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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진수미 시인

by 부흐고비 2022. 7. 13.

진수미 시인
1970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다. 서울시립대 국문과 및 同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7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시집 『달의 코르크 마개가 열릴 때까지』, 『밤의 분명한 사실들』 등이 있다.

‘천몽’ 동인. 서울시립대 객원교수.

 



그해 오월의 짧은 그림자 / 진수미
사랑을 했던가 마음의 때, 그 자국 지우지 못해 거리를 헤맸던가 구두 뒤축이 헐거워질 때까지 낡은 바람을 쏘다녔던가, 그래 하기는 했던가 온 내장을 다해 엎어졌던가, 날 선 계단 발 헛디뎠던가 하이힐 뒷굽이 비끗했던가 국화분 위 와르르 무너졌던가 그래, 국화 잎잎은 망그러지던가 짓이겨져 착착 무르팍에 엉기던가 물씬 흙냄새 당기던가 혹 조화()는 아니었는가 비칠 몸 일으킬 만하던가 누군가 갸웃 고개 돌려주던가 달려오던가 아야야, 손 내밀던가, 그래, 그 계단 밑, 아픈 복사뼈, 퉁퉁, 붓고, 화끈화끈 그게, 사랑이라며, 탈골하며, 환하게 바람, 스미던가 그래, 사랑이던가, 그 누군가는 혹.//

10번 출구에서 돌아보라 / 진수미
도심이 좋아요. 보도블록과 낯선 이들을 사랑합니다. 어깨를 치고 툭 지나가도 만난 적 없는 궤도처럼// 춤추기 좋은 조명과 음악 속에서 여자는 금속의 날카로운 끝이 아랫배를 뚫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통증, 떨리는 나이프, 파르르, 존재여, 관통하려면 부디 고속열차의 스피드로// 망설이며 두드리는 계절의 노크처럼 빛 속에선지 핏속에선지 의식이 검은자위에 흘러들어 왔다 사라졌다. 희번득, 돌아서면 어느새 터널 끝// 팔랑이는 포스트잇의 날갯짓으로 이곳과 저곳이 나뉠 때 무언의 시선도 날카로운 금속의 일종이었다고, 피 묻은 비명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흘렀다고 누군가는 중얼거렸습니다.// 목소리는 무엇입니까. 궁극적으로 질문인 세계여. 여자, 한복판, 칼, 찔렸다……, 무표정한 당신, 사실의 톤으로 만져지지 않는 것들을 묻는다면, 양파의 궤도로써 도는 세계여. 지금 당신의 이름으로 벗기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음유 시인 / 진수미
시간의 흐름과 낡아짐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운명이 그러한 것 같다. 시라는 장르도 예외는 아니다. 시는 생일을 알 수 없는 예술이다. 아주 오래전 음유 시인에 의해서 음송되었고, 필사로 기록되다가 인쇄매체와 결합되면서 오늘날의 시가 생겨났다고 한다. 이 시는 요즘 볼 수 없는 공터와 거기 버려진 가재도구들을 생각하며 썼다.//

좀비도 방귀를 뀝니까 / 진수미
대합실 사내가 허리를 굽히는 순간, 이야기는 출발한다네 칙칙폭폭 바퀴를 닮은 무릎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척추가 어깨뼈를 능가하며 솟구치는 순간 경련이 사내를 삼켜 버렸네 이것은 좀비 영화의 시작이었지만 오래전 인적이 사라진 소읍은 무섭도록 고요했다네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허기가 위장을 점령하고 물어뜯을 육체가 없다는 절망이 뒤틀림에 파도를 주었네 내장이 말했다네 나는 뒤틀리고 있다네 뒤틀리며 팽창하고 있다네 헛것으로 빵빵하게 부푼 기관이 어둠 속에서 요동치고 있다네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지* 그 곁을 기차가 달렸어 쏟아질 듯 차체가 출렁였지만 괜찮아 모든 이야기는 탈선이니까 끊어졌다가도 이어지는 게 기차라는 말에는 폭발음이 실려 있으니까 좀비도 방귀를 뀝니까? 내장이 외쳤지만 사내는 듣지 못했어 좀비 1일차였고 그것은 귀부터 문드러지는 살덩어리였으니까 듣게 하려고 듣게 하려고 살덩어리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수밖에 없었다네//
* I Walked A Jombie(1943,밥 루튼⸳자크 투르네)

바기날 플라워(Vaginal Flower) / 진수미
여름 학기/ 여성학 종강한 뒤, 화장실 바닥에/ 거울 놓고/ 양 다리 활짝 열었다./ 선분홍/ 꽃잎 한 점 보았다./ 이럴 수가!/ 오, 모르게 꽃이었다니/ 아랫배 깊숙이/ 구근 한덩이/ 이렇게 숨겨져 있었구나/ 하얀 크리넥스/ 입입으로 피워낸 꽃잎처럼/ 철따라/ 점점(點點)이 피꽃 게우며, 울컥 불컥/ 목젖 헹구며, 나/ 물오른/ 한줄기 꽃대였다네.//
* 1997년 《문학동네》 신인상 수상작

구름의 탄생 / 진수미
배가 부를수록 몸이 가벼워졌다 자꾸만 천장에 붙으려고 한다. 아버지는 화분의 흙 속에 머리칼을 꾹꾹 눌러 담으셨다 머리카락이 흙 알갱이를 단단히 거머쥐고 팔다리는 제멋대로 솟아올랐다 머리털이 자라고 자라 발바닥이 천장에 닿았을 때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탯줄은 자를 필요가 없었다.//

