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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마지막 선물 / 김영순

부흐고비 2021. 12. 2. 09:16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사립문 열고 들어서면 감나무 사이로 금반지처럼 둥근 달이 떠 있는 옛집, 그 시댁이 내 추억 속에는 늘 있다. 반짝이는 달빛을 받으며 맨드라미가 장독대를 받치고 있는 집이다. 적적하고 외로운 날이면 나는 마음속에서 무작정 그 집을 찾아간다. 못다 한 사랑 남기고 떠난 시어머니가 툇마루에 앉아 그 시절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아가, 한이 엄씨야."

어머니는 나를 늘 다정하게 불렀다. 입담 좋은 이야기로 살기가 바빠 메마른 나의 가슴에 화사한 융단을 깔아 주었다. 어머니의 이야기로 저녁은 푹신했고 부드러웠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꽃이 피지 않았는데도 어머니와 함께 있으면 이야기꽃으로 화사했다.

"아가, 한이 엄씨야. 아무리 힘들어도 꾹 참고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것이다. 아들의 겉을 낳지 어찌 마음대로 할 것이냐. 그래도 생긴 것 저만치 반반하니 어디를 가더라도 네 남편이라 자랑할 만하제. 안 그러냐?"

불편한 일이 있을 때마다 어머니는 나를 칭얼대는 아이 달래듯 토닥여 주었다.

어머니와의 인연은 처음과 끝이 하나인 금반지처럼 늘 아름답게 빛났다. 내 나이 21세 되던 꽃다운 시절에 그 인연은 시작되었다. 아들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소리를 듣고 등에 막둥이를 업은 채 전라남도 고흥에서 광주로 달려왔다. 울퉁불퉁한 신작로를 오며 멀미를 하였는지 얼굴이 샛노랗게 지쳐 보였다. 나는 긴 머리를 뒤로 묶은 여리고 수줍음 많은 여대생이었다. 첫 만남에서 어머니는 나의 첫인상이 좋고 청순하게 보인다고 했다. 마치 딸에게 이야기하듯 다정한 대화가 오고 갔다. 어머니는 원래 마을에서 까다롭기로 소문이 나서 쌀을 싸 가지고 전국을 돌아다녀도 며느릿감 못 구할 거라고 동네 분들이 수근대곤 했던 분이다. 그런데 웬일일까, 이게 인연이라는 것일까. 그렇게 시작된 40여 년을 고부간에 별 갈등 없이 오순도순 지냈다. 어머니는 내게 닥치는 비비람을 대신 막아주며 배려해 주었다. 꽃이 향기를 만나 제 인연을 찾아가듯 나는 어머니를 만나 남편과의 인연을 결혼으로 완성시켰다. 어머니와의 사이가 유별나게 좋아 시누이들이 오히려 샘을 낼 정도였다.

결혼 후 새댁 시절에 어머니는 나에게 시골 시장에 같이 가자고 하더니 색깔이 예쁜 파라솔을 선물로 사 주었다. 얼마나 기뻤던지 나는 가는 곳마다 가지고 다니며 자랑하곤 하였다.

하루는 다리미질을 하다가 어머니 저고리를 태워 먹었는데 겁에 질린 나를 오히려 다독거려 주었다. 여러 가지 음식 만드는 방법도 자상하게 알려 주었다. 늘 나에게 아들의 어렸을 적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들려주고 가문의 내력도 소상히 알려 주었다. 일요일이면 곱게 한복을 차려 입고 나란히 교회로 향하곤 하였다. 교회에 같이 가는 게 별것이냐 하겠지만 어머니에게는 일생 일대의 중요한 결정과 다름없었다. 남편이 8대 종손인데도 어머니는 나의 신앙을 존중해 주었다. 어머니는 나와 함께 교회에 다니기 위해 친척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골에 있는 논밭을 정리한 후 광주로 이사했다. 나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평생을 그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고 다짐하곤 하였다. 씨줄과 날줄처럼 어머니를 만나 아름다운 인생이라는 비단 한 필을 짤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이었다. 재미나게 살아가는 고부간을 하늘이 시샘이라도 한 것일까. 어머니는 병원에 다녀오더니 자궁암이라고 청천벽력 같은 말을 전해 주었다. 담담하게 병마를 받아들인 마음이 얼마나 힘드셨을까. 어찌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속울음 삭이며 아픔을 견디는 어머니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병중에도 꿋꿋하게 가족을 위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여전했다.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금반지처럼.

