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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임경섭 시인

부흐고비 2022. 6. 24. 08:00

임경섭 시인
1981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200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죄책감』, 『우리는 살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가 있다.

 



진열장의 내력 / 임경섭
누르면 툭- 하고 떨어지는/ 아침, 샴푸 통 마지막 남은 몇 방울의 졸음 있는 힘껏 짜낸/ 김 대리는 네모반듯하게 건물 속으로 들어가/ 차곡차곡 쌓인다 날마다 김 대리의 자리는 한 블록씩 깊어진다/ 아래층 이 과장은 한 박스 서류뭉치로 처분되었다지/ 누군가 음료수를 뽑아 마실 때마다 덜컹 내려앉는 일과,/ 버려질 것을 아는 이들도 사방으로 설계된 빌딩 속으로/ 차례대로 몸을 누인다/ 모든 가게의 비밀은 진열장에 숨어 있다/ 이리저리 굴러다녀야 할 것들을 가득 담아 놓은 과일바구니/ 모인 것들은 축축한 바닥에 한 번 튕겨보지도 못하고/ 뿌연 먼지로 내려지는 셔터를 기다려/ 어둠 속으로 무른 멍 자국을 감춘다/ 바닥에 떨어지거나 모서리에 부딪쳐 생긴 것보다/ 서로에게 짓이겨 생긴 멍 자국에서 과일은/ 더 지독한 향기를 뿜는다/ 곯은 사람들로 붐비는 퇴근길은 진한 매연 냄새를 풍기고/ 김 대리는 살구를 고른다 먼지 닦아가며 고르다가 떨어뜨린/ 살구 한 알 탱탱하게 굴러가는 것을 본다/ 짓무르지 않은 것들은 저렇게 꿋꿋이 굴러다니는데/ 쌓여 있어 한 쪽으로 절뚝이는 것들아/ 살구를 주우러 가는 김 대리의 발자국에 통증처럼/ 저녁이 배고 높은 허공으로 신음처럼 새가 난다/ 곧지도 않고 함부로 꺾이지도 않는 길을 가는 새의 둥근 비행/ 그 아래서 김 대리는 둥글게 몸을 말아 살구를 줍는다//
* 200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처음의 맛 / 임경섭
해가 지는 곳에서/ 해가 지고 있었다// 나무가 움직이는 곳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엄마가 담근 김치의 맛이 기억나지 않는 것에 대해/ 형이 슬퍼한 밤이었다// 김치는 써는 소리마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고/ 형이 말했지만/ 나는 도무지 그것들을 구별할 수 없는 밤이었다// 창문이 있는 곳에서/ 어둠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달이 떠 있어야 할 곳엔/ 이미 구름이 한창이었다// 모두가 돌아오는 곳에서/ 모두가 돌아오진 않았다//

죽도 / 임경섭
단단한 것은 얇은 겹으로 뭉쳐 있다는 것을/ 오늘에야 알았네 문 열지 않았다면/ 피멍처럼 시간을 쌓아두고/ 종일 뿌연 음지만 응시했을 죽도/ 다 해진 몸으로 벽에 기대 있네/ 창고 구석에서 대숲을 그리워하고 있던 것일까/ 폭풍을 기다리며 조금씩 일렁이던/ 수많은 갈래의 바람결, 몸통 깊숙이 스민 시린 기억들/ 나를 내려치려는 듯// 이삿짐을 나르다가 TV를 놓치고 손가락을 찧고/ 뒤꿈치를 까이고, 그러기에 잠자코 있으라니까!/ 단단한 것들의 모질게도 짧은 생명력이란,/ 해진 아버지를 창고에 처박아 두고 싶네/ 단단한 것들은 모두 허물어지는 것일까/ 아버지에게 쓴소리를 하는 내가/ 이미 단단해져 있다는 생각이 텅- 텅-/ 나를 향해 하염없이 날아오던 죽도처럼 텅- 텅- /허벅지가 아려오네// 바람이 분다/ 날 선 세월이 조여 온 만큼의 공간 만에 서서/ 바람은 불어 올 때야 비로소 바람이라는 것을 안다/ 죽도는 그렇게 숲의 가장자리에 서서 자랐을 것이네/ 자신을 내려치는 바람을 온몸으로 막아내려/ 촘촘히 줄기를 메워 나갔을 것이네 아버지는/ 한 자루의 죽도, 쪼개지고 벌어지기 전까지/ 나를 단련시키던, 더 이상 불어닥치지 않는/ 아버지를 대숲에 두고 오네/ 비로소 나는 또 한 자루의 아버지//

전단지에 살던 노인 / 임경섭
깊은 우물이라는 뜻의 데린구유는/ 종교탄압을 피하려 곳곳에서 도망쳐온 이들을/ 차곡차곡 쌓아두던 저장고/ 대규모의 지하 동굴이 서로 연결된 지하도시 데린구유는/ 더 심한 박해 들을 불러 모았고 사람들은/ 너나할것없이 춥고 음산한 노동을 견뎌야 했다/ 피난민이 늘어날수록 그들은 동굴을 파고 또 팠다/ 수백 년 동안 진행되었던 땅 속으로의 은밀한 부양,/ 음지로 내려가는 것들은 스스로 유적이 되는 일/ 거대한 미로의 벽들은 수많은 플래시에 뜯겨나가/ 여기저기 흩날릴 준비를 하는지 잠시 흔들거렸다.// 홀로 누운 밤은 더디게만 흐르더라/ 깜빡 잠든 사이 두 달의 시간은 먼지처럼 쌓였다/ 문틈으로 버석대며 들어온 바람이/ 살점을 시간에 묻혀 날려 보냈을 거라/ 2년 만에 찾아온 손녀매가 수납장을 열자/ 노인은 부패한 채 꿈에 깊은 구덩이를 파고 있었다/ 아침마다 한 동씩 아파트가 솟아오르는 재개발지구에서/ 노인은 날마다 얼마만큼의 슬픔을 퍼 날랐을까// 양지가 사라져가는 이 땅에서 노인은/ 스스로 유물이 되고 싶었던 걸까 수납장 속/ 오래된 방향제 만큼 쪼그라들어 버려진 노인/ 관광객들처럼 늘어선 복지센터 임원들과 함께/ 행인들의 발길에 툭- 툭- 차이던 그곳/ 행당 4구역 재개발지구 노인의 깊은 유적지는/ 땅 속에 스미지 못하고 오래도록/ 아스팔트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다//

