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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미륵골에서 쓰는 편지 / 윤영

부흐고비 2023. 6. 25. 21:32

미륵골 빈집에 혼자 남았습니다. 이 집에서의 혼자라는 말에는 적적함과 즐기고 싶은 고요가 함께입니다. 슬쩍 두렵기도 하고 심심하기도하고 그럽니다. 홀로 집을 지켰던 모친이 요양원으로 떠나고 빈집이 된 지 삼 년. 어쩌다 보니 나흘간 머물 요량으로 여차여차해 왔습니다.

책을 펼쳐 보지만 눈도 침침하고 유튜브를 몇 편 봤더니 데이터는 한정이 없네요. 이참에 댑싸리 밑에 개 팔자로 즐겨보자 했건만 일이 눈에 들어옵디다. 남아도는 볕이 아까워 이불이며 먼지 묻은 소쿠리며 신발들을 씻었습니다. 고들빼기꽃에 앉았던 배추흰나비가 바지랑대에 앉았습니다. 나비 눈에도 꽃 시절 다 지난 어수룩한 중년 여인의 고독감이 읽혔던가 봅니다.

일 다 하고 죽은 무덤 없다더니 잔일에 끝이 없군요. 사람이 기거하지 않으니 오죽이나 하겠습니까. 부엌 여불떼기에 놓인 장독대 정리하랴 뒷길까지 무성하게 덮은 백화등과 잡풀 손질하랴 어설픈 손놀림이 분주합니다. 그것도 일인 게냐 하고 싶지만, 꼴딱 한나절이나 걸렸지 뭡니까. 붉은 명자꽃은 내 친구 삼철이네 마당 언저리까지 가지를 넘겨 꽃잎을 떨구었습니다. 지난가을인가 철이는 선박 수리 기술을 배워 바닷가 마을로 이사 나가고 스님이 이사를 왔다는데 목탁 소리 한번 귀합디다. 아무래도 집도 절도 아닌 곳이라 그럴까요. 지금도 얼금얼금한 울타리 사이로 절냥이 밥을 챙기는 승복 자락의 뒷모습만 훔쳤을 뿐입니다.

슬슬 산그늘이 내려오기 전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겠어요. 가마솥에 한 양동이의 물을 붓고 솔가지와 신문지로 불쏘시개를 만들었습니다. 함석 덮개 아래 재여 있는 장작과 잔가지를 빼내 지그재그로 얹으며 제법 불목하니 흉내도 내봅니다. 사람 든 집이라고 굴통에서 연기가 곡선을 그리며 대숲으로 사라지는 걸 보니 실로 흡족하고 그럽니다. 그것도 잠깐 아 글쎄 활활 타오르던 불길이 순식간에 솟구쳐 나오면서 검은 냇내에 눈이 매그러워 눈물 콧물을 한참이나 흘렸지 뭡니까. 센서 하나 작동시키면 뜨거워질 보일러 방을 두고 굳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냥 잡생각이 일지 않아서랄까요. 그 사이 산비탈에서 뜯어 온 고사리를 데쳐 날날하게 널어놓고 부뚜막에 앉았습니다.

장작이 사그라드는 사이 사방으로 어둠이 덮이는 중입니다. 불문을 닫아걸었습니다. 외주둥이라고 굶을 수는 없으니 밥 한술 떠야지요. 담벼락 사이 돋아난 달래를 뽑아 설겅하게 무쳐내고 엊저녁에 끓여 놓은 시래깃국으로 저녁을 채웠습니다. 수돗가에 쪼그려 앉아 씻은 그릇을 채반에 엎어 놓고 일어서니 감나무에 초엿새 달이 내걸렸네요. 열댓 가구는 될까 한 마을, 산중의 밤은 잠자는 일이 전부인 듯 일찌감치 집집이 불이 꺼졌습니다.

