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시詩 느낌

정호승 시인

부흐고비 2021. 2. 9. 17:03

 

봄길 /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낮은 곳을 향하여 / 정호승

첫눈은 가장 낮은 곳을 향하여 내린다/ 명동성당 높은 종탑 위에 먼저 내리지 않고/ 성당 입구 계단 아래 구걸의 낡은 바구니를 놓고 엎드린/ 걸인의 어깨 위에 먼저 내린다// 봄눈은 가장 낮은 곳을 향하여 내린다/ 설악산 봉정암 진신가리탑 위에 먼저 내리지 않고/ 사리탑 아래 무릎 꿇고 기도하는/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어머니의 늙은 두 손 위에 먼저 내린다// 강물이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가야 바다가 되듯/ 나도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가야 인간이 되는데/ 나의 가장 낮은 곳은 어디인가/ 가장 낮은 곳에서도 가장 낮아진 당신은 누구인가// 오늘도 태백을 떠나 멀리 낙동강을 따라 흘러가도/ 나의 가장 낮은 곳에 다다르지 못하고/ 가장 낮은 곳에서도 가장 낮아진 당신을 따라가지 못하고/ 나는 아직 인간이 되지 못한다//

 

햇살에게 / 정호승

이른아침에/ 먼지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먼지가 된 나를/ 하루 종일/ 찬란하게 비춰주셔서 감사합니다//

 

겨울 강에서 / 정호승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리/ 겨울 강 강언덕에 눈보라 몰아쳐도/ 눈보라에 내 몸이 으스스 쓰러져도/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리/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강물은 흘러가 흐느끼지 않아도/ 끝끝내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어/ 쓰러지면 일어서는 갈대가 되어/ 청산이 소리치면 소리쳐 울리//

 

또 기다리는 편지 / 정호승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 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폭풍 / 정호승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일은 옳지 않다.// 폭풍을 두려워하며/ 폭풍을 바라보는 일은 더욱 옳지 않다.// 스스로 폭풍이 되어/ 머리를 풀고 하늘을 뒤흔드는/ 저 한 그루 나무를 보라.// 스스로 폭풍이 되어/ 폭풍 속을 나는/ 저 한 마리 새를 보라.// 은사시나뭇잎 사이로/ 폭풍이 휘몰아치는 밤이 깊어 갈지라도//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일은 옳지 않다.// 폭풍이 지나간 들녘에 핀/ 한 송이 꽃이 되기를/ 기다리는 일은 더욱 옳지 않다.//

 

무릎 / 정호승 

너도 무릎을 꿇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이 되었느냐/ 너도 무릎을 끓어야만/ 걸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데에/ 평생이 걸렸느냐/ 차디찬 바닥에/ 스스로 무릎을 꿇었을 때가 일어설 때이다/ 무릎을 꿇고/ 먼 산을 바라볼 때가 길 떠날 때이다/ 낙타도 먼길을 가기 위해서는/ 먼저 무릎을 꿇고 사막을 바라본다/ 낙타도 사막의 길을 가다가/ 밤이 깊으면/ 먼저 무릎을 꿇고/ 찬란한 별들을 바라본다//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거라도 / 정호승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낙엽이 떨어질 때를 아는 사람을 사랑하라/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낙엽이 왜 낮은 데로 떨어지는지를 아는 사람을 사랑하라/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한 잎 낙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 시월의 붉은 달이 지고/ 창밖에 따스한 불빛이 그리운 날/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한 잎 낙엽으로 떨어져 썩을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 한 잎 낙엽으로 썩어/ 다시 봄을 기다리는 사람을 사랑하라//

 

 

          우리가 어느 별에서 / 정호승

우리가 어느 별에서 만났기에/ 이토록 서로 그리워 하느냐/ 우리 어느 별에서 그리워하였기에/ 이토록 서로 사랑하고 있느냐/ 사랑이 가난한 사람들이/ 등불을 들고 거리에 나가/ 풀은 시들고 꽃은 지는데/ 우리가 어느 별에서 헤어졌기에/ 이토록 서로 별빛마다 빛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잠들었기에/ 이토록 새벽을 흔들어 깨우느냐/ 해 뜨기 전에/ 가장 추워하는 그대를 위하여/ 저문 바닷가에 홀로/ 사람의 모닥불을 피우는 그대를 위하여/ 나는 오늘밤 어느 별에서/ 떠나기 위하여 머물고 있느냐/ 어느별의 새벽길을 걷기 위하여/ 마음의 칼날 아래 떨고 있느냐//

 