죄책감 ―천부에서 / 임경섭
우리는 계단을 내려갔다/ 짐을 부리자마자 계단을 내려갔다/ 눈이 쌓인 만큼 계단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곳이 계단이라 믿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눈이 쌓인 곳으로 소리도 사라졌다/ 길이 길이었던 곳으로/ 계단이 계단이었던 곳으로/ 우리는 내려갔다/ 내려가도 내리막이었다/ 멀리서 벼랑을 때려대는 파도는/ 몇천 년이고 그래왔다는 듯이/ 파도였다// 우리는 계속 계단을 내려갔다/ 내려가다가 우리는/ 우리가 길을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별 시답잖은 생각을 다/ 해보기도 하였다//

우두커니 / 임경섭
출근길에 생각했다/ 나는 왜 저 사내가 되지 못할까/ 선로는 나가지도 들어가지도 못하는 문/ 그 위에 서서 나는 왜 저 사내가 되지 못할까/ 생각했다// 그러니까 등이 아주 작게 말린/ 가난한 아비 하나가 선로 위에 누워 있던 거다/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외할머니는 그의 등을 긁어주었던 거다/ 좁게 파인 등골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등이 작으면 저 긴 잠 일렁이는 물결에도/ 별자리들이 출렁이지/ 출렁이기 마련이지,/ 혀를 찼던 거다// 외할머니 연곡 뒷산에 묻고 오던 날/ 어린 그에게 감을 따주었다는 셋째 외삼촌과/ 그날 따먹은 건 감이 아니라 밤이었다는 첫째 외삼촌,/ 그는 그 중간쯤에 서 있는 담이었던 거다/ 혹은 이듬해 연곡천에서 끓여먹던 개장국 안에/ 흰둥이의 눈깔이 들어 있었다는 사촌누이와/ 처음부터 대가리는 넣지도 않았었다는 막내의 실랑이,/ 그는 그 사이에 끼여 들리지 않는 발음이었던 거다// 있거나 말거나 있었거나 없었거나// 그러니까 선로 밖으로 휩쓸려나가/ 처음 보는 동네 정류장에서/ 노선도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나는 왜 달려오는 전동차 밑으로 몸을 눕히지 못할까/ 그리하여 수십 수백의 출근길을 몇십 분이라도/ 훼방 놓지 못할까/ 생각했다//

들어선 / 임경섭
형이/ 현관을 열고 들어와/ 신발을 벗자/ 모래 몇 알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길도 소리를 갖고 있다면/ 저렇지 않을까// 형에게 인사도 안 하고/ 동생이/ 채널을 돌렸다//

기다리는 것은 기다리는 것 너머에 있다 / 임경섭
기요가 지나간 자리에서/ 두툼한 유리문이 느리게 닫히고 있었고/ 그녀를 따라 들어온 적도 해협의 습한 온기가/ 제자리를 잠시 맴돌다 사라지고 있었다// 아침부터 서둘렀지만/ 공항에 들어선 순간부터/ 자신을 제외한 그곳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이른 귀국을 방해하고 있다고/ 기요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재촉하던 걸음 앞으로/ 몸집만 한 짐들을 곁에 둔 이국의 사람들이/ 각자의 장소에서 저마다의 방향으로 줄지어 서 있었고/ 긴 줄 너머로/ 항공사 직원들이 사람들의 여정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표정 없이 티켓을 끊어 주고 있었다// 탑승 시간은 정해져 있었고/ 그 시간까지는 두 시간도 넘게 남아 있었다/ 서두른다고 시간이 당겨지지는 않는다는 걸/ 기요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출국장 훨씬 더 너머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누군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요가 이미 지나온 길 위에서/ 더운 공기가 자주 맴돌다 사라지고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을 떠올릴수록/ 가야할 길이 더 길어지고 있다고/ 기요는 생각하고 있었다//

빛으로 오다 / 임경섭
엄마 엄마// 오늘 과학 시간에 선생님이 말했어요/ 모든 것이 빛으로 존재한다고요/ 빛이 없으면 서로를 확인할 수 없다고요/ 빛이 있어서 모두가 함께할 수 있다고요// 그럼 엄마/ 내 앞에 있는 엄마는 엄마인가요 빛인가요/ 어느날 엄마가 사라진다면 그건/ 빛이 사라진 거니까 엄마는/ 보이지 않을 뿐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건가요// 집에 오다 누군가 담벼락에 적어놓은/ 휴거라는 글자를 봤어요 무서워요/ 모두가 사라지는 날이라잖아요/ 그 길이 어두웠다면 그 길이 보이지 않았다면/ 이런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을 텐데// 엄마, 오늘밤엔 불을 끄지 말아줘요/ 불을 끄면 내 방도 사라지고 내 잠도 사라지고/ 엄마를 위해 모으던 동전들과/ 어린 동생을 위해 적어놓은 기도문들도 사라질 거예요// 그래도 불을 꺼야 하겠죠?/ 이제야 알겠어요 밤이 왜 존재하는지/ 밤이 오면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거죠/ 우리가 사라져야 그동안 또다른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테니까/ 그리고 또다시 아침이 오면 우리는 전혀 다른 빛으로/ 서로 다른 빛으로 태어나겠죠//

