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년 제8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 동상 어제의 아련한 기억들을 더듬고 싶을 땐 살포시 눈을 감아야 한다. 눈을 감는다는 건, 머릿속에 새겨 두었던 망각의 흉터에 불을 지피는 것과 같다. 늦가을 만추에 고향집을 간만에 찾았다. 성글게 추억이 깃든 문간방 쪽마루에 비스듬히 기대어 두 눈을 살포시 감아본다. 찰나의 순간, 어제의 환영(幻影)들이 나를 뭉텅이로 데려가기 시작한다. 유년시절 나는 행랑채 서까래 기둥에 등을 기대고 멍하니 마당 언저리를 두리번거리는 야릇한 버릇이 있었다. 마당 오른쪽 툭 튀어나온 둔덕에는 장독들이 정갈스레 옹기종기 놓여있었다. 아침이 되면 햇살은 감나무 잎사귀 사이로 간신히 헤치고 나와, 나지막한 흙 담장 위를 뛰어넘어 싸리나무 울타리 우듬지에 가뿐히 내려앉았다. 실낱같은 ..

2021년 제8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 동상 삶이 시들해지는 날이면 숨이 살아있는 시장으로 향한다. 느린 걸음으로 기웃거리다 보면 몸속에 엔돌핀이 샘솟고 축 처진 어깨에 힘이 실리며 덤으로 따뜻한 정까지 한 아름 안고 온다. 재래시장 난전을 기웃거리는 재미가 여간 쏠쏠하지 않다. 작은 바구니와 큰 바구니를 구분해 채소나 과일을 담아놓았다. 가격표는 골판지에 써서 바구니에 꽂아 한눈에 볼 수 있다. 모양은 삐뚜름하게 제멋에 사는 것처럼 생김새가 모두 제각각이다. 화장기 없는 얼굴로 다가앉은 자연 그대로의 물상을 보고 있으니 더없이 친근하게 여겨진다. 인간 세상의 군상들을 마주하는 것 같아 설핏 웃음이 터진다. 물건을 담은 바구니의 크기에 따라 천 원짜리 몇 장으로 살 수 있는 가격이니 누구나 부담 없이..

2021년 제8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 동상 진분홍 꽃 무리가 금방이라도 산언덕을 태울 듯 붉어지면 축제는 시작되었다. 고기잡이 나갔던 배들이 들어오고 뽕할머니 제사 준비도 부산해졌다. 진달래꽃은 돌가자미라는 춤으로 쑥을 만나러 오고, 4월의 바다는 물을 벗기 시작했다. 서망마을 바당곳, 무당이 물에 빠진 넋을 건져 올리고 있다. 징 소리가 요란하게 울어대다 파도에 쓸려 멀어지고 무가 소리는 끊어졌다 이어지며 바닷속에 누운 넋을 달랜다. ‘어 이를 갈거나 어 이를 갈거나/ 이제 가면 못 오는 길 어서 바삐 가지 말고/ 불쌍하신 망자님 세 왕가고 극락 갈 제/ 천궁 없이 어이가리/ 잘 가시오’. 당골은 건져온 넋의 극락 천도를 기원한다. 낮은 대금 소리는 날카로운 피리 소리에 묻히고 가냘픈 해금 소리는..

2021년 제8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 은상 달팽이가 더듬이를 내밀었다. 사방이 풀밭인데 어디로 가는 걸까? 제 등을 옮기자니 한나절이다. 달팽이가 기어가는 길은 위험천만이다. 빠르게 이동하는 개미떼가 아무리 부러워도 눈길 한번 줄 수 없다. 잠시도 해찰부릴 수 없는 달팽이는 아무도 등 떠밀지 않았음에도, 이 세상을 기도하기위해 구도자의 길을 나선 어느 수도자와 비슷하다. 나선형의 등을 지고 다니는 달팽이는 르네상스시대의 건축양식을 능가한 전위예술가요, 타고난 재주 또한 기묘하다. 아름드리나무에 빨판처럼 달라붙어있는 밀착성에 더하여, 곡예사처럼 유리벽을 오르내리는 아슬아슬한 면모(面貌)를 보여준다. 이러한 달팽이도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 있다. 그 눈물은 다소 짭조름하다. 달팽이도 한때 바다가 고향이었..

2021년 제8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 금상 슴베는 칼이나 호미, 낫 따위의 자루 속에 들어박혀 있는 뾰족한 쇠붙이를 말한다. 땅속에 묻힌 나무뿌리처럼 자루 속에 숨어서 농기구를 지탱해 날이 잘 들게 해준다. 쇠붙이와 자루인 나무는 오행의 운행에서 금극목(金克木)으로 상극(相克)이라 한다. 낫은 나무를 쳐내고, 나무는 쇠붙이를 녹일 수 있어 상극이라는 것. 그런 상극관계인 쇠꼬챙이와 자루가 상생하여 온전한 낫이 되도록 해주는 역할이 슴베다. 조선낫 슴베도 물푸레나무로 된 자루 안에 숨어 있다. 나는 산소에 벌초를 할 때는 아버지가 손수 만들어 사용했던 조선낫을 쓴다. 그 슴베 덕분에 조선낫은 굵은 나뭇가지도 거침없이 쳐낼 수 있다. 슴베는 드러나지 않고 숨겨야 제 기능을 한다. 그래서 시뻘겋게 달군 ..

2021년 제8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 금상 물레 위 흙덩이에 온 마음이 놓였다. 미끄덩거리고 부드러운 촉감에 흙덩이를 불끈 잡는다. 손가락 사이에서 미어터지듯 삐져나와 버리는 것이 아쉬워 남은 것을 그러모아 다시 주먹을 쥐어본다. 시원하고 차진 흙의 감촉이 손끝으로 전해져 온다. 그릇을 만들기 위해 질흙을 잘 반죽해 떼어 놓은 덩어리를 ‘꼬박’이라고 부른다. 두드리고 비비고 매만지며 썰질 할 땐 무엇을 만들지 기분이 들뜬다. 조형토를 주물러 도톰한 사발이든 너른 접시든 얼추 형체가 드러날 땐 설렘도 커진다. 옆자리의 도공은 빠르게 돌아가는 물레의 속도를 잊은 듯 혼신의 기를 모아 자유자재로 형태를 넓혀간다. 꼬박은 무한한 가능성의 상징이다. 어릴 때,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꿈을 꾸었던 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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