'… … …' / 진수미
낭떠러지에는 비명이 살고/ 비명을 삼키려고 그들은/ 벌린 입아귀에/ 주먹 대신 나무 둥치를 쑤셔넣는다./ 비명을 받아먹으며/ 낭떠러지에서 사육되는 나무들의/ 유일한 취미는/ 추락하는 자의 옷자락을 거머쥐는 것이다.// 놓아줄까 말까 그들이/ 낄낄대는 동안 절벽의 여행자는/ 눈을 감지도 뜨지도 못한다.// 달의 코르크마개가 열릴 때까지//

더 작은 입자보다 조그만 / 진수미
턴테이블을 느리게 회전하는 오보에 선율은 연주자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여주지 않네. 허나 소리를 삼키는 소리를 볼 때, 개미소리로라도 울어야 한다네. 목소리는 무엇입니까. 더 큰 것이 큰 것을, 큰 것이 작은 것을, 작은 것이 그보다 작은 입술을 감춰버릴 때, 자신의 진열대에서 말없이 천칭을 꺼내보는 자여. 저울은, 평등은 무엇입니까. 차라리 비대칭의 지워진 얼굴을 들고 뛸까요. 마구 편향된 날개처럼 돌아가는 세계, 프로펠러여//

거꾸로 서 있는 나무/ 진수미
나는/ 한때 나무가 두 팔을 벌리고/ 바람을 끌어 모으며 살고 있다/ 생각했지만 이제는/ 땅 속에 머리를 박고/ 두 다리를 쳐들고 서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무는/ 물구나무서서/ 손가락으로 대지를 움켜 채고/ 끌어당기며/ 그래도 중력의 법칙을 지켜야지/ 지켜야지 중얼거리며/ 아랫도리를 허옇게 벗고서/ 머리카락으로 흙알 하나 하나를 휘감으며/ 하늘을 딛고 서 있다/ 새들은/ 나무의 사타구니에/ 집을 짓고 노래한다/ 나무들이 밤마다 性交했다는/ 전설을 상상하며/ 그 간사한 주둥이로 욕망은 즐겁다/ 욕망은 즐겁다, 라고.//

주사위 놀이 / 진수미
아야야―/ 함부로 굴리지 마세요/ 다루는 법이 여간 미숙하지 않네요/ 당신의 짜디짠 슬픔 속으로/ 그렇게 동댕이치지는 마세요/ 육면의 단단한 살갗이지만/ 눅눅한 담뱃재며 눈물이 배어든다고요/ 당신의 절망 따위에 절여지긴 싫어요/ (빌어먹을, 슬픔의 삼투압이라니!)/ 이봐요, 이러지 마세요/ 내 속에도 어쩔 수 없는/ 방류된 슬픔 하나 굴러 다녀요/ 점점이 맺힌 몸뚱어리인데요/ 이리 굴러도/ 저리 굴려져도/ 슬픔만이 또르르 튀어오르는 시간들인데, 아무리 그대―/ 나를 갖고 놀고 싶어도.//

리어 왕 / 진수미
암호를 대라, 네 패스워드는 무엇이냐/ (어둠의 개 컹컹/ 짖어댄다)/ 떨리는 손으로/ 뇌수의 키보드를 눌러댄다/ 삐익 삑― 교신 불가능/ 교신 불가능/ 아아, 쓸모없이 늙었구나/ 희미한 망막 떨리고/ 꺼질 듯한 왕의 탄식/ 힘없이 마른 땅에 꽂힌다/ 암호를 대라, 네 패스워드는?/ (어둠의 개 달려들 듯/ 으르렁거린다)/ 망가진 키보드를 던지고/ 두 손, 바닥으로 떨군다/ 주책 없는 타액을/ 갈라진 손등으로 훔친다/ 누구냐/ 암호를 대라, 어서!/ (어둠의 개 살라먹은/ 불 토해내고)/ 달빛 아래 선 늙은이/ 수치심에 떨며 외친다/ 애 애비다 애비!/ 이, 망할 것들.//

내 마음의 풍차 / 진수미
형, 나 이상한 애를 알게 됐어/ 아주 작은 애야 형 허리춤에 찰걸……/ (철커덕, 동전 내려가는 소리)/ 쿡, 이상한 취미 붙은 게구나/ 너 걔 에미 젖비린내에 반한 거 아니냐/ 그게 아냐 형/ 등에 혹이 하나 달렸어/ 형 머리만해, 그래서 허리가 휘었어/ 너무 무거워 보여/ 어떻게 떼줄까 항상 생각하는데…… (철커덕)/ 지랄하지 마 새꺄/ 노틀담의 꼽추 새로 찍냐/ 킥, 계집이 콰지모도라 거, 재밌는데/ 그렇게 말하지 마/ 젖은 눈…… 아주 그런 얼굴로 날 봐/ 아주 묘한…… 형, 그럼 내가 막 (철커덕)/ 녹아내릴 것 같아/ 야, 육갑 떨지 말고 내 말 새겨들어/ 너는 온전한 줄 알아 (철커덕) 새꺄/ 병신이 끼리끼리 모여 지랄 말고/ 빨랑 집이나 들어와/ 그러지 마 형/ 어제 걔 등에서 푸드득 새가 날았어……/ 이 새끼가…… 정말 돌았나…… (철커덕)/ ……몇 개 더 부화하면 집을 만들어야겠어/ 어쭈― 점점, 환장하네/ ……곧 날 수도 있겠지?/ 야! 성질 긁지 말고/ 그럼 형에게도 몇 마리 날려줄게…… (철커덕)/ 동전이 끝나나봐 형, 형? (급하게)/ 마지막인데, 어,(暗電)//