바닥에 대하여 / 정호승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바닥을 딛고/ 굳세게 일어선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고/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의 바닥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은 없다고/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밥값 / 정호승

어머니/ 아무래도 제가 지옥에 한번 다녀오겠습니다/ 아무리 멀어도/ 아침에 출근하듯이 갔다가/ 저녁에 퇴근하듯이 다녀오겠습니다/ 식사 거르지 마시고 꼭꼭 씹어서 잡수시고/ 외출하실 때는 가스불 꼭 잠그시고/ 너무 염려하지는 마세요/ 지옥도 사람 사는 곳이겠지요/ 지금이라도 밥값을 하러 지옥에 가면/ 비로소 제가 인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슬픔이 기쁨에게 /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 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떄/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는/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허허바다 / 정호승

찾아가 보니 찾아온 곳 없네/ 돌아와 보니 돌아온 곳 없네/ 다시 떠나가 보니 떠나온 곳 없네/ 살아도 산 것이 없고/ 죽어도 죽은 것이 없네/ 해미가 깔린 새벽녘/ 태풍이 지나간 / 허허바다에/ 겨자씨 한 알 떠 있네//

* 장사익의 노래 : 허허바다

 

정동진 / 정호승

밤을 다하여, 우리가 태백을 넘어온, 까닭은 무엇인가/ 밤을 다하여, 우리가 새벽에 닿은, 까닭은 무엇인가/ 수평선 너머로, 우리가 타고 온, 기차를 떠나보내고/ 우리는, 각자 가슴을 맞대고, 새벽 바다를 바라본다./ 해가 떠오른다./ 해는, 바다 위로 막 떠오르는 순간에는, 바라볼 수 있어도/ 성큼 떠오르고 나면, 눈부셔 바라볼 수가 없다./ 그렇다./ 우리가, 누가 누구의 해가 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서로의 햇살이 될 수 있을 뿐/ 우리는 다만, 서로의 파도가 될 수 있을 뿐/ 누가 누구의 바다가 될 수 있겠는가?/ 바다에 빠진 기차가 다시 일어나, 해안선과 나란히 달린다./ 우리가 지금, 다정하게 철길 옆 해변 가로, 팔짱을 끼고 걷는다 해도/ 언제까지 함께 팔짱을 끼고, 걸을 수 있겠는가?/ 동해를 향해 서 있는, 저 소나무를 보라/ 바다에, 한쪽 어깨를 지친 듯이 내어준, 저 소나무의 마음을 보라/ 네가 한때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기대였던 내 어깨처럼,/ 편안하지 않은가/ 또다시 해변을 따라, 길게 뻗어나간 저~ 철길을 보라/ 기차가 밤을 다하여, 평생을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서로, 평행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 굳이 하나 되기 위하여, 노력하기보다/ 평행을 이루어, 우리의 기차를 달리게 해야 한다./ 기차를 떠나보내고, 정 동진은 늘 혼자 남는다./ 우리를 떠나보내고, 정 동진은 울지 않는다./ 수평선 너머로, 손수건을 흔드는 정 동진은, 붉은 새벽 바다/ 어여뻐 라, 너는 어느새 파도에 젖은, 햇살이 되어 있구나./ 오늘은, 착한 갈매기 한 마리가, 너를 사랑하기를...//

 

가시 / 정호승

지은 죄가 많아 흠뻑 비를 맞고 봉은사에 갔더니/ 내 몸에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 손등에는 채송화가 무릎에는 제비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더니/ 야윈 내 젖가슴에는 장미가 피어나/ 뚝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에/ 가시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토록 가시 많은 나무에/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고 생각하라고// 장미는 꽃에서 향기가 나는 것이 아니라/ 가시에서 향기가 나는 것이라고/ 가장 날카로운 가시에서/ 가장 멀리 가는 향기가 난다고/ 장미는 시들지도 않고 자꾸자꾸 피어나// 나는 봉은사 대웅전 처마 밑에 앉아/ 평생토록 내 가슴에 피눈물을 흘리게 한/ 가시를 힘껏 뽑아내려고 하다가/ 슬며시 그만두었다//

 

