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구름이 벽공에다 만물상을 초 잡는 그 하늘을 우러러보아도, 맥파만경에 굼실거리는 청청한 들판을 내려다보아도 백주의 우울을 참기 어려운 어느 날 오후였다. 나는 조그만 범선 한 척을 바다 위에 띄웠다. 붉은 돛을 달고 바다 한복판까지 와서는 노도 젓지 않고 키도 잡지 않았다. 다만 바람에 맡겨 떠내려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나는 뱃전에 턱을 괴고 앉아서 부유와 같은 인생의 운명을 생각하였다. 까닭 모르고 살아가는 내 몸에도 조만간 닥쳐올 죽음의 허무를 미리다가 탄식하였다. 서녘 하늘로부터는 비를 머금은 구름이 몰려 들어온다. 그 검은 구름장은 시름없이 떨어뜨린 내 머리 위를 덮어 누르려 한다. 배는 아산만 한가운데에 떠 있는 '가치내'라는 조그만 섬에 와 닿았다. 멀리서 보면 송아지가 누운 것만 한 ..
벌써부터 신문에는 봄「春」자가 푸뜩푸뜩 눈이 뜨인다. 꽃송이기 통통히 불어오른 온실 화초의 사진까지 박아내서 아직도 겨울 속에 칩거해 있는 인간들에게 인공적으로 봄의 의식(意識)을 주사하려 한다. 노염(老炎)이 찌는 듯한 2학기 초의 작문 시간인데 새까만 칠판에 백묵으로 커다랗게 쓰인「秋」자를 바라다보니 그제야 비로소 가을이 온 듯 싶더라는 말을 내 질녀에게 들은 법한데 오늘 아침은 “어제 오늘 서울은 완연한 봄이외다”라고 쓴 편지의 서두를 보고서야 창밖을 유심히 내어다보았다. 먼 산을 바라다보고 앞 바다를 내려다보나 아직도 이 시골에는 봄이 기어든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산봉우리는 백설을 인 채로 눈이 부시고 아산만은 장근(將近) 두 달 동안이나 얼어붙어 발동선의 왕래조차 끊겼다. 그러다가 요새야 조금..
우리 집과 등성이 하나를 격한 야학당에서 종 치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 집 편으로 바람이 불어오는 저녁에는 아이들이 떼를 지어 모여 가는 소리와, 아홉시 반이면 파해서 흩어져가며 재깔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틀에 한 번쯤은 보던 책이나 들었던 붓을 던지고 야학당으로 가서 둘러보고 오는데 금년에는 토담으로 쌓은 것이나마 새로 지은 야학당에 남녀 아동들이 80명이나 들어와서 세 반에 나누어 가르친다. 물론 오리 밖에 있는 보통학교에도 입학하지 못하는 극빈자의 자녀들인데 선생들도 또한 보교(普校)를 졸업한 정도의 청년들로, 밤에 가마때기라도 치지 않으면 잔돈푼 구경도 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네들은 시간과 집안 살림을 희생하고 하루 저녁도 빠지지 않고 와서는 교편을 잡고 아이들과 저녁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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