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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지내 놓고 보면 / 김태길

부흐고비 2023. 4. 4. 08:59

속상하고 화나는 일, 억울하고 분한 일, 매일같이 일어난다. 친한 친구 만나 하소연한다.
"액땜한 셈치고 잊어버리라"고 위로한다.
"남의 일이니까 그렇게 태연하게 말할 수 있겠지" 하며 이번에는 친구에게 화풀이를 한다. 친구는 피식 웃고 만다.

나도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탓으로 큰 손해를 본 경험을 가졌다. 집 한채를 사기 당한 적도 있었고, 속담 그대로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아픔도 더러 당했다. 자질구레한 일로 기분이 상한 날은 예쁜 얼굴을 가진 여자가 대로상에서 껌을 볼품 없이 씹는 모습을 목격한 날보다도 더욱 자주 있었다. 새로 산 고무신 또는 우산을 도둑맞고 한동안 기분이 나빴던 경험도 있다. 하루 세 끼 먹기가 어렵던 시절의 이야기다. 크게 잘못한 일도 없이 담임 선생에게 따귀를 얻어맞고 밤잠을 설친 일도 있다. 다친 데도 없는데 기분은 몹시 언짢았다.

지내 놓고 돌이켜보면 내 일도 남의 일이 된다. 아무렇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그토록 속을 끓였다는 생각에 스스로 웃는다. 내가 직접 겪은 일이지만, 남의 일처럼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마음이 가라앉고, 마음이 가라앉으면 남의 일처럼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의 경우가 그렇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시간이 약이다.

비범한 사람들은 처음부터 만사에 초연할 수가 있다고 들었다. 고승(高)이니 큰스님이니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실제로 그들이 그토록 초연한 경지에 이른 것인지 또는 속마음을 감추고 초연함을 가장하는 데 성공했을 따름인지 그것은 알 수 없다. 초연함을 가장하는 몸가짐과 표정을 오래 되풀이하는 가운데 실제로 초연한 심경이 어느 정도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겉으로 항상 웃는 얼굴을 하면 안으로 즐거운 마음이 생기고, 항상 어두운 표정을 지으면 어두운 마음이 생긴다. 제임스와 랑게는 인간 심리의 미묘한 측면을 들여다본 심리학자였다.

그러나 표정과 몸가짐의 겉모습을 꾸밈으로써 그에 상응한 속마음을 창출하고자 하는 방법이 언제나 충분히 성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칫하면 범인(凡人)만도 못 한 위선자가 생길 염려도 있다.

위대한 인물의 모습을 실감 나게 연출할 수 있는 배우나 탤런트를 길러내기는 비교적 쉬울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인물을 길러내거나 스스로 그런 인물이 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다만 '매우 어렵다'와 '불가능하다'는 같은 뜻의 말이 아니다.

희로애락의 감정을 초월하여 속세의 모든 일을 조용하게 내려다보는 경지에 도달했다고 가정한다. 크게 분노하고 슬퍼한 일이 없어질 뿐 아니라, 춤추고 노래하며 기뻐할 일도 없어질 것이다. 실패를 괴로워할 까닭이 없으면 성공을 즐거워할 까닭도 없어진다. 성공을 즐거워할 까닭이 없어지기 전에 '성공'이라는 것을 위해서 기를 쓰고 노력하는 일 자체의 의의가 의심스럽게 된다.

모든 것은 자연의 섭리를 따라서 흘러갈 것이고 굳이 선악과 시비를 따져서 어떤 원칙에 집착할 이유조차 없어질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을 다시 원점으로 되돌리게 된다. 불행한 일 당하면 근심 걱정하며 슬퍼하기도 하고, 좋은 일 생기면 기뻐하고 크게 웃기도 하며, 그저 보통사람으로 사는 편이 차라리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되돌아간다.

인공위성에 몸을 싣고 고성능 망원경으로 인간 세계를 내려다보면, 개미 떼 같은 하계(下界)의 희로애락이 가소로울 것이다. 그러나 그 우주인에게는 초연함에서 오는 외로움이 따를 것이다. 외로움조차도 초월하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외로움조차도 느끼지 않는 초연한 삶, 그것은 벌써 인간으로서의 삶이 아니다.

그러나 지내 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로 미워하고 분노하며 밤잠을 설치는 낮은 구렁을 벗어나고 싶은 소망은 여전히 남는다. 분노하고 미워하거나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지나쳐서 나와 내 주위 사람을 괴롭히는 지경에 이르는 것은 어리석은 노릇이다.

희로애락의 감정을 갖되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갖고 싶다.

크게 슬펐던 일은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역시 슬픔으로 남는다. 그러나 마음이 혼란할 정도의 슬픔은 아니다. 크게 기뻤던 일은 오랜 세월 이 지난 뒤에도 역시 기쁨으로 남는다. 그러나 냉정함을 잃을 정도로 들뜬 기쁨은 아니다. 마음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을 정도의 슬픔과 기쁨까지 도 없애라고 무리하게 족쇄를 채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느 정도의 슬픔과 어느 정도의 기쁨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편이 오히려 순리(理)에 가깝지 않을까 한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비로소 그 정도의 슬픔 또는 그 정도의 기쁨으로 정리가 되는 것은 깨달음이 너무 늦다. 좋지 않은 일 또는 좋은 일이 생겼을 그 당시에 지체없이 그러한 깨달음으로 마음의 흔들림을 막을 수 있다면 세상 살기가 한결 수월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오늘 처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도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같은 생각을 거듭한다는 것은 나의 감정이 그 생각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김태길(1920~2009): 수필가, 철학자. 호는 우송(友松). 충북 충주 출생. 일본 동경대학 법학부 수학, 서울 문리대 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 미국 Johns Hopkins 대학원 철학과 졸업(철학박사). 도의문화저작상 수상했으며, 서울대학교 교수, 철학연구회 회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윤리학』,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 『존 두이』, 『새로운 가치관의 지향』, 『웃는 갈대』, 『변혁 시대의 사회 철학』, 『빛이 그리운 생각들』, 『검은마음 흰마음』, 『마음의 그림자』, 『삶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흐르지 않은 세월』 등 다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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