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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복효근 시인

부흐고비 2021. 2. 19. 16:35

설행(雪行) / 복효근


분명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올라간 산정
허무만이 눈보라로 몰려 올뿐
아무 것도 없어
더 믿을게 없어
앞서 간 사람의 발자국만이 경전처럼 눈부셨습니다
몇몇의 발이 부르트고
관절이 삐꺽이고
추위에 귓불이 얼었을지라도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으므로
더 잃을 것도 없어
비로소 서로가 나침반이 되었습니다
가슴에서 가슴속으로 길을 내어주던
눈보라속에서
내 모든 그대가 이정표입니다
길입니다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 복효근

내가 꽃피는 일이/ 당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면/ 꽃은 피어 무엇하리/ 당신이 기쁨에 넘쳐/ 온누리 햇살에 둘리어 있을 때/ 나는 꽃피어 또 무엇하리/ 또한/ 내 그대를 사랑한다 함은/ 당신의 가슴 한복판에/ 찬란히 꽃피는 일이 아니라/ 눈두덩 찍어내며 그대 주저앉는/ 가을 산자락 후미진 곳에서/ 그저 수줍은 듯 잠시/ 그대 눈망울에 머무는 일/ 그렇게 나는/ 그대 슬픔의 산높이에서 핀다//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숫돌 / 복효근

숫돌을 생각한다/ 돌에게도 수컷이 있을까/ 그래, 수컷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알자면/ 숫돌에 무딘 칼을 문질러보라/ 무딘 쇠붙이를 벼리는 데는 숫돌만한 것이 없으리/ 닳아서 누워버린 날을 세우려면/ 숫돌은 먼저 쇠에 제 몸을 맡기고/ 제 몸도 함께 닳아야 하는 것인데/ 명필이/ 먹에 닳아서 뚫린 벼루의 숫자로 제 생애를 헤아리듯이/ 숫돌은/ 제가 벼린 칼날이 몇인가, 혹은 그 날이 무엇을 베었는가/ 근심하며 고뇌하며/ 닳아서 야윈 뼈에 제 생애를 새기느니/ 통장의 잔고를 헤아리다가/ 허접한 가계에 주눅 든 내 남성이 한없이 짜부러지는 때/ 생각한다/ 수컷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춘향의 노래 / 복효근

지리산은/ 지리산으로 천 년을 지리산이듯/ 도련님은 그렇게 하늘 높은 지리산입니다// 섬진강은/ 또 천 년을 가도 섬진강이듯/ 나는 땅 낮은 섬진강입니다// 그러나 또 한껏 이렇지요/ 지리산이 제 살 속에 낸 길에/ 섬진강을 안고 흐르듯/ 나는 도련님 속에 흐르는 강입니다// 섬진강이 깊어진 제 가슴에/ 지리산을 담아 거울처럼 비춰주듯/ 도련님은 내 안에 서있는 산입니다// 땅이 땅이면서 하늘인 곳/ 하늘이 하늘이면서 땅인 자리에/ 엮어가는 꿈/ 그것이 사랑이라면// 땅 낮은 섬진강 도련님과/ 하늘 높은 지리산 내가 엮는 꿈/ 우리 사랑은 단 하루도 천 년입니다.//

 

수인번호를 발목에 차고 / 복효근

대중탕에 들어서면 운명처럼/ 번호표 달린 열쇠를 받는다/ 죄인이라는 거다/ 관을 닮은 옷장을 열면/ 물음표 같은 옷걸이 하나/ 살아온 날을 묻는다/ 확인하자 벗으라 한다/ 양말을 벗고 겉옷을 벗고/ 속옷을 벗고 남김없이 벗고나면/ 입은 만큼 껍질로 쌓이는 시간/ 거울 속/ 수인번호를 발목에 차고/ 추레한 사내 하나/ 벗어야 할 껍질로 서 있다//

겐지스강에 가듯 - 대중탕에서 1. / 복효근

모두들 뉘우치러/ 예배당으로 절로 가는 일요일/ 나는 이태리타올 한 장 가지고/ 목욕탕엘 간다/ 염이라 하던가 사람이 죽으면/ 마지막 목욕을 한다지/ 씻는다는 것은 어쨌든 뉘우치는 일/ 지금은 살아서 푸른 하늘/ 그 사랑의 더함으로 덜함으로/ 나로 하여 아픈 사람 저 하늘 아래 있을라/ 마지막이듯 목욕탕엘 가자/ 햇빛 푸른 갠지스강 물에/ 인도 사람 죄를 죽이듯/ 가서 나를 죽이자//

