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추석을 사흘 앞두고 시아버지의 제사가 있었다. 일 년에 몇 번 안 되는 시댁 가족이 모두 모이는 날이다. 시차를 두고 모이는 식구들을 기다리며 이런저런 밀린 집안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윗동서가 지난주에 집을 계약하러 온다고 했는데 소식이 없다고 한다.
" 계약이라요? 어떤 집이요?"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 이 집 내놨잖아? 몰랐어? "
나는 집안에 돌아가는 일을 모르고 있었다는 충격만큼이나 이 시골집을 팔기로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 집은 남편을 비롯한 다섯 형제가 태어나 자란 집이다. 내가 남편과 결혼 할 때 둘째 아들인데도 불구하고 식구가 되려면 1년은 같이 살아야 한다고 해서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신혼을 보낸 집이기도 하다. 그때는 옛날 집이었고, 우리는 사랑채에 살림을 차렸었다.
나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엄마 아버지 두 분도 모두 본적이 서울이어서 서울을 벗어난 지역에 사는 친척이 한 분도 안 계셨다. 어릴 때 방학이면 시골로 놀러 가는 친구를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연애를 하고 결혼 이야기가 오가면서 드디어 꿈꾸던 시골에서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기쁨에 들떴었다. 거기다가 배 과수원을 한다니, 소설 같은 생활을 하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신혼 첫날부터 부닥친 난관은 아궁이에 불을 때는 일이었다. 거기에 과수원 일꾼들을 위해 끼니마다 가마솥에 밥을 지어야 했다. 한번은 마당에서 설거지하다가 갑자기 집안으로 몰려 들어오는 까만 새끼돼지에 놀라서 혼절을 했던 적도 있었다. 오래 지난 일들이 마치 어제 일인 듯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친다. 그렇게 좌충우돌 많은 에피소드를 남기며 약속했던 일 년을 다 못 채우고 도시로 살림을 났었다.
그 때는 집들마다 아궁이 불을 때던 시절이라서인지 어스름하게 저녁 어둠이 내릴 때면 냇내가 온 동네를 휘감았다. 도시에서는 맡아보지 못했던 그 냇내가 느껴질 때면 알 수 없는 서글픔이 밀려왔다. 그리고 곧 마을 전체를 감싸고 내려앉는 무시무시한 어둠, 어둠이 그렇게 눈앞에 물체도 안 보이게 깜깜 하다는 것도 아마 그때 처음 인지한 것 같다. 문 앞까지 몰린 어둠이 무섭고, 갑자기 눈앞에 어른대는 네온 불빛이 그리워 눈물 흘리던 시절이 그 집에 있다.
도시로 살림을 옮기고 그래도 무시로 드나들던 집이었다. 집이 너무 낡아 시아버님이 교직에서 은퇴하시고는 처음 하신일이 집을 개축하는 일이었다. 우리가 살던 사랑채만 남기고 옛집은 단층 슬라브 집으로 바뀌었다. 집을 완공하던 날 모든 식구들을 불러 모아 집들이 행사를 할 때, 아버님은
" 고향을 떠나면 안 된다. 누구든 이집을 지키며 살아라." 하셨다. 나는 그때 그 말씀이 너무나 명료하게 남아 지금도 아버님의 어투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그동안은 어머니가 홀로 집을 지키며 사셨는데, 이제 연로하시고 치매가 와서 요양원으로 가는 바람에 빈집이 된 지 육 개월쯤 되었던 터다. 아무리 며느리는 남의 식구라지만 의견도 안 묻고 자기들 형제끼리 결정했다고 속에서 부아가 치밀기도 했지만 말을 했어도 내가 어떤 의견을 낼 수 있었을까 싶다.
"형님! 형님이 내려와 사시면 어때요? 지금 사시는 곳보다 환경도 좋고, 무엇보다 고향이잖아요?"
그래도 아쉬워 제일 큰 시누이에게 툭 말을 던져보았다. 그러나
"싫어, 옛날 생각하면 지긋지긋해. 어릴 때 일만 한 기억밖에 안 나"하며 펄쩍 뛴다. 그래도 서울에서 불과 한 시간 거리밖에 안 되는데, 자기들 살던 고향집인데... 계속 아쉬움이 마음속을 떠나지 않는다.
어쩌면 올 해 마지막 추석을 보낼지 모르는 집을 둘러본다. 불호령 하시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집안 곳곳에 박혀 집안에 기를 세웠는데, 이제는 누런 흔적만 남아있다. 녹록하지 않던 시집살이에 웃음을 접어야 했던 시간이 더께로 쌓인 마루. 먼지 하나 남아있을까 닦고 또 닦아 지금도 윤이 나고 있는 그 마루를 맨발로 쓱쓱 밀어본다.
댓돌에 올라서면 사방으로 펼쳐진 하얀 배꽃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한창 배 봉지 속에서 익어가고 있을 배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이 집에 올 때면 주방에서 일만 하다가 일이 끝나면 바로 우리 집으로 가곤 했는데 오늘은 오랜만에 뒤란도 가본다. 그동안 비어있던 시간만큼 무성하게 몸을 키운 잡초만 가득하다. 늘 예쁘게 피던 꽃들이 잡초로 변해 있고, 뒤란을 홀로 지키고 있는 칸나만이 붉은 울음을 툭툭 터뜨리고 있다. 나 역시 이 옛집에 대한 즐거운 기억이 별로 없는데 나를 이렇게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그리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식구들은 또 왜 고향에 대한 미련을 아무렇지 않게 버리는 것일까?
앞마당 앞 살구나무 앞에 서서 나무를 올려다본다. 옛집에 살 때 채 익지 않은 살구가 얼마나 맛있던지 미리 따서 먹던 생각이 나면서 '올해는 살구가 덜 열리네...' 하시던 아버님의 목소리가 '고향을 지켜야지... ' 로 들리는 듯하고, 울컥 눈물이 쏟아진다.
무표정한 남편을 비롯한 형제들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향일까? 아니면 그저 황혼으로 저무는 삶에 대한 순응 인 것일까? 모두 제 할 일을 마친 식구들이 집을 떠나기 위해 차에 시동을 건다. 맨 마지막으로 집을 나선다.
다시 돌아본 슬래브 지붕 위 수신이 끊긴 안테나 위에 빨간 고추잠자리가 한 마리 앉아있다.
// 2022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륵골에서 쓰는 편지 / 윤영 (0) | 2023.06.25 |
---|---|
보리굴비 한 상자 / 박금아 (0) | 2023.06.25 |
추젓 항아리 / 장경미 (0) | 2023.06.25 |
아귀 / 윤정인 (0) | 2023.06.25 |
아등바등 / 이상경 (0) | 2023.06.25 |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