연못 / 임경섭
허리 굽은 노인이 깊은 꿈 속으로/ 연못처럼 고이고 있는 새벽/ 선잠에 돛을 달아 물결을 따라가 보려 했지만/ 꿈은 어느새 몸을 뒤척여 자취를 감추고/ 노인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잠을 설치고 일어나 보니/ 갈현동 이 좁은 골목으로도 계절이 꺾여 들어오고 있었다/ 오랫동안 골목 위로 시간은 무수히 흘러갔지만/ 모퉁이 담벼락 앞에 다시 피는 산수유,/ 그러고 보니 시간은 그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오는 것인지도 몰랐다/ 새벽 창의 중심부에 붙은 산수유를 따라/ 다닥다닥 눌어붙는 생각들, 순간/ 창의 가장자리로 한 노인이 고개를 내밀었다가 사라졌다/ 노인의 우연을 질문하지만 대답해주는 이는 없다/ 그렇게 어머니를 만나야 했다/ 잠을 설치고 부스럭댈 때마다/ 말없이 깨어 있던 어머니는 없다 살아 있다면/ 백발이 성성했을 어머니는/ 젊은 그대로의 모습만 보여주었다/ 늙은 어머니를 슬퍼하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다 하지만/ 젊은 어머니는 드물게 다시 찾아와/ 골목 위의 배 한 척 띄울 수 없는 연못처럼/ 밤 속에 고였다. 간다//

푸른 광장의 녹슨 잠 / 임경섭
나는 서랍장 만에 잘 개켜놓은 투명한 배열 속의 호흡// 겨울과 봄의 간격, 부유와 침몰의 간격,/ 때로는 대기의 안과 밖의 간격에서/ 일 년 내내 숨어 지내는 키득거림// 철 지난 옷의 터진 실밥을 오랜 기다림으로/ 한 올 한 올 풀어헤치다 보면 그 긴 간격으로 벌어진/ 옷의 주인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시간을 빨아들이는 제습기의 말/ 보이지 않는 음습한 목소리들을 삼키는 허공/ 입술 주름 사이에 숨겨둔 단어들까지 모조리 삼켜// 말라 터진 건기의 입 속으로 기린이 들어온다/ 싱싱한 간격을 찾아 마사이마라 초원을 달려와/ 무성한 허공을 뜯어 긴 목에 빼곡히 쌓으며// 한없이 목이 길어진 기린은 구름을 뚫고/ 대기를 뚫고 심장을 뚫고 올라가 나에게 말하지/ 여기까지 와 보면 만다 아무도 없다// 나는 아무도 없는 간격에서 음습한 목소리를 먹고 자라는 고요한 석순// 내가 이 방만의 일부이듯 천장에 피어 있는 곰팡이/ 후미진 방까지 비집고 들어온 음습한 시간을 너를 두고 생각한다/ 어딘가에 균열이 생겼고 오랫동안 물방울 입자 같은 단어들이/ 균열을 헤집고 벌려 틈을 만들고 또다시 균열을 만들고// 균열이 생긴 만큼 방은 세상과 멀어지고 있다/ 물방울도 월세방 하나 차지하려고 만간힘 쓰는 세상에/ 수몰되어 나는 그 시간들을 채집할 뿐// 아 시간은 서랍장 만에 가둬 놓은 투명한 배열/ 균열 속의 가지런한 허공//

첨단세탁전문점 세탁반장 / 임경섭
아파트단지 만으로 저녁이 찾아오는 길목/ 첨단세탁전문점 세탁반장은 희뿌연 명찰을 달고 있다/ 403호 아줌마의 끊어진 브래지어부터 옆집 노총각의 때 절은 와이셔츠, 코르덴 바지, 오리털 파카까지/ 취급하기 까다로운 고급원단에서부터 각종 침구류까지/ 몇 번 만난 적 있는 그에겐 없는 것이 없었다 세탁반장은/ 옷의 잡티는 물론 사람들 주름살까지 쫙쫙 펴주곤 하는 것이었는데,/ 그의 첨단화된 세탁방법에 대해 사람들은 알고 있던 것일까?// 잠금장치의 혁명이라 불리는 디지털 도어록, 열쇠를 챙겨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편의성이 우리를 전자식으로 잠가놓았다 그 틈에 화재가 발생하면 수동 개폐장치 사용이 불가능해 현관문을 차단해 버리는 치명적인 결점이 드러났다/ 첨단은 가질 수 없는 것을 갖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인가 봐/ 밤새 젖은 어둠이 골목을 쓸고 가는 동안 방 하나 불타올랐다는데, 철창살 사이론 비명만 빠져나가고 녹아버린 전자식 잠금쇠가 일가족의 발목을 붙잡았다는데, 검은 가족들이 현관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방 안에 널브러져 있었다는데,/ 흉흉한 뉴스들이 사이렌처럼 기승을 부리는 저녁/ 모든 가질 수 없는 것들은 점점 첨단이 되어가고 세탁반장은/ 203동 말숙이의 치마를 다린다 언젠가 그의 세탁이 더욱/ 첨단이 되면 그의 간판은 내려질지 모를 일이다/ 온몸으로 드라이하고 스팀 다림질하는 세탁반장은 잔뜩 주름진 바지에게 분무질을 하고 꾹- 꾹 누를 때마다/ 치익- 증발하는 소리를 낸다//