나의 붉고 푸르고 노란 / 진수미

아파트 단지 쪽문 옆/ 부추 파 마늘 생강 깻잎 상추/ 텃밭을 막 빠져나온 듯한 푸성귀가 널렸다/ 푸성귀 옆 먼지 날리는 거리에/ 노인이 앉아 있었다// 마트에서 장을 본 이웃들이 곁을 스쳐 지나가고/ 입을 꾹 다물고 그는 앉아 있었다// 자동차가 달리고/ 시간이 흐르고/ 좌판 옆/ 간판도 없이 앉아 있었다// 뙤약볕을 피해 자리 옮기던/ 그는 쪽문 바로 옆/ 공원 모퉁이에 눌러 앉았다/ 커다란 나무 밑이었다/ 어느 날은 통통한 몸집의 중년 여인이/ 그를 따라 채소를 다듬었다// 가을 햇살 아래 / 성귀 옆/ 붉고 노란 과일이 하나둘 자리 잡았다/ 사과 배 감 귤 무화과/ 자동차가 달리고/ 시간이 흐르고// 초겨울 냉기에/ 쿨럭이며 그는 앉아 있었다/ 싸락눈 떨어지는 그릇 속/ 물에 불은 흰 밥알을/ 입속으로 퍼 넣으면서/ 고집스레 바닥에 붙어 있었다// 자동차가 달리고/ 시간이 흐르고/ 그를 볼 때마다/ 쓰지 못하는 시를 생각해다/ 그를 생각하며/ 쓰지 못한 시들이 쌓여갔다// 쓸 수 있을까 나는,/ 그와/ 그의 노동을/ 곧 짓무를 붉고 푸르고 노란 것들/ 오전 아홉 시와/ 오후 여섯 시를 비추는 저 태양 빛을// 어스름 무렵/ 혼자 남은 채소와 과일을 수레에 싣는/ 뒷모습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쓰지 못할 거야/ 아마,/ 그는 내 시의 한계/ 내 언어의 절벽이로구나// 왜?/ 누군가 물었다/ 그가 아름답지 않아서?/ 시적이지 않아서?/ 그의 노동이 지루해서?/ 마치 지구의 자전처럼?// 누군가/ 나를 천천히 돌려세우며 말해주었다/ 아름답지도 시적이지도 않고 지루한 건/ 너의 언어란다// 마트에서 장을 본 이웃들이 스쳐 지나간다/ 입을 꾹 다물고 나는 바닥을 고집한다/ 멀미를 느낄 새도 없이//

 

심해어 / 진수미
내게는/ 두 개의 눈이 있고// 눈을 반쯤 감은 현실이 있고/ 스크린이 있고// 액자처럼/ 세계를 껴 안은 어둠이 있다.// 어둠은 사라지지 않는다./ 당신의 이름도 사라지지 않는다.// 스크린에는/ 하염없이 이어지는 빗줄기가 있고/ 납작 엎드린 고요가 있고// 우리는/ 왜 이리 슬픈 일이 많은 건가요?// 지층처럼 단단해진 어둠/ 못생긴 입술이 있고// 눈을 감으면/ 왜 동시에 감기나요?// 느릿느릿 어둠을/ 툭 밀어내는 물음이 있고//

검은 오르페우스 / 진수미
머리카락이 되어/ 까맣게 돋아나는 꿈을 꾸었다.// 검은색 시간들이/ 바람개비처럼 수채에 말려드는 꿈/ 그것을 음악이라 불렀다.// 등을 보면 마음이 놓이니까/ 꿈 없는/ 잠을 이룰 수 있으니까// 나의 등을 바라보고 걷고 있다./ 한없이/ 내가/ 내 안에 없다는 느낌// 한없이/ 내 뒤에/ 내가 걸어온다는 느낌// 다행이야/ 혼자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비명이 꺼지지 않은 목젖을/ 감출 수 있어서// 음악 속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이어서//

이 해변은 당신을 닮았다 / 진수미
전화를 받으면 어디야? 묻는 사람이 있다 나는 어디긴 어디야, 여기지 들키고 싶지 않다 병원에 있으면 환자 상담실에 있으면 내담자 교도소면 죄수 나는 의사가 아니니까 상담사가 아니니까 교도관이 아니니까 내가 누군지 말해 주는 건 장소인지도 몰라 전화를 받자말자 어디야? 묻는 사람이 있다 나는 여기 있지, 그러는 당신은 어딘데? 되물을라치면 거기가 어딘데? 끝없이 질문을 받는 꿈을 꾸었다 나는 여기야 바닷가를 걷고 있어 당신을 생각하고 있어 당신을 읽고 있어 뇌의 주름에 파도를 새기고 있어 하얗게 부서지는 꿈을 꾸고 있어.//

