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행(雪行) / 복효근 분명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올라간 산정 허무만이 눈보라로 몰려 올뿐 아무 것도 없어 더 믿을게 없어 앞서 간 사람의 발자국만이 경전처럼 눈부셨습니다 몇몇의 발이 부르트고 관절이 삐꺽이고 추위에 귓불이 얼었을지라도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으므로 더 잃을 것도 없어 비로소 서로가 나침반이 되었습니다 가슴에서 가슴속으로 길을 내어주던 눈보라속에서 내 모든 그대가 이정표입니다 길입니다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 복효근 내가 꽃피는 일이/ 당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면/ 꽃은 피어 무엇하리/ 당신이 기쁨에 넘쳐/ 온누리 햇살에 둘리어 있을 때/ 나는 꽃피어 또 무엇하리/ 또한/ 내 그대를 사랑한다 함은/ 당신의 가슴 한복판에/ 찬란히 꽃피는 일이 아니라/ 눈두덩 찍어내며 그대..

신처용가新處容歌 / 원용수 아내 젖이 짝젖 되었다 한 쪽만 만져서 그리 되었다나 난 어느 쪽도 만지지 않은 것 같은데 역신의 짓인가 이녁도 모르고 지내왔단다 커진 젖은 그대로 두고 작은 젖을 키우란다 되짚어 봐도 도둑맞은 것 같아 께름하다 잡생각 마시오, 역신은 믿는 가정엔 범접하지 못한다오 아내를 왼편에 두고 오른손으로 왼쪽 젖만 만졌다니 앞으로 오른편에 두고 왼손으로 오른쪽 젖 만져볼까 때로는 그를 넘나들며 양손 다 사용하고 내 한 생이 아내를 도둑질하네 원용수 시인은 수필가이기도 하다. 호는 안석, 경북 울진 출생, 강릉사범, 방송통신대학 졸업, 초등 교원 명퇴하였다. 월간 '한맥문학' 등단, 한국문협, 대구문협,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형산수필, 달구벌수필 동인, 대구수필가협회 이사, 문학잡지 '문..

검은 방/ 신철규 슬픔의 과적 때문에 우리는 가라앉았다 슬픔이 한쪽으로 치우쳐 이 세계는 비틀거렸다 신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그것이 일반명사인지 고유 명사인지 알 수 없어 포기했다 기도를 하던 두 손엔 검은 물이 가득 고였다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 최대한 가만히 있으려고 할수록 몸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딱딱해지고 있었다 해변에 맨발로 서 있던 유가족 맨살로 닿을 수 없는 거리가 그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죽을 때까지 악몽을 꾸어야 하는 사람들의 뒷모습 학살은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꾸는 악몽 같은 것 손가락과 발가락까지 피가 돌지 않고 눈이 심장과 바로 연결된 것처럼 쿵쾅거렸다 모든 것이 가만히 있는 곳이 지옥이다 꽃도 나무도 시들지 않고 살아 있는 곳 별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멈춰서 못처럼 박혀 있는 ..

천생연분/ 정끝별 후라나무 씨는 독을 품고 있다네 살을 썩게 하고 눈을 멀게 한다네 그 짝 마코 앵무는 열매 꼬투리를 찢어 씨를 흩어놓는다네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많이,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멀리, 흩어진 씨를 배불리 쪼아먹은 후 어라! 독을 중화시키는 진흙을 먹는다네 베르톨레티아나무 열매는 이름만큼이나 딱딱해 너무 큰 데다 향기도 없어 그 열매를 좋아하는 건 쳇! 토끼만한 아고우티뿐이라네 앞니로 껍질을 깨 속살과 씨를 먹고 남은 씨를 땅 속에 숨긴다네 다른 짐승이 찾기 어려울 만큼 깊이, 싹이 돋아나기 쉬울 만큼 얕게, 잊어버릴 만큼 여기저기 너에게만은 독이 아니라 밥이고 싶은 너에게만은 쭉정이가 아니라 고갱이고 싶은 그리하여 네가 나를 만개케 하는 밥이 쓰다 / 정끝별 파나마 A형 독감에 걸려 먹는..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