비행운 / 임경섭
꿈을 꾸었어요/ 네모반듯한 교정 한구석에 늘어선 양버즘나무들이/ 천천히 그늘을 움직이고/ 양버즘나무 그늘의 중심에 숨은 매미떼가/ 쉬지 않고 울어대는 꿈이었습니다/ 하늘 가득 거대한 여객기들이 유유히/ 줄지어 돌아오는 꿈이었어요/ 너무나 거대했던 나머지 하늘은 보이지 않고/ 여객기들과 그것들이 남긴 비행운들만 섬섬히 빛나는/ 그런 꿈이었어요 그들의 활주로가/ 어느 쪽으로 놓여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낮고 느린 비행이 우리에게 잇따른 안착을 꿈꾸게 하는/ 그런 꿈이었습니다/ 운동장에 늘어선 우리는/ 입을 벌린 채 탄성을 내지르며/ 공중을 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여객기의 좁은 창문들 새로 얼핏 보일 것 같은/ 여행자들의 벅찬 마음을 상상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때였어요/ 대열의 끝에서 여객기 하나가 항로를 벗어난 것은/ 한껏 바람을 불어넣다 놓쳐버린 풍선처럼/ 후미의 여객기는 제멋대로 자주 방향을 바꾸더니/ 이내 구름 너머로까지 치솟아올랐습니다/ 운동장에 늘어선 우리는 기다렸어요/ 어리둥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유가 있겠지 설마 떨어지기야 하겠어?/ 생각하는 말들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한 채/ 입가의 웃음기를 잃지 않으려 애를 쓰면서/ 우리는 기다렸어요 기다리자/ 후미의 여객기는 돌아왔습니다/ 기체는 수직으로 떨어지고 있었어요/ 운동장에 늘어선 우리의 머리 위로 곧장/ 기체는 떨어지고 있었어요/ 우리는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기다리던 것이 돌아왔지만/ 우리는 너나없이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꿈을 꾸었어요/ 달아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달아나며 생각했어요/ 돌아온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돌아와도 돌아오지 못한 거란 건 또 어떤 기분일까?/ 우리는 너나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교정 너머로 나무 그늘 너머로 구름 너머로/ 그리고 거대했던 꿈 너머로/ 달아나고 있었습니다//

환 / 임경섭
발광하는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어둠의 한가운데였으므로 그곳이/ 우거진 숲인 듯도 했고/ 외진 고개의 포장길인 듯도 했던/ 그때/ 발광하는 형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어둠의 한가운데였으므로 그것이/ 사람을 찾는 손전등 같기도 했고/ 길을 찾는 자동차의 전조등 같기도 했던/ 그때/ 발광하는 형체가 눈이 부시도록 거대해졌다고 했다/ 어둠의 한가운데였으므로 우리가/ 조난당한 등산객인 듯도 했던/ 차에 치이기 직전의 고라니인 듯도 했던/ 그때/ 얼어붙은 몸으로 발광하듯 눈을 떴다고 했다/ 눈을 떴으나/ 주위가 어둠보다 어두웠으므로 우리가/ 우리를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더 이상 우리가 우리를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눈이 내리고 있다 / 임경섭
연일 폭염이 지속되는 가운데/ 길고 무거운 몸을 뙤약볕에 지지고 있는/ 차고지의 시동 꺼진 702A 버스 안에서/ 스마트폰에 형은 쓴다/ 눈이 내리고 있다/ 쓰고 나서 형은 생각한다/ 이 문장이 실현될 수 있는 확률에 대해/ 그러고 나서 스스로를 위로한다/ 모든 문장은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고/ 괜찮다/ 누구나 진실을 적어 내려간 적 없으니/ 눈이 내리고 있다고 쓰면/ 눈이 내리고 있는 것이다/ 출발 시간이 다 되어도 기사님은 오지 않고/ 열없이 달뜬 시간 속에서/ 형의 눈 내리는 문장은 삭제되기 시작하고/ 형은 그 사실을 모른다/ 그러나 아무도 형을 모른다//

휘날린 / 임경섭
여름성경학교에 갔던 밤이었다/ 수련원은 적막했으나/ 그만큼 벌레들은 크게 울었다/ 큰 소리로 기도하는 사람일수록/ 죄가 없는 사람/ 누나는 그보다 고요하게 기도했다/ 누나의 죄는/ 돌기 돋은 송곳니 사이로 삐져나온/ 짐승의 끈적한 언어와도 같은 것이었으니,// 휴지가 필요한 밤이었다/ 난 늘 닦아내는 꿈을 꾸니까/ 우리는 늘 휴지를 가지고 다녔다/ 세상엔 닦아낼 것들이 너무도 많았으니까// 휴지를 가지고 다닌다는 건/ 언제나 더렵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나의 유년은/ 쌓여 있는 시간들 사이에/ 숨은,/ 뽑으면 더러워지고 뽑지 않아도/ 더러워지는,/ 한없이 순서를 기다리거나 한순간 구겨져/ 사라질, 얇은 고백들인 것// 그날 밤 누나의 간증을 엿들으며 생각했다/ 엄마에게 한 번도 휴지를 사달라고 조른 적 없는 나는/ 깨끗한 사람일까/ 잠을 자지 않는 이상 이 천막 예배당에 아침이 오지 않을 테니/ 꿈은 더럽고 미래는 깨끗한 사람이/ 우리라는 걸까//