처용 단가(短歌) / 진수미
처용이 왔다/ 한없이 작아진 처용이/ 한없이 어려진 처용이/ 곤두박질 달려왔다/ 그렁그렁 잠긴 얼굴을/ 치마폭에 던진다/ 한없이 어려져/ 한없이 좁아져/ 어깨 하나로/ 꺼이꺼이 운다/ 천 년 전 그 밤도/ 무서웠다고/ 오늘처럼/ 오주주 공포였다고// 사내야 고개를 묻고 귀를 막아라./ 귀를 막고도 들리는 울음 있거든/ 피하지 말고 다 들어라./ 두려우면 치마폭을 빌려주마./ 내 치마폭을 감고 네가 울 동안,/ 울음 그친 후 해쓱해질/ 그대를 위해 흰죽을 쑤마./ 처용이 왔다./ 처용의 처도 왔다./ 꺼이꺼이 우는 처용 뒤에서/ 처용의 처가 처용의 어깨를 잡는다./ 소금 기둥이 된 서방을 위해/ 뒤돌아보지 않고 서역을 가야 하는 역할을/ 이생에선 그녀가 맡았으니,/ 사내야 그대는 울어라./ 처용의 처의 치마폭이 여기 있다.//

라라라 나는 / 진수미
라라라 나는 용서되지 않는 얼룩/ 얼룩 위의 곰팡이 그대 삶을 부식하는 좀벌레/ 라라라 나는 지워지지 않는 그대의 오점/ 벤젠도 미온수도 밥풀도 소용없다네/ 라라라 나는 그대가 잡았다 놓친 한 마리 새/ 그대 얼룩의 망막 위에 비누거품처럼 떠오른다지/ 라라라 그대 돌이킴에 빠질 수 없는 향신료 나 없인/ 그대 아무런 맛도 향도 낼 수 없다네/ 라라라 나는 그대의 영원한 착각 한때의 오해/ 헐렁한 작업복에 꽂힌 철없는 연장/ 뚱땅거리며 그대를 배회했었지 요령도 없이 뚱땅뚱땅/ 나는 그대의 빈 수레 공수래공수거 그렇게 왔다 갔었지/ 나는 그대를 향해서만 구부러진 순결한 못/ 코르덴 외투며 챙이 둥근 모자가 걸리기도 했었지/ 그대가 사력으로 잡아 뽑기 전까진/ 라라라 나는 그대 뇌리의 메워지지 않을 어떤 흠/ 그대 마음 한 자락도 걸어두지 못하리 라라라 그대 문턱으로 가는/ 낮은 사닥다리를 넘어뜨린 이후론, 그 어떠한//

가스등 / 진수미
균열 없는 기억이란 없어 쩍쩍 갈라져 벌어진 입 동티 나지 않는 기억이란 끄아악 비명을 지르며 제 몸을 분지르는 분필처럼 끄아악 어제가 다하지 않았는데 오늘이라니 최초로 통과한 구멍으로 다시는 기어들 수 없다니 곧 헐리고 말 假建物의 운명이라니 그대가 찍어 날린, 둔탁한 원호를 그으며 끄아악 먼지로 바수어지는, 믿을 수가 없어 완전한 건 그대가 불러모은 필름뿐 무릎에 올라 가르릉 목을 울리다 그대 숨통 낚아챌 순간만을 기다리는 짐승처럼 혈관을 도는 피톨은 더멀리 기억할 수 있을까 헝클린 타래를 흔들어 막 꺼진 양초가 불어넣는 브라운 운동처럼 허공으로 스밀 수 있을까 갱도마다 炭柱가 무너진다 그대, 동티 나지 않는 기억이란 없는 것 모든 게 一片의 그대겠으나 그 모두를 만난다 해서 완전한 그대 만져질리 없고 어둠이 乾溜하는 결코 가두리지 못할 저 빛, 그대는 깊숙이 잠들어간다 그 누구보다 깊어진 잠을 딛고 바람 속으로 툭툭 그림자를 끊어 넣는 것이다 分光.//

밤의 아이들 / 진수미
밤은 자꾸 어두워지려고 한다// 태양의 검은 동공// 희번득/ 안구 뒤쪽으로 굴러갔다 되돌아오고/ 아랫눈썹이/ 바르르 떨리는 찰나// 밤의/ 화장법을 익힌/ 아이들이/ 그네에서 다리를 흔들다/ 하나둘 사라진다/ 흑마술처럼// 심장은/ 밤의 펌프질을 시작하고// 후두둑/ 후두둑/ 물들이 어둠 쪽으로 이동하는 때// 졸다 깬/ 운전자의 두 눈에는/ 차창에 흐르는/ 아이들의/ 뭉개진 검은 이마//

비인칭 독서 / 진수미
읽어라. 무엇을?/ 멀리 닭 한 마리, 형체 없는 새벽을 운다.// 읽어라. 누구를? 먼동이 트는구나./ 텅 빈 페이지 한 장이 바람도 없이 일어서고 있다.// 읽으오./ 읽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하얀 바닥은 평평하고 늘 아름다운 꿈을 꾸는 것 같고/ 꿈틀꿈틀 윤전기가 쏟는 것은 자벌레의 사악한 애벌레 떼// 분쇄된 활자를 백지 위에 쏟아놓습니다./ 흑색 마취 혹은 각성의 가루들. 외눈박이처럼 한쪽 콧구멍을 막으면 더 황홀해질까요./ 10분 뒤, 당신은 죽은 새가 놓인 두 갈래 자갈길에 서 있게 된다./ 흙을 주세요. 가엾은 새들. 어느 쪽을 택해도 황무지, 황무지, 황무지가 펼쳐질 터// 이름을 감춘 자의 머릿속을 뚜벅뚜벅 걸을 수 있다./ 혹은 또각또각. 작가는 아무것도 돼서는 안 돼./ 그녀의 이야기에는 이름을 바꾼 자가 언제나 등장하지요. 그들은 글을 쓰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되지 않기 위해서. 아무거나 돼 버리기 위해서./ 당신의 맷돌은 싸르락싸르락 바람 위에 한 톨의 모래를 얹고 있습니까,//