가방 / 정호승

나를 가방 속에 구겨 넣고 출근할 때가 있다/ 휴지처럼 나를 구겨 넣은 가방을 들고 지하철을 탈 때가 있다/ 잠시 지하철 선반에 올려졌다가 신문과 함께 바닥에 툭 떨어질 때가 있다/ 지하철 문틈에 끼여 컥 숨이 막힐 때가 있다/ 그래도 가방 속에 구겨져 있으면 인간이 되지 않아서 좋다/ 무엇보다도 돈을 벌지 않으면 안되는 남편이 되지 않아서 좋다/ 아내를 따라 성당에 나가 십자가를 바라보며 거짓 기도를 하지 않아서 좋다/ 나는 가방이므로 더이상 대출상환금을 갚지 않아서 좋다/ 친구에게 배반당하지도 용서하지도 용서받지도 않아서 좋다/ 언젠가 출장길에 부안 내소사 요사채 툇마루에 놓여 있다가/ 봄햇살에 깜빡 잠이 들어 잠 속에서도 새소리를 들었을 때/ 한강대교 아래로 휙 내던져져 물속 깊이깊이 가라앉아 있다가/ 고요히 나를 찾아온 물고기들과 뜨겁게 키스를 나누었을 때/ 나는 그 얼마나 행복했던가/ 나를 가방 속에 코 푼 휴지처럼 구겨넣고 퇴근할 때도 있다/ 회식이 있는 날은 술 취해 나를 잃어버릴까봐 미리 가방 속에 구겨넣는다/ 그런 날은 아내는 어디 가고 아들도 보이지 않고/ 노모만 밤늦도록 빈방에 늙은 텔레비전처럼 쭈그리고 있다가/ 가방이 와 이래 무겁노 하시면서 나를 받아주신다//

 

하늘의 그물 / 정호승

하늘의 그물은 성글지만/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다만 가을밤에 보름달 뜨면/ 어린 새끼들 데리고 기러기들만/ 하나 둘 떼지어 빠져나갑니다//

 

별들은 따뜻하다 / 정호승

하늘에는 눈이 있다/ 두려워할 것은 없다/ 캄캄한 겨울/ 눈 내린 보리밭 길을 걸어가다가/ 새벽이 지나지 않고 밤이 올 때/ 내 가난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나에게/ 진리의 때는 이미 늦었으나/ 내가 용서라고 부르던 것들은/ 모든 거짓이었으나/ 북풍이 지나간 새벽 거리를 걸으며/ 새벽이 지나지 않고 또 밤이 올 때/ 내 죽음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수선화에게 /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 양희은 :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서울의 예수 / 정호승

1./ 예수가 낚시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있다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예수가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2./ 술 취한 저녁 지평선 너머로 예수의 긴 그림자가 넘어간다/ 인생의 찬밥 한 그릇 얻어먹은 예수의 등 뒤로 재빨리 초승달/ 하나 떠 오른다 고통 속에 넘치는 평화, 눈물 속에 그리운 자유가/ 있었을까 서울의 빵과 사랑과, 서울의 빵과 눈물을 생각하며/ 예수가 홀로 담배를 피운다 사랑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람을 보며,/ 사람들이 모래를 씹으며 잠드는 밤 낙엽들을 떠나기 위하여/ 서울에 잠시 머물고, 예수는 절망의 끝으로 걸어간다//

3./ 목이 마르다 서울이 잠들기 전에 인간의 꿈이 먼저 잠들어/ 목이 마르다 등불을 들고 걷는 자는 어디 있느냐 서울의 등길은/ 보이지 않고, 밤마다 잿더미에 주저 앉아서 겉옷만 찢으며 우는 자여/ 총소리가 들리고 눈이 내리더니, 사랑과 믿음의 깊이 사이로 첫눈이/ 내리더니, 서울에서 잡힌 돌 하나, 그 어디 던질 데가 없도다/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운 그대들은 나와 함께 술잔을 들라/ 눈 내리는 서울의 밤하늘 어디에도 내 잠시 머리 둘곳이 없나니,/ 그대들은 나와 함께 술잔을 들고 어둠속으로 이 세상 칼끝을/ 피해 가다가, 가슴으로 칼끝에 쓰러진 그대들은 눈 그친 서울밤의/ 눈길을 걸어가라 아직 악인의 등불은 꺼지지 않고, 서울의 새벽에/ 귀를 기울이는 고요한 인간의 귀는 풀잎에 젖어 목이 마르다/ 인간이 잠들기 전에 서울의 꿈이 먼저 잠이 들어 아, 목이 마르다//

4./ 사람의 잔을 마시고 싶다 추억이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 소주잔을/ 나누며 눈물의 빈대떡을 나눠 먹고 싶다 꽃잎 하나 칼처럼 떨어지는/ 봄날에 풀잎을 스치는 사람의 옷자락 소리를 들으며, 마음의 나라보다/ 사람의 나라에 살고 싶다 새벽마다 사람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서울의 등잔에 홀로 불을 켜고 가난한 사람의 창에 기대어 서울의/ 그리움을 그리워하고 싶다//