정체성 / 임경섭
한 공간의 어둠이 정지한다/ 한 공간의 규모가 조각난다// 충돌은 야간에 이루어지지/ 관측도 야간에 이루어진다// 관측되지 않은 별은 별이 아니다/ 어떤 형편과 형편이 충돌하면/ 때론 거대함만이 살아남는다// 아무도 위반한 적 없다/ 아무도 침범하지 않았다// 누구도 버린 적이 없어서/ 버림받지 않았다 했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 길이 아닌 길이어서/ 타살이 아니라 했다// 정체성은 작아지지 않는다/ 정체성은 다져지고 흩어져 넓어진다//

이, 야기/ 임경섭
빛의 반대편으로 길게 드러누운 골목/ 우지끈, 누군가 입 여는 소리 들리고/ 절뚝거리던 사내는 주저 앉는다// 이것은 단단히 봉합된 절기 속에서 새어나온 검고 끈끈한 이야기// 불사신이어야 했던 아킬레우스는 이제야/ 몸속 깊숙이 처박아놓은 희뿌연 시간들을 털어낸다/ 굳게 잠겨 있던 조류 속으로/ 살점이 떨어져 나가자 연거푸 터져나오는 신음들/ 되는 대로 쌓인 채 아 짓이겨진 상형들이 들춰진다// 이것은 농축된 기단 속을 이동하던 투명하고 건조한 이야기// 암 선고받은 아내가 보름 만에 죽었을 때도/ 딱딱하게 굳은 아내의 몸을 낯선 사내들이 닦아낼 때도/ 그의 동공은 차갑게 식어 있어야 했다// 이것은 바닥에 놓인 창문 밖으로 걸쭉하게 불어오는 북서풍의 은밀한 이야기// 어둠 속에서야 드러나는 급소/ 유리창을 밟고 찢어진 사내의 뒤꿈치 사이로/ 터져나오는 상처들/ 함께 가던 길인데도 여태껏 나는 그와 걷지 않았다/ 그의 길에만 창이 나 있었으므로// 이것은 배신한 회의의 무딘 날에 찢긴 살점을 오물거리며 비밀을 털어놓는 아버지의 이. 야기//

꿈이 되는 꿈 / ​임경섭
오랜 꿈에서 깨어났지만 아직 도로 위였어요// 나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 안에 갇혀/ 꿈을 꾸었던 것 같아요// 나는 엄마의 무덤으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오른 것이었는데/ 버스는 이미 엄마의 무덤을 지나쳐버린 후였죠// 모두 예정된 일이었어요// 새로 만든 고속도로를 타고 자주/ 터널 안으로 들어가서 버스는/ 밤보다 더 깊은 밤에 갇히는 것 같았어요// 그때 생각했죠/ 밤보다 깊은 밤은 밤보다 환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이 밤의 조명처럼 빠르게 지나갈 때마다/ 버스는 도로를 벗어나려는 듯/ 몸부림을 쳤어요 그럴수록 도로는 더 거대하게/ 구불거리는 듯했죠// 나는 도로에 갇힌 버스에 갇혀/ 꿈을 꾸다 깼던 것 같아요// 모두 예정된 일이었죠// 내 안에 갇힌 꿈은 나를 벗어나려는 듯/ 내가 뒤척일 때마다 꿈틀거렸지만// 밤이 몹시 흔들리며 지나가는/ 검은 차창의 반대편으로 내가/ 튕겨 나가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도로의 바깥으로/ 멈추지 않는 속력의 바깥으로/ 도무지 끊기지 않을 것 같은 실선의 바깥으로/ 떠밀려 나가지 않는다면/ 꿈은 나를 빠져나가지 못할 거란 생각이// 반대 차선에서 느리게 다가오다가/ 순식간 사라진 덤프트럭의 전조등같이/ 지나가버렸어요// 모두 예정된 일이었죠// 내 꿈은 버스기사였습니다/ 꿈이 꼭 꿈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난 이미 꿈을 이루었으니까/ 난 이미 꿈을 꾸었으니까// 버스에 갇혀 버스 기사의 꿈을 이룬 나는/ 충돌을 꿈꾸었던 것 같아요/ 충돌의 순간 꿈을 이룬 꿈에서/ 깨어나는 꿈을 꿀지도 모를 일이었죠// 그래요/ 모두 예정된 일이었습니다// 꿈을 꾸는 꿈이라면 모를까/ 꿈이 되는 꿈이라니요//

눈이 내리고 있다 / 임경섭
연일 폭염이 지속되는 가운데/ 길고 무거운 몸을 뙤약볕에 지지고 있는/ 차고지의 시동 꺼진 702A 버스 안에서/ 스마트폰에 형은 쓴다/ 눈이 내리고 있다/ 쓰고 나서 형은 생각한다/ 이 문장이 실현될 수 있는 확률에 대해/ 그리고 나서 스스로를 위로한다/ 모든 문장은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고/ 괜찮다/ 누구나 진실을 써내려간 적 없으니/ 눈이 내리고 있다고 쓰면/ 눈이 내리고 있는 것이다//