그 여름 마지막 비의 춤 / 진수미
그 여름 얼어붙은 비가 내렸어요/ 속옷만 입고 쫓겨난 아이들은/ 맨발로 춤을 추죠/ 맨홀 사이사이를 돌며// 번개 쳐도 눈 반짝이지 않고/ 눈물에도 녹지 않는/ 날카롭고 시린 잇몸들 아이들은/ 맨발로 그걸 느끼죠// 콩콩콩 소리가 다가오면/ 맨홀들은 서둘러/ 벌린 입을 다물죠/ 갈라진 맨발도 그걸 느끼죠// 나는 사라지지 않을 거죠?/ 맨홀들은 함구했지만// 그 여름 유리 조각 섞인 비가 내렸어요/ 아무도 사라지지 않았지만/ 춤추는 아이는 볼 수가 없죠/ 유리로 된/ 혓바닥이 넘실넘실 도로를 가득 매웠죠//

껌 씹는 여자 / 진수미
복권 긁는 대신 껌을 씹지/ 딱 딱 소리는 취미 없고 그래서 아무도 돌아보지 않지만/ 풍선을 분다 아주 크게/ 아주 높게// 하얀 구체가 부풀다/ 애드벌룬처럼 커지면/ 거기 매달린 껌딱지 같겠지 나는/ 말똥을 이고 가는 말똥구리 같겠지// 애인을 만나면/ 키스 대신/ 풍선을 맞대기/ 터질 때까지 비벼보기/ 피시식/ 빵―/ 그리고 다가오는/ 입술의 감촉// 푸하하하 풍선을 분다 아주 크게/ 아주 높게/ 말똥을 부풀리는 말똥구리처럼/ 꿈을 씹다가 혀를 깨무는/ 몽상가처럼//

빛의 저격수 / 진수미
삐뚤빼뚤한 치열을 두드릴 수는 없잖아,/ 잇새에 돌이 가득했다. 의사는 스케일링을 권했다./ 치지도 않을 건반의/ 뚜껑을 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작은/아버지는 조율사였어요 가끔은 제 몸도 만져줬죠// 복기할 수 없는 음들이 밤마다 찾아오고/ 욕실 거울에 달린 얼굴에는 누군가 밟고 다닌 흔적이,// 몇날 며칠을/ 턱을 잡고 앓았다./ 아랫배도 수상스레 부풀어 오르는데,// 작은/아버지는 조율사였어요 가끔은 제 몸도 만져줬죠// 약사는 말없이 진통제를 내밀었다./ 전선 위에는 햐얗고 검은 새들이 줄지어 앉아 있다./ 어젯밤 그녀가 뜯어낸 건반들이다./ 햇빛이 그들을 쏴 맞추고 있다.// 코 위까지/ 점퍼의 지퍼를 올리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작은/아버지는 조율사였어요 가끔은 제 몸도 만져줬죠//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살찐 건반의 관절이 꺾이면서 공기의 현을 두드린다./ 무광의 돌들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빛을 되쏘고 있었다.//

고양이가 자라는 소년 ㅡ병승에게 / 진수미
사람이 안 볼 때/ 움직이고 춤을 추는 인형들이나/ 등짝에 글자 새기고 돌아앉아 있는/ 書冊界나 매한가지/ 불시에 일어나/ 뽑아 들면 흥청망청 섞여 놀다/ 낙오된 글자를 만나게 된다/ 뒤죽박죽/ 시집을 넘기는데/ 고양이(가) 자라는 소년이라니*// 너만의 새로움/ 병승 괴물은 어디서부터 변신을 시작하나/ 눈에서 코, 입으로? 그건 재미적고/ 귀가 진행되다 손가락으로 전이/ 얼룩덜룩 얼기설기/ 그래 그렇겠지 노오란 안광을 흘리며/ 털북숭 네 무릎을 쭈욱 뻗는 너/ 내일이나 모레쯤/ 전화를 넣으면 야아옹/ 수염을 바르르 떨면서 수미냐옹?/ 핸드폰 액정을 발가락으로 꾹꾹 누르면서// 다른 페이지를 훑는 사이/ ‘가’를 밀치고 ‘와’가 돌아왔지만/ 멍청한 조사들/ 와나 가나/ 그게 그거지/ 역시 너는 멋진 녀석// 길어진 그림자가 두 갈래로 갈라져/ 갈라진 손가락을 쳐들고/ 서로에게 반사를 보내고 있다/ 그래 그렇지/ 역시 너는 멋진 녀석//
* 황병승 '고양이와 자라는 소년'

