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시詩 느낌

윤제림 시인

부흐고비 2021. 2. 5. 11:00

백담계곡을 내려오며 / 윤제림

 

1.

 

꼬리를 치며 따라붙는 여자

너 잘 걸렸다, 불알 밑에 힘을 돋우며

손목도 잡아보고, 쓸어안아도

가만있는 여자.

입에는 샛하얀 거품을 물고 쉴새없이 재깔이며

눈웃음도 치며

속치마도 잠깐 잠깐 내보이며

산길 이십 리를 같이 걸어내려온 여자.

 

2.

 

인간의 여자라면 마을길 이십 리쯤 더 내려왔을 텐데요.

그 여자는 한 걸음도 더는 따라오지 않습니다요, 못된 년, 망할 년 욕이나 다 나왔지만요. 내 탓이지요 뭐. 그녀의 말은 한 마디도 못 알아들었으니까요. 말도 안 통하는 사내 따라 나설 계집이 어디 있겠어요. 말귀만 좀 통했으면 집에까지 데려올 수도 있었을 텐데요.

 

 

 

외할머니 / 윤제림

- 박경리 선생의 사진을 보며

 

세상 모든 외할머니의 얼굴을 한

할머니 한 분이, 치악산 가을볕 아래

고추를 고르고 앉으셨네.

세상 모든 외손주들의 고추를

주무르듯이.

 

원보네 외할머니 저 뜨듯한 손에

가버린 내 일곱 살의 고추도 한번

잡히고 싶어라.

 

 

 

화가 장씨가 그림을 그릴 때 / 윤제림

 

참새랑 까치는

자기네는 안 그리는 줄 알고

그냥 가려는 중이고,

앞뜰의 동그란 나무와

머리끝이 뾰족한 나무는

짐짓 바른 자세로 섰는데,

알자지 어린아이와 말라깽이 강아지는

뭐하는 할배인가,

빤히 올려다보네.

 

※ 장씨 : 장욱진(화가)을 일컬음

 

 

 

아름다움에 대하여 / 윤제림

내 심장을 꿰뚫을 수도 있었을, 화살 하나가/ 종잇장 하나를 매달고 장대(將臺) 기둥에 날아와 꽂혔다/ 적장의 편지였다/ 역관(譯官)을 불러 읽어보라 했다// 수레바퀴만한 달이 성곽을 타고 넘어가는 봄밤이오/ 오늘도 나는 변복을 하고, 동서남북을 두루 살피고/ 돌아와 이제 막 저녁을 먹었다오// 망루며 포대며 당최 치고 때릴 데가 없더이다/ 나는 이 아름다운 성에 이미 무릎을 꿇었소// 날 밝으면, 성문 앞 팽나무 그늘에서/ 바둑이나 한 판 둡시다, 우리/ 내가 지면 조용히 물러가리다// 혹여, 내가 그대를 이긴다면/ 어찌하면 이렇게 아름다운/ 성을 쌓을 수 있는지,/ 기술이나 두어 가지 일러주지 않겠소?//

 

 

동백꽃 / 윤제림

협상은 또 결렬된 모양이다/ 오늘도 북소리에, 일제히 투신.// 동백꽃은 파업이 너무 길다.//

 

 

/ 윤제림

꽃 피울려고 온몸에 힘을 쓰는 벚나무들, 작전도로 신작로 길로 살 하나 툭 불거진 양산을 쓰고 손으로 짰지 싶은 헐렁한 스웨터를 입고, 곰인형 가방을 멘 계집애 손에 붙들고 아낙 하나가 길을 간다. 멀리 군인트럭 하나 달려오는 걸 보고, 흙먼지 피해 일찍 피어난 개나리꽃 뒤에 가 숨는다. 흠칫 속도를 죽이는 트럭, 슬슬 비켜 가는 짐칸 호로 속에서 병사 하나 목을 빼고 외치듯이 묻는다. "아지매요, 알라 뱄지요?" 한 손으로 부른 배를 안고,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아낙이 수줍게 웃는다. 금방이라도 꽃이 피어날 것 같은 길이다.//

 

 

매미 / 윤제림

내가 죽었다는데, 매미가 제일 오래 울었다// 귀신도 못되고, 그냥 허깨비로/ 구름장에 걸터앉아/ 내려다보니/ 매미만 쉬지 않고 울었다// 대체 누굴까,/ 내가 죽었다는데 매미 홀로 울었다,/ 저도 따라 죽는다고 울었다//