흔적 / 임경섭
현관을 열었을 때 보았다/ 내가 몇 달이고 걸었을 길가의 모래뭉치며 흙먼지들이/ 쫓아와 너저분히 쌓여 있었다// 벗으면 후드득 튕겨나가는 지구의 살점들/ 현관마다 종적을 감춘 모퉁이들이 모여들어/ 지층을 만들고 있었다// 저 무수한 시간의 뿌리들이 길어 올려 피워낸 것이/ 깊숙한 골목의 방 한 칸이라면/ 내 잠은 오늘 또 어떤 이의 금기 속으로 시들어야 할까//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설계한 사람의/ 손금을 상상하기로 했다/ 그 손길의 무구와 무고가 동의어로 느껴질 즈음/ 네 쪽으로 흐르던 시간들이 범람하였다// 우리는 한 번도 길을 따라 걸어보지 않았다고/ 길이 우리를 따라 몰려든 것이라고/ 그리고 우리가 걸은 길들은 언제나 다정했으므로/ 적당한 모멸 또한 숨기고 있는 것이라고// 시간이 흐를수록 골목이 깊어지고 있다/ 흐른다는 것, 혹은 깊어진다는 것/ 골목이 시간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다// 우리는 매일 낮아지고 있다/ 많이 걸어야 할 사람일수록 언덕에 살고 있다//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 임경섭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있다/ 당신은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를 발견한 뒤부터/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를 안다고 생각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신은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와 마주친다 또 다른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다/ 어? 어떻게 내가 모르는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있을 수 있지?/ 당신은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두 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처음 들은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만이 유일한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라 여긴다/ 당신은 더 이상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신이 모르는 사이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는 도처에서 태어나고 있다/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는 당신의 사방에 놓여 있지만/ 당신은 당신의 처음 그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만이 진짜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라 여기며 이미 당신이 모르지 않을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에 귀를 닫는다/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는 당신이 소유할 수 없다/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는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직 하나뿐인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에서 당신이 무사히 빠져나오기를 바라고 있다//

사이렌 / 임경섭
누나는/ 사랑니를 앓고 있어서 밤새 뒤척였고/ 그사이 신축 아파트 단지 너머로/ 앰뷸런스가 지나가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했다// 누나는/ 어금니에 힘을 꼭 주고 있었지만/ 자기보다 아픈 사람들의 신음이/ 희미하게 자꾸 들려오는 것 같아서/ 응급실에 갈까 잠깐 고민한 게/ 미안했다고도 했다// 누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조금밖에 아프지 않아 사과하는 사람/ 잘못도 하지 않은 채 용서를 비는 사람// 학교에서 배운대로 실천하는 사람/ 그래서 모든 신호를 지키는 사람/ 법을 믿는 사람/ 아주 도덕적인 사람// 재건축에 묶인 누나네 집 앞은/ 보도블록도 깔지 않아서/ 온통 잿빛이었다//

형의 벌 / 임경섭
아무렇게나 방바닥에 누워/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던 형이 물었다/ 아무것도 안할 수 있을까?// 오후의 늦은 햇살을 느끼거나/ 돌아오지 못할 작년의 봄을 떠올리거나/ 남은 한해 동안 무얼 먹고 살지 걱정하는 것까지/ 모조리 안할 수 있을까?// 형은 생각 없이 한 말이었지만/ 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 일 수 있을까?/ 우리는 이미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아무것도 안하기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시티 / 임경섭
아름답다의 다른 말을 생각해보자/ 허물다/ 짓다/ 허물고 짓다// 추억하다의 같은 말을 생각해보자/ 무너지다/ 세워지다/ 무너지고 세워지다// 아프다의 다른 말을 생각해봐/ 추악하다의 같은 말을 생각해봐/ 떠오르지 않을 거야/ 있지도 않았으니까// 처음부터 이 도시계획에/ 네 방 같은 건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플라스마 / 임경섭
헤르베르트 그라프는 그의 아내에게 오로라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가 나고 자란 고장에선 오로라를 볼 수 없었다/ 같은 고장에서 나고 자란 아내 역시 한번도 보지 못한 그것을 끔찍이 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결혼 3주년이 되던 날 근교로 나간 헤르베르트 그라프는 멀찍이 샛노란 해넘이가 한눈에 들어오는 까페 테라스에 앉아 아내에게 말했다/ 죽기 전에 너에게 오로라를 보여주고 싶어/ 그러자 아내는 검붉은 가을 수수밭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의 아내 혼자서 오로라가 보이는 곳으로 가도 된다는 말이야?/ 아내의 질문에 헤르베르트 그라프는 한쪽 머리가 아파왔다// 그렇지 나는 분명 아내에게 오로라를 보여주고 싶었지/ 그렇지만 일찍이 스스로 오로라를 보고 싶단 마음도 갖고 있었어/ 그렇다면 내 말은 내가 오로라를 보기 위한 수단으로 아내를 이용하겠단 뜻일까// 헤르베르트 그라프는 꼬았던 다리를 반대로 다시 꼬는 동안 상체를 아내쪽으로 은근히 숙이며 말했다/ 죽기 전에 너와 오로라를 보러 가고 싶어/ 그러자 아내는 푸르르 떨리는 진보랏빛 유성 같은 입술로 물었다/ 당신은 오로라가 보고 싶은 거야, 오로라가 보이는 곳으로 가고 싶은 거야?/ 아내의 질문에 헤르베르트 그라프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래 오로라를 보는 일은 검색으로도 가능한 일이지/ 그래도 나는 태양의 입자와 지구의 자기장이 부딪는 곳에 서서 그것들의 발광을 목격하고 싶은 마음이었어/ 그래서 내 말은 오로라가 보이는 곳으로 가되 거기서 오로라를 보지 못해도 된다는 뜻일까// 헤르베르트 그라프는 의자에서 일어나 아내에게로 걸어가 그녀의 팔걸이에 걸터앉으며 다시 말했다/ 죽기 전에 오로라가 보이는 곳으로 가 너와 함께 오로라를 바라보고 싶어/ 그러자 아내는 북극점으로부터 불어오는 텅 빈 바람 같은 눈빛으로 물었다/ 생애 단 한번 맞이할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왜 당신과 함께해야 하지? 지치도록 평생을 함께할 당신과 말야/ 아내의 말에 헤르베르트 그라프는 한 손으로 자신의 무릎을 내리치며 웃기 시작했다.// 다시없을 이 밤 아내와의 귀갓길은 그에게 아프지도 않았고 기쁘지도 않았고 허전하지도 않았고 가득하지도 않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헤르베르트 그라프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지나 가버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늦여름 / 임경섭
마틸다는/ 슈퍼에 가고 있었다// 단발머리를 한 마틸다는/ 목에 검정색 초커를 하고/ 슈퍼에 가고 있었다// 이웃에/ 아우디 신형 A4의 주인은/ 여행을 가고 없었다// 마틸다와는/ 1학년 때부터 같은 반이던/ 건넛집 나탈리는/ 이사를 가고 없었다// 길가에 심긴 어린 가로수에서/ 전에 없이 큰 소리로/ 매미가 울고 있었다// 마틸다가 슈퍼에 가고 있을 때/ 마틸다의 여름도/ 가고 있었다//