수요일의 날짜 변경선 / 진수미
조리기구 닦던 손이 심장으로 다가간다// 없다, 뻥 뚫린// 구멍을 통과한 손이 휘어지고/ 반신(半身)을 휘돌아/ 반쯤 젖은 행주를 거머쥐는데// 꽁무니에 실을 매달고/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하는 거미/ 천정에는 별 모양의 물방울// 얼어붙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어제의 태양을 꺼낸다/ 냉동고의 역한 냄새가 함께 흐른다// 칼을 쥔다/ 냉동선에는 방부제가 없다// 어제의 심장이 방출한 피가/ 붉은 시계의 모래알처럼 흩어지면/ 울어도 될까, 호라치의 사람들이여// 밤이야,/ 태양은 졌어/ 손을 갖다 대도// 뻥 뚫린,/ 오늘은 종일 밤이지/ 저 멀리 흘러가는/ 한 척의 냉동선을 봐//

우울한 베란다 ㅡ모그y의 설계 음악 / 진수미
두 번째/ 세계의 모든 두 번째/ 눈이 내린다// 당신이 펼친 생계도에 베란다는 없고/ 식물처럼 자라는 베란다/ 추방당한 정원의 눈같이/ 서서/ 보았지// 잠옷 입은 아이들이/ 창틀에서 베란다로/ 베란다에서 소파의 용수철로 뛰어오르고/ 눈발은 건물 편으로 돌아선다// 우리도 게임을 시작할 거야/ 두 번째 세계의/ 모든 막장을 어루만지는/ 빛// 쉰여섯의 마틸다 고모가 조카에게 연정을 품고/ 일곱 살 베이브가 영화같이 안아주요// 속삭일 때/ 사랑이라 착각하면 지는/ 발렌타인 연인의 러브 어페어// 게임의 완성은 룰의 환상이겠지만/ 승패를 나누기 직전/ 신호등 앞에 선/ 설계회의는 자꾸 우스워지려 한다// 눈발이 사랑하는 베란다/ 당신의 베란다/ 발코니가 언급 안 될 순 없겠지/ 그이와 내가 결정적으로 다른 게 뭐죠?/ 격한 고뇌가 임신하는//두 번째/ 세계의 모든 두 번째/ 미래를 딛는 음표를 달고/ 눈이 내린다// 하얀 보자기처럼/ 악보처럼/ 베란다의 생애를 덮으며//

겹겹의 당신 / 진수미
우리, 라는 말을 상상할 필요가 없던 머나먼 곳. 당신은 언제나처럼 눈을 감는군요/ 북소리가 휘몰아치는 안개 속에 우린. 같이 있었잖아, 이야기의 시작은 혼자인 법이 없어서,/ 복수의 그건, 겁 많은 동물의 가두리를 가리키기도 해요. 아무것도 믿지 않는 당신. 별. 사나운 당신, 갈기.// 북소리는 안개처럼 우릴 빨아들였고, 손을 넣어 서로의 심장을 어루만질 때마다 사라졌던/ 우리들이 하나둘씩 돌아왔죠. 하나면서 둘이고 메두사의 갈라진 머리칼이기도 했던 우리들./ 소리는 물속에서 올라오고 있었어요. 우리는 수면에 얼굴을 떨어뜨렸죠./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너울대는 젖은 머리털 새로 우리를 올려다보고 있었어요. 당신의/ 눈, 코, 입에서 뿌글뿌글 거품이 솟아오르고 있었고, 소리는 더 빠르게 잦아들고 더 빨리 자라났어요./ 어서 나와, 외쳤지만 당신은 동그란 눈을 우리에게 고정시킨 채 꿈쩍도 안 했죠./ 던져 줄 게 없어서, 우리의 몸은 왜 이리 미끈둥미끈둥한 걸까, 누군가가 탄식하듯 혀를 늘어뜨리기도/ 했었죠. 당신은 아무것도 붙잡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어요. 주무시네요, 이 순간, 당신은./ 헐떡거리며 방죽에 주저 앉았어요. 우린 늘 쉽게 지치잖아, 늘였던 혓바닥을 되감으며 어떡하지를/ 연발하고 있는데, 어느 샌가 당신이 우리 곁에 앉아서 어떡하지, 어떡하지를 반복하고 있는 거예요./ 물에서 나와보니 당신은 하나가 아니었어. 안개가 걷히고 나니 우리와 똑같은 숫자로 불어 있었지./ 똑같이 데려갈 친구가 생겨서 너무나 기뻤어. 우리의 목욕물을 나눠 주고 우리의 옷을 입히고 우리의 침대에/ 눕혔지. 당신은 말 잘 듣는 아기 같았어. 우린 엄마가 되었다고 해야 옳을까,// 북소리와 안개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갈라진 서로의 틈새를 헤집는 대신, 우리는 밤마다 당신 심장을 어루만졌지./ 이제 난 알아, 우리가 더 이상 우리가 아닌 걸. 우리들은 하나둘씩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당신들이 앉아 있더군./ 우리가 남긴 목욕물을 끼얹고 우리의 호흡과 기억을 되풀이하면서 우리의 표정으로 스튜를 젓더군. 이제 난 알아,/ 이 이야기가 더 이상 우리만의 이야기가 아니란 걸.// 북소리가 시작되었네. 저 소리를 따라 나 역시 사라지겠네. 이야기엔 왜 그리 한숨과 주름이 많은걸까, 당신을/ 닮은 그녀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주름, 그래, 우주를 주무를 수 있던 시간들. 북과 안개의 융단이 데려다 주는/ 머나먼 곳. 다시 한 번, 물속에서 완성되는 종족이 다시없기를, 우리의 이름을 빌려서 빌래요. 안녕, 아름다운 겹겹의 당신.//

