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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 심노숭

부흐고비 2008. 9. 4. 08:32

 

아버지와 아들


집요한 성격은 아버지와 아들이 대를 이어 비슷하여 그들 사이에도 서로 양보하지 않을 때가 있다. 어쩌면 그리 심할까?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과 그 아들 정재(定齋) 박태보(朴泰輔)는 사사건건 의견이 갈려서 서로가 제 의견을 내세우느라 서로 져본 적이 없다.

소사(素沙)에 있는 빗돌¹이 길의 동쪽에 있는지 서쪽에 있는지를 가리려고 사람을 따로 보내 알아보게 한 일도 있다.

이웃 사람이 죽어 상제(祥祭)날이 가까워오자 제수로 쓸 초를 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때 서계는 아무 날이라고 주장하고 정재는 다른 날이라고 주장하여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망자의 아들을 불러 물었더니 대답이 정재의 주장과 맞아떨어졌다. 그러자 서계가 “무릇 사람이 불초한 자식을 두면 죽은 날 제삿밥 얻어먹기도 힘들다!”라고 말했다.

정재가 아이였을 때 서계가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니 방안에 깔아놓은 장판이 송곳 자국으로 뒤덮였다. 사연을 캐묻자 정재는 “송곳으로 벼룩을 찔러 잡으려고 그런 건데 결국 잡았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부자가 모두 영주(影籌)²할 줄 알았다. 정재가 마당에 있는 살구나무에 달린 살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몇 개가 달렸다.”고 말하자 서계는 “아니다! 몇 개가 달렸다.”고 말하여 정재가 말한 수보다 수를 줄여 말했다. 살구를 모두 따서 계산을 해보자 서계가 말한 수가 맞았다. 서계가 화를 내며, 억지로 아는 체하며 이기려고만 드는 정재의 태도를 꾸짖었다. 정재가 바로 나무를 타고 올라가 가지 끝에서 잎사귀 밑에 숨어있는 병든 살구를 따가지고 내려오자 정재가 말한 개수와 딱 맞아떨어졌다.

정재가 파주 목사가 되었다. 전답을 다투는 송사를 판결하여 갑이 이기고 을이 졌다. 판결하고 난 다음에, “송사의 이치로는 을이 마땅히 이겨야 하나 을의 도장이 장단의 관인이 찍혀 있으므로 분명히 간특한 짓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갑이 이긴 것이다.”라고 말했다. 을이 몹시 억울해 하며 서계에게 가서 하소연하였다. 서계는 이렇게 말했다.

“사용된 인장이 장단의 것인 줄은 파악하면서 당시에 파주에서 인장을 잃어버려 임시방편으로 장단의 인장을 사용한 것을 모르다니! 이렇게 멍청해서야 어떻게 관리노릇을 한단 말이냐!”

조사해보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그 말에 정재는 더 이상 따지지 못했다.

심노숭(沈魯崇, 1762~1837),〈자저실기(自著實記)〉,《효전산고(孝田散稿)》

1) 이 빗돌은 성환읍 대흥리에 서있는 국보 7호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 사적비를 말한다. 고려 현종이 1021년 280칸의 사찰을 짓고 최충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다. 거대한 사찰의 하나였지만 불타 없어지고 비만 남았다.

2) 짐작으로 수를 알아맞히는 것을 뜻하는 듯하다.

해설 _ 안대회(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심노숭(1762~1837)이 선인들의 일화를 기록한 책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집요한 성격을 가져 서로 지지 않으려고 경쟁하는 사연이다. 지기를 싫어하는 성격이라 해도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이런 정도까지일 줄은 예상하기 어렵다. 그 점이 이 사연을 흥미로운 이야기로 만든다.

이런 이야기가 전하는 것은 박세당(朴世堂, 1629~1703)과 박태보(朴泰輔, 1654~1689) 두 사람이 강직하고도 고집 세기로 선비들 사이에 유명하였기 때문이다. 부자는 모두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박세당은 고집스럽게 자기 길을 걸어간 학자로서, 뜻이 맞지 않자 과감하게 조정을 등지고 다시는 조정에 들어가지 않았다. 노론과 정치적으로 대결하여 후에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리기도 하였다.

박태보도 고집 세기로는 그 아버지에게 뒤지지 않았다. 소론이면서도 당론을 편들지 않고 소신에 따라 움직였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의 폐위(廢位)를 강하게 반대하여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진도에 유배 도중 노량진에서 죽은 사연이 너무도 유명하다. 비리를 보면 참지 못하고 의리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 사람으로 그를 존경하는 선비들이 매우 많았다. 이런 강직하고 고집 센 인물들이기에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보인 집요하고 고집스런 행적이 화제에 올랐으리라.

한편, 박세당 부자가 서로 지지 않으려 한 태도에는 아버지라고 해서 편들려고 하지 않은 심리가 깔려 있기도 하다. 심노숭은 다른 글에서 이런 이야기를 전한다.

박세당이 아들에게 윤선거(尹宣擧)와 남구만(南九萬)에 견주어 자신을 평가해보라고 하였다. 예상과 달리 박태보는, “윤선거는 도(道)를 실은 문장이고, 남구만은 나라를 다스리는 사업까지 담긴 문장이므로 유구하게 전해질 것이기에 아버지의 문장이 그들에게는 미치지 못한다.”고 답했다. 그러자 박세당은, “너는 나를 너무 가볍게 보는구나!”라고 대답했다. 객관적인 평가라면, 윤선거와 남구만의 문장도 높은 수준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박세당이 더 높은 수준의 문장이 아닐까 생각한다. 박태보가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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