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길 /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낮은 곳을 향하여 / 정호승 첫눈은 가장 낮은 곳을 향하여 내린다/ 명동성당 높은 종탑 위에 먼저 내리지 않고/ 성당 입구 계단 아래 구걸의 낡은 바구니를 놓고 엎드린/ 걸인의 어깨 위에 먼저 내린다// 봄눈은 가장 낮은 곳을 향하여 내린다/ 설악산 봉정암 진신가리탑 위에 먼저 내리지 않고/ 사리탑 아래 무릎 꿇고 기도하는/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어머니의 늙은 두..

성철 스님이 지내시던 해인사 백련암 손님방에서 하룻밤 잔 적이 있다. 스님이 입적하시기 10여 년 전 일이다. 당시 잡지사 기자로 일하던 나는 스님께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허락하시지 않았다. 그 대신 서면 질문을 하면 서면으로 답변해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날 밤 나는 무슨 질문을 할까 곰곰 생각하면서 가야산 백련암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하안거 해제 전날인 백련암의 여름밤은 깊고 고요했다. 밤하늘엔 보름달이 두둥실 떠올라 있었고 어둠 속에서 들리는 풀벌레 울음도 깊고 청명했다. 큰스님이 가까이 계시는 데서 밤을 맞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가슴은 보름달처럼 차올랐다. 물론 잠은 오지 않았다. 어느새 시간이 지나 해인사의 새벽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벌떡 일어나 스님 주무시는 방을 바라보았다. 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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