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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득 코너

너는 누구냐 / 심대흥

부흐고비 2008. 9. 5. 09:19

 

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


"그대의 존함은 무엇인가?"
소동파(小東波)가 당대의 큰스님이었던 승호(承皓)를 찾았을 때 스님이 대뜸 묻는 말이었다. 이에 소동파가 대답했다.
"저는 칭(枰)입니다"
사실 중국에 칭(枰)이라는 성은 없었다. 소동파는 당송(唐宋) 9대 문장가 중의 한사람으로 그의 시는 다른 당시(唐詩)들이 서정적인데 비해 철학적인 서술이 매우 강했다. 새로운 시의 경지를 개척했다는 높은 평가를 듣고 있었던 터라 스스로 학식에 자만심을 갖고 있었던 만큼 웬만한 학자나 스님들은 거들떠보지 않았던 그였다. 쥐뿔도 모르면서 무슨 무슨 도사니 고승이니 하면서 거들먹거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잠시 후 소동파는

"저는 세상의 모든 도인들을 달아보는 저울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승호스님은 벼락같은 소리로 주장자를 내리쳤다.
"하~알(喝)!"
소동파가 깜짝 놀라 창황하고 있을 때 스님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이 소리는 몇 근이나 되는가?"
단 한마디도 대꾸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소동파는 이렇게 읊었다고 전한다.
'산색(山色)은 그대로가 법신(法身)이요, 수성(水聲)은 그대로가 설법(說法)이로다.'

세상의 지식은 '내가 아는 것'과 '네가 아는 것'으로 저울질 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 들어나는 '배움'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저울질 될 뿐이다. 소동파가 자신의 저울로 상대의 무게를 달았다면 승호 스님은 배움을 뛰어넘는 자리. 앎을 버린 자리에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무게가 없는 자리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온 우주를 담을 수 있는 무게이기도 한 것이다. 흐르는 물, 나르는 공기, 산과 하늘, 나무와 풀... 지식이라는 잣대를 떠난 무한 광대한 앎을 버린 자리에 턱 버티고 있는 이 우주의 무게를 달 저울이 있을까. 산색깔이 그대로 법이요 물소리가 그대로 말이라는 무한대의 무게는 그래서 지고 무상한 깨달음의 궁극적 잣대인 것이다. 곧 지식(知識 Knowledge)이 아닌 지혜(知慧 Wisdom)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지혜를 매어 달 그 큰 저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삽 십 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곡(谷)에 모이는데 그 텅 빈 공간이 있어서 수레의 기능이 있게 된다. 찰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그 텅 빈 공간이 있어 그릇의 기능을 하게 된다. 문과 창문을 내어 방문을 만드는데 그 텅 빈 공간이 있어 방의 기능이 있게 된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우리는 늘 눈에 보이는 것과 손에 잡히는 것만을 지혜의 대상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그것을 잡으려고 혼신의 노력을 기우린다. 그런데 노자는 이 눈에 보이는 것을 타파한다. 없음의 움직임, 없음의 영향. 없음의 경지를 보는 것 ㅡ곧 '비어있음의 가능성'이다.

사도 바울은 성경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떠한 눈도 본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어떤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마련해 두었다(고린도 전서)' 어떤 눈도, 어떤 귀도, 어떤 마음도 보이지 않는 것ㅡ 이것을 바로 '하나님의 지혜'라고 했다. 왜일까? 우리의 눈, 우리의 귀,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모든 지혜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소동파의 제자 황산곡(黃山谷)이 어느 날 회당선사(晦堂禪士)에게 물었다.
"공자는『논어』에서 '나는 너희에게 아무것도 감춘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마치 선(禪)과 같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선사는 그를 데리고 법당을 나섰다. 좁은 산길로 들어서자 길섶 계수나무의 꽃향기가 코를 찔렀다. 회당선사가 말했다.
"어떻습니까? 이 꽃향기.... 좋지 않습니까?"
황상곡이 답했다."네, 아주 좋습니다." 그러자 회당이 말했습니다.
"자~보시지요. 아무 것도 감춘 것이 없지 않습니까?"

노자의 지혜도, 하나님의 지혜도, 공자의 지혜도 부처의 지혜도 비록 우주를 매어달수 있는 저울일지언정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감춘 게 없다고 하는 데 그것들은 왜 보이지 않는 걸까.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세상의 저 지혜를 스스로 붙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저울에 자신을 올려놓고 무거운가, 가벼운가 저울질 하는 그것 ㅡ곧 에고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에고(ego)는 일종의 색안경이다. 그걸 통해 보는 지혜는 있는 그대로의 지혜가 아니라 내가 만든 세상 내가 만든 방식인 것이다. 벗는 순간 우리는 깨달을 것이다. 노자의, 하나님의, 공자의, 부처의 참 지혜를.... (백성호 저 <사색 中> 일부 인용) 어떻게 벗고 어떻게 빈곳을 채울까.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계어로 유명한 백장(百丈)선사에게 하루는 젊은 스님이 찾아와 물었다.
"스님! 부처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놈아, 너는 소를 타고 소를 찾고 있느냐."
"만약 소를 찾으면 그 다음에는 어떡할까요?"
"소를 탔으면 갈 길을 가야지 왜 머뭇거리느냐?"
"그럼 그 소를 어떻게 간직할까요?"
"소가 남의 밭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려므나...(心牛圖)"

한 가닥 깨우침도 없이 헛가래만 목에 그득 찬 혼탁속의 내 존재를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선각자의 구도의 길을 이리저리 훔쳐보고 코끝을 벌렁인다고 없던 향내 절로 나며 보이지 않던 지혜의 길 나타나랴. 다만 마음만 조급하여 방향 없는 미로를 헤맴이니 스스로 피곤함에 몸과 마음이 점점이 녹아내릴 뿐이다. '소'를 한번 봤다고 '소의 길이 곧 나의 길'이 되는 게 아님일지니 돈오돈수(頓悟頓修)니 돈오점수(頓悟漸修)니 하는 불교계의 논쟁도 여기 있음이라.

과연 '나의 소'는 어디 있는가.

소요거사 심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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