겨울 숲 / 복효근

새들도 떠나고/ 그대가 한 그루/ 헐벗은 나무로 흔들리고 있을 때/ 나도 헐벗은 한 그루 나무로 그대 곁에 서겠다/ 아무도 이 눈보라 멈출 수 없고/ 나 또한 그대가 될 수 없어/ 대신 앓아줄 수 없는 지금/ 어쩌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눈보라를 그대와 나누어 맞는 일뿐/ 그러나 그것마저 그대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보라 그대로 하여/ 그대 쪽에서 불어오는 눈보라를 내가 견딘다/ 그리하여 언 땅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뿌리를 얽어쥐고 체온은 나누며/ 끝끝내 하늘을 우러러/ 새들을 기다리고 있을 때/ 보라 어느샌가/ 수많은 그대와 또 수많은 나를/ 사람들은 숲이라 부른다//

 

어느 대나무의 고백 / 복효근

늘 푸르다는 것 하나로/ 내게서 대쪽 같은 선비의 풍모를 읽고 가지만/ 내 몸 가득 칸칸이 들어찬 어둠 속에/ 터질 듯한 공허와 회의를 아는가// 고백컨대/ 나는 참새 한 마리의 무게로도 휘청댄다/ 흰 눈 속에서도 하늘 찌르는 기개를 운운하지만/ 바람이라도 거세게 불라치면/ 허리뼈가 뻐개지도록 휜다 흔들린다// 제 때에 이냥 베어져서/ 난세의 죽창이 되어 피 흘리거나/ 태평성대 향기로운 대피리가 되는,/ 정수리 깨치고 서늘하게 울려 퍼지는 장군죽비// 하다못해 세상의 종아리를 후려치는 회초리의 꿈마저/ 꾸지 않는 것은 아니나/ 흉흉하게 들려오는 세상의 바람소리에/ 어둠 속에서 먼저 떨었던 것이다// 아아, 고백하건대/ 그놈의 꿈들 때문에 서글픈 나는/ 생의 맨 끄트머리에나 있다고 하는 그 꽃을 위하여/ 시들지도 못하고 휘청, 흔들리며, 떨며 다만,/ 하늘 우러러 견디고 서 있는 것이다//

 

상처에 대하여 / 복효근 

오래 전 입은 누이의/ 화상은 아무래도 꽃을 닮아간다/ 젊은 날 내내 속썩어쌓더니/ 누이의 눈매에선/ 꽃향기가 난다/ 요즈음 보니/ 모든 상처는 꽃을/ 꽃의 빛깔을 닮았다/ 하다못해 상처라면/ 아이들의 여드름마저도/ 초여름 고마리꽃을 닮았다/ 오래 피가 멎지 않던/ 상처일수록 꽃향기가 괸다/ 오래 된 누이의 화상을 보니 알겠다/ 향기가 배어나는 사람의 가슴속엔/ 커다란 상처 하나 있다는 것// 잘 익은 상처에선/ 꽃향기가 난다//

 

멸치똥 / 복효근

똥이라 부르지 말자/ 그 넓은 바다에서/ 집채만한 고래와 상어와/ 때깔도 좋은 열대어들 사이에서/ 주눅들어 이리저리 눈치보며/ 똥 빠지게 피해다녔으니 똥인들 남아 있겠느냐/ 게다가 그물에 걸리어 세상 버릴 적에 똥마저 버렸을 터이니/ 못처럼 짧게 야윈 몸속에/ 박힌 이것을 똥이라 하지 말자/ 바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늘 잡아먹은 적 없이 잡아먹혀서/ 어느 목숨에 빚진 적도 없으니/ 똥이라 해서 구리겠느냐/ 국물 우려낼 땐 이것을 발라내지도 않고/ 통째로 물에 넣으면서/ 멸치도 생선이냐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적마다 까맣게 타들어갔을/ 목숨 가진 것의 배알이다/ 배알도 없는 놈이라면/ 그 똥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들어낸 자리/ 길고 가느다란 한 줄기 뼈가 있겠느냐/ 밸도 없이 배알도 없이 속도 창시도 없이/ 똥만 그득한 세상을 향하여/ 그래도 멸치는 뼈대 있는 집안이라고/ 등뼈 곧추세우며/ 누누천년 지켜온 배알이다//

 

5월의 숲 / 복효근

그러니 그대여,/ 오늘은/ 내가 저이들과 바람이 나더라도/ 바람이 나서 한 사나흘 떠돌더라도/ 저 눈빛에/ 눈도 빼앗겨 마음도 빼앗겨/ 내 생의 앞 뒤를 다 섞어버리더라도/ 용서해다오/ 세상에 지고도 돌아와 오히려 당당하게/ 누워 아늑할 수 있는 그늘이/ 이렇게 예비되어 있었나니/ 그대보다도 내보다도/ 또 그 무엇보다도/ 내 남루와/ 또한 그대와 나의 마지막 촉루를/ 가려줄 빛깔이 있다면/ 그리고 다시 이 지상에 돌아올 때/ 두르고 와야 할 빛깔이 있다면/ 저 바로 저 빛깔은 아니겠는가/ 그러니 그대여/ 오늘은/ 저이들이랑 그대와 나와랑/ 함께 바람이 나버려서/ 저이들이 길어오는 먼 나라의 강물빛 아래 누워/ 서로를 들여다 보는 눈빛에서/ 엽록소가 뚝뚝 듣게 해도 좋겠다/ 저 숲나무 빛깔로 그대로 저물어도 좋겠다//

