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호 시인 1971년 전남 광주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및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1997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달안을 걷다』, 『밤새 이상을 읽다』, 『백핸드 발리』가 있다.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윤동주문학대상 젊은작가상 수상. 협성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달 안을 걷다 / 김병호 내가 한 그루 은사시나무이었을 때/ 내 안에 머물던 눈 먼 새들/ 바늘 돋은 혀로 말간 울음을 날렸다/ 울음은 발갛게 부풀어 둥근 달을 낳고/ 속잎새에만 골라 앉은 숫눈이/ 돌처럼 뜨겁게 떠올랐다// 그믐 모양으로 흐르던 푸른 수맥의 흔적/ 그 사이로 비늘 떨군 물고기가/ 해질녘 주름진 빛과 몸 바꿔 흐를 때/ 내가 제일 나중에 지녔던 울음과/ 몸담아 흐..
86,400원. 그것으로 하루를 산다. 엄마가 아버지하고 머리를 맞대고 궁리해서, 날마다 86,400원의 생활비를 받을 수 있는 종신보험을 들어 주었다. 그것으로 밥도 먹고 일도 하고 잠도 자고 피곤한 날은 차도 한 잔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때로는 쓴 곳도 기억나지 않는데 잔고가 바닥나 아쉬워하는 날도 있다. 필시 잔뜩 취해서 어디다 쓰는지도 모르고 신나게 흔들고 다닌 날이다. 모든 게 귀찮은 날은 온종일 이불 속에서 뒹굴며 날짜 지난 것들을 잔뜩 사 먹기도 한다. 그렇게 보낸 날은 배탈이 심하게 나서 치료하느라 며칠 동안 아까운 생활비만 날린다. 어리고 젊었을 때는 쓸 곳은 많은데, 하루치가 겨우 86,400원뿐이라고 투덜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다음날 0시가 되면 다시 채워지는 보험이어서 잔고가 바닥..
바람이 봄 꽃잎들을 데려가 흙에 재운다. 더러는 바람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흙과 포개지기도 한다. 꽃잎이 그들 삶의 끝을 바람에 맡길 때, 꽃잎은 생의 절정을 맞는다. 장엄하되 소란스럽지 않고 기시감旣視感이 들되 늘 새롭다. 바람에 꽃잎이 지는, 생애의 끝이 절정이라니 무슨 역설인가. 찬란한 꽃잎의 죽음 의식, 풍장風葬이다. 매화나 벚꽃은 생의 끝을 바람에 맡긴다. 가지에 붙어 있다가 자신의 몸에 남은 마지막 온기를 바람에 실려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낙엽도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가지만 꽃잎의 처연한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꽃잎 곁을 스치는 요란스럽지 않은 바람소리는 차라리 처연한 만가輓歌로 들린다. 이 때 꽃잎은 데려가 줄 바람을 순하게 맞이한다. 순간의 이런 풍경의 끝은 여리고 애달프다. 이화梨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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