5./ 나를 섬기는 자는 슬프고, 나를 슬퍼하는 자는 슬프다/ 나를 위하여 기뻐하는 자는 슬프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는/ 더욱 슬프다 나는 내 이웃을 위하여 괴로워하지 않았고,/ 가난한 자의 별들을 바라보지 않았나니, 내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자들은 불행하고, 내 이름을 간절히 사랑하는 자들은 더욱 불행하다//

 

아버지의 나이 / 정호승

나는 이제 나무에 기댈 줄 알게 되었다/ 나무에 기대어 흐느껴 울 줄 알게 되었다/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가/ 나무의 그림자가 될 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왜 나무 그늘을 찾아/ 지게를 내려놓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강물을 따라 흐를 줄도 알게 되었다/ 강물을 따라 흘러가다가/ 절벽을 휘감아돌 때가/ 가장 찬란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해질 무렵/ 아버지가 왜 강가에 지게를 내려놓고/ 종아리를 씻고 돌아와/ 내 이름을 한번씩 불러보셨는지도 알게 되었다//

 

/ 정호승

벽에 박아두었던 못을 뺀다/ 벽을 빠져나오면서 못이 구부러진다/ 구부러진 못을 그대로 둔다/ 구부러진 못을 망치로 억지로 펴서/ 다시 쾅쾅 벽에 못질하던 때가 있었으나/ 구부러진 못의 병들고 녹슨 가슴을/ 애써 헝겊으로 닦아놓는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늙은 아버지/ 공중목욕탕으로 모시고 가서/ 때밀이용 침상 위에 눕혀놓는다/ 구부러진 못이다 아버지도/ 때밀이 청년이 벌거벗은 아버지를 펴려고 해도/ 더이상 펴지지 않는다/ 아버지도 한때 벽에 박혀 녹이 슬도록/ 모든 무게를 견뎌냈으나/ 벽을 빠져나오면서 그만/ 구부러진 못이 되었다//

 

술 한잔 / 정호승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꽃 소리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거미줄 / 정호승

산 입에 거미줄을 쳐도/ 거미줄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거미줄에 걸린 아침 이슬이/ 햇살에 맑게 빛날 때다/ 송이송이 소나기가 매달려 있을 때다// 산 입에 거미줄을 쳐도/ 거미줄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진실은 알지만 기다리고 있을 때다/ 진실에도 기다림이 필요하다고/ 진실은 기다림을 필요로 한다고/ 조용히 조용히 말하고 있을 때다//

 

선암사 / 정호승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 정호승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꽃잎에도 상처가 있다/ 너와 함께 걸었던 들길을 걸으면/ 들길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보면/ 상처 많은 풀잎들이 손을 흔든다/ 상처 많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

 

이사 / 정호승

낡은 재건축 아파트 철거작업이 끝나자/ 마지막으로 나무들이 철거되기 시작한다/ 아직 봄은 오지 않았는데/ 뿌리를 꼭 껴안고 있던 흙을 새끼줄로 동여매고/ 하늘을 우러러보던 나뭇가지를 땅바닥에 질질 끌고/ 이삿짐 트럭에 실려가는 힘없는 나무 뒤를/ 까치들이 따라간다/ 울지도 않고/ 아슬아슬 아직 까치집이 그대로 남아 있는 나무 뒤를/ 울지도 않고//

 

연꽃 구경/ 정호승

연꽃이 피면/ 달도 별도 새도 연꽃 구경을 왔다가/ 그만 자기들도 연꽃이 되어/ 활짝 피어나는데/ 유독 연꽃 구경을 온 사람들만이/ 연꽃이 되지 못하고/ 비빔밥을 먹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받아야 할 돈 생각을 한다/ 연꽃처럼 살아보자고/ 아무리 사는 게 더럽더라도/ 연꽃 같은 마음으로 살아보자고/ 죽고 사는 게 연꽃 같은 것이라고/ 해마다 벼르고 별러/ 부지런히 연꽃 구경을 온 사람들인데도/ 끝내 연꽃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연꽃들이 사람 구경을 한다/ 해가 질 때쯤이면/ 연꽃들이 오히려/ 사람이 되어보기도 한다/ 가장 더러운 사람이 되어보기도 한다//

 