백석 시인의 산문 〈편지〉를 읽습니다. 백열등이라 눈은 아프지만, 그의 알전구 같은 문체에 흠씬 빠져들었습니다. 이제 잠을 청하려고요. 홑이불 하나 배에 걸치고 마당에 누웠습니다. 앞산 고라니와 무논의 개구리, 소쩍새가 번갈아 울어대는 것이 무슨 합창단원들 같습니다. 아슴푸레하게 잠이 몰아오는가 싶더니 야윈 모습을 한 엄마가 쌀가루 풀어진 듯한 목소리로 자꾸 나를 깨웁니다.

“한데에 잠들면 입 삐뚤어진데이.” 환청과 찬 기운에 눈을 떴습니다. 그새 두어 시간이 훌쩍 흘렀나 봐요. 설핏 든 잠이 꽤 달았는지 방에 들어 아랫목에 누웠지만, 좀체 잠이 오지 않는군요. 숲으로 달아낸 작은 창으로 아카시아꽃향이 들이칩니다. 이참에 작정하고 그 아이와의 기억을 데려와도 되겠지요. 초등학교 2~3학년이었을 겁니다. ‘리라초등학교’라고 적힌 노란 체육복에 바가지 모양의 머리카락을 한 서울 소년이 전학을 왔었어요. 단층 건물과 비릿한 갯내로 둘러싸인 마을에 있는 여관집 외손자였어요. 무슨 사내아이의 머리카락이 그렇게 검고 윤기가 나던지요. 공부며 운동이며 못 하는 게 없는 데다가 순하기는 또 어찌나 순한지.

얼추 두어 달은 흘렀을걸요. 복도에는 쉬는 시간마다 어설픈 서울말이 유행되더니 종내에는 그 아이의 도시락 반찬까지 신비로웠다니까요. 반들반들한 콩자반과 분홍 소시지와 계란말이가 있는 점심시간은 괜스레 고급스러워졌고요. 몸집이 거대하고 입이 걸었던 소년의 할머니네 정원에는 매화나무와 무화과나무가 있었는데요. 나무 아래는 늘 흰 조개껍데기가 수북했었어요. 이제 여관집 할머니도 돌아가셨겠지요.

한 학기가 흘러갔을 겁니다. 그 아이가 처음으로 내가 사는 산골로 오던 날이었어요. 미륵불을 모신 사당에서 소년과 나는 눈을 감고 서로의 소원을 말했습니다. 기차를 타고 서울 구경해 보고 싶다는 나의 말에 아이가 잇몸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어요. 엄마와 아버지가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그 아이의 소원에 나는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후로도 우린 틈만 나면 바닷가와 산골을 헤집었습니다. 보잘것없는 집이 부끄러워 숲과 도랑과 언덕으로만 쏘다녔지만. 찔레순을 꺾어 먹이거나 고욤나무 아래 앉아 개미집을 관찰하는 일. 지금 생각해도 참 미안한 일입니다.

또 그렇게 반년이 지나고 소년은 서울로 돌아갔습니다. 코스모스만큼이나 마른 여자의 손을 잡고 신작로가 있는 곳으로 사라지던 모습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나는 며칠간 처진 눈매의 순한 그 아이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지요.

더러 생각날 때도 있습디다. 이제 어디에서든 그 소년과 그의 청년 시절과 그의 중년을 마주합니다. 혹 모르지요. 좀 더 세월이 흐른 뒤 문득 만나져서 올챙이 뒷다리 이야기며 콩자반 흉내 내느라 메주콩에 검은 물감칠했다는 이야기 할 날이 올는지.

새벽입니다. 수잠에 드는 동안 영갑이 아제네 닭이 목청껏 울어 재칩니다. 이제 서둘러 해 달기 전 용골을 거쳐 밀밭골에 가봐야겠어요. 푸릇한 머윗대와 방풍나물에, 밤새 자란 고사리가 지천일 겁니다. 오후엔 친구가 딸내미와 외손자를 데리고 촌캉스를 하러 오거든요. 7번 국도를 타고 강구에서 해안선을 따라오라고. 영해 읍내 시장에서 미주구리회에 소주나 두어 병 사오라고 기별을 넣을 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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