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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스님이 지내시던 해인사 백련암 손님방에서 하룻밤 잔 적이 있다. 스님이 입적하시기 10여 년 전 일이다. 당시 잡지사 기자로 일하던 나는 스님께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허락하시지 않았다. 그 대신 서면 질문을 하면 서면으로 답변해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날 밤 나는 무슨 질문을 할까 곰곰 생각하면서 가야산 백련암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하안거 해제 전날인 백련암의 여름밤은 깊고 고요했다. 밤하늘엔 보름달이 두둥실 떠올라 있었고 어둠 속에서 들리는 풀벌레 울음도 깊고 청명했다. 큰스님이 가까이 계시는 데서 밤을 맞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가슴은 보름달처럼 차올랐다. 물론 잠은 오지 않았다. 어느새 시간이 지나 해인사의 새벽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벌떡 일어나 스님 주무시는 방을 바라보았다. 스님 방엔 맑은 불이 켜져 있었고, 달빛 아래 마당을 거니시는 스님의 모습이 보였다.
천천히 아침공양을 하고 나자 스님은 언제 해인사로 내려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해인사로 내려갔다. 이미 대웅전엔 많은 스님들과 불자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나는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앉아 대웅전 높은 단상에 올라 주장자를 손에 쥐고 하안거 해제 설법을 하시는 스님을 바라보았다. 스님은 마치 엷은 미소를 띤 호랑이처럼 보였다.
그날 설법을 마치고 스님이 백련암으로 걸어 올라가실 때 함께 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때 자연스럽게 동행하면서 여쭙고 싶은 걸 여쭙고 찍고 싶은 사진도 찍으라는 게 당시 제자승인 원택 스님의 배려 깊은 말씀이었다.
스님은 설법을 마치자마자 지체 없이 바로 백련암으로 향했다. 나는 사진기자와 함께 부지런히 스님 뒤를 따라갔다. 스님은 청년처럼 훠이훠이 빠른 걸음으로 산을 올라가셨다. 감히 말씀을 붙이기 어려웠다. 그래도 뒤처지지 않고 스님 뒤를 따라가 세상 사람들을 위해 한 말씀 해주시기를 청했다. 스님께서는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나. 다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면 알 건데" 하시고는 빙그레 웃기만 하셨다. 그러고는 호랑이 한 마리가 그려진, 백련암 방향을 가리키는 나무표지판이 나오자 그 앞 바위에 앉아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포즈를 취해주셨다.
사진기자가 이때다 싶어 연방 셔터를 눌렀다. 그때였다. 스님께서 "왜 그렇게 사진을 많이 찍노. 필름이 안 아깝나" 하고 물으셨다. 사진기자가 사진 찍는 데 여념이 없어 스님 질문에 얼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나서서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많이 찍어야 합니다. 벌써 필름을 다섯 통도 더 썼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그래, 그러면 1,000번을 찍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아이쿠, 1,000번이나!'
나는 그때 '어떻게 1,000번을 찍으라고 하시나, 스님께서 농담도 잘하신다'고 생각했다. 사진기자는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처음엔 사진 찍는 걸 그리 달가워하지 않으신 스님이 그 말씀을 하시고 나서는 카메라를 피하지 않으셨다. "그만 좀 찍어라"라는 말씀도 하지 않으셔서 그날 스님 사진을 참 많이 찍었다. 스님이 벗어놓은 검정고무신과 누더기 승복, 스님이 잡수시는 소박한 무염식 밥상을 찍기도 했다.
그 뒤 "사진을 찍으려면 1,000번을 찍어라"라고 하신 스님의 말씀이 내 인생의 화두가 되었다. 그 말씀이 무슨 뜻일까. 생각할수록 어려웠다. 그래도 그 말씀을 늘 잊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가 어느 날 문득 '무슨 일을 하든 최선을 다해 노력하라'는 뜻이라고 쉽게 생각했다.
당시 스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은 조건 없이 만나주셨지만 일반인이나 신도들은 부처님께 먼저 1,000배를 하지 않으면 만나주지 않으셨다. 그래서 나는 '1,000배를 어떻게 하나. 요구가 너무 지나치고 까다로우시다. 그냥 만나주시지' 하는 생각을 했다. 말이 1,000배지 1,000배를 하려면 며칠이나 걸리고 아파 드러누울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1,000배를 하면서 그만큼 '먼저 부처님을 만나고 자기 자신을 만나라'는 뜻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한 말씀 해달라고 했을 때 "자신을 들여다보면 다 안다"고 말씀하신 것이었다. 스님께서 늘 '자기 자신을 바로 보라'고 하신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나는 그동안 남을 들여다보는 일은 수없이 많았어도 나 자신을 들여다본 일은 거의 없었다. 들여다볼 기회가 있어도 일부러 외면해왔다. 이제 비로소 나를 들여다본다. 들여다볼수록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사진을 찍으려면 1,000번을 찍어라."
스님의 이 말씀만 들려온다.
"시를 쓰려면 1,000번을 써라."
"누굴 사랑하려면 1,000번을 사랑해라."
아무리 생각해봐도 바로 이 말씀이다. 무슨 일을 하든 1,000번을 할 정도로 열심히 노력하면 결국엔 이루어진다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제부터라도 시를 한 편 쓰더라도 1,000번을 써야 한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공보다 노력이다. 노력하는 과정 자체가 우리의 삶이며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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