냉장고 소년 / 진수미
이 속은 환한데? 이곳은 환한 내부./ 멀리 안 가도 되겠어, 엄마/ 어떠한 환속도 우릴 기다리지 않고,// 이곳은 진짜로 환하군. 강보에 싼 아가들이 유골로 박혀 있군./ 신문지로 둘둘 말거나 쇼핑백에/ 대충 접어 넣지 말아요. 아기는/ 버리실 때에도 예쁘게,// 조심하거라. 잘못 짚으면 와르르 무너질 거야./ 이 방엔 산발한 어머니가 참 많이도 매달렸군./ 배곯은 아기울음은 나를 흥분시키지,/ 유두 끝에 물큰 침이 돌지./ 콩들이 쏟아진다. 얼어서 뭉쳤던 모조 눈알도 쏟아진다. 소년은 제 불알을 놀듯 어미의 젖을 잡아당긴다. 찬란한 오색 젖이 뿜어지고 흰개미들이 얼른 길을 덮는다. 나는 송사리야. 물살에 머릴 박고 꼬리를 살래살래 치며 엄마, 이곳은 납골당이지? 나는 부장품인가? 엄마, 이곳은 늘 환하고 언제나 곡소리를 모방한 음악이 흐르는군. 곡을 따라 내 유두엔 어느새 머리칼이 자랐군.//

짐승의 말 / 진수미
낭떠러지에는 비명이 살고/ 비명을 삼키려고 그들은/ 벌린 입아귀에/ 주먹 대신 나무 둥치를 쑤셔넣는다/ 비명을 받아먹으며/ 낭떠러지에서 사육되는 나무들의/ 유일한 취미는/ 추락하는 자의 옷자락을 거머쥐는 것이다.// 놓아줄까 말까 그들이/ 낄낄대는 동안 절벽의 여행자는/ 눈을 감지도 뜨지도 못한다.// 달의 코르크 마개가 열릴 때까지//

푸른 잎 우주 ㅡ0416 /진수미
아침이 왔다 물 한 컵 마시고 고양이 밥을 주고 스트레칭하고 더없이 좋은 시작이었는데 뼈가 부서졌다 모든 게 망가졌다 광장에 들렸다 카페에서 책을 읽기로 한 약속 동강 난 연필처럼 어디론가 굴러갔다 힘이 주어지지 않는다 움직일 수 가 없다 엉뚱하게 사지가 부푼다... 내 것이 아닌 듯하다... 아프다......, 의사가 상처를 두드리며 물었다 최대치를 10이라 할 때 어느 정도 아픈가요? 통증을 가늠하다 혼란이 왔다 내게 1인 것이 남에게 3일 수 있지 않나요? 타인에게 6이 내게는 2면 어쩌나요? 당신의 통증은 당신의 것 나의 것은....... 우리는 앞을 보고 서 있었다 서로를 곁눈질하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당신의 심장을 움켜쥔다면 당신 고통을 헤아릴 수 있을까...... 고통 속에 고립되지 않으려 우리는 가슴을 쥐어뜯는다... 울부짖는다...... 거긴 7만큼 아파요 이게 9의 경지인가요? 통증에 계단이 나 있다면 고통의 나선 계단을 다 같이 오를 수 있다면 더 높이 서 있는 당신을 향해 고개 젖힐 것이다. 당신 얼굴에 무언가 흐른다면 그것이 여름비처럼 살갗을 두드린다면 용암처럼 얼굴을 녹인다면 우리는 다 같이 아프다 아프다 외칠 것이다 고통에 몸 비틀 것이다// 그래서일까요/ 통증의 시간은 식물을 닮았어요/ 다른 시간의 가지를 타고 오르는 넝쿨처럼// 줄기 끝/ 붉은 꽃을 매달고 화분 밖으로 팔을 내뻗는/ 게발선인장처럼//

사라짐 B / 진수미
내게서 떠나는 나를 계측/ 하는 기계를 발명했습니다// 자넨 아직 멀엇어,/ 막 출발하는 연기들, 비웃음// 그건 발가락 문제입니다./ 떠돌이 특허꾼이 외쳤다.// 당신, 목까지 벌게졌어/ 갈라진 초쟁월初生月처럼/ 노란 발톱들이/ 딱딱 몸을 튕기고 있었다.// 발가락은 열네 개에서 스물아홉 개/ 묵묵히 자라났다./ 거리의 여자가 되고 싶습니다.// 을지로 3가 계단참에서/ 0.7cm 떠오른 남자를 본 적이 있다./ 두 달하고도 열흘, 노숙의 밤은/ 분리된 자의 것이다.// 코와 코가 맞닿는 높이/ 자신의 귀에 대고 외친다./ 여보시오, 들리나? 나요,/ 이 말 들리오?// 수박의 스너프 필름을 상상하는 구름/ 삼키기 쉬운 캡슐처럼/ 녹고 있습니다.// 거리가 집으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당신의 바닥 게이지는 몇입니까.// 발가락이 다육다육이란 걸/ 믿으실 때까지/ 귀환하지 않겠습니다.//

