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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보험 / 김근우

by 부흐고비 2022. 6. 14.

86,400원. 그것으로 하루를 산다. 엄마가 아버지하고 머리를 맞대고 궁리해서, 날마다 86,400원의 생활비를 받을 수 있는 종신보험을 들어 주었다. 그것으로 밥도 먹고 일도 하고 잠도 자고 피곤한 날은 차도 한 잔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때로는 쓴 곳도 기억나지 않는데 잔고가 바닥나 아쉬워하는 날도 있다. 필시 잔뜩 취해서 어디다 쓰는지도 모르고 신나게 흔들고 다닌 날이다. 모든 게 귀찮은 날은 온종일 이불 속에서 뒹굴며 날짜 지난 것들을 잔뜩 사 먹기도 한다. 그렇게 보낸 날은 배탈이 심하게 나서 치료하느라 며칠 동안 아까운 생활비만 날린다.

어리고 젊었을 때는 쓸 곳은 많은데, 하루치가 겨우 86,400원뿐이라고 투덜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다음날 0시가 되면 다시 채워지는 보험이어서 잔고가 바닥이 나도 걱정은 하지 않았다. 요즘에는 쓰는 곳이 뻔해서 얼마를 썼는지 얼마가 남았는지 계산하지 않는다. 아껴 쓰고 남은 것을 두었다 쓰면 좋으련만, 가불이나 저축은 물론 증여나 대여도 할 수 없는 아주 고약한 보험이다.

비 예보는 없는데 날씨가 끄무레하다. 책을 잡고 씨름하다 지고 말았다. 아들이 미국으로 한 달 동안 출장을 가야 한다는 말이 온종일 책 위를 걸어 다녔다. 요즘 같은 질병 재난 시기에, 코로나19에 그렇게도 열악하다는 미국을 가야 한다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혹시 어렸을 때 예방접종 빼 먹은 건 없었는지 되짚어 본다. 일에 바빠 어린 걸 친정엄마한테 의탁하느라 분유 먹인 것이 면역력을 떨어뜨리지는 않았을지, 묻어두었던 미안한 마음이 요동한다. 아이는 아직 출국도 안 했는데 코로나19에 감염된 아들을 만들어 놓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유통기한이 지난 과거를 헤매고 다니느라 하루 생활비 86,400원을 몽땅 쓰고 말았다.

며칠이 지나도 미국 출장과 코로나19를 짊어진 아이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마음으로는 아이가 출장을 마치고 돌아와 있을 몇 주 후로 얼른 달려가고 싶다. 하지만 시간을 가불해 미래로 가고 싶은 생각에게, 현재는 아무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코로나19가 곳곳에 박혀 있는 하루 86,400초를 째깍째깍 짚어대며 한 발씩만 앞으로 걸어갈 뿐이다.

엄마의 무거운 마음을 알아챈 아이가 나를 안심시키느라 얼굴이 어둡다. 코로나19보다 걱정이 먼저 전염되고 있었다. 아이들 내외는 쾌적한 숙소나 감염경로 차단을 위한 대책을 준비하고 있는데 지켜보는 엄마가 일을 그르치고 있었다. 깨어 있다는 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최선책을 찾아가는 것이다. 며칠째 나를 끌고 다니던 걱정의 발화점을 찾아본다.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아이의 생각을 펼쳐놓고, 그 위에 ‘밀접 밀집 밀폐’의 차단 목록을 함께 쓰고 아이는 비행기를 탔다.

아이를 향했던 걱정스러운 마음을 들여다본다, 지나간 날이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든 아니면 아이의 미국 현지 생활이든 어떤 것도 내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은 없다. 그런데도 그곳을 부질없이 기웃거리며 걱정에게 먹이를 던지고 있는 내가 보인다. 무명(無明)이다. 생각을 멈추고 망상의 분진을 가라앉힌다. 그칠 줄 모르던 걱정의 행렬에 틈새가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생각의 주파수를 맞춘다. 미안하고 불안했던 지난 시간을 털고, 귀국한 아이가 해야 할 ‘자가 격리’를 위해, 비워 두었던 엄마네 집 청소를 시작했다. 걸레질마다 쌓였던 걱정까지 닦여나가는 기쁨을 차곡차곡 쌓으며 아이를 기다린다.

같은 상황을 놓고도 전혀 다른 며칠을 살았다. 주어진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마음이 사는 곳이 다르다. 현재를 버리고 도망가서 생각하느냐, 아니면 현재를 디디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마음이 사는 곳이 달랐다. 코로나19에 묶이는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하루는 후회스러운 과거로, 또 어느 날은 허황된 미래로 도망가 있었다. 깨어 있는 의식으로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과거로 미래로 뛰어다닌 생각 때문에 주인 없는 현재를 만들었다. 며칠 동안 수취인도 없는 빈집으로 들어온 귀한 보험료만 허비하고 말았다.

처음에 엄마가 보험을 계약할 때는 최고 고객으로 해달라고 열 달이나 빌고 빌어서 60년 만기로 들어 주었다. 지금은 여러 번 갱신되어 만기가 두 배 가까이 연장되었다. 그렇긴 해도 뚝 떼어서 인심도 쓸 수 없는 야박한 조건 때문에 해지하고 다른 보험을 들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피보험자는 해약도 할 수 없는 강제성 생명보험이다. 어쩌겠는가. 어차피 해지할 수 없다면 엄마의 바람대로 충실하게 고객의 의무를 다해 우수고객의 예우를 받는 길밖에 없다.

하루 24시간, 1,440분, 86,400초의 귀중한 보험금을 우수고객답게 쓰기 위해 마음을 다독인다. 분유 먹여 키운 것이나 일에만 매달리고 산 지난날이 아이들에게 두고두고 미안하지만 이제 그 생각은 폐기한다. 아니, 그것보다는 잘 손질해서 마음의 선반 한편에 잘 보관해 두어야겠다.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생활비만 축낸 요즘 며칠도 오래 곰삭으면 글 밭의 퇴비가 될지 모를 일이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거쳐 갈 수 있는 작은 역을 하나 지났다. 다음 역이 코스모스가 한들거리고 있는 역일지, 코로나19가 창궐하고 있는 역일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향기가 있으면 열고, 균이 우글대면 닫을 수 있는 유연한 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곳곳에서 만났던 역장들의 당부이니 빨간 밑줄로 강조해 둔다. 세상 사람들 사이를 끼웃거리며 돌아다니던 어리석은 생각도 문 열어 다시 태운다. 돌아온 생각이 쏟아놓는 세상 이야기에 오늘 잔고가 벌써 바닥났다.

보험금이 다시 입금되었다. 먹고, 자고, 씻고, 손자하고 노는데 꼬박 72,000원을 쓴다. 나머지 14,400원으로 책도 보고 영화도 보고 때로는 내 흉도 마음껏 본다. 좀 부족하기는 하지만 이제는 보험료가 적다고 투덜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얼마짜리 보험이냐보다는 어디에 어떤 마음으로 쓰느냐가 더 중요함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귀하디 귀한 새날이 다시 열렸다. 조용히 눈을 감고 의식을 깨운다. 바람은 나무는 그리고 마주 앉은 그는, 즐거운지 슬픈지 혹은 아파하고 있는지. 손끝 발끝, 그리고 시선 끝에 마음을 대고 글 밭으로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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