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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바람 / 박영자

부흐고비 2022. 7. 25. 07:30

바람이 분다. 나뭇잎이 팔랑거린다. 바람은 어디서부터 불어와서 어디쯤서 사라지는가. 인생의 여름에서 한참 멀어진 지금, 아직도 잠재우지 못한 내 안의 바람이 마중을 나와 함께 일렁인다.


아이들 집에 머물 때 아침마다 산책로를 찾는 것은 꼭 운동을 위함이기보다는 일찍 잠에서 깨어 남아도는 식전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서다. 오랜 습관으로 눈만 뜨면 직행을 하던 주방은 이곳에서만은 나의 영역이 아닐뿐더러 더운 여름날 아침부터 도를 닦는 사람처럼 책을 마주하고 앉았기도 좀 뭣하다. 생존의 전장으로 나가는 젊은이들의 부산한 하루의 시작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나는 도둑고양이처럼 발소리를 죽여 가며 현관을 빠져나온다.


한강을 지척에 두고 서해바다가 멀지 않은 이곳은 바람이 많다. 바람 없는 날이 거의 없다. 겨울이면 냉기를 머금은 칼바람이 귀를 베어갈 듯 앙칼지지만 여름나기는 그저 그만이다. 숨쉬기조차 힘든 대구분지의 더위를 생각하면 이곳은 신선의 자리에 못지않다.


바람 한 자락이 건들 불어와 내 몸을 휘감는다. 살갗에 스치는 감촉이 상쾌하다. 그 긴 꼬리에서 언뜻 바다냄새가 난다. 때로는 몽골의 초원도 실려 오고 남국의 정열을 갖다 쏟아 붓기도 한다. 가끔 서풍에 묻어오는 낯선 문명의 냄새는 잠자는 나의 역마살을 건드려 깨운다. 태풍이 바다를 뒤집어 청소를 하듯 때와 분위기에 따라 바람은 내 몸 안의 공기를 한 번씩 흔들어 순환시킨다.


산책로에는 가끔 운동을 하러 나온 사람이 부지런히 팔을 흔들며 지나갈 뿐 사위가 조용하다. 콘크리트 더미에 익숙해진 시선이 녹색의 바다를 만나면 닫혀 있던 가슴이 열리며 내 안의 바람이 회동을 한다. 풍선처럼 부푼 가슴을 안고 나도 둑 위를 걷는다.


바람이 가장 적나라하게 보이는 곳이 천변의 갈대밭이다. 건들마가 쏴하고 불면 갈대는 은빛 이파리들을 반짝이며 바람결을 따라 비스듬히 드러눕는다. 세찬 바람을 만나면 땅바닥에 완전히 쓰러졌다가도 어느새 가늘고 긴 몸을 꼿꼿이 세우면서 다시 일어선다. 그 강인한 힘은 어디서 나오며 허리의 유연성은 또 무엇인가. 언뜻 보기에 갈대가 무심히 흔들리는 것 같으나 무심한 것은 바람이고 갈대는 바람 앞에 긴장한다. 갈대는 뿌리 깊은 나무임에 틀림이 없다.


후배 한 사람이 남편에게 불어온 바람 때문에 난리다. 집 바깥에 여자가 생겼다고 한다. 배신감으로, 오기로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내어 아물기 어려운 지경이다. 이혼까지 불사하겠다고 한다. 바람이란 잠시 지나가는 것이므로 시간이 지나면 제풀에 사그라져 본자리로 돌아올 것이라며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이 상책이란 말밖에 줄 수가 없었다. 불어 닥친 광풍에 풍구질 할 일 없지 않느냐고. 그것이 바람에 대처하는 내 삶의 방식이고 바람의 속성이 또한 그런 것 아닌가.


바람 안 부는 곳이 어디 있으랴. 줄기줄기 갈대 사이를 바람이 지나간다. 사람살이도 결국 갈대와 그다지 다를 바가 없다.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쓰러져 눕기도 하지만 허리를 꺾이는 것은 큰 굴욕이라도 되는 양 앙버티며 일어선다. 때로는 등 붙이고 드러눕고 싶어도 그것은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다. 바깥에서 불어오는 바람 못지않게 내 안의 바람 다스리는 일도 만만치 않다. 붙잡지 못한 꿈에 연연하여 끊임없이 담 밖을 기웃거리게 하는 정체불명의 정신적 허기가 바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바람이 인다. 바람은 자유의 표상이다. 굴레를 벗어던진 그 기백이 부럽다. 활기차다. 사람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마력을 지닌다. 공기의 움직임이라는 단순한 학술적 해석은 바람의 이미지와 영 어울리지 않는다. 맹수처럼 포효할 때는 못다 채워 쓰린 내 가슴도 함께 곤두박질친다.


바람이고 싶었다. 안개와 어울리고 구름을 희롱하며 거침없이 떠돌고 싶었다. 그리움의 연원을 찾아서. 그러나 갈대처럼 붙박여 살았다. 언제나 발목을 잡는 건 가족과 사회적 통념,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의 용기부족이었다. 이제 내 안의 바람도 제풀에 잦아들어 많이 순해졌다. 억겁의 세월 속에서 찰나에 불과한 한 점 내 삶이 바람이었는지 갈대였는지도 때로는 헷갈린다.


아직도 나의 바람은 선잠을 자고 있다. 툭하면 언제 또 고개를 들고 광기를 부릴지 조심스럽다. 이는 바람을 잠재우기도 하마 힘에 부치거니와 시작점에서 한 발짝도 뛰어넘지 못하고 맴도는 수없는 동그라미를 이제 그만 그렸으면 싶다. 원을 그리자면 시작점이 끝맺음이 되듯이 모든 방황의 끝은 제자리가 아닐까. 발밑에 웅크리고 엎디어 흔들리는 나를 움켜잡고 있던 그 뿌리가 오늘 아프도록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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