크리스마스 마켓 / 진수미
취기를 따라 비틀거린다 옷 벗은/ 알코올의 혀가 전신을 핥고 지나갔다./ 적조는 쉽게 떠나지 않아요 오늘 우린/ 태양ㅡ 유령ㅡ이라/ 불러 주기// 이 도시에서/ 네 時의 작명가처럼 시시한 게 또 있을까,/ 달의 등근 숟가락도 희미해지는데/ 길을 것이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단 얘기지// 472와 293의 무릎이 휘청거렸다./ 어쩐지 우리는 통로 같지 않아?/ 절멸로 가는 자연사 박물관이지// 희미하게 올라가는 달의 입꼬리 새/ 덧니가 반짝 보였다/ 사라지려는/ 찰나,// 사랑해/ 우리는 유령처럼 입을 맞췄다./ 보이는 것이 다 붉었다./ 입술이었다.//

죽은 자의 휴일 / 진수미
한 발을 딛고/ 두 발짝 딛고/ 다음 발은 싱크홀/ 다음 다음 발은 무엇일까/ 생각하다 잠이 깼다// 지금은 밤일까/ 아침 일까/ 신새벽이라는 말을 좋아했던/ 누군가가 떠오르고/ 나는 바닥을 만져본다// 팔이 길어져/ 콘크리트를 뚫고/ 그러고도 길어져/ 무언가 만져진다면/ 죽은 이의 심장이라/ 부르리// 딱딱하고 느릿느릿 /움직이는 그걸/ 학교에선/ 맨틀이라 가르쳤지/ 하지만 그건 떠난 자의/ 검붉게 끊어오르는 멘탈// 이미 그들은 죽었고/ 산 것은 나라는데/ 도무지 뭐가 팩트고/ 가짜 뉴스인지/ 바닥을 만질 때마다/ 헷갈렸다// 나의 매일매일은/ 그들의 빨간 날/ 딱딱하고 느릿하게 출렁이는 시간/ 그건 핵에 가까운 거야/ 핵을 녹이려는 흐름인 거야// 한강변 아파트는 높이높이 솟구치고/ 기억은 짧고 뭉툭해져 간다// 다정했던 아이/ 그러나 죄를 짓고/ 벌 받는 자세에 괴로워하고/ 딱딱해진 심장을 안고/ 휴일의 우주로 떠나갔지/ 너를 떠올리며/ 다정함을 떠올리면/ 나도 죄를 짓는 걸까// 35층 아파트에 설 때마다/ 바닥을 내려다본다/ 여기서 떨어지면/ 무엇이 먼저 바닥과 만날까/ 금이 간 액정에서 손을 떼고/ 심장을 쓰다듬는다// 이 다음 발은/ 싱크홀,//

버스보이, 시인, 웨이트리스 그리고 혁명 / 진수미
워싱턴 D.C/ Busboy and poets라는/ 레스토랑이 있다.// 버스보이는/ 웨이트리스를 도와/ 그릇을 치우/고 설거지하는 사람/ 시인과 이들이 어떤 협의체를 만들고/ 어떤 방식으로 혁명을/ 꿈꾸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웨이트리스,/ 내게도/ 사랑하는 버스보이가 있었다.// 당신이 원하는 음식을/ 주문서에 적고/ 알맞은 온도의 접시들을/ 재빨리/ 테이블에 내려놓는 것이 나의 일,// 당신이 먹은 접시를 치우고/ 흘린 소스를 닦는 것이/ 버스보이가 했던 일,// 우리는/ 그렇게 신나게 일을 했었다// 새벽이 가까워진 레스토랑에서/ 당신의 팁을 나눠주고/ 당신 흉도 나눠 듣고/ 더듬더듬 토로하는 불법 체류의 삶에/ 귀 기울이며/ 그렇게 신나게 우정을 쌓아갔다// 아니,/ 그렇게 우정이라고 생각해왔다./ 버스보이는/ 더 이상 나와 일하지 않는다.// 그렇게 더 허드레한 직장으로 밀려 나고/ 더 이상 내 전화를 받지 않는다./ 나의 무엇이 그를 섭섭하게 했던 모양/ 그게 뭔지 나는 짐작조차 못 한다.// 우정이 깨지고/ 이유를 모른다면/ 그것은 당신이 가해자라는 말// 선량하고 성실했던/ 나의 버스보이여/ 우리는 친구가 아니 었었나, 따위/ 탄식은 집어치워라/ 틀림없이 내가 뭔가 그를 서운하게 했다.// 뭔지도 모른다는 게 섬뜩해서/ 허둥대다/ 주문을 잘못 받아적고/ 주방과 홀에서 욕을 먹고// 인원 감축이 이루어진/ 텅 빈 레스토랑/ 더러운 접시와 테이블, 의자들만이/ 나를 응시하는 시간/ 퉁퉁 부은 발목으로 버스를 밀며/ 그를 떠올렸다// 레스토랑 밖에는 달이 떠 있지/ 싯누런 가래를 매단 달무리처럼/ 지워진 듯 돋아난 듯/ 그렇게 CLOSED를 속삭이며 떠 있지// 달빛 아래 서면/ 죄인이라는 생각/ 어쩐지/ 시인에 가까워졌다는 생각// 받지 않는 전화를 끊으며/ 이래서/ 조직이 힘들다는 생각// 이래서 나의 혁명이 멀다는 생각/ 워싱턴 D.C보다/ 달 정찰 인공위성보다/ 더, 더, 더, 멀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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