비누에 대한 비유 / 복효근

온전히 사랑해본 적이 있는가/ 가령, 비누를/ 한사코 미끄러져 달아나는 비누를/ 붙잡아 처바르고 안고 애무해보지만/ 사랑한 것은 비누가 아니라 비누의 거품일 뿐/ 비누의 심장에 다가가 본 적 있는가/ 비누에게 무슨 심장이냐고?/ 그렇다면 비누가 그런 것처럼/ 제 살 한 점 선선히 내어준 일 있었는가/ 누구의 더러운 냄새 속으로 녹아 들어가/ 한번이라도 뜨거운 심장을 증명해 본 일 있었던가/ 고작해야/ 때얼룩 허물을 벗어 안겨주면서도/ 눈앞에 있을 때/ 참으로 간절히 참으로 간절히/ 비누에게 있는 비누의 이름을 불러준 적 있는가/ 닳아 없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불러보는 없는 이름/ 여보, 비누/ 없어 비누//

조선호박 / 복효근

잘 익은 조선호박은/ 자식 둘 기르며 허리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몸매/ 내 작은 형수 엉덩이 같아서/ 신난간난 한세월 지긋이 뭉개온 토종의 저 둥근 표정이라니/ 그속엔/ 천둥 같은 가뭄 같은 것들도 푹 삭아서 약으로 고였겠다/ 이제는 따글따글 오뉴월 뙤약볕이 한 말은 여물어서/ 은빛 붕어새끼 같은 눈물 같은 씨앗들이/ 어둠 속 환하도록 빛나겠다/ 얼마나 깊은 궁륭일까/ 잘 익은 조선호박일 수록 큰 허공 하나 키워서/ 내 형수 엉덩이 두드려 볼 수는 없어도/ 누렁호박 두드려보면 들린다/ 뿌리야 거름구덩이 속에 박혔어도/ 지리산 줄기처럼 섬진강 줄기처럼 넌출넌출/ 벋어나간 호박덩굴 궁 궁 발울림 소리들/ 봄 햇살 함께 일어서선/ 늦서리 함뿍 뒤집어쓰고야 밭언덕을 내려와/ 죽은 시아비도 늙은 시어미도 바람같은 지아비도/ 저녁 한 밥상에 둘러앉히고/ 궁시렁 구시렁 쌀 안치는 소리/ 상 차리는 소리…//

덮어준다는 것 / 복효근

달팽이 두 마리가 붙어 있다/ 빈집에서 길게 몸을 빼내어/ 한 놈이 한 놈을 덮으려 하고 있다/ 덮어주려 하고 있다/ 일생이 노숙이었으므로/ 온몸이 맨살 혹은 속살이었으므로/ 상처이었으므로 부끄럼이었으므로/ 덮어준다는 것,/ 사람으로 말하면 무슨 체위/ 저 흘레의 자세가 아름다운 것은/ 덮어준다는 그 동작 때문이 아닐까/ 맨살로 벽을 더듬는 움막 속의 나날/ 다시 돌아서면/ 벽뿐인 생애를 또 기어서 가야 하는 길이므로/ 내가 너를 네가 나를 덮어줄 수 있는/ 지금 여기가/ 지옥이더라도 신혼방이겠다/ 내 쪽의 이불을 끌어다가 자꾸/ 네 쪽의 드러난 어깨를 덮으려는 것 같은/ 몸짓, 저 육두문자를/ 사람의 언어로 번역할 수는 없겠다/ 신혼서약을 하듯 유서를 쓰듯/ 최선을 다하여/ 아침 한나절을 몇 백 년이 흘러가고 있다//

 

보리를 찾아서 / 복효근

남해금산의 보리암은/ 바닷새의 둥지처럼/ 절벽에 매달려 있었네// 그 바위 절벽이 아름답다고/ 바라다뵈는 바다가 그림 같다고 말하지 말라/ 바랑에 쌀을 짊어지고 아둥바둥 오르는/ 쭈그렁 보살님네들이 더 아름다운 곳// 길 아닌 길만 더듬어/ 언제든지 뛰어내릴 수 있는 벼랑 끝/ 혹은, 뛰어들 수 있는 바다/ 언제나 끝만을 생각하며 걸어온 나그네에게// 끝이 시작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 보리암은 절벽에 있었네/ 바닷새는 벼랑에 살고 있었네// 남해금산은/ 가만히/ 세상으로 내려가는 길 하나를 풀어주고 있네//


 

복효근 시인 

1962년 전북 남원 출생.

전북대학교 국어교육학과 졸업.

1991년「시와시학」으로 등단.

1995년「편운문학상」신인상 수상.

1997년 시와시학「젊은 시인상」수상.

1993년 시집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1996년 『버마재비 사랑』

2000년 『새에 대한 반성문』

2002년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2005년 『목련꽃 브라자』

2006년 『어느 대나무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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