막다른 골목/ 정호승

막다른 골목에서 울다가/ 돌아 나온 사람들은 모르지/ 그곳이 막다른 골목이 아니었음을// 막다른 골목에서 주저앉아 울다가/ 결국 막다른 골목이 된 사람들도 모르지/ 당신이야말로 막다른 골목이 아니었음을// 막다른 골목에서 결국 쓰러진 사람들도 모르지/ 낙타가 쓰러지는 건 깃털같이 가벼운/ 마지막 짐 하나 때문이라는 것을// 막다른 골목에 핀 민들레는 알지/ 사막이 쓰러지는 것도 결국은/ 한마리 쓰러진 낙타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 정호승

나는 희망이 없는 희망을 거절한다/ 희망에는 희망이 없다/ 희망은 기쁨보다 분노에 가깝다/ 나는 절망을 통하여 희망을 가졌을 뿐/ 희망을 통하여 희망을 가져본 적이 없다// 나는 절망이 없는 희망을 거절한다/ 희망은 절망이 있기 때문에 희망이다/ 희망만 있는 희망은 희망이 없다/ 희망은 희망의 손을 먼저 잡는 것보다/ 절망의 손을 먼저 잡는 것이 중요하다// 희망에는 절망이 있다/ 나는 희망의 절망을 먼저 원한다./ 희망의 절망이 절망이 될 때보다/ 희망의 절망이 희망이 될 때/ 당신을 사랑한다.//

 

여행 / 정호승

사람이 여행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다/ 아직도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오지뿐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떠나라/ 떠나서 돌아오지 마라/ 설산의 창공을 나는 독수리들이/ 유유히 나의 심장을 쪼아 먹을 때까지/ 쪼아 먹힌 나의 심장이 먼지가 되어/ 바람에 흩날릴 때까지/ 돌아오지 마라/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람의 마음의 설산뿐이다//

 

개에게 인생을 이야기하다 / 정호승

젊을 때는 산을 바라보고 나이가 들면 사막을 바라보라/ 더이상 슬픈 눈으로 과거를 바라보지 말고/ 과거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웃으면서 걸어가라/ 인생은 언제 어느 순간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오늘을 어머니를 땅에 묻은 날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첫아기에게 첫젖을 물린 날이라고 생각하라/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분노하지 말고/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아침밥을 준비하라/ 어떤 이의 운명 앞에서는 신도 어안이 벙벙해질 때가 있다/ 내가 마시지 않으면 안되는 잔이 있으면 내가 마셔라/ 꽃의 향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듯/ 바람이 나와 함께 잠들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일에 감사하는 일일 뿐/ 내가 누구의 손을 잡기 위해서는 내 손이 빈손이 되어야 한다/ 오늘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말고 무엇을 이루려고 뛰어가지 마라/ 아무도 미워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지 말고 가끔 저녁에 술이나 한잔해라/ 산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을 내려와야 하고/ 사막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먼저 깊은 우물이 되어야 한다//

 

스테인드글라스 / 정호승

늦은 오후/ 성당에 가서 무릎을 꿇었다/ 높은 창/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저녁햇살이/ 내 앞에 눈부시다/ 모든 색채가 고통이라는 사실을/ 나 아직 알 수 없으나/ 스테인드글라스가/ 조각조각난 유리로 만들어진 까닭은/ 이제 알겠다/ 내가 산산조각난 까닭도/ 이제 알겠다//

 

부러짐에 대하여 / 정호승

나뭇가지가 바람에 뚝뚝 부러지는 것은/ 나뭇가지를 물고 가 집을 짓는 새들을 위해서다/ 만일 나뭇가지가 부러지지 않고 그대로 나뭇가지로 살아남는다면/ 새들이 무엇으로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부러지지 않고 계속 살아남기만을 원한다면/ 누가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오늘도 거리에 유난히 작고 가는 나뭇가지가 부러져 나뒹구는 것은/ 새들로 하여금 그 나뭇가지를 묵고 가 집을 짓게 하기 위해서다/ 만일 나뭇가지가 작고 가늘게 부러지지 않고/ 마냥 크고 굵게만 부러진다면/ 어찌 어린 새들이 부리로 그 나뭇가지를 물고 가/ 하늘 높이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부러지지 않고 계속 살아남기만을 원한다면/ 누가 나를 인간의 집을 짓는 데 쓸 수 있겠는가//

 

여름밤 / 정호승

아파트 경비원 혼자 라면을 끓인다/ 한 평 남짓한 좁은 경비실에 앉아/ 입을 벌리고 졸다가 일어나/ 끓인 라면을 혼자 먹는다/ 한낮에 맑게 울던 매미는 울지 않고/ 오늘따라 별들도 보이지 않고/ 밤늦게 주차하는 자동차의 찬란한 불빛을 뚫고/ 키 작은 소녀/ 김치 한 사발을 들고 온다/ 인간에게는 왜 도둑이 있는지/ 인간이 왜 아파트를 지켜야 하는지/ 인생을 지키기도 힘든 여름밤/ 거미줄이 내 얼굴에 걸려 무너진다/ 나는 아직 거미의 먹이가 되지 못하고/ 거미의 일생만 뒤흔들어놓는다//

