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현정 시인 1977년 서울 출생. 한양대 독문학과 졸업, 고려대 한국어문학과 대학원 석사 과정 졸업. 2001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 시집 『꼭 같이 사는 것처럼』, 『사과시럽눈동자』가 있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 ㅡVAN GOGH 1890년, 100.5×50.5 / 임현정 불길한 밤이다./ 까마귀의 목적 없는 방향/ 날아오는 것인지 날아/ 가는 것인지, 생각지 마라/ 이미 저것은 나를 지나쳐 갔다./ 언제나 몇 갈래의 길이 있었지. 나는 길의 냄새를 맡아/ 길이 아닌 곳으로 걸었다. 흔적을 찾는 개처럼./ 역암 같은 어둠이 여기저기 뭉쳐 있다./ 또 길의 중앙./ 나의 시선은 먼 데로 뻗은/ 붉은 길 위에 있지만/ 나는 황금빛 밀밭으로 걸어갈 것이다./ 악성빈혈 같은 나의 허기는 노란 그림 몇 점을..
회오리바람이 집을 에워싸는 듯하다. 강도 높은 바람 소리에 잠 못 이루는 밤이다. 내가 머무는 공간은 사계절 바람이 부는 바람골. 가는바람에서 된바람까지 바람의 종류를 셀 수가 없다. 더위가 여러 날 지속하더니 태풍을 부른 것인가. 태풍은 고온에서 일어난다고 하는데, 기상에 관하여 깊이 알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바람의 제물이 될 나의 소중한 식물들을 단속하는 일이 중요하다. 아파트 복층에 머물며 겪은 산 경험으로 바람을 맞을 채비를 서둘러야만 한다. 나뭇잎은 나무의 소중한 일부분이다. 인간은 그저 봄바람에 현란할 정도로 눈부신 이파리의 몸짓과 오색으로 물든 고운 단풍잎을 기억한다. 살아보니 바람의 몸짓이 모두 좋은 것만은 아니다. 하늘이 노한 것처럼 시커먼 먹구름으로 뒤덮고 강한 번개와 태풍을 몰..
사과나무 포도나무가 실하게 영근 과일들을 하혈하듯 쏟아 내렸다. 다 털린 빈 몸으로 아랫도리를 휘둘리고 있었다. 짓밟힌 채마밭은 울고 있었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태풍의 공습이었다. 열대의 바다에서 태어난 루사는 잉태된 그 뜨거운 입김을 몰아 제주도의 목덜미를 핥고 정확히 한반도의 심장부를 뚫었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잔혹한 입김의 자취가 화인(火印)처럼 남았다. 그야말로 벼락같은 자연의 위력 앞에 손쓸 수 없는 한낱 인간의 허약함을 증명받고 싶었던 것일까? 독기를 품었으나 심중을 알 수 없는 여자처럼 그렇게 루사는 한반도를 관통했고 인간은 내장을 다친 어린 짐승처럼 신음했다. 이백 명이 넘는 사상자와 실종자, 그리고 수조 원의 재산 피해 앞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막힘으로 오열했다. 하루아침에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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