바이세 엘스터 강 ㅡ슈레버 일기 / 임경섭
나는 주말 오전을 온전히 침실 안에서 보내고 싶었지만/ 엊그제 한 약속을 잊지 않은 아이 손에 이끌려/ 아침부터 외출을 해야 했다/ 할머니가 정성스레 만든 족발 요리를 남기지 않는다면/ 강변에 데려갈 것이란 약속이었다// 주말 오전의 햇빛은 버려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더 묵혀야 했으나 너무 일찍 꺼낸 밀반죽처럼/ 주말 오전의 풍경은 충분히 부풀지 않아/ 찰기를 잃고 하얗게 떠 있었다/ 한껏 아껴두었다가 한꺼번에 쬐야할 볕을 서둘러 맞닥뜨린 나는/ 집을 나서자마자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 강변까지는 수백 미터 거리여서/ 아이와의 걸음으론 한 시간은 족히 걸어야 했다/ 걷는 동안 아이는 나와 가로수와 표지판과 상점의 가판대 주위를/ 번갈아가며 돌고 돌았다// 나보다는 몇 곱절 더 먼 길을 가던 아이가 물었다/ 강은 언제부터 흘렀느냐고/ 네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강은 흐르고 있었다고/ 나는 대답했다/ 그럼 강은 그전 언제부터 흘렀느냐고 아이가 물었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강은 흐르고 있었다고/ 나는 대답했다/ 태어나기도 전의 일을 아빠는 어떻게 아느냐고 아이가 물었다/ 지금 너에게처럼 나도 할아버지가 알려줬다고/ 나는 대답했다/ 그럼 아빠는 할아버지의 말을 모두 믿느냐고 아이가 물었다// 강변은 아이와 내가 출발하기 전부터/ 사람들로 붐비고 있을 것 같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라이프치히 동물원 ㅡ슈레버 일기 / 임경섭
세살 된 아이를 데리고/ 내가 찾아간 곳은 동물원이었다/ 그곳은 가질 수 없는 것들로 가득했다// 어제 내린 비로/ 하늘빛이 무척 푸른 날이었지만/ 군데군데 얕은 물웅덩이들이 놓여 있어/ 나는 말간 하늘보다는/ 앞서 내달리는 아이를 주로 쳐다보며/ 숲처럼 우거진 포장길을 걸어야 했다// 말을 막 배우기 시작한 내 아이는/ 처음 보는 동물을 마주할 때마다/ 그것들을 갖고 싶다 했지만/ 나는 그때마다/ 그것들을 가질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 설명하는 대신/ 나는 아이에게 동물원에 대해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알기로 동물원은/ 움직이는 사물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동물원 안에는 그 어떤 사물도 움직이지 않았으니/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동물원은 움직이지 않는 동물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동물도 스스로 그곳을 선택한 적 없었으니/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동물원은 움직이지 않는 동물들을 모아놓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모아놓은 주체가 빠졌으니/ 나는 그대로 말할 수 없었다/ 동물원은 인간이 움직이지 않는 동물들을 모아놓은 곳이었다/ 그러나 인간도 동물이었으니/ 나는 그대로 말할 수 없었다/ 동물원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모아놓은 곳이었다/ 그러나 스스로를 가둔 테두리는 보이지 않을 만큼 넓었으니/ 나는 더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세살 된 아이가/ 아무 말 하지 않는 나를 데려간 곳은/ 동물원이었다/ 그곳은 경계와 경계들이 놓여 있는/ 경계의 안쪽이었다//

