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섭 시인 1981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200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죄책감』, 『우리는 살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가 있다. 진열장의 내력 / 임경섭 누르면 툭- 하고 떨어지는/ 아침, 샴푸 통 마지막 남은 몇 방울의 졸음 있는 힘껏 짜낸/ 김 대리는 네모반듯하게 건물 속으로 들어가/ 차곡차곡 쌓인다 날마다 김 대리의 자리는 한 블록씩 깊어진다/ 아래층 이 과장은 한 박스 서류뭉치로 처분되었다지/ 누군가 음료수를 뽑아 마실 때마다 덜컹 내려앉는 일과,/ 버려질 것을 아는 이들도 사방으로 설계된 빌딩 속으로/ 차례대로 몸을 누인다/ 모든 가게의 비밀은 진열장에 숨어 있다/ 이리저리 굴러다녀야 할 것들을..
“아재, 밥 잘 먹었는교?” “야, 배 터지도록 먹었소.” “아재, 내 더위 사소.” 정월 대보름날 아침 담 너머로 흔히 나누는 인사다. 다가오는 여름 더위를 먼저 불러 파는 우스개 놀이다. ‘아재’는, ‘아저씨’의 사투리라고 쉽게 규정 할 수 있으나 훨씬 정감스러운 호칭이다. 삼촌, 오촌은 아니지만 먼 친척이거나 가까운 이웃에게 서로 부르는 서부 경남에서 널리 사용되는 호칭이다. 어쩐지 살가운 맛이 나는 불음이다. 금요 산책 팀은 열 명으로 시작했다. 두 명이 병고로 참석하지 못하고 있다. 팔순이 넘은 나이이기에 건강상 불참하게 될 사유가 자꾸 생긴다. 다 늙어가는 나이에 이름을 그대로 부르는 것은 듣기 거북하다. 호나 별명으로 부르기로 했다. 두꺼비, 대장 등의 별칭으로 서로 부르고 있다. S회장에게..
운명의 짐을 졌다. 시커멓게 과거를 지우고 뉘 집에 유배되었다. 나무에서 숯으로 바뀐 신세를 항변할 새도 없이 잿불에 파묻힌다. 가문을 지키며 불씨를 잇는 계율은 지엄하다. 그을음과 연기로 미적대지 않는다. 불티를 날리며 요란을 떨지 않는다. 그저 소리 없이 뭉근하게 타오른다. 살풀이하듯 발갛게 일렁인다. 밤새 가물거리며 화로의 불씨를 품느라 어둠살이 밝아오는 줄도 모른다. 몸 안의 길을 따라 저장해 놓은 한 톨의 비, 한 가닥의 바람, 한 점의 햇살마저 날려 버렸으니 한가로이 풍화에 들면 그만이다. 텅 비어 구멍투성이인 몸뚱이로 무얼 어쩌랴. 난데없이 어두운 구석에 처박혀 묵은내를 들이마신다. 장독에 들어앉아 불순물을 흡착하느라 뒤척일 수 없다. 잡귀를 물리치는 문지기로 내몰려 문간의 금줄에 내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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