없다는 사람이 있지요/ 너무 걱정 말아요/ 나는 나를, 당신은 당신을 곧/ 찾아낼 거라고 누군가는/ 믿고 있을 거예요/ 그래요 찾아낼 수 없다면/ 유령처럼 나타날 거예요/ 물론 그때 내가 나를/ 당신이 당신을 알아볼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뭐 행여/ 못 알아본다고 한들/ 괜찮아요// 모든 사람은 갈 곳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유령이/ 있는 거니까요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줘도 못 알아듣는/ 당신이 있다면/ 곰과 눈사람이 싸운다고/ 생각해봐요// 입 닥쳐, 란 말을/ 누가 먼저 꺼낼지 그따위/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마시길, 둘 다 갈 곳이/ 있으니까요/ 비록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지라도/ 사랑하니까요//
* 제5회 동주문학상 수상작

봉투 같은 걸 들고 / 김륭
첫눈은 계속 내리도록 내버려두는 게 좋아// 여름에도 눈사람을 줍는 사람이 있어 봉투 같은 걸 들고/ 흰 봉투인지 검은 봉투인지는 몰라도 돼 어차피// 살아가는 자와 죽어가는 자의 이야기로/ 세상은 돌고 돌아// 애도가 사교가 되는 장례식장, 모르는 사내 둘이 마주보고 앉아/ 국밥을 먹는데 참 먹먹해 보여 그래서 좋아// 밥은 계속 먹도록 내버려두는 게 좋아 다정하게// 둘 중 하나가 죽었으면 너무 다정해져서 울지도 못할 거야// 이름 없는 씨앗을 받을 것도 아닌데 봉투 같은 걸 들고// 물소리가 물고기를, 물고기가 물소리를 잡으러 가듯// 눈사람은 좀 더 누워있게 내버려두는 게 어때/ 첫눈은 계속 내리도록 그냥 국밥이나 먹자// 또 오겠지 도망이라도 오겠지// 봉투 같은 걸 들고//
* 제5회 동주문학상 수상작

검은 기린 / 김륭
“이 육체 속에서 우리는 무얼 한단 말인가.”/ 내 옆 침대에서 누울 준비를 하고 있던 사람이 말했다./ ⸺안토니오 타부키, 『인도 야상곡』//
영혼을 다 써 버린 후 검은 연기처럼, 다//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다 나는, 내 몸이 어떻게 지내는지/ 당신이 지새는 밤과 어떻게 섞이는지 보려고// 내가 없는 내 죽음도 보일지 몰라 하얀 침대시트를 함께/ 말았던 당신의 죽음 또한// 그러나 지금은 자는 게 좋겠다고/ 선반 위에 올려놓은 130g 햇반처럼 납작해지는/ 별, 하얀, 검게 그을리기 좋은// 문득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들면 당신 또한 돌아왔다고/ 나는 다 써버리지 못한 울음으로 가만히/ 두 눈을 꺼트릴 것이다// 없는 아름다움도 막 팔아먹을 만큼 우린 참// 식물적으로 아팠지, 이런 문장 하나쯤은 서로의 입에/ 넣어 줄 수 없을까?//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떠나듯/ 검게 부러져 가는 서로의 목을/ 베개처럼 껴안고// 나는 왜 자꾸 눈사람 머릿속이/ 검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 제5회 동주문학상 수상작

​눈사람 / 김륭
나는 손이 없어 나를 꼭 껴안아 줄 수는 없지만/ 새로 태어날 수는 있습니다.// 추운 아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나는 발이 없지만 걸어서 왔습니다.// 하늘을 꼭꼭 밟고 왔습니다.//

떨림 / 김륭
울음이 울음을 밀고 있다// 이미 죽었는데 아직 죽고 있다는 듯이// 그때마다 눈송이, 이제 막 눈 뜬 늙은 눈송이 하나/ 땅에 발 내려 뭉쳐지려다 또 뿔뿔이 흩어지는/ 눈송이, 눈송이 뒤집어쓴 나는/ 눈사람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눈사람을/ 녹이는 사람// 열려라 밤, 닫히면 또 어때 중심을 잃은 내가/ 나를 걸어보는 이야기// 말 위에 말을, 글 위에 글을, 숨을 곳이 거기밖에 없어서// 다음 이야기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눈사람 검은 머릿속 가득 고인 피로 밤을 끓이듯/ 살 떨리는 필치로/ 기어코 나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가장 먼저 죽은 사람// 사람을 다 잡아먹은 공기는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는데, 달에 숨을 붙이러 가는/ 울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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