 

 

어떤 신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의견 / 윤제림

종이로 만든 관()이 나온다지요. 반갑고 고마운 일입니다. 죽은 친구를 들고 산으로 올라가봐서 아는데요, 목관은 생각보다 무겁더군요. 값을 물어봐서 아는데요, 보기보다 비싸더군요. 종이로 만들면 가벼워서 좋을 것입니다. 가난한 상주들에게 좋을 것입니다.// 걱정스러운 것은 지질(紙質)인데요. 제발, 종이컵이나 라면용기의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주세요. 태우면 곱게곱게 하늘로 오르고, 묻으면 고분고분 흙이 되게요. 물에 지면 꽃잎 같고, 바람에 날리면 눈송이 같게요. 적어도 이 '사람의 그릇'만은 일회용품 규제 대상에 포함되지 않게요.//

 

 

버드나무 아래 / 운제림

대형트럭 하나가 뙤약볕 아래 꼼짝 않고 서있다. 고단한 모양이다. 그 옆에 늙은 버드나무도 이파리 하나 흔들리지 않는다. 그늘 아래 웃통을 벗고 사내가 네 활개를 벗고 잠들어 있다. 아니 늘어져 있다. 언뜻보면 죽은 것 같다. 우리 할머니가 보셨으면 가서 흔들어 보라고 하셨을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그늘뿐이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 윤제림

손이 어는지 터지는지 세상 모르고 함께 놀다가 이를테면, 고누놀이나 딱지치기를 하며 놀다가 "저녁 먹어라" 부르는 소리에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 달아나던 친구의 뒷모습이 보였습니다. 상복을 입고 혼자 서 있는 사내아이한테서.//

누런 변기 위 '상복 대여' 따위 스티커 너저분한 화장실 타일 벽에 "똥 누고 올게" 하고 제집 뒷간으로 내빼더니 영 소식이 없던 날의 고누판이 어른거렸습니다.//

"짜식, 정말 치사한 놈이네!" 영안실 뒷마당 높다란 옹벽을 때리며 날아와 떨어지는 낙엽들이 친구가 던져 두고 간 딱지장처럼 내 발등을 덮고 있었습니다. "이 딱지, 너 다 가져!" 하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가정식 백반 / 윤제림

아침 됩니다 한밭식당/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는,/ 낮 검은 사내들,/ 모자를 벗으니/ 머리에서 김이 난다/ 구두를 벗으니/ 발에서 김이 난다// 아버지 한 사람이/ 부엌 쪽에 대고 소리친다/ 밥 좀 많이 퍼요.//

 

 

안씨의 공부 / 윤제림

 

 


 

윤제림 시인은 1959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성장했다.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

1987문예중앙뿌리 깊은 별들을 위하여9편이 당선되어 등단

1988년 시집삼천리호 자전거문학동네

1990미미의 집중앙일보사

1994황천반점민음사

2001사랑을 놓치다문학동네

2008그는 걸어서 온다문학동네

21세기 전망 동인

 

 

 

[윤제림의 행인일기] 올해 노벨문학상은 개인상이 아니다 

 

'예브게니 예프투센코(Yevgeny Yevtushenko)'의 시낭송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옛 소련의 대표적 반체제 시인인 그가, 1988년 국제 펜클럽 초청으로 우리나라에 왔을 때였지요. 서소문 어느 아트홀에서 그의 낭송회가 열렸습니다. 저는 제일 앞줄에서 그 유명한 시인을 보았습니다.

지금도 그의 몸짓과 목소리가 선명히 떠오릅니다. 그는 마치 한 사람의 배우나 가수처럼 보였습니다. 소품이나 배경음악이 있는 것도 아닌데, 시는 노래처럼 리드미컬했고 동작은 흥미로웠습니다. 모노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혼자서 그 큰 무대를 다 쓰더군요. 미끄러지듯 걷다가 우뚝 섰다가 춤을 추듯이 흐느적거리기도 했습니다. 그의 몸은 그의 시가 시키는 대로 다양한 동선(動線)을 그렸습니다. 표정도 자주 바뀌었고 제스처도 다양했습니다.

