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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셈법 / 김영희

부흐고비 2021. 11. 18. 21:43

2021년 제8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 동상

삶이 시들해지는 날이면 숨이 살아있는 시장으로 향한다. 느린 걸음으로 기웃거리다 보면 몸속에 엔돌핀이 샘솟고 축 처진 어깨에 힘이 실리며 덤으로 따뜻한 정까지 한 아름 안고 온다.

재래시장 난전을 기웃거리는 재미가 여간 쏠쏠하지 않다. 작은 바구니와 큰 바구니를 구분해 채소나 과일을 담아놓았다. 가격표는 골판지에 써서 바구니에 꽂아 한눈에 볼 수 있다. 모양은 삐뚜름하게 제멋에 사는 것처럼 생김새가 모두 제각각이다. 화장기 없는 얼굴로 다가앉은 자연 그대로의 물상을 보고 있으니 더없이 친근하게 여겨진다. 인간 세상의 군상들을 마주하는 것 같아 설핏 웃음이 터진다. 물건을 담은 바구니의 크기에 따라 천 원짜리 몇 장으로 살 수 있는 가격이니 누구나 부담 없이 구매 할 수 있다.

난전을 돌아보니 할머니께서 손수 짜 온 참기름, 농사지은 잡곡, 채소를 가지런히 놓고 오가는 사람을 기다린다. 겉절이 할 채소를 샀더니 푸성귀를 우수로 더 얹어준다. 이렇게 많이 주면 남는 게 있겠냐고 하니 할머니는 “촌 물건은 다 그렇다.” 마수걸이인데 많이 주고 적게 주는 것은 엿장수 마음대로라 하신다. 자극도 호들갑도 없는 대화에 은근한 정감이 흐른다. 허술한 좌판을 벌여놓고 할머니의 호객행위는 “이거 진짜배기야. 싱싱하고 맛이 달라.”가 주된 설명이다.

할머니의 명쾌함과 소박하고 정이 넘치는 셈법은 각박한 세상에 배려와 소소한 기쁨을 알게 해준다. 천 원, 이천 원을 벌기 위해 난전에서 기린 목이 되도록 손님을 기다린다. 잡곡과 채소를 애지중지 매만지는 주름진 손등에 삶의 고단함이 엿보인다. 할머니는 아픈 다리를 끌고 길가 좁다랗게 마련한 난전 한 귀퉁이에서 싸 온 도시락으로 허기를 달랜다.

길 한 모퉁이에서 할머니가 호박을 싸게 판다며 천 원에 가지고 가란다. 비가 자주와 호박 값이 농협에서도 삼천 원하는데 왜 이렇게 싸게 파냐고 했더니 집에 어른이 계셔 빨리 가야 한단다. 칠십 중반의 할머니인지라, 지금 연세에 누굴 섬길 분이 있는지 궁금했다.

시어머님이 요양 병원에서 곡기를 끊으셔서, 돌아가실 것 같아 자식 된 도리로 집으로 다시 모셔왔다. 대소변을 받아내고 끼니 수발이 일이라 마음이 급하다는 것이다. 할머니 사정이 딱해 보여 호박 하나를 사려고 했던 것을 다라이에 남아 있는 호박을 모두 산다고 하니 하나 값은 받지 않겠다고 하신다.

친정엄마도 한때 장사를 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몸져눕자 가족의 생계가 막막했다. 병원비와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엄마는 장삿길에 나섰다. 마른 건어물을 취급하는 친척의 도움을 받아 미역, 멸치, 오징어를 떼다 팔았다. 비탈진 길을 발이 부르트도록 오르내리며 배달을 마다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니 단골이 생기고 벌이가 나아진다며 엄마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개중에는 물건 값을 내일 준다, 다음 달에 준다며 미루는 사람도 있었다. 다음 달 월급날이면 꼭 갚겠다며 찬거리를 가져간 새댁이 몇 달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엄마는 기다리다 못해 날을 잡아 작정하고 고갯마루를 넘어 이사한 달동네를 찾아갔었다. 좁다란 통로를 지나 막다른 집, 허름한 방에 아파 누운 여인과 땟거리가 없어 눈물마저 말라버린 아기가 빈 젖을 빨고 있었다. 엄마는 팔려던 건어물을 꺼내어 미역국을 끓이고 멸치조림과 다시마로 반찬을 해주고 되돌아왔다.

엄마의 셈법은 딱 부러지지 않았다. 우리 집 살림살이도 녹록치 않은 형편이었지만 사는 게 팍팍하거나 아픈 사람에게는 우수로 더 얹어주며 상대방의 입장과 처지를 딱하게 생각했다. 이해타산은 나중의 셈법이며 돈이 없으면 외상으로 주기도 하고 조금 밑지거나 본전을 해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물건을 건넸다.

지난 날 삶이 가팔랐던 분들에게서 느껴지는 뭉근하고 가슴 따뜻한 울림이 전해진다. 쉽게 낙담하지 않고 삶에 순응하는 여유와 연륜이 느껴져 뭉그적거린다. 더 살 게 있는지를 생각하며 투박한 물건에 눈길을 보탠다. 이 모습은 가난했지만 따스했던 지난 시절 엄마와의 대화인 것 같다. 쑥 훑어보면 한눈에 들어오는 물건이지만 찬찬히 곱씹고 살피며 엄마가 그리워 칭얼대는 아이처럼 얼쩡거린다.

날 것 그대로의 맨얼굴에는 정확한 계산법이 없다. 이곳은 인정이 넘치는 곳이라 말만 잘하면 덤으로 더 얹어주기도 한다. 때로는 제 몫보다 덧거리가 더 많은 경우도 있다. 물건을 고르다 보면 마음의 온도가 올라간다. 주판알과 계산기는 없지만 계산은 머리와 마음으로 셈한다. 인정과 속 깊은 호의는 눈길이 미치지 않는 가슴 밑바닥에 먼저 와 닿는다. 심장의 온도가 차가워지며 소통과 공감이 멀어지는 시대, 미지근한 셈법은 수채화같이 맑고 잔잔한 여운과 울림을 준다.

수상소감

김영희 : '대구문학'신인상등단, '수필세계'신인상, 경북문화체험전국수필대전공모 은상, 대구문화재단창작기금수혜(2017), 수필집 '오래된 별빛'. 대구문인협회. 대구수필가협회이사. 수필세계작가회.


재래시장에서 찬거리를 사 와 가족들이 좋아하는 저녁을 준비했다. 식탁을 차리는데 문자가 왔다.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에 글을 보냈으나 잠시 잊고 있었다. 감사의 문자였다. 삶이 시들해지면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며 찾는 곳이 시장이다. 척박한 삶의 현장에서 옛 엄마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현실은 각박하고 몰인정하다. 하지만 아직도 주변에는 인정이 묻어나는 곳이 산재해있다. 재래시장에서 느낀 따뜻한 울림이 삶의 온기가 되어 한 편의 글이 되었다. 평소 글을 쓴다고 하지만 글의 위치가 궁금했다. 아직은 갈 길이 멀다는 생각에 고개가 숙어진다. 걸음을 늦출 때가 아닌 것이다. 걸음은 때로 빨라지기도, 느려지기도 하겠지만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내 안에 갇혀있던 이야기가 외부 세계로 이어져 글이 되는 순간을 기다려본다. 부족함이 많은 글 선택해주신 심사위원분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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