성 토마스 교회 ㅡ슈레버 일기 / 임경섭
페르세우스자리 유성우가 떨어진다는 8월이었다/ 나는 합창단원인 내 아이와 함께 유성우를 보기 위해 토마너 성가대가 연습을 마치는 시간에 맞춰 성 토마스 교회로 향했다/ 교회로 가는 길 위에는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가로수며 보도블록이며 벽돌집이며 불 꺼진 벽돌집 창문이며 창문에 비친 허공이며 할 것 없이 모두 그 속에 포근히 들어차 있었다// 교회까지 절반쯤 갔을 때였던가/ 내가 아주 어릴 적 어느 칠흑 같던 밤 어머니와 함께 같은 길을 걷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날도 8월이었으리라/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어머니가 들려주는 사촌누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성 토마스 교회 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때의 사촌들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느닷없이 떨어지던 별똥별의 굵은 꼬리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너무도 아름답다고 저토록 아름다운 것에 소원을 빌어보라고 어머니가 말했지만 내게는 두려운 풍광이었다/ 아름다운 것들은 내 머리 위로 곧장 들이닥칠 것만 같았다/ 나는 떨어지는 별들에게 어머니의 깊은 병에 대해 기도하는 대신 우리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어둠은 무섭도록 아름다웠다/ 교회에 다다르기 전부터 유성우가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멀찍이 아이들의 아름다운 합창 소리는 여전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교회까지 남은 걸음을 걷는 동안 떨어지는 별들을 바라보며 별똥이 다 질 때까지 노래가 끝나지 않기를 기도했다//

크로아티아 비누 / 임경섭
나카타는 목욕을 할 때마다 신혼여행지에서/ 산 비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의/ 고향에선 볼 수 없던 대리석 문양의 비누였다// 나카타는 목욕을 할 때마다 신혼여행지에서/ 산 비누를 바라보며 그곳의 짙푸른 해안선을/ 한참이고 떠올렸다 그곳은 시간을 두고 촘촘히/ 흘러내린 비누의 마블링 같은 섬들로 가득했다// 나카타는 목욕을 할 때마다 신혼여행지의/ 해안선을 떠올리며 여행가가 되고 싶다는 자신의/ 꿈에 대해 생각했다 비누 하나 다 닳을 때까지/ 여행을 기억할 수 있다면 자신은 충분히/ 여행가가 될 자격이 있다고 나카타는 생각했다// 나카타는 목욕을 할 때마다 여행가가 될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며 신혼여행 말고는 변변한 여행/ 한번 해본 적 없는 자신의 경험에 대해 고민했다/ 한번도 홀로 떠난 적 없었으므로 자신의 꿈이/ 아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을 거라고/ 나카타는 걱정했다// 나카타는 목욕을 할 때마다 아내 없이 이룰 수/ 없는 꿈에 대해 고민하며 욕실 나무 선반 위의/ 비누를 바라보았다 비누는 몸집이 부쩍 작아져/ 있었지만 아내는 살아 있는 한 닳지는 않을 거란/ 생각에 나카타는 안도했다// 그리하여 나카타는 목욕을 할 때마다 닳아/ 없어지지 않을 아내를 생각하며 아내만큼/ 소중한 크로아티아 비누를 매만졌다 아낄수록/ 비누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졸린 / 임경섭
아무도 찾지 못했네/ 졸린/ 어디선가/ 알 수 없는 고장에서 온/ 출국하지 않았으나 입국도 하지 않은/ 그녀가 즐겨 찾던 스트리트/ 그녀가 활보하던 애비뉴에서도/ 더이상 졸린을 본 사람은 없었네/ 이태원로 27가에서도/ 인사동 쌈지길에서도/ 졸린은 더이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았네/ 졸린은 한국인이 아니니까/ 한국인이 아니면 애국자도 아니니까/ 그러나/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졸린에 대한 목격담을 많이 갖고 있었네//

지평선 / 임경섭
난생처음 지평선을 마주한 아이에게 다니엘 파울 슈레버는 말했다 아들아 나도 지평선은 처음이구나 그러자 아이가 물었다 지평선이 뭐야? 슈레버는 곡식의 낟알을 살찌우는 가을볕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기 하늘과 땅이 맞닿아 만든 선 그것이 지평선이란다 그러자 아이가 다시 물었다 지평선에 갈 수 있을까? 슈레버는 황금빛 평야를 가로지르는 실개천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란다 그러자 아이가 되물었다 지평선에 가면 지평선을 밟을 수 있을까? 슈레버는 해넘이를 등지고 홀로 날아가는 홍부리황새의 날갯짓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평선에 가면 지금의 지평선은 사라지고 또다른 지평선에 결국 갈 수 없는 거 아냐? 슈레버는 끝이 보이지 않는 밀밭에 점점이 흩어져 이따금 허리를 펴는 농부들의 기지개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가가는만큼 지평선은 밀려나며 멀어질거란다 그러자 아이가 물었다 그렇다면 아빠가 거짓말한 거 아냐? 슈레버는 느긋하게 물결을 만들다가 사라지는 곡창지대의 여린 하늬바람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들아 나도 지평선은 처음이구나// 다니엘 파울 슈레버는 좀처럼 해가 질 것 같지 않은 서녘의 시간 속에 아이와 함께 서 있었다 슈레버는 옆에 선 아이에게 한발짝 다가섰지만 아이는 그만큼 멀어지고 있었다.//

국경을 넘는 일 / 임경섭
살아 있는 한/ 넘지 못할 국경 한군데쯤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 그러나 넘으려 하지 않는 국경은/ 누구에게도 없네//
세살 난 쿠르디는/ 가족과 함께/ 만선이 된 조각배를 타고/ 에게해의 광활한 국경을 넘고 있었다// 우리 단지 아이들이/ 가방을 메고/ 시끄럽게/ 교문을 들어서고 있을 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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