 

군고구마 굽는 청년 / 정호승

청년은 기다림을 굽고 있는 것이다/ 나무를 쪼개 추운 드럼통에 불을 지피며/ 청년이 고구마가 익기를 기다리는 것은/ 기다림이 익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사람들이 외투 깃을 올리고 종종걸음 치는 밤거리에서/ 뜨겁게 달구어진 조약돌에 고구마를 올려놓고/ 청년이 잠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은/ 기다림이 첫눈처럼 내리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청년은 지금 불 위의 고구마처럼 타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온몸이 딱딱하고 시꺼멓게 타들어가면서도/ 기다림만은 노랗고 따끈따끈하게 구워지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구워진다는 것은 따끈따끈해진다는 것이다/ 따끈따끈해진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맛있어진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 맛있어본 적이 없었던 청년이/ 다 익은 군고구마를 꺼내 젓가락으로 쿡 한 번 찔러보는 것은/ 사랑에서 기다림이 얼마나 성실하게 잘 익었는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넘어짐에 대하여 / 정호승

나는 넘어질 때마다 꼭 물 위에 넘어진다/ 나는 일어설 때마다 꼭 물을 짚고 일어선다/ 더이상 검은 물속 깊이 빠지지 않기 위하여/ 잔잔한 물결/ 때로는 거친 삼각파도를 짚고 일어선다//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할 때만 꼭 넘어진다/ 오히려 넘어지고 있으면 넘어지지 않는다/ 넘어져도 좋다고 생각하면 넘어지지 않고/ 천천히 제비꽃이 핀 강둑을 걸어간다// 어떤 때는 물을 짚고 일어서다가/ 그만 물속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아예 물속으로 힘차게 걸어간다/ 수련이 손을 뻗으면 수련의 손을 잡고/ 물고기들이 앞장서면 푸른 물고기의 길을 따라간다// 아직도 넘어질 일과/ 일어설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일으켜세우기 위해 나를 넘어뜨리고/ 넘어뜨리기 위해 다시 일으켜세운다 할지라도//

 

꽃향기 / 정호승

내 무거운 짐들이 꽃으로 피어날 수 있었으면 좋겠네/ 버리고 싶었으나 결코 버려지지 않는/ 결국은 지금까지 버리지 못하고 질질 끌고 온/ 아무리 버려도 뒤따라와 내 등에 걸터앉아 비시시 웃고 있는/ 버리면 버릴수록 더욱더 무거워져 나를 비틀거리게 하는/ 비틀거리면 비틀거릴수록 더욱더 늘어나 나를 짓눌러버리는/ 내 평생의 짐들이 이제는 꽃으로 피어나/ 그래도 길가에 꽃향기 가득했으면 좋겠네// 

 

서귀포에서 / 정호승

바람이 차다 창문을 닫아라/ 서귀포의 어둠도 추위에 떨고 있다/ 흐르던 폭포도 굶주림에 얼어붙는/ 아귀도의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다// 창문을 닫아라 두려움은 없다/ 두려움 끝에 오는 적막이 두려울 뿐/ 적막 끝에 오는 슬픔이 두려울 뿐/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건 사랑일 뿐/ 세상은 나를 필요로 할 때만 사랑했을 뿐// 어둠이 차다 창문을 닫아라/ 서귀포 앞바다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저기 저 동백 꽃잎 한 점이/ 눈보라에 숨을 가둔다//

 

폐사지처럼 산다 / 정호승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처럼 산다/ 요즘 뭐 하고 지내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에서 쓰러진 탑을 일으켜세우며 산다/ 나 아직 진리의 탑 하나 세운 적 없지만/ 죽은 친구의 마음 사리 하나 넣어둘/ 부도탑 한번 세운 적 없지만/ 폐사지에 처박혀 나뒹구는 옥개석 한 조각/ 부둥켜안고 산다/ 가끔 웃으면서 라면도 끓여먹고/ 바람과 풀도 뜯어먹고/ 부서진 석등에 불이나 켜고 산다/ 부디 어떻게 사느냐고 다정하게 묻지 마라/ 너를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고/ 거짓말도 자꾸 진지하게 하면/ 진지한 거짓말이 되는 일이 너무 부끄러워/ 입도 버리고 혀도 파묻고/ 폐사지처럼 산다//