긴 세월을 묵묵히 투병 생활하던 어머니의 모습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나를 이 세상에서 불꽃처럼 열정적으로 살게 해주는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병이 깊어지면서 어머니는 입맛이 떨어지고 살이 빠져 갔다. 나는 바쁜 직장 생활과 자녀를 돌보는 주부로 힘들었지만 간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암이 말기에 이르러서는 좋아하는 과일도 생선도 보기 싫다고 했다. 죽을 쑤어 떠 넣어 드려도 입을 다물고 거절했다. 웃자란 아쉬움만 나의 삶을 온통 휘젓고 있었다. 슬픔을 떼어 놓고 담담한 얼굴로 어머니를 대해야겠다는 다짐만 수없이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69세 되던 어느 날 밤, 어머니는 조용히 나를 불렀다. 방안은 여기 저기 약봉지와 헝클어진 머리카락으로 암과의 마지막 결투를 벌이는 격전장처럼 어지러웠다. 곱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퀭한 눈은 더 움푹 들어가 있었다. 수척해진 모습에 기력이 전혀 없어 보였다. 무심한 별들만 아무 일 없다는 듯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창에 비친 달빛이 더욱 쓸쓸해 보였다.

"아가, 한이 엄씨야, 아무래도 내 수명이 다한 것 같다. 그동안 어려운 살림 꾸려 나가고 손주 셋 잘 길러 주어서 고맙다. 성질 급한 내 아들이지만 네 남편이니 사랑하고 잘 살거라. 부탁한다."

평소와는 달리 호흡이 가빠지고 무척 힘들어 했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어머니!"

나는 어머니를 부둥켜 안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결국 펑펑 소리내어 통곡했다. 얼마나 울었던지 눈이 퉁퉁 부어 뜰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두고 갈 한 생이 안타까워서 울고 나는 먼저 갈 한 생이 안타까워서 울었다.

"그만 울거라. 씩씩하게 살아야 한다. 이거 받아라."

깡마른 손으로 나의 옷깃을 잡은 어머니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선물을 건네준 어머니의 몸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무정한 밤바람만 야속하게 불어왔다. 하얀 종이에 싼 조그마한 선물을 조심스레 펴보니 금니 세 개와 어머니의 세월처럼 닳아진 금반지가 있었다. 금반지는 어머니의 병과는 무관하게 반짝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영원히 곁에서 나를 지켜줄 듯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금반지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는 어머니의 마음이 담긴 마지막 선물이었다. 어떠한 유산보다도 귀한 선물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그 금붙이는 녹여서 금반지와 목걸이로 만들어 내 몸에 지니고 다녔다. 어머니가 언제나 나와 함께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머니는 아들 대학교육 시킬 때 미역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이 동네 저 동네 행상을 다녔다. 물려줄 재산이 없는 어머니의 안타까움을 부끄럽게 여기며 하소연하던 일이 자꾸만 떠올랐다. 물기 하나 없는 푸석푸석한 숨소리가 삭고 삭아 어머니는 깡말라 있었다. 섧게 섧게 울음 울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신 어머니. 너울너울 나비처럼 날아가 버린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가끔 보인다.

금반지처럼 둥근 달이 감나무 사이로 떠오르고 있다. 금테를 두른 감나무가 환하다. 한이 엄씨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오는 듯하다. 손에 낀 금반지가 반짝거린다. 어머니가 감싸주고 있는 듯 포근하다.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논픽션 부문 '코로나19와 마주치기' - 이주희

이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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