몇 가지 시 제목은 우리말로 읽기도 했지요. '나의 소망'을 '나의 사망'으로 발음하는 바람에 폭소가 터지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시를 읽고 있는 예프투센코의 육성은 강물처럼 출렁거렸고, 음률은 바람처럼 자유로웠습니다.

 인류여, 나는 그대의 모든 바리케이드에서/싸우고 싶다./매일 밤 지친
 달이 되어 죽고/ 매일 아침 새로 태어난 태양이 되어/부활하고 싶다.

순간, 시인의 몸도 가수의 그것처럼 하나의 악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야성적 사유와 감각적 기교로 생명의 원천을 즐겨 노래한 시인 '딜런 토마스(Dylan Thomas)'가 함께 떠올랐지요. 시인 김종길 선생께 들은 이야기도 생각났습니다. 당신이 딜런 토마스의 시낭송을 직접 들어본 적이 있는데, 폭포수 옆에 서있는 것처럼 느껴지더라는 증언.

오늘 아침엔 거기에 노벨문학상을 받게 된 가수 '밥 딜런(Bob Dylan)' 생각을 포개어 봅니다. 단언컨대, 밥 딜런은 시를 연주하는 '악기'입니다. '딜런 토마스'가 되고 싶었던 악기입니다. 밥 딜런은 애초에 자신의 정체성을 시인에 두었지요. 그렇기에 저는 그를 시인이라 부르는데 주저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시인은 제 몸 하나가 온전한 일터입니다. 직장이지요. 자신이 고용주이며 스스로가 근로자입니다. 저 혼자 갑도 되고 을도 됩니다. 지은이면서 최초의 독자입니다.

비판자이면서 옹호자입니다. 포착되지 않은 장면의 발견자입니다. 보고되지 않은 사건의 기록자입니다. 적발되지 않은 상황의 고발자입니다.

외롭고 고단하지만 뜨거운 삶입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온몸으로 밀고 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일과 성취 중에서 가장 뾰족한 끝자리에 오른 것들을 우리는 시라고 부릅니다. 이를테면 '춤의 시', '모래의 시', '빙판의 시'..... 시인도 그만큼 많습니다. '링 위의 시인'도 있고, '건반 위의 시인'도 있습니다.

밥 딜런은 기타를 들고 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데까지 올라갔습니다. '천국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피뢰침도 없는 첨탑 끝에 위태롭게 서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어느 일본영화('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 속 대사처럼 '신의 목소리(神樣の聲)'를 들려주었습니다. '답은 바람이 알고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그를 천재 시인 '랭보'와 '예푸트센코'에 비유하기도 했지요. 저는 밥 딜런의 노벨상 수상 소식을, 한 가수가 지향해온 궁극적 가치가 시인의 꿈과 동류항(同類項)임을 인정받은 일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스웨덴 한림원이 문학의 만국공원에 세운 하나의 기념비(記念碑) 쯤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지구대가족의 꿈과 우주의 평화를 모토로 수천 년을 이어온 문학의 포용력과 위엄을 만천하에 보여주려는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카메라가 펜이나 연필을 대신하고, 인공지능이 모든 창작을 해보겠다고 덤비는 오늘, 문학의 정신을 다시금 환기(喚起)시키려는 의도로 읽어도 좋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아직 글로 옮겨지지 않았을 뿐, 그 자체가 문학적 서사이며 시적 텍스트인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있지 않을 뿐, 저마다의 언어로 시적 성취를 이룬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바로 그런 이유에서 저는, 이번 노벨문학상은 펜 이외의 도구로 시를 쓰는 시인들에게 주어지는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류에 나누고 세상에 보태온 바가 문학의 그것에 필적하는 사람들을 시인으로 호명(呼名)한 것이지요. 위대한 가수 '루이 암스트롱'의 죽음에 바쳐진 예푸트센코의 조시(弔詩)가 그런 짐작을 가능하게 합니다. '암스트롱의 트럼펫'이라는 시의 끝 대목 말입니다.

 서로 하는 일은 다르지만/ 시인(the poet)과 재즈가수(the great jazzman)
 는 같은 형제/그들은 같은 것을 세상에 주기 때문에

출처: 아시아경제, 2020.2.11.

'시詩 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만환 시인  (0) 2021.02.05
손세실리아 시인  (0) 2021.02.05
서정주 시인  (0) 2021.02.05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 칼릴 지브란  (0) 2021.01.26
우리가 오르는 언덕 / 아만다 고만  (0) 2021.01.22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