 

연인 / 정호승

사랑이란 오래 갈수록 처음처럼/ 그렇게 짜릿짜릿한 게 아니야./ 그냥 무덤덤해지면서 그윽해지는 거야./ 아무리 좋은 향기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면 그건 지독한 냄새야./ 살짝 사라져야만 진정한 향기야./ 사랑도 그와 같은 거야./ 사랑도 오래되면 평생을 같이하는 친구처럼/ 어떤 우정 같은 게 생기는 거야.//

 

어머니를 위한 자장가 / 정호승

잘 자라 우리 엄마/ 할미꽃처럼/ 당신이 잠재우던 아들 품에 안겨/ 장독대 위에 내리던 함박눈처럼// 잘 자라 우리 엄마/ 산 그림자처럼/ 산 그림자 속에 잠든 산새들처럼/ 이아들이 엄마 품에 따라갈 때까지// 잘 자라 우리엄마/ 엄마 품에 안겨 자던 예쁜 아기의/ 저절로 벗겨진 꽃신발처럼//

 

내가 사랑하는 사람 / 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 김원중 노래 : 내가 사랑하는 사람

 

철길에 앉아 / 정호승

철길에 앉아 그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철길에 앉아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 멀리 기차 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기차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코스모스가 안타까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기차가 눈 안에 들어왔다/ 지평선을 뚫고 성난 멧돼지처럼 씩씩거리며/ 기차는 곧 나를 덮칠 것 같았다// 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낮달이 놀란 얼굴을 하고/ 해바라기가 고개를 흔들며 빨리 일어나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 싶었다//

 

까닭 / 정호승

내가 아직 한 포기 풀잎으로 태어나서/ 풀잎으로 사는 것은/ 아침마다 이슬을 맞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짓가랑이를 적시며 나를 짓밟고 가는/ 너의 발자국을 견디기 위해서다// 내가 아직 한 송이 눈송이로 태어나서/ 밤새껏 함박눈으로 내리는 것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싸리빗자루로 눈길을 쓰시는/ 어머니를 위해서가 아니라/ 눈물도 없이 나를 짓밟고 가는/ 너의 발자국을 고이 남기기 위해서다// 내가 아직도 쓸쓸히 노래 한 소절로 태어나서/ 밤마다 아리랑을 부르며 별을 바라보는 것은/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를 사랑하기엔/ 내 인생이 너무나 짧기 때문이다//

 

벗에게 부탁함 / 정호승

벗이여/ 이제 나를 욕하더라도/ 올 봄에는/ 저 새 같은 놈/ 저 나무 같은 놈 이라고 욕을 해다오/ 봄비가 내리고/ 먼 산에 진달래가 만발하면/ 벗이여/ 이제 나를 욕하더라도/ 저 꽃 같은 놈/ 저 봄비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 나는 때때로 잎보다 먼저 피어나는/ 꽃같은 놈이 되고 싶다//

 

끝끝내 / 정호승

헤어지는 날까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헤어지는 날까지/ 차마/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그대 처음과 같이 아름다울 줄을/ 그대 처음과 같이 영원할 줄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순결하게 무덤가에 무더기로 핀/ 흰 싸리꽃만 꺾어 바쳤습니다// 사랑도 지나치면 사랑이 아닌 것을/ 눈물도 지나치면 눈물이 아닌 것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모른다 / 정호승

사람들은 사랑이 끝난 뒤에도 사랑을 모른다/ 사랑이 다 끝난 뒤에도 끝난 줄을 모른다/ 창 밖에 내리던 누더기눈도/ 내리다 지치면 숨을 죽이고/ 새들도 지치면 돌아갈줄 아는데/ 사람들은 누더기가 되어서도 돌아갈줄 모른다//

 

봄눈 / 정호승

봄눈이 내리면/ 그대 결코/ 다른 사람에게 눈물을 보이지 말라/ 봄눈이 내리면/ 그대 결코/ 절벽 위를 무릎으로 걸어가지 말라/ 봄눈이 내리는 날/ 내 그대의 따뜻한 집이 되리니/ 그대 가슴의 무덤을 열고/ 봄눈으로 만든 눈사람이 되리니/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과 용서였다고/ 올해도 봄눈으로 내리는/ 나의 사람아..//

 

