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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블록현상이 찾아오다 / 조계선

by 부흐고비 2022. 7. 27.

글이 도무지 써지지 않는다. 글쓰기와 멀어지지 않으려면 매일 무엇이든 써야 한다는 주위의 조언이 마음을 조급하게 만든다. 기껏 머리에서 떠올린 단어들은 제자리를 찾지 못해 맞춰지지 않는 퍼즐 같다. 글머리부터 티격태격하다 힘들게 조합한 문장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가 없다. 쓰고 지우길 반복한 날이 얼추 한 달은 지났다. 생각해 보니 아끼던 안경이 사라진 시기와 딱 들어맞는다.

한 달 전쯤이다. 십오 년 가까이 써온 자줏빛 뿔테 돋보기안경이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아침나절 신문을 볼 때 사용한 것까지는 기억나지만 어디다 벗어두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넓지 않은 집안을 몇 날 동안 뒤져도 행방이 묘연했다. 여분의 돋보기는 두어 개 더 있지만 집에서 글을 읽고 쓸 때 늘 애용해 온 것이다.

긴 시간 길들여져 손때 묻은 안경은 몸의 일부분 같다. 문득 사람에 대한 집착도 버려야 한다고 말해 왔거늘 물건쯤이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쓰다만 글처럼 찜찜한 마음은 남아있지만 찾기를 포기했다. 만약 이사를 하게 된다면 어디에서 불쑥 나타나 이산가족 만나듯 해후하게 될지 모른다는 미련은 남겨 두었다.

사용하지 않던 안경을 찾아 써고 모니터를 보고 있자니 눈이 영 편치 않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 나와 궁합이 맞지 않아 글을 쓸 수가 없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지만 글이 써지지 않는 원인이 사라진 안경 탓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내 안의 문제를 밖으로 돌리고 싶은 얄팍한 심사일 뿐이다.

아예 컴퓨터 전원을 껐다. 그때 말로만 듣던 ‘블록현상’이 찾아온 것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창작을 하고 싶어도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작품을 만들지 못하는 상태를 ‘블록 현상’이라 부른다. 작가에겐 무언가 써야겠다는 간절한 생각은 있지만 마음과 달리 단 몇 줄의 글도 쉽게 나오지 않는다는 증상이 어쩐지 나와 닮았다.

등단을 하고 삼 년 동안은 글쓰기와 허니문 기간이라고 말한 어느 작가의 말이 떠오른다. 사랑하는 남녀사이에도 흔히 벌어지는 일이지만, 작가와 글쓰기도 허니문이 끝나면 데면데면해져 멀어지기 쉽단다. 어떤 것이든 사랑을 지켜내기 위해선 인내가 필요한 모양이다. 나도 삼년 남짓 글을 써서 수필집을 냈다. 허니문 동안 알차게 시간을 보냈지만 달달한 시간이 지나고 나니 우리 사이가 멀어지려나 보다.

맨부커 상을 받은 미국의 소설가 필립로스는 ‘거침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은 증표이며 실제로는 쓰기를 멈추어야 한다. 한 문장에서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헤맬 때 글쓰기를 계속해야겠다는 확신이 든다.’ 고 말했다. 작가의 말을 다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쉽게 써 내려가는 글엔 자신의 생각을 담아 낼 공간이 없다는 것 아닐까. 글쓰기는 자신과의 싸움이며 좋은 글이란 쉽게 태어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들린다.

글쓰기는 스스로를 탐사하며 자신을 다듬어가는 작업이다. 그러기에 글은 작가의 마음 안에서 만들어 내는 분신이기도 하다. 수필집을 낸 후 글을 쓰기가 힘들어진 이유는 책에 쏟아낸 수많은 말들이 무겁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내 안에 숨어있던 사유가 걸러져 문자로 태어나면 생명을 얻게 된다. 그 순간 글 속의 나와 글 밖의 내가 일치하는지 물어온다.

두터운 삶의 고치 안에서 우화 羽化를 꿈 꾼 것은 화려한 나비가 되려는 것은 아니었다. 누구나 글이라는 날개를 단다면 갑갑한 현실의 고치를 뚫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자신도 언젠가는 책을 내고 싶다던 오십 대의 글벗이 화답을 보내왔다.

“선배는 내 미래의 롤 모델이에요”

글쓰기가 선물한 인생 최고의 찬사이다. 한 동안 짓눌러오던 글의 무거움에서 조금은 벗어난 것 같았다.

긍정 심리학자들은 인간에게 몰입, 즐거움, 의미라는 세 가지 조건이 주어졌을 때 행복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때때로 글쓰기는 내게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게 하는 몰입이란 이름의 마법을 데려온다. 그것은 즐거움을 불러내고 덤으로 삶의 의미까지 주는 일석 삼조 같은 일을 해낸다. 행복은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는 생각도 들게 만든다.

동네 안경점에 들러 노안으로 온 난시와 원시를 조율해 줄 다초점 안경을 맞추었다.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할거란 직원의 말에 불편함을 견디고 있는 중이다. 새 안경의 밝은 렌즈가 눈에 편해질 무렵이면 ‘블록현상’이라는 글쓰기의 어려움에서 벗어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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