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먼 산자락을 휘감은 물안개가 서서히 옅어지며 강은 아침을 맞는다. 물결은 잔잔하게 흐르고 이따금 가마우지에 쫒긴 물고기들이 강물 위로 튀어 올랐다가 잽싸게 달아난다. 고기잡이 배 위에 백로 한 마리 하염없이 홀로 서 있다. 그물을 걷어 올리는 어부의 손길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녀석이 애처로이 고개 떨구면 어부는 못이긴 척, 작은 고기 서너 마리를 던져준다. 백로는 긴 목을 주억거리며 단번에 물고기를 집어 삼킨다. 나른한 강 수면에 비친 백로의 모습이 어인일로 낯이 익다. 요즘 나는 부쩍 시간을 잊은 채 세상 풍경을 바라보는 일이 잦다. 여름이면 나와 아버지는 서로를 찾으면서 눈을 맞추기 바빴다. 집 근처의 금강으로 투망 메고 고기 잡으러 가고 싶기 때문이었다. 누가 더 좋..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사립문 열고 들어서면 감나무 사이로 금반지처럼 둥근 달이 떠 있는 옛집, 그 시댁이 내 추억 속에는 늘 있다. 반짝이는 달빛을 받으며 맨드라미가 장독대를 받치고 있는 집이다. 적적하고 외로운 날이면 나는 마음속에서 무작정 그 집을 찾아간다. 못다 한 사랑 남기고 떠난 시어머니가 툇마루에 앉아 그 시절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아가, 한이 엄씨야." 어머니는 나를 늘 다정하게 불렀다. 입담 좋은 이야기로 살기가 바빠 메마른 나의 가슴에 화사한 융단을 깔아 주었다. 어머니의 이야기로 저녁은 푹신했고 부드러웠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꽃이 피지 않았는데도 어머니와 함께 있으면 이야기꽃으로 화사했다. "아가, 한이 엄씨야. 아무리 힘들어도 꾹 참고 살다 보면 좋은 날..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강 둔치는 온통 꽃밭이다. 시민의 정서를 배려해 만든 화단에는 튤립과 수선화가 줄지어 앉았고 그 둘레를 따라 조팝꽃이 띠를 이루며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아름다움에 취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셔터를 눌러댄다. 눈은 여유로운 분위기에 취해 있으면서 머리로는 조팝꽃에 대한 팍팍한 기억과 보호받지 못한 그분들 모습이 어른거린다. 어려운 시기에 태어나서 몹쓸 병마로 서러운 생을 살다간 그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리다. 여섯 살 어림의 봄이다. 진달래가 진 고향마을 산야는 조팝나무가 점령했다. 긴 가지에 자잘한 꽃송이가 닥지닥지 붙은 꽃나무가 밭둑이나 산기슭에 지천으로 깔렸다. 꽃 모양이 튀긴 좁쌀 같다 하여 좁쌀밥나무 즉 조팝나무라 부른다. 가까이에서 보면 좁쌀처럼 까슬까슬한 식감..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판소리에는 귀명창이 있다. 귀명창에는 추임새가 날고 있다. 판소리 공연장에 갔다. 그곳에서 귀명창을 만났다. 부채를 쥔 소리꾼과 북과 북채를 쥔 고수(鼓手) 뿐인 단촐한 무대다. 고수가 엇! 기합 소리를 내며 북채로 타당 탁, 북을 치자, 소리꾼이 춘향가의 쑥대머리 대목을 시작한다. '그때 춘향이는 옥중에서 머리를 풀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사설인 아니리를 한다. 다시 고수가 엇! 타당 탁, 북을 치면 소리꾼은 '쑥대머리~' 하며 본격적인 창으로 들어간다. 고수는 시작이나 변화, 음절마다 박을 치며 '얼씨구' '잘한다.' '좋다' 등 추임세로 소리꾼의 목을 풀고 흥을 불러낸다. 소리꾼의 창과 고수의 추임새에 몸짓의 발림이 어우러지면 조용하던 관중석이 소란해진다. 판소리를..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나는 잠이 많은 편이다. 집안 내력이고 어머니가 으뜸이었다. 손자를 등에 업고 재우다 방바닥에 엎드려 손자보다 먼저 잠든 어머니 모습은 자주 보는 광경이었다. 팔순에 접어든 누님도 잠이 많아졌다고 하소연한다. 가히 잠보집안이다. 닮은꼴이 있다. 농장 구석에 두 평쯤 연못을 만들고 미꾸라지를 넣었는데 온데간데없다. 미꾸라지가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를 타고 다닌다는 옛말이 사실이었던가. 대신 개구리천국이 되어있다. 비단개구리인데 이 녀석들이 잠이 많다. 연못바닥에 까맣게 깔려있던 알집이 도롱뇽인 줄 알았는데 비단개구리였다. 덩치가 큰 참개구리는 다 자라면 인근 풀숲이나 제법 먼 거리로 행동반경을 넓히지만 비단개구리는 그렇지 않다. 밤낮으로 연못주위를 떠나지 않는다. 참개구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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