상처가 스승이다 / 정호승

별을 보려면 어둠이 꼭 필요하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왜 가장 원하지 않는 일에 인생을 낭비하는가/ 산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나를 쓰러뜨린다// 내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한 가지 용서하면/ 신은 나의 잘못을 두 가지 용서해 주신다/ 예수에게조차 유다라는 배반자가 있었다/ 친구는 한 사람이면 족하고, 두 사람이면 많고,/ 세 사람이면 불가능하다/ 연잎은 자신이 감당할 만한 빗방울만 싣고 있다가/ 그 이상이 되면 미련 없이 비워버린다// 상처는 스승이다/ 남의 흉은 사흘이다/ 오늘이 지나면 다시 못 볼 사람처럼 가족을 대하라/ 어머니의 웃음 속에는 신비가 있습니다/ 시간 없을 때 시간 있고, 바쁠 때 더 많은 일을 한다/ 시련이란 해가 떠서 지는 것만큼이나 불가피한 것이다// 항구에 있는 배는 안전하지만/ 그것이 배를 만든 이유는 아니다/ 사람은 실패을 통해 다시 태어난다/ 감사함을 통하여 부유해질 수 있다/ 돈은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마르다// 밥알이 밥그릇에 있어야 아름답지/ 얼굴이나 옷에 붙어 있으면 추해 보인다/ 성실이 없는 곳에 존재가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면 매일 죽으나/ 두려워하지 않으면 단 한 번 밖에 죽지 않는다//

 

빈손의 의미 / 정호승

내가 누구의 손을/ 잡기 위해서는/ 내 손이 빈손이어야 한다.// 내 손에 너무 많은 것을/ 올려놓거나/ 너무 많은 것을/ 움켜쥐지 말아야 한다.// 내 손에 다른 무엇이/ 가득 들어 있는 한/ 남의 손을 잡을 수는 없다.// 소유의 손은/ 반드시 상처를 입으나/ 텅 빈손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 그 동안/ 내가 빈손이 되어/ 다른 사람의 손을 얼마만큼/ 잡았는지 참으로 부끄럽다.// 어둠이 몰고 오는/ 조용함의 위압감은/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공허한 침묵 속으로/ 나를 몰아넣고/ 오만과 욕심만 가득 찬/ 나를 묶어버린다,// 어차피/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인생인걸/ 무엇을 욕심내고/ 무엇이 못마땅한가,// 오만과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내 손을 잡아 줄리 없고/ 용서와 배려를 모르는 한/ 어느 누구에게도 손 내밀 수 없다.// 얼만큼 비우고 비워야/ 빈손이 될 수 있을까//

 

물끄러미 / 정호승

당신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볼 때가 좋다/ 차가운 겨울 밤하늘에 비껴 뜬 보름달이 나를 바라보듯/ 풀을 뜯던 들녘의 소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듯/ 대문 앞에 세워둔 눈사람이 녹으면서 나를 바라보듯/ 폭설이 내린 태백산 기슭에 벌렁 드러누웠을 때/ 고사목 사이로 떠오른 낮달이 나를 바라보듯/ 아버지 영정 앞에 세워둔 촛불이 밤새도록 나를 바라보듯/ 물끄러미 당신이 나를 바라볼 때가 좋다/ 오늘도 나는 타다 남은 연탄재처럼 눈길에 버려져 있어도/ 태백선 추전역 앞마당에 막장의 갱목처럼/ 추적추적 겨울비에 떨며 내가 버려져 있어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빛 속에는 이제 미움도 증오도 없다/ 누가 누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 속에는 사랑보다 연민이 있어서 좋다/ 내 남은 인생의 가장 첫날인 오늘 아침/ 선암사 매화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새 한 마리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별들이 민들레 씨앗처럼 흩어져 나를 바라본다/ 북극성에 앉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당신이 보인다.//

 

 


 

정호승 시인

1950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새벽편지』, 『별들은 따뜻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흔들리지 않는 갈대』,『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밥값』 등이,

어른이 읽는 동화로 『연인』,『항아리』『모닥불』,『기차 이야기』 등이,

산문집 『소년부처』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사진을 찍으려면 1,000번을 찍어라 / 정호승

성철 스님이 지내시던 해인사 백련암 손님방에서 하룻밤 잔 적이 있다. 스님이 입적하시기 10여 년 전 일이다. 당시 잡지사 기자로 일하던 나는 스님께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허락하시지 않았다.

blog.daum.net

 

 

'시詩 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끝별 시인  (0) 2021.02.13
오광수 시인  (0) 2021.02.11
데미안 / 헤르만 헤세  (0) 2021.02.07
박건삼 시인  (0) 2021.02.06
김현승 시인  (0) 2021.02.06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