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담계곡을 내려오며 / 윤제림 1. 꼬리를 치며 따라붙는 여자 너 잘 걸렸다, 불알 밑에 힘을 돋우며 손목도 잡아보고, 쓸어안아도 가만있는 여자. 입에는 샛하얀 거품을 물고 쉴새없이 재깔이며 눈웃음도 치며 속치마도 잠깐 잠깐 내보이며 산길 이십 리를 같이 걸어내려온 여자. 2. 인간의 여자라면 마을길 이십 리쯤 더 내려왔을 텐데요. 그 여자는 한 걸음도 더는 따라오지 않습니다요, 못된 년, 망할 년 욕이나 다 나왔지만요. 내 탓이지요 뭐. 그녀의 말은 한 마디도 못 알아들었으니까요. 말도 안 통하는 사내 따라 나설 계집이 어디 있겠어요. 말귀만 좀 통했으면 집에까지 데려올 수도 있었을 텐데요. 외할머니 / 윤제림 - 박경리 선생의 사진을 보며 세상 모든 외할머니의 얼굴을 한 할머니 한 분이, 치악산 가을..
안씨의 공부 / 윤제림 己亥生 안씨 할머니가 이제 와서 한글을 깨쳐 보겠다고 검정고시학원에 딸린 한글반 학생이 된 까닭은 전주 가는 버스를 탔는데 진주에 부려지고 싶지 않아서다. 아니, 어느 날 저승에 가서도 그럴까 더럭 겁이 나서다. 거기선 글자 하나 잘못 읽으면 영판 엉뚱한 세상으로 간다지 않는가. 길 한 번 잘못 들면 한 칠만팔천 리쯤 엇나가서, 고쳐 잡자면 이천삼백 년쯤 걸린다지 않는가. 한글공부가 쉬이 끝나면, 한자도 조금 익혀 볼 생각이다. 그 나라 공문서는 아무래도 한자가 많이 섞여 있을 것 같아서다. [해설] 할머니 걱정 마세요. 전주에 가려다 진주에 부려지는 일 없으실 거예요. 물론 상주에 가려다 성주에 부려져서도 안 되겠지요. 더구나 저승 가서도 잘못 부려진다